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모두가 나가고, 윤은 의자를 가져다 무흔의 머리맡에 와 앉아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로 고생하시었소.”
무흔은 대답 없이 고개를 반대로 틀어 버렸다. 예부상서의 못 돼먹은 짓거리를 꽤 오래 봐 준 윤이 얄미워졌다. 아까는 고마움이 잠깐 솟았었는데, 막상 실물을 마주하니 화부터 치밀어올랐다.
“일찍 제지하지 못하여 미안하오. 숙부는 워낙 의심이 많은 자라.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십시다.”
“다행?”
“고작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기로 채 열 대도 맞지 않았잖소.”
“고작이라 하였… 윽!”
발끈한 무흔은 윤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으나, 엉덩이의 통증 탓에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갑작스런 움직임 탓에 엉덩이에 올려둔 약초가 뭉텅이로 흘러내렸다. 윤은 잽싸게 손을 뻗어 이를 받쳤다. 허벅지에서 골반을 지나 엉덩이 위쪽까지, 그 질척이는 것을 손으로 조심스레 천천히 밀어 올려주었다.
“흐읍!”
예상치 못한 자극에 놀란 무흔은 저도 모르게 숨부터 들이켰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라, 버럭 화부터 튀어나왔다.
“지금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고맙다 하면 될 것을. 어찌 화를 내시는가?”
“아니, 지… 지금 내 허벅다리에서 둔부에 이르기까지 소… 손, 손바닥으로 훑지 않았어?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놀란 쪽은 무흔만이 아니었다. 윤은 손바닥에서 느껴진 의외의 탄력감에 홀려 마땅한 답조차 둘러대지 못하고 있었다.
‘몸이 가늘고 살이 워낙에 희어 그저 물컹한 살일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몸을 쓸 줄 아는 자의 살성이 아닌가! 단단하고 탄력이 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몸이 아니야.’
치료를 위해 무흔의 상의는 완전히 찢긴 채로 벌어져 있었다. 훤히 드러난 새하얀 등은 그저 뽀얗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근하게 잔근육들이 들어차 있었다.
윤은 확인을 위해 이번엔 무흔의 뒷허벅지를 꽉 쥐어보았다. 지인의 힘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무시하고, 굵지는 않으나 길게 쭉 뻗은 허벅다리가 상당히 단단한 것을 확인했다.
“몸에 손대지 마!”
“갇혀 살면서 무공이라도 연마했나? 하체에 제법 내실이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그렇다 하여 검을 쓸 줄 모르는 것도 아니지. 뭐, 그런 것을 다 궁금해하시고 그러시나….”
춤을 추는 것이 취미라 솔직히 대답하긴 싫었다. 어쩐지 상대가 저를 무희라 놀릴 것 같아서. 무흔은 투덜대는 어조로 대충 답을 흐렸다.
무흔이 검술을 배우는 것은 황명으로 인해 허용되지 않았으나, 무료함을 버티기 위해 다른 잡기들을 배우는 것은 가능했다. 그림에는 재능이 없는지라, 악공들과 무희들을 데려다 놓고 매일같이 음악과 춤을 익혔다.
그중에서도 무흔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검무였다. 그러니 검을 아예 못 쓴다고 볼 수는 없었다.
“몸은 탄탄한데 살성은 여린가 보오. 매 몇 대에 이리 열이 올라서야.”
윤은 방금 엉덩이에서 느꼈던 뜨거운 기운을 떠올렸다. 새하얀 몸뚱이 위에 붉은 흔적들, 그리고 열감. 뜬금없이 야릇한 상상이 솟는 터라 얼른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의원에게 치유자임을 들키지는 않았나?”
“아하… 그것이 신경 쓰여 이리 달려오셨나 보군.”
무흔은 엎드린 채로 눈을 치켜들었다. 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것이 무흔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상해. 내 입장에서야 함구해 달라 하는 게 당연하거늘, 주 국공은 어찌 이를 비밀로 하지 못해 안달인데?”
바로 답을 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생각을 하던 윤이 무흔에게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 얼굴 앞에 생각지도 못한 두툼한 허벅지가 턱 하니 놓이자 무흔은 움찔했다.
“유일무이. 그것이 내게 있어 당신의 가치요.”
윤의 손가락이 무흔의 뺨을 쓰다듬었다.
무흔은 난데없는 친근한 접촉에 당황했다. 아무리 윤이 지인에 허덕인다지만, 이건 과한 걸 넘어 뻔뻔한 행동이었다.
“어우, 꼭… 이리… 만지면서 이야기를 해야 되나?”
“아까 숙부의 채찍으로부터 그대를 구하느라 능력을 썼으니, 그만큼 받아 가는 것뿐인데?”
어쩐지 윤의 말끝이 요상하게 꼬부라지는 느낌이라, 무흔은 약초가 그득히 얹힌 환부를 최대한 움직이지 않도록 하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맞은 부위를 보느라 의원이 주변에 초를 그득히 켜 놓은 덕에 무흔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을 대번에 살필 수 있었다.
윤의 뺨은 옅은 붉은빛으로 상기되어 있었고, 눈도 살짝 풀린 듯 보였다.
“취하였나?”
“취하였지.”
윤은 저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듯, 한숨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등으로 흘러내리는 무흔의 머리카락이 약초에 닿지 않도록 잘 모아 한쪽 어깨로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연회장에서 어찌나들 술을 권하던지. 게다가 숙부가 가져온 술이 유난히 독했어.”
“그래서, 내가 맞고 있는데 구경만 했다? 아, 그만 좀 만져!”
“그것은 두고두고 사죄할 터이니 부디 용서해 주시오.”
윤이 두 손을 곱게 모아 꾸벅 절을 했다. 그러다 저를 노려보는 무흔의 얼굴을 턱 하니 붙잡고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입술이 바짝 마르셨소. 의원이 아까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 하였지. 차를 드리리까.”
“기왕이면 찬물이 좋겠는데.”
무흔의 몸은 엉덩이에서부터 허리, 등에 이르기까지 아까 찢긴 옷차림 그대로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던 터라, 윤은 아무래도 무흔이 추울까 염려가 들었다.
“찬물? 따뜻한 쪽이 낫지 않나?”
“목이 많이 타니 그냥 줘.”
윤이 잔을 가져다주었으나, 이를 받아마시기에는 무흔의 자세가 여의치 않았다.
“음… 개처럼 물을 핥으라 할 수도 없겠군. 실례하겠소.”
윤이 침대 머리맡, 바닥에 주저앉았다. 잔의 물을 본인의 입에 머금은 그는 거침없이 무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서는 하얗고 가느다란 뒷덜미를 꽉 붙들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입맞춤이었던 터라, 무흔은 맞닿은 입술을 통해 제 입으로 넘어 들어오는 물 한 모금을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켜 버렸다. 채 받아 마시지 못하고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체 무….”
화를 내려던 순간, 윤의 손가락이 턱에 닿았다. 그의 엄지가 부드럽게 입가를 훑어 스며 나온 물을 닦아내는 통에 무흔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 무흔과는 달리, 윤은 잔에 남은 물을 마저 머금고는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읍!”
아까보다 더 많은 물이 울컥 밀려 들어왔다. 찧은 약초를 엉덩이에 그득히 얹은 통에, 무흔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윤이 제게서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대체 이 무슨 짓이야!”
“은증왕께서 물로 갈증을 채우시는 김에, 나 또한 정화에 대한 갈증을 좀 채웠소.”
“아까 내 몸을 만지작댄 건 뭐고!”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지. 헌데 지금… 대단히 신기한 것을 하나 깨달았어.”
귀까지 빨갛게 물든 무흔과는 대조적으로, 윤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감쌌다. 열감이 사라진 것에 신기해하며 눈을 크게 떴다.
“몸의 정화뿐만 아니라 술까지 싹 다 깨다니! 술 또한 몸에 해를 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보네. 와… 술이 정화되었어….”
“허, 평생 이능력자로 살았으면서, 그걸 지금 처음 깨달았다고?”
“술에 취해 지인을 받을 일이 있었겠나.”
“술에 취해 치유자들과 입을 맞춘다거나, 몸을… 섞는다거나….”
“은증왕께선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요?”
“방금 나에게 한 짓거리로 미루어 짐작해 본 것이지. 본디 입술이 헤프신가 보군.”
“믿기 힘드시겠지만, 입술로 지인을 받지 아니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소.”
“10년 전엔?”
“닥치는 대로 품고 안았지.”
망설임 한 번 없는 윤의 뻔뻔한 대답에 무흔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진정으로 하는 소리요? 아니면, 나를 놀리는 건가?”
“온몸의 기혈 중 1할이 오염되었을 때, 그저 좀 신경이 쓰이는 정도야. 3할이 더러워지면 예민해지고 찌뿌둥한 기분이 계속되며 짜증이 솟지. 5할이 그리되면 두통이 끊이질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혈이 역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점점 잠을 이루기도 힘들어지지.”
말을 하다 말고 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흔은 그것을 보고 아마도 본인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거니, 하는 짐작을 해 보았다.
“7할이 오염될 정도면 보통의 이능력자는 제대로 버티기 힘들어.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하고 내 경우에는 치유자들이 번갈아가며 전신을 몇 시간이고 주물러 대야 간신히 좀 살 만해진다 하면 되나.”
무흔은 단계별로 상태를 줄줄 읊는 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책에서 읽기로는, 오염 상태가 7할에 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했는데, 윤에게는 그것이 빈번한 일인 듯싶었다.
“오염도가 8할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정화가 시급한 단계를 넘어 위기 상태야. 이때부터는 폭주의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나의 경우에는 10년 전부터 줄곧 5할가량의 오염도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소. 그전에는 정말 말도 못 했고.”
“그래서 더 지인에 집착했던 건가….”
“그때 우리가 만났더라면, 은증왕께선 아마 몸이 남아나지 않으셨을 게요.”
윤의 농담에도 딱히 반응하지 않고, 무흔은 고개를 도리질 치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육욕에 물든 것이 주 국공의 본성인가 보오. 발정 난 개와 무엇이 다를까.”
“다…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는 법.”
윤이 딱히 더 말을 잇지 않고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그 탓에 오히려 무흔은 내막이 궁금해졌다. 빨리 얘기를 더 해 보라며, 엎드린 채로 침대를 탁탁 두드리며 물었다.
“10년 전엔 무슨 계기가 있었기에?”
“당시에 나는 어떻게든 정화의 효율을 높여 보려 지인을 받을 때면 매번 입술을 맞대거나 몸을 섞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단순히 손을 잡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더군.”
“숱한 시도 끝에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깨달음이 아니라 방법을 얻었지. 도학 선생에게서.”
“나도 이능력자와 치유자에 대한 그의 저서를 다 읽었어.”
“오, 그러한가. 그 도학선생이 나에게 맞는 특별한 치유자를 찾느라 몇 년이나 대륙을 뒤지고 다녔으나 결국 실패하였어. 그 대신 정화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비급을 찾아냈고, 나는 그것을 실천하여 10년 가까이 금욕하고 매일 새벽 수련에 부지런을 떨고 있지.”
“허, 금욕?”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는 식의 눈빛이 윤에게로 향했다. 신뢰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 표정에 윤의 웃음이 터졌다.
“하하, 믿기지 아니하신다면 내가 매일 반복하는 새벽 수련을 보여 드리지. 쾌차하시거든 뒷산에 함께 오르십시다.”
산에 오를 수 있다! 그 말에 무흔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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