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숙부가 은증왕을 보겠다는 것은 예상하던 청이었다. 윤은 일부러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이리 연회가 한창인데 먼저 자리를 뜨시려고요?”
“허허, 이 숙부가 그리 지각없는 자로 보이느냐. 이리로 부르자꾸나. 그가 아주 좋은 구경거리라 들었다.”
“굳이… 이런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 하십니까?”
“윤아, 너는 은증왕을 처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윤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주한모는 준비된 핑계를 천연덕스럽게 내어놓았다.
“너나 나나,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망하게 우리 곁을 뜨셨던 내 형님, 네 부친을 생각해 보거라. 그것이 아우 된 도리로서, 또 자식 된 도리로서 당연하지 않겠느냐.”
“예, 숙부. 물론입니다.”
“이 자리에 불러내는 것이 영 내키지 않으면, 내가 그리로 가마. 벽에 기구들이 다 준비되어 있을 것이니, 차라리 잘되었어. 내가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해다오.”
주한모의 눈이 번뜩였다. 복수심이라기보다는 흥미로움에 가까운, 그 미묘한 차이를 윤은 놓치지 않았다.
“고문은 불허합니다.”
무흔과의 약조대로 윤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약조도 약조였지만, 쥐 소리가 난다는 이유로 밥조차 먹지 못하는 이가 숙부의 고문을 이겨낼 리 없었다. 은증왕이 고문을 견디다 못해 온갖 말을 다 토해낼 것이 너무도 뻔히 그려졌다.
“그래… 네 눈에 든 몸이 상하는 것이 내키지 않겠지.”
한모는 은근하고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눈을 똑바로 맞추고, 조카의 속내 정도야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식의 어조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듣자 하니, 네가 다른 마음을 품고 그를 숨겨 두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
“다른 마음이라니요. 제 충심을 의심하십니까.”
일부러 다른 방향의 대답을 해 보았지만, 권모술수로 건원국 제일이라 하는 제 숙부의 상대가 되기에는 많이 미흡했다.
“나는 그리 물은 것이 아닌데? 혹 내가 널 비호해 줘야 하는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야?”
“장난으로라도 역심을 운운하지 마십시오.”
“하하, 그래그래. 내 실수하였다. 아름다운 것을 두고 육욕이 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이 누가 있겠느냐. 네가 관례를 올렸을 때, 네 방에 사내를 처음 들여준 것도 나이다. 내가 모를까.”
“숙부!”
“성을 내니 더욱 의심스럽구나. 어제 도착하자마자 너와 은증왕의 소문부터 들었거늘.”
“그저 소문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도 아직 은증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가 꽤 되더구나.”
“머무시는 동안 언제든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한모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음기를 머금고는 윤을 올려다보았다.
“연회의 흥을 돋우자. 그자를 이리로 데려오너라.”
“포로입니다. 연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 포로이기 때문에 더욱 연회에 어울리는 것이니라.”
“내일 날이 밝으면, 그때 저와 더불어 만나는 것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윤아, 섭섭하구나. 네 휘하의 모든 병사들이 내게서 좋은 술도 과일도 받아먹었는데? 못 이기는 척 그를 불러내면 될 것을. 내가 당장 보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허면 이 자리에 끌고 나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으며, 또 너의 부친이자 나의 하나뿐인 형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를 내가 대면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가벼운 실랑이는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으로 오가는 말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더는 실랑이가 아닌, 설전이 될 것이었다. 윤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은증왕의 일로 조카와 숙부 간에 목소리를 높였다는 소문이라도 퍼지게 된다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되겠지. 은증왕이 화젯거리가 되는 것은 내게 좋지 못한 전개이다.’
양국 간 인질 교환까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무흔을 보내지 않을 계책을 몰래 세우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최대한 잡음 없이 그가 머무르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는 한 발 물러설 때였다. 윤은 무흔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환, 가서 은증왕을 끌고 오너라.”
성주의 명이 떨어졌다. 그제야 주한모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윤은 손짓으로 이환을 불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귀엣말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
포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림은 물론이요, 심지어 침묵이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악공들의 음률 또한 멎어 버렸다.
연회장 중앙을 가로지르는 긴 복도 끝에 은증왕이 섰다.
하늘에서 별빛이 내린 듯이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에 달빛을 그러모은 듯한 흰 피부가 모두의 호기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핏빛을 머금은 보라색의 눈동자였다.
“그 유명한 희로국의 혈왕이 납시었구나.”
술 한 모금을 막 넘긴 주한모가 기분 좋게 외쳤다. 연회 내내 술을 그렇게나 들이부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눈엔 서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들어오는 은증왕의 모습을 티끌 하나 놓치지 않을 듯 집요하게 뜯어보았다.
무흔은 긴장에 넋을 잃었다. 난생 처음 보는 연회장의 규모와 화려함에 우선 압도당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제게로 집중되는 눈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자들의 안색과 눈빛이 당연하게도 제게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주한모는 저와는 다른 그 겉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거나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마주하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은증왕을 관찰하던 그가 입꼬리를 씰룩대며 조카를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우리 조카님이 굳이 황제 폐하께 아쉬운 소리 해 가며 여기까지 끌고 올 만한 절색이로고.”
윤은 숙부의 엇나간 짐작을 애써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인과 관련된 실상을 덮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그토록 원하시던 이를 눈앞에 대령하였습니다. 하문하시지요.”
한모의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슥 내리깔렸다. 그의 시선이 은증왕의 얼굴에서 손목을 칭칭 감고 있는 밧줄, 그리고 시커먼 장갑으로 시선을 옮긴 것이었다.
“우리 조카님께서… 이런 취향이 있으셨나.”
“무슨 말씀이신지.”
“상대를 이리 속박해두고 취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이 말이다. 연회가 파하면 바로 그리로 향하려 준비를 해 두었나 보구나.”
한모는 술자리에서 흔히 오가는 저속한 농담을 가벼이 던지고서는 실실 웃으며 은증왕과 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흔의 손목에 감긴 밧줄 덕에 장갑에 새겨진 윤의 성이 가려졌다. 이환이 무흔을 데리러 가기 전, 윤이 급히 지시한 것이 이것이었다. 혹시라도 장갑이 벗겨지는 사태를 막고자 함도 있었다.
“은증왕의 손에 닿으면 저주가 옮는다더니, 정말 그러한가 보네? 수음도 못 받게 되려나?”
음란한 희롱 탓에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단번에 달아올랐다.
윤은 제법 낯빛을 관리하고 있었으나,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무흔은 그럴 여유 따위 없었다. 그는 저를 모욕한 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무흔이 초장부터 숙부에게 말려들기 시작하는 것인가 싶어 윤은 덜걱 걱정이 솟았다.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가벼이 웃음을 터뜨리며 진담 반 농담 반의 답을 건네주었다.
“포로는 지정된 처소나 감옥 밖으로 나올 때 손을 속박하여야 한다는 군법에 따른 것뿐이지요. 숙부께서 특별한 즐거움에 정통하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야… 딱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취향 또한 아닌지라.”
“우리 조카님이 다 컸구나.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갈 줄도 알고. 숙부를 놀릴 줄도 알고 말이야.”
한모는 신이라도 난 듯한 미소를 듬뿍 머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방에 자리한 악공들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연주자가 든 활을 요구했다. 팔뚝 길이보다 좀 더 긴, 하얀 말총이 엮인 길고 가느다란 나무 대를 쥐고, 그는 은증왕에게로 걸어갔다.
“조카님께서 내게 정통하다 하는 것을, 내 친히 살펴봐 주겠네.”
은증왕의 긴 상의는 허벅지의 중간 즈음 닿는 길이였다. 딱 달라붙는 품의 옷은 아닌지라, 언뜻 보아서는 몸의 선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한모는 활대를 오른손에 쥐고 그 끝을 왼손 바닥에 톡톡 내리치며 은증왕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미색이야 말할 것도 없지. 두상의 크기와 형태가 좋고 어깨는 적당히 벌어졌으나 두텁지는 아니하구나. 여리여리하니 움켜쥐기 적합하다. 자세가 올곧아 등이 바로 섰으니 참으로 보기에 좋아.”
은증왕의 등 뒤에 선 그는 긴 막대를 뻗어 그 끝으로 등의 중앙을 가르는 뼈를 살살 훑어내렸다. 활대의 끝이 멈춘 곳은 은증왕의 허리였다. 이어 좌우 옆구리를 번갈아 톡톡 치며 한모는 품평을 이어나갔다.
“목과 허리가 가는 것이,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맛이 있겠구나.”
은증왕의 옆쪽으로 걸어 나와 걸음을 멈춘 주한모는 활대를 그의 허리 뒤로 뻗었다.
물 흐르는 듯한 두 겹의 비단 옷자락이 등 뒤로 툭 떨어져 내려 있었다.
주한모는 은증왕의 등허리에서부터 골반까지를 활대로 쓸어내렸다.
“둔부의 위쪽이 제법 둥글게 솟았어.”
호선을 그리던 막대는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아래쪽도 탱탱하게 올라붙은 것이, 제법 쥐는 맛이 있을 것이고.”
무흔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예부상서에게 휘말리지 말라 윤이 경고했던 것을 한참 전부터 쉴 새 없이 되뇌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모멸감이 솟았다.
“어디 보자….”
주한모는 손목을 튕겨 활대를 휘둘렀다. 엉덩이의 살이 통통하게 오른 부분을 가볍게 치자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나무 대가 공중으로 솟았다.
“윽!”
얕은 비명과 함께 무흔은 몸을 떨었다. 통증은 둘째치고, 수치심에 뺨이 화끈거렸다.
“탄력감이 상당하구나. 윤아, 보았느냐. 이게 내가 정통한 부분이다.”
그는 활대 끝으로 은증왕의 손목에 감긴 밧줄을 톡톡 두드렸다.
“이쪽이 아니고.”
기분 좋게 껄껄대던 주한모는 순간 놀라 웃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여 활을 바라보았다. 은증왕이 묶인 손으로 활대를 꽉 붙든 것이었다.
“작작 하시오.”
분노가 한껏 실려 흘러나온 무흔의 음성에 한모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국의 예부상서라는 자가 이리 무례하여도 된단 말인가!”
“물론이지요. 나는 마음껏 무례하여도 되는 자입니다.”
주한모는 무흔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가 섰다. 몸이 아슬아슬하게 스칠 듯 말 듯한 거리였다.
무흔이 긴장하여 숨을 멈추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 모양새를 가만히 눈에 담고 있던 한모는 씩 웃으며 제 아랫도리를 은증왕의 엉덩이에 갖다 붙이며 골반을 좌우로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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