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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26화 (26/85)

#026화

휘익.

거세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잔인하기는 하나 모두에게 색다른 여흥이 되어주었을 그 채찍은 그 목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허공에 붙들렸다.

가죽으로 된 긴 채찍줄을 칭칭 말고 있는 방패 모양의 물건은 거대한 징이었다. 장정의 팔 길이를 지름으로 하는 큼지막한 둥근 금속 악기로, 악공들의 자리 맨 뒤에 걸려 있던 것이 윤의 손짓 한 번에 그리로 날아간 것이었다.

“윤아!”

한모는 상석에 앉은 조카의 이름을 앙칼지게 외쳤다. 짜증이 실려 있었다.

쿵, 지잉, 하는 울림과 함께 채찍을 휘감은 징이 바닥에 떨어졌다.

긴장이 풀린 무흔의 뺨 위로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무흔은 얼른 옷자락부터 거머쥐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뒤를 가리려 함이었다.

“젠장….”

손목이 포박된 채로, 여전히 한쪽 팔은 장신의 무사에게 붙들린 상태로 옷을 틀어 몸을 가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모두가 저를 지켜보는 현실에 과연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지.

무흔은 벽제성에서 나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리 다들 나만 보고 있었다. 주 국공은 내게 익숙해지라 하였지. 허, 웃기시네. 책임이라도 질 듯이 굴어놓고, 결국 치욕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무흔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리하면 적어도 엉덩이는 남들 앞에 보이지 않을 테니.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하얗게 찰랑이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숙부와 무흔을 한눈에 담은 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흔의 모습이 안쓰러운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나는 것인지. 분노의 대상은 숙부인지 자신인지. 그것을 분간할 수 없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윤은 겉옷을 벗었다. 호위를 선 자리에서 한참 전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제 눈치만 보는 이환에게 옷을 던져주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받아들고 무흔에게로 향했다.

“린, 비켜.”

이환은 무흔의 한쪽 팔을 여전히 쥐고 있는 주한모의 호위무사에게 눈을 부라렸다.

린이 주한모를 따라 중경으로 가기 전까지 둘은 서로에게 충직한 벗이었다. 어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서로 부둥켜 끌어안고 회포를 나누었건만.

그러한 그가 지금은 주군의 마음에 든 자를 치욕에 빠뜨리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 이환은 상당히 불쾌했다.

“은증왕,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흔은 답을 두고 고민했다. 일어나면 다시 맨 엉덩이가 드러날 터였다. 하지만 예부상서의 무사가 팔을 놓아주었으니 이제 어떻게든 옷을 틀어 몸을 가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 머리 위에서 공기의 흐름이 펄럭, 하고 일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무흔은 제 어깨와 등을 감싸는 따스함을 느꼈다. 양옆으로 황금 주작이 수놓인 폭넓은 붉은 소매가 길게 떨어져 내렸다.

“이제 안심하고 일어나시면 됩니다.”

무흔은 제게 걸쳐진 겉옷의 앞섶을 본능적으로 여몄다. 제 손끝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지만, 다리가 풀려 혼자서는 몸을 세울 수가 없었다.

무흔이 이환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나는 동안, 연회장에는 윤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숙부, 고문은 곤란합니다. 은증왕을 온전한 상태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희로국에 억류된 염록왕 전하께서 오히려 큰 고역을 치르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한모는 바닥에 널브러진 징과 거기 휘감긴 자신의 채찍을 내려다보았다. 열 살이나 어린 조카에게 당한 수모가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은 형국이었다.

허나 아무리 조카라 한들, 품계로 보자면 엄연히 윗사람이다. 또한 주한모는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는 북부의 성주를 상대로 신경전을 펼칠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윤아, 염록왕 전하는 나의 형님과 동문수학한 사이이자 수어지교의 벗이셨다. 또한 형수님과는 사촌지간으로, 서로를 무척이나 아끼셨지. 그분이 잘못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야 할 것이야. 하지만.”

주한모가 화려한 소매를 요란하게 펼치며 눈을 부릅뜨고서는 강한 목소리를 냈다.

“이자가 뭔가 숨기고 있다면 그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만 한다.”

윤은 눈앞에 벌어진 판이 영 보기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의도된 연출에 모두들 속아주기만을 바라며, 이환을 향해 손을 펄럭였다.

“일단 은증왕은 끌고 나가거라.”

하필 무흔까지 그 의도된 연출에 걸려든 것이 문제였다.

이환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기댄 채 힘이 빠진 다리를 질질 끌며 연회장을 나서던 무흔은 매섭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주한모가 아닌, 윤이었다. 그 원망의 눈초리가 윤의 마음에 날카롭게 박혔다.

*

연회가 파하자마자, 윤은 사평에게 물었다.

“어째서 숙부께선 더 물고 늘어지지 않고 바로 단념하셨을까?”

“확실히 이상하지요.”

“오늘은 연회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그만 접은 것일 수도 있겠지. 내일이 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부상서께서 다른 결론을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다른 어떤?”

“내 편이 아니면 죽인다, 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라. 은증왕에 대한 호위를 강화하여야 하겠습니다.”

“은증왕의 상처가 심하지는 않겠지?”

아까 윤은 참고 또 참았었다.

솔직히 대나무로 된 악기의 활은 매질에 있어서 그다지 타격이 큰 도구라 할 수 없었다. 저 정도 매로 몇 대 맞는 것 정도야 괜찮겠거니,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무흔의 비명과 참담한 표정이 제 속을 후벼팠다. 처음에는 그저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는데 점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숙부가 무흔에게 염록왕에 대해 캐묻기 시작한 순간, 윤은 제 안에 묻어둔 의혹이 한층 더 짙어졌음을 인정했다. 진실됨을 알기 위함이란 말도 핑계로 들렸다.

저를 노려보는 무흔의 그 시선 속에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말이 묻어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평 또한 ‘제가 진작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고. 숙부를 의심하려 드는 제 마음이 끔찍했다.

그리 혼란스런 와중에, 무흔의 옷이 찢기고 엉덩이가 드러났다.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매 몇 대 맞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일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욕을 보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저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무흔이 참고 있다.

그것이 일순간 울컥할 정도로 윤의 마음을 두드렸다.

매가 부러지고 숙부는 채찍을 들었다. 더는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회초리로 매 몇 대 맞은 정도인 것을요. 성주님 덕에 채찍도 피했고. 아까 하온에게 가 보라 일렀습니다. 처소를 미리 준비해두길 잘했지요. 염려 마십시오.”

“의원이 이미 갔다는 말이냐!”

의원이 무흔의 맥을 짚는다면 지인의 능력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윤은 다급히 방향을 틀었다. 제법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체통 따위 두 번 생각지 아니하고 무흔의 처소로 질주했다.

*

연회장에서 빠져나온지 몇 걸음 되지 않아, 무흔은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한참 만에 정신이 든 것은 엉덩이에 차가운 것이 닿았을 때였다.

“윽!”

“정신이 드셨습니까. 환부를 치료 중이니 그대로 계십시오.”

퉁명스런 목소리가 울렸다. 옥에서 보았던 그 하온이라는 자의 음성인 듯했다.

푹신한 침대에 엎드린 채 무흔은 가만히 안도의 숨을 뱉었다.

“긴장한 몸으로 고초를 겪고 나서 긴장이 갑자기 풀린 탓에 혼절하신 겁니다. 우선 시료를 마친 후, 진맥을 하고 시침을 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환이 있었다. 젊은 의원만을 말없이 지켜보던 그가 얼른 무흔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데려다주어 고마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군께서 은증왕을 각별하게 여기시는 만큼, 저 또한 그러합니다. 주군께서 연회장에서도 은증왕의 부름에 답을 해 주셨잖습니까.”

“그야… 거래를 제안한 자로서, 최소한의 도리지.”

투덜투덜하는 무흔의 목소리에 이환은 얼른 주군을 변호하고 나섰다.

“주군께서 은증왕께 이리 옷까지 벗어주셨습니다.”

이환은 무흔의 머리맡에 곱게 개어 놓은 붉은 겉옷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 주군은 본디 이리 곰살맞은 행동 따위는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하온, 내 말이 맞지?”

이환이 활짝 웃으며 동의를 구했으나, 무흔 뒤에 있는 의원은 눈을 내리깐 채 무덤덤하게 네 하고 짧은 답을 내어놓을 뿐이었다. 그저 열심히 찧은 약초를 벌겋게 부어오른 무흔의 엉덩이에 얹었다.

“윽! 으….”

환부가 말도 못 하게 쓰렸다. 무흔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상에 머리를 푹 묻었다. 이러한 와중에, 좋은 향기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코앞에 놓인 것은 이환의 말대로 윤의 옷이었다.

‘위세 등등하게 거칠 것이 없는 자라 그러한가. 그는 높은 곳에 앉아 붉고 화려한 옷을 걸친 것이 제법 어울리더군. 잘도 나를 그런 상황에 몰아넣고… 허,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그는 알았을까. 망할 자식.’

엉덩이의 상처에 찧은 약초가 닿을 때마다 무흔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성껏 치료를 해 주고 있는 의원에게 실례인 것만 같아, 이를 악물고 윤의 겉옷을 힘껏 쥐어 신음을 참았다.

“읏….”

“많이 쓰리십니까?”

“참을 수 있소.”

“환부가 진정될 때까지는 이리 엎드려 계셔야 합니다.”

“잘 때도 이리 해야 하나?”

“주무시기 전에 깨끗하게 닦아드릴 것입니다. 통증으로 인하여 쉽사리 잠이 드시기 힘들 터이니, 잠이 잘 오는 탕약을 가져다 드리겠….”

의원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무흔의 처소에 윤이 들이닥쳤다. 벌컥 문이 열리는 통에 모두가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온!”

“오셨습니까, 성주님.”

윤은 우선 분위기를 살폈다.

무흔이야 환부를 진정시키는 약초를 얹은 상태였다. 의원과 그를 보조하는 어린 시종이 하나, 그리고 한쪽에는 이환이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그저 미소만 지으며 서 있었다.

아직 치유자임을 들키진 않은 듯했다.

‘은증왕에게 지인의 힘이 있음을 알았다면 이환이 이리 얌전할 리 없지.’

평온한 그를 보고서야 윤은 마음을 놓았다. 안도의 표정이 감도는 순간, 무흔과 눈이 마주쳤다.

윤의 난입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던 무흔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은증왕의 상태는 어떠하냐.”

“뼈와 신경은 당연히 무탈하며, 환부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것입니다. 아까는 탈진으로 혼절하시었으나 방금 깨어나셨으니, 이제 시침을 해 드리려 합니다.”

침을 놓는다면 분명 그 전에 맥을 짚는 게 순서였다. 윤은 하온이 침통을 꺼내 드는 것을 보고는 손을 들어 이를 제지했다.

“깼으면 됐지, 침은 무슨. 나가 있거라.”

“하오나 수분 또한 충분히 섭취하셔야 하고….”

“전부, 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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