#028화
무흔의 얼굴에 홍조가 돌고 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효명성에서 이리로 오는 동안 창밖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그 산. 난생 처음으로 산에 오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방금까지 나눈 발정이니 금욕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싹 잊혔다.
“뒷산은 어느 정도의 규모요? 산에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나?”
“뒷산이라 해서 언덕 수준은 아니고. 하루 날 잡아 제법 오를 만한 산이지. 산의 볼거리는 일일이 늘어놓을 수조차 없으니, 얼른 회복이나 하시오.”
“내일은 어찌 되겠는가? 예부상서가 또 나를 보자 할 텐데.”
“우선 내일 하루는 병증을 핑계 삼아 숙부께서 그대를 찾지 아니하도록 지켜드리리다.”
“그다음 날은?”
“갇혀 산 황자라 그러한지 몸이 허하여 병증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면 되지 않겠소?”
“허, 어디 예부상서가 눈 하나 끔뻑하겠는가. 그쪽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부상서가 들이닥치면, 병사들의 이 문을 열어주지 않겠냐 이 말이야.”
“염려 마시오. 내 알아서 하리다. 회복에만 신경 쓰시지요.”
윤은 무흔의 가느다란 허리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희고 뽀얀 등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매끈하게 오밀조밀 잔근육이 들어찬 백옥같은 등을 뒤에서 끌어안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매질로 열이 뜨끈하게 오른 저 엉덩이를 움켜쥐고 육체의 합일을 이루게 된다면, 과연 정화가 어디까지…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지인에 대한 갈구가 육욕에까지 이르는 순간, 윤은 제풀에 흠칫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흠,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의원을 들여보낼 터이니 필요한 것은 그에게 이야기하면 될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진맥은 받지 마시오.”
“알아들었어. 그리하리다.”
“쉬시오.”
일부러 건조한 인사를 건네고, 윤은 무흔의 처소를 나섰다. 분명 지인 덕에 술이 다 깨었건만, 서늘한 밤 공기를 가르는 와중에도 자신의 뺨에는 열기가 머물러 있었다.
*
효명성의 새벽은 여느 때와 똑같이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막 눈을 뜰 즈음, 그들의 성주는 이미 뒷산에 올라 명상을 중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런 후에는 늘 혼탁한 자신의 기를 차분히 다스리기 위한 무예를 연마했다. 유려한 동작으로 팔을 뻗어 허공을 가르고 공중에 뜬 듯이 발을 움직이며 한참을 그리 땀을 뺐다.
“하아아… 다르구나.”
윤은 온몸에 흐르는 기를 느끼며 숨을 깊이 내쉬었다. 주먹을 꾹 쥐었다 펴 보고서는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몇 번 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확실히 달라. 완벽하게 정화된 기를 이리 느껴가며 몸을 쓰는 것이 얼마 만인가. 어린 시절? 기억나지 않아. 전부 다 처음인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윤은 폭포수와 온천이 나란히 자리한 지점에 올라 옷을 벗었다. 바위 위에 옷이 차곡차곡 쌓이고, 뜨끈하게 열이 오른 근육질의 맨몸이 드러났다.
먼저 얼음보다 차가운 냉탕에 몸을 담그고, 그다음으로 뜨거운 온천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다시 폭포 아래 냉탕에 들어갔다가 온탕에 들어가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그의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었다.
출정을 나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10년간 반복해 온 일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윤은 애써 억눌러 둔 복잡한 생각들을 그제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숙부께서는 대체 왜 이리 급히, 미리 알리지 않고 오신 것인가? 은증왕에게 묻고 싶은 것은 어제의 그것이 전부였을까?’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던 그는 갈림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은증왕의 상태가 많이 나아졌는지, 잠은 잘 잤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도 선뜻 발이 움직이질 않는 것은 지난밤 제 안에 솟았던 야릇한 욕망 때문이었다.
“윤아,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하필, 숙부와 맞닥뜨렸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촉촉한 것을 보니, 설마 오늘도 새벽부터 산의 탕에 들어갔던 것이냐?”
“예, 숙부. 절로 같은 시각에 눈이 떠집니다.”
“헌데, 정말로 효과가 있나? 치유자 없이도 기가 정화된다 그리 느껴지는가?”
“지인은 조금도 되지 않습니다.”
“뭐라? 그럼 헛고생인 게야? 혹 무공을 더 올리려 매일 그리 수련을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능력자의 기는 무공에 쓰이는 정기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정화의 통로를 맑게 하고 또 튼튼하게 해줍니다.”
“지인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로구나.”
주한모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조카의 두툼한 팔뚝을 어루만졌다.
“네 혹 여전히 폭주를 염려하고 있는 것이냐.”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인을 끝끝내 제대로 받지 못하고 폭주하게 되면 큰일이지요.”
“폭주란 본디 이능력자가 가진 힘에 비례하는 것이니 효명성 일대, 아니 북부가 통째로 가루가 되어버릴 것이니라.”
“제 목숨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지요.”
“헌데 이리 쌩쌩한 것을 보니 어디 그럴 날이 오긴 하겠는가? 염려 말거라.”
“예, 숙부.”
“내 오늘 바로 중경으로 떠날 것이야. 대대적으로 전국을 뒤져 치유자를 더 찾아낼 수 있도록 폐하께 주청을 드리마.”
“오늘 말씀입니까?”
난데없는 한모의 통보에 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연유로, 고작 은증왕의 얼굴 하나 보려고 그 먼길을 달려온 것인가 하는 의문부터 스쳤다.
“어찌 이리 급히 가십니까? 조금 더 머무르시지요. 섭섭합니다.”
“조정에 일이 너무 많아 그러하다.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출발할 것이야. 조반은 함께 하자꾸나.”
“그리 상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걸어나가는 숙부의 뒷모습을 보며, 윤은 석연치 않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숙부가 이대로 끝일 리 없었다.
‘혹 은증왕을 태자의 손에 쥐여주려, 그것을 계산하러 온 것인가? 아니다, 태자는 숙부의 아랫도리에 매달려 사는 인간이야. 아니면 황제께 은증왕을 들이밀어 환심을 사기 위해 미리 외형의 확인이라도 한 것일까?’
끊임없이 스치는 의혹에 계속 숙부가 걸리는 것이 솔직히 싫었다.
‘내가 정에 이끌려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윤은 불편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성주 대행으로 성심껏 저를 돌봐준 이가 바로 숙부였다. 그의 뒤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
*
주한모는 올 때와는 달리 갈 때는 마차에 올랐다.
효명성에서 막 벗어난 그의 일행 중,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무사 둘이 슬그머니 말을 돌려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저희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한모는 품에서 은자가 듬뿍 든 주머니를 꺼내어 건넸다.
“약속된 착수금이다. 성공 보수는 세 배로 준다 전하거라.”
“예.”
“너희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없도록 조심히 움직이고.”
“예.”
“이번 건은 반드시 성공하여야 한다. 실패의 대가는 죽음이라 전하거라.”
“예, 주인님.”
“가 봐.”
주한모와 마차에 동행한 호위무사는 어제 연회장에서 무흔의 몸을 붙들고 있던 장신의 미청년 린이었다. 한모는 그의 뽀얀 뺨을 끈적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린아, 효명성에 있던 시절부터 이환과는 절친한 사이였지?”
“예.”
“지금은 어떠하냐? 어제 연회장에서 널 무섭게 노려보던데.”
“괜찮습니다. 명하신 대로 간밤에 그와 술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오늘 아침 식사도 그와 같이하였지? 내가 알아보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주한모는 린의 갑옷을 벗기며 속삭여 물었다. 린은 상의의 매듭을 풀어 자신이 모시는 이의 번거로움을 덜어주며 답했다.
“이환 말하기를, 주 국공께서는 은증왕의 몸을 취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다 하였습니다.”
“아니, 허면 취하면 될 것이지. 싶은 것은 또 무엇이냐?”
“육욕뿐만 아니라 마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환은 그리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손도 잡고 입도 맞추었다 하나, 그다음은 아직이라 합니다.”
옷깃이 벌어지고 린의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나자, 주한모는 그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 좋은 것이 왜 아직일까.”
“주 국공께 가장 중요한 것은 색욕보다는 역시 지인 아니겠습니까. 이환의 말로는 금욕이 지인의 효율에 도움이 된다 하니….”
“린아, 이는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가슴을 더듬던 주한모의 손가락이 손끝에 걸리는 것을 꼬집어 비틀었다.
“읏… 죄송합니다.”
“혀를 함부로 놀린 벌을 받아야지. 그래, 혀가 잘못하였으니 벌도 혀가 받는 것이 합당하겠구나.”
주한모는 린을 꿇어앉혔다. 그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하 둘이 말을 달려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아… 내 귀여운 조카님의 장난감을 망가뜨려야 하니, 미안해서 어찌한다.”
*
숙부 일행이 성을 나서고, 또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는 내내 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성주의 그러한 모습에 똑같이 표정이 무거워진 사평이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주군, 중경의 우리 사람에게 전서구를 보내려 합니다.”
“숙부의 행보를 주시하라, 그러한 지시를 내릴 생각인가?”
“허락해 주십시오.”
윤은 혈육을 경계해야 하는 이 상황이 영 달갑지 않았다. 씁쓸하긴 하나 하는 수 없었다. 사평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내렸을 명이었다.
“그리하라.”
“아, 그리고 은증왕이 고열로 앓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신을 잃고 어머니만 찾는다더군요. 의원을 보내두었습니다.”
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한모를 만나지 않기 위해 꾀병이라는 수를 쓰는 것일 터였다.
“정말 아픈 것이 맞느냐?”
“예?”
“숙부가 성을 떠나셨단 소식이 은증왕에게 아직 닿지 못한 모양이군.”
“정말로 아픈 것이 맞사옵니다. 출입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발견하여….”
“뭐라?”
윤은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곁에 섰던 사평이 깜짝 놀랄 정도로, 윤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다급한 걸음으로 은증왕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
“성주님, 오셨습니까? 저도 막 도착하였습니다.”
무흔의 침상 앞에 자리한 하온이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건넸다. 열이 펄펄 끓는 이마에서 손을 막 뗀 그는 이어 환자의 소매를 걷었다. 젊은 의원의 검지와 중지가 새하얀 손목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멈춰라!”
윤의 다급한 외침이 무흔의 침소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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