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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23화 (23/85)

#023화

무흔은 옥사에 갇힌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끝까지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모두의 토론에 불이 붙었다. 철창 안에서, 또 철창 너머로 서로 내가 옳다 네가 옳다 이야기가 끓듯이 오가기 시작했다.

“주군께선 지난 10년간 완벽하게 금욕하셨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북부의 모두가 아는 일이지.”

“10년간 그리하셨으니 이젠 참지 못할 때도 되셨지 않아요?”

“형님들, 정신 차려요. 말조심! 우리가 왜 옥에 갇혔는지 잊었어요?”

열을 올리는 천홍을 막내 나령이 뜯어말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이환이 자신만만하게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주군께서 마차에서?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지. 아하하!”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이환이 소리 내어 우렁차게 웃다 말고, 감방 앞으로 다가온 청년을 보자마자 자세를 바로 했다. 얼른 철창 앞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하온! 잘 지냈어? 오래간만이다.”

“예.”

무흔은 지금껏 보지 못한 이환의 표정에 어쩐지 흥미가 일었다.

눈이 반짝반짝, 뺨이 터져나갈 듯 꽉 찬 미소, 그리고 철창을 부서져라 꽉 쥔 두 손.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이환과는 달리, 하온이라는 자는 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상당히 뚱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은증왕께 인사드립니다. 의원 하온이라 합니다.”

초록색 옷, 흰 앞치마에 흰 모자, 몇 시진 전, 무흔에게 해독약을 가져다준 의원과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감옥 안이 어두워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리여리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반갑소.”

“식전에 해독환을 드셨다 들었습니다.”

“그러하오.”

“혹시 체내에 남은 독이 있을지 모르니 탕약을 지어 독의 기운을 빼려 합니다. 진맥을 해 드릴 테니 손목을 창살 밖으로 내어주시겠습니까?”

“아… 괜찮소. 연기도 워낙 적게 들이마셨고 정 염려된다면 아까처럼 해독환을 더 먹으면 되지 않나?”

의원이 맥을 짚었다간 치유자임이 대번에 들통날 터였다. 무흔은 창살 가까이로 가기는커녕 바닥에 앉아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하온과 무흔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환이 얼른 무흔에게로 다가와 말을 거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진맥을 한 번 받아보시지요. 하온이 비록 스물다섯 젊은 의원이지만 실력은 효명성 내에서 최고입니다. 도학 선생께서도 칭찬을 쏟아부으셨는걸요.”

“난 정말 괜찮은데….”

“주군께서 특별히 진맥하라 보내셨을 겁니다. 그렇지, 하온?”

이환이 돌아보며 물었다. 하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평 장사께서 가 보라 하셨고, 오늘 근무하는 의원 중 옥사 담당으로 제 순번이 돌아와 제가 온 것뿐입니다. 주군께서는 포로의 치료에 대해 일언반구 없으셨습니다.”

낯빛에도 어조에도 일말의 높낮이 하나 일지 않았다. 그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더 무흔에겐 이상하게 들렸다. 묘하게 날을 세우는 듯한 느낌이 스치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진맥을 거부하시니 문진을 하겠습니다. 숨 쉬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십니까?”

“아니오.”

“연기를 들이켰다 하셨지요. 침을 삼킬 때 목은 어떠십니까?”

“아무렇지 않은데.”

“숨 쉴 때 흉부나 기관지에 거슬리는 것이나 통증이 있지는 않습니까?”

무흔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후, 하고 천천히 길게 숨을 내쉬었다.

“멀쩡하오.”

“안색과 눈을 살펴봐야 하니 이리 가까이 와 주십시오.”

“나의 안색과 눈이야 세상이 다 아는 것을.”

무흔은 자학을 곁들인 농담을 던져 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이를 들은 것인지 아닌지,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무흔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어둡네. 천홍, 불을 좀 띄워줘.”

하온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감옥 안에, 환하게 타오르는 불덩이 하나가 동그랗게 떠올랐다. 천홍은 그것을 하온의 머리 위로 가볍게 띄워 올렸다.

“우와….”

몇 번을 보아도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무흔은 그제야 일어나 하온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 서긴 했으나, 시선은 불로 된 구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헉.”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온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살피는 순간, 무흔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철창살을 꾹 붙들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4년 전, 희로국의 황궁 지하 석전에 유폐되었을 때 분명 본 적이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선 청년의 모습을 빠르게 훑었다.

‘청아하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그와 꼭 닮았기는 하나 성정이 정반대야. 그 화공은 참으로 다정하고 따뜻하였는데 이자는 차가워.’

“눈동자를 왼쪽으로 해 보십시오. 네. 이번엔 오른쪽. 네, 됐습니다. 아래로 해 보십시오.”

하온의 시선이 무흔의 장갑으로 향하는 것 같더니, 손목에 새겨진 황금색 글자에 잠깐 머물렀다. 하온은 이내 고개를 들어 무흔의 얼굴을 좌우로 살폈다.

“살결이 희고 투명하여 진료 보기 편하군요. 안색에는 이상 없습니다. 혀를 내밀어보십시오.”

“에에에.”

무흔이 혀를 길게 내밀며 소리를 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이상은 없으니, 저녁때 한 번 더 해독환을 드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해독에 좋은 차를 올릴 테니 우선은 그것을 드십시오.”

“고맙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찬바람이라도 날릴 듯이 그가 쌩하게 자리를 떴다. 이환이 잘 가라고 소리를 높여 외쳤지만, 하온은 대답도 없이 옥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종사관, 저 의원은 내게 화가 난 것인가?”

“하온이 원래 좀 낯을 가리지요. 익숙해지면 편안해집니다.”

“그대와는 얼마나 알고 지냈기에?”

“20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대와도 낯을 가리는 것 같던데.”

별 뜻 없는 질문이었다. 무흔이 보고 느낀 대로 그대로. 하지만 알고 지낸 세월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을 짝사랑으로 보내고 있는 이환에게는 타격이 컸다. 화살이 푹 꽂히기라도 한 듯 이환이 얼어붙었다.

“에이, 하온 형은 저하고도 7년 알았는데 하나도 안 친해요. 나령이랑은 그나마 얘기도 하고 그러지.”

복도 너머 감방 창살에 두 팔을 걸친 천홍이 냉큼 침묵을 파고들었다.

“아… 본디 벗이 많지 않은 자인가 보군.”

“네. 근데 하온 형님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맨 처음 봤을 땐 따뜻한 인상이었는데, 하경 형님이 세상을 뜬 뒤로 그렇게 됐죠.”

천홍의 마지막 말에 감옥 한 층 전체가 난데없이 숙연해졌다.

무흔은 뭔지 모를 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어찌해야 할지 눈치만 보고 있는 그에게 이환이 얼른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하경은 하온의 형입니다. 여기 같이 투옥된 우리 제1정예 부대원들의 전우였지요. 제가 가장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고.”

“아….”

“천홍 저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복도 너머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은증왕께서 궁금해하시기에… 하온 형님도 처음부터 그러셨던 건 아니셨단 말씀을 드리고도 싶었고….”

“잘 알았네. 저 의원은 겉보기만큼 차가운 이가 아니라는 것을 덕분에 내가 기억하게 되지 않겠는가. 고마워.”

의원의 등장으로 잠깐 잠잠해졌던 옥사 내의 화제는 다시 원래의 내기 건으로 되돌아갔다.

“주군이 아니라 사평 장사가 의원을 보낸 것이라니… 이거, 내기의 향방이 슬슬 나오는 거 아니야?”

“장사 나리야 워낙 빈틈없는 분이시니 명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일을 처리하신 걸 수도 있지. 난 주군께서 은증왕을 쳐다보시는 그 눈빛을 보았어.”

“어이구, 관상가 나셨네.”

감방 어디선가 두런두런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온이 가 버린 방향으로 고개를 빼고 있던 이환은 난감한 표정으로 무흔의 눈치를 살폈다.

“신경 쓰지 마시게.”

“제가 소문의 발원지가 되는 바람에… 정말 죄송합니다.”

“다들 이런 얘기로 시간 때우는 거지 뭐. 감옥이라는 곳이, 하아… 참 별로야.”

무흔은 한숨을 푹 쉬고 보료에 드러누웠다. 새벽 내내 깨어 있던 터라 잠이 쏟아졌다. 이불 위로 호랑이 털을 포근하게 덮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

효명성의 연회장은 대륙 내에서 황궁 연회장에 비견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높은 천장을 받치는 굵직한 기둥들은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으며, 성주의 집안을 상징하는 붉은색 천이 화려하게 실내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효명성의 연회장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등불이었다.

곳곳에 매달린 정교한 금속 장식물 안의 등불이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며 화려함을 더하고 있었다. 금속계 능력자였던 윤의 고조부가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이능력을 금속 세공에 쏟아부은 것이었다.

좌우로는 길게 연회석이, 중앙에는 무희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넓은 무대가, 그리고 우측 연회석 뒤쪽으로는 악공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아울러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효명성주를 위한 자리였다.

투옥되었던 이환과 일부의 흑성부대원, 제1정예부대원들도 연회 시작 전 아슬아슬하게 풀려나 늦지 않게 모습을 드러냈다.

“성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성주가 당도했음을 고하는 목소리가 연회장 안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윤이 들어서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허나 그의 숙부는 아니었다. 성주의 자리 우측 아래, 최상석에 자리한 주한모는 윤이 제 앞에 와 선 후에야 몸을 일으켜 섰다.

“우리 조카님, 이리 차려입으니 빛이 나는구나. 야성적인 어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제가 무엇을 걸쳐도 숙부를 따라가진 못할 겁니다.”

주한모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조카를 꼭 끌어안아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예로부터 주씨 집안은 대대로 인물이 좋기로 유명했다. 신이 직접 손끝으로 빚어낸 듯한 완벽한 얼굴의 윤과 대륙 최고의 미색으로 손꼽히는 주한모가 마주 보고 섰으니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황홀하게 머무르는 것도 당연했다.

“오래간만에 북부에 오셨으니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숙부.”

성주가 올라가 채 좌정하기도 전에, 한모는 먼저 좌우로 옷을 펼쳐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 조카를 빤히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윤은 속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찬가지로 똑같은 미소를 머금고는 자리로 올라가 앉았다.

악공들의 연주와 무희들의 춤으로 시작된 연회는 끊이지 않는 술과 음식으로 모두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즈음이었다. 잔에 찰랑찰랑하게 술을 채운 주한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사를 장황하게 늘어놓더니만, 건배를 제안하고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끌어올렸다.

단숨에 한 잔을 비워내기 무섭게 그는 이곳에 온 속내를 드러냈다.

“윤아, 내 이리 술이 돌고 기분이 좋으니 청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꽃마차에 고이고이 모셔온 은증왕이 지금 옥에 갇혀 있다지? 그를 보고 싶구나.”

연회장에 일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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