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몸을 밀착시킨 상태로 주한모가 무흔의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귓바퀴에 뱀이 스멀스멀 지나가는 듯 소름이 돋자, 무흔의 입술 사이로 공포를 머금은 숨결이 떨려 나왔다.
“이 자리에서 네 옷을 벗겨 버린들, 무례 정도가 아니라 능멸을 하든, 나는 저 앞에 앉은 효명성주께서도 무어라 하지 못할 자라 이 말이다. 이대로 끌고 나가 밤새도록….”
주한모가 무흔을 붙든 손에 힘을 주고 허릿짓이라도 하듯 자신의 아래를 무흔의 엉덩이에 꾹 밀어 갖다 붙였다.
“새로운 기쁨에 눈뜨게 해 줄 수도 있느니라.”
술로 무르익은 연회장 곳곳에서 휘파람 소리와 희롱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주한모는 껄껄 웃으며 무흔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한 대 쳤다.
“참으로 탐이 나는 몸이로구나.”
무흔은 제 심장이 잘못될 것처럼 날뛰는 것을 깨달았다. 주한모가 지금 말한 것, 혹은 윤이 예전에 말해주었던 그 거대한 새장의 일이 정말로 일어나게 되는 건 아닌지 덜컥 두려워졌다.
호흡조차 버거웠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윤과 눈이 마주쳤다.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으면 좋았으련만, 무흔은 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와달라는 요청을 시선에 담아 간절하게 바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높은 곳에 앉은 윤은 아무런 반응도 제재도 하지 않고,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그저 관전만 하는 듯했다.
‘주 국공은 날 돕는 것보다 정보를 지키는 게 우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무심한 얼굴을 할 수 있나. 어쩌면 저들처럼 즐기는 것일 수도 있겠지. 망할 놈.’
무흔은 어금니를 꽉 물어 주한모의 치욕스런 행위와 언사를 참아내었다. 자존심을 내세워 본들, 지금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무흔의 시선을 좇아, 한모는 조카를 향해 몸을 돌려 섰다.
“윤아, 어찌 생각하느냐. 너의 부친이자 나의 하나뿐인 형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자를 인질 교환이란 명목으로 얌전히 돌려보낼 셈이냐?”
윤은 복잡한 속내를 감추는 것에 제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한이 서린 무흔의 시선이 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것이 책임감을 자극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숙부의 손이 그에게 닿는 것이 왜 이렇게까지 불쾌한지를 고민하는 것도 편치 못한 속내의 원인 중 하나였다.
“허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무미건조해 보이는 조카의 물음에 한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는 열변을 토해냈다.
“누군가는 고작 20년 좀 지난 일이라 할 것이나, 내게는 아직도 21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아직도 그날의 붉은 피가 생생하게 떠올라. 나로 하여금 오늘 밤, 이자에게 형님의 죽음에 상응하는 고통을 선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거라.”
그가 무흔을 바라보았다.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허락을 기다리며, 그는 손에 쥔 활대 끝으로 은증왕의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무흔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상대는 이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포로 주제에, 눈빛이 건방지구나.”
주한모가 활대를 쥔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어 휙, 하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짝.
“윽!”
무흔은 뺨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은 너무도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이환, 사평을 비롯한 연회장의 모두가 놀란 와중에 그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이는 당연하게도 당사자인 무흔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손을 들어 뺨을 감싼 채 그 자리에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귀한 분께서 이렇게까지 놀라시는 것을 보니… 맞아 본 적이 없으신가 보지?”
주한모의 비아냥에 무흔은 아무런 반응도 내지 못했다.
맨 처음 무흔이 뺨을 맞았던 것은 16세 때의 일이었다. 불에 덴 듯한 통증은 공포로 얼룩진 그 기억을 삽시간에 불러일으켰다.
무흔은 황망한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모는 활대 끝을 무흔의 턱 아래에 대고 고개를 거칠게 위로 치켜올렸다.
“자, 대답해라. 희로국에 끌려가신 우리 염록왕 전하를 뵌 적이 있는가?”
“흐으… 하아… 하… 만난 적 없소.”
“그분의 안위를 묻는 것이다. 무탈히 건강히 계신지, 들어본 적도 없는가?”
“없어. 하아… 단 한 번도 없소.”
무흔은 가슴을 움켜쥔 채로 숨을 고르며 답을 건넸다.
그러다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이 무뢰배의 첫 질문은 염록왕에 대한 것이었다. 기껏 연회장에 요란하게 불러내어 마음을 흐트러뜨린 후에 묻는다는 말이 염록왕이라니?
순간 짝,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연회장에 울렸다. 이번에는 대나무로 된 긴 활대가 무흔의 팔뚝을 후려쳤다.
“윽!”
무흔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두 눈에 더 날을 세웠다. 아무리 대단한 예부상서라 해도, 제게 난데없이 이리 폭력을 가할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이리 드센 눈빛을 한 포로의 말을 어찌 믿겠나?”
“내가 거짓을 입에 올려 이득을 볼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것은 모를 일이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원. 정녕 희로국 황궁에 머물던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염록왕 전하를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것인가?”
“아시다시피 이 사람은 유폐된 황자라. 지하의 석궁에 갇혀 죽음이 차라리 나을 듯한 삶을 살았어. 누가 내게 바깥의 소식을 전해주겠으며, 또 전해준다 한들 관심도 없는 타국의 왕야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무흔의 어조에 비아냥이 한껏 실렸다. 주한모는 불쾌함을 드러내는 대신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했다.
“쯧쯧, 그저 답변의 진실성을 확인하고자 네가 당연히 들어보았을 염록왕 전하에 대한 것을 우선 물어보았던 것인데… 이런 반응이라?”
주한모는 멀찍이 선 자신의 호위 무사에게 손짓했다.
“포로를 일으켜 세우거라.”
구척장신이 무색할 정도로 고운 얼굴을 한 무사는 결박된 무흔의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멱살을 채어 단번에 무흔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무흔의 몸이 들풀처럼 휘청였다.
“이런 이런. 곱게 갇혀 자란 황자께선 거칠게 다뤄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시군.”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였는데, 어찌 이리 사람을 몰아세우는가!”
무흔은 간신히 몸을 가누고 매섭게 소리쳤다.
붙들린 팔에서 통증이 일었다.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저를 꽉 쥔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에는 기력이 한참 모자랐다.
예부상서의 질문에 대해 함구하기로 한 것은 윤과의 약조이긴 했으나, 지금의 심정으로는 약조 따위 관계없이 이자에게는 단 한 마디도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심이 강하게 섰다.
“귀신의 낯짝에, 요물의 눈동자를 가진 자를 어찌 믿겠나. 뒷구멍이라도 쑤셔주면 못 버티고 진실을 토할 것 같긴 한데….”
무흔은 제 안에서 끓어 넘치는 분노를 더는 참지 못했다. 헛웃음을 짓고, 상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비아냥으로 꽉 찬 음성을 내었다.
“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할까. 당장 나를 벗겨 능멸한다 한들 누구도 죄를 묻지 못할 분이시잖소? 건원국의 태자와 승상을 등에 업으셨으니… 저 효명성주, 아니 황제도 눈감아 줄 뒷배가 있으시구려.”
주한모의 입매가 뒤틀리는 것도 찰나였다. 그는 호위무사에게 몸을 기대고 귓가에 입술을 달싹여 명을 내렸다. 이어 무흔의 눈을 들여다보며 실실 웃었다.
“거짓을 고하는지 아닌지는, 매로 다스려보면 금방 드러나겠지요, 대단히 귀하신 은증왕 전하.”
그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무사는 무흔의 옷을 잡아 찢었다. 등허리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다.
휙.
동시에 주한모의 손에 들린 활대가 허공에 커다란 호선을 매섭게 그어 내렸다.
짝.
“윽!”
맨살이 드러난 것에 당황한 무흔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비명을 내지르며 휘청이는 순간, 주한모의 호위무사는 무흔의 정면에서 양팔을 꽉 붙들었다.
휙.
한 번 더, 붙들린 무흔의 몸 위로 매질이 가해졌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봉긋하게 솟은 새하얀 엉덩이 위로 붉은 줄이 선명하게 둘 그어졌다.
“악!”
비명과 함께 무흔의 몸이 뒤틀렸다. 피하고 싶었으나, 저를 붙잡은 눈앞의 사내는 거대한 산이나 다름없었다.
주한모의 눈에는 쾌락이 스쳤다. 가학의 맛에 중독된 자 특유의 눈빛이었다.
“몇 대만에 진실을 토로할지, 나와 내기해 보겠나?”
쉴 틈 없이, 무자비한 매질이 두 번 더 내리꽂혔다. 주한모가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이를 꽉 물고 힘을 주었으며, 그가 쥔 단단한 대나무 활대는 무흔의 하얀 살결을 사정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윽! 흐으… 그만….”
둔부의 연한 살결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주한모는 그 자리를 매섭게 후려갈겼다.
“악! 진짜 모른다고! 흐윽….”
한 번 더 휘두르는 순간, 힘을 버텨내지 못한 활대가 반으로 툭 부러져 버렸다.
“린아, 채찍을 다오.”
호위무사는 허리에 찬 돌돌 말린 채찍을 꺼내어 한모에게 건넸다. 이를 본 무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정말로, 나는 정말로 알지 못하오.”
“채찍 맛을 보고, 그런 후에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지 내 다시 묻지.”
무흔은 저를 붙들고 있는 사내에게서 어떻게든 몸을 빼내 보려 있는 힘을 다해 움찔거렸으나 허사였다.
그자의 어깨 너머로 윤과 눈이 마주쳤다.
‘주 국공, 저 죽일 놈.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구경만 할 셈인가! 대체 얼마나 더 참으라는 거야!’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고인 눈을 보인 것이 억울했다. 만인 앞에 꼴사납게 드러난 제 뒤태가 부끄러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무흔은 연회장의 정면을 향하여 분노에 찬 일갈을 내질렀다.
“주 국공! 멈추게 해!”
주한모가 휘두른 채찍이 무흔의 몸으로 향했다.
휘익.
거세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리고, 무흔은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윤의 손끝에서 이능력이 뻗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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