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윤은 단 한 번도 숙부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생각의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진 것에 불과했으나, 마음 깊이 번지는 파문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평, 여기 오기 전에 계원 장군에게 들렀다 왔지?”
“예. 오늘 숯 굽는 당번들, 감방과 숯가마를 오가며 화로를 나른 자들, 간수들 전원, 그리고 옥사 주변을 감시하던 이들까지 전원 취조 중에 있습니다.”
“아직 별말이 없고?”
“단서가 나오는 대로 이리 사람을 보낸다 하였습니다.”
“물증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리 대담한 짓거리를 할 때는 그만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혹은 저질러 놓고 튀는 경우겠지요. 후자의 경우를 대비하여 성문 출금령을 내렸습니다.”
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담한 것으로 치면 숙부를 따를 자가 없을 터였다.
숙부가 거느린 호위무사들은 숙부가 고르고 고른 최정예 무사 집단이다. 그중 효명성 출신이 절반. 그들의 움직임이라면 들키지 않고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스쳤다.
“성주님.”
“응?”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는 중이야.”
윤은 말을 아꼈다. 지금껏 사평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번 건은 달랐다.
사평이 숙부를 어찌 생각하는지 뻔히 아는 바, 치우친 의견을 듣는 것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윤은 아직 숙부를 믿고 싶었다.
“성주님, 헌데 어찌 그 새벽에 옥사로 걸음하셨습니까?”
“포로가 신경 쓰여 그러했네.”
“아….”
뭔가 안다는 듯한 그 아, 가 윤의 귀에 굉장히 거슬렸다. 눈을 모로 세우고 사평을 바라보았건만, 돌아오는 것은 뻔뻔한 미소였다.
“괴연석 건을 빌미 삼아 준비해 둔 따뜻한 처소로 옮겨주시지 그리하셨습니까. 좋은 기회 하나를 놓치셨군요.”
“은증왕을 감옥에 가두자는 의견을 처음 낸 건 자네야.”
“투옥시킨 것을 이미 예부상서께 보였으니 그걸로 됐지요.”
“아니, 이대로가 나아.”
“은증왕과 손도 잡고 입도 맞추셨다지요. 그 이상으로 혹시… 제가 모르는 괴이한 취미라도 생기셨습니까?”
정말로 놀랍다는 듯이 사평이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물었다. 그것이 장난스레 저를 놀릴 때마다 나오는 표정임을 윤은 알고 있었다.
“설마… 도망 못 가게 감옥에 가두고 수갑을 채워 벽에 묶어둔 채로 취하시려는….”
“자네 미쳤는가!”
“은증왕이 참으로 독특한 미색이기는 하지요. 그동안 주군께서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시지 않은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이환에게 무슨 소릴 어찌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사실과는 달라. 그 얘긴 그만하지.”
“두봉이야 그렇다 치고, 장갑까지 은증왕께 주셨던데.”
저 망할 눈썰미. 윤은 속으로 뇌까리며 못 들은 척했으나, 사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가둬두실 것이라면 침소로 들이시어 포로 교환 전까지 마음껏 취하심이….”
“그런 게 아니라니까!”
버럭 발끈했던 윤은 이내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놀림을 받든 오해를 사든, 어쨌든 사평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은증왕과 관련하여… 포로 교환 말이야.”
“예.”
“막을 방도가 없겠는가. 아니면, 포로 교환 전에 염록왕 전하를 미리 빼온다든가. 어찌 생각하는가?”
“은증왕을 곁에 두고 싶다는 말씀이시지요?”
“응.”
사평은 알쏭달쏭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마음에 뒀냐니 아니라 하고, 몸을 취할 생각도 없는데 곁에는 두고 싶다니. 굳이 이를 정의하자면 우정? 허나 입 맞추는 친구는 세상에 없는 법이다.
윤이 제게 속을 터놓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심중이 더욱 궁금해졌다.
“왜 없겠습니까. 성주께서 포로 교환에 동행하시어 거길 쑥대밭으로 만드시고 염록왕 전하와 은증왕 둘 다를 빼오면 되는 일입니다.”
“이런 돌은 자를 보았나.”
“이능력이 아니라, 정예병을 동원하여 거사를 치른다 해도 누군가는 다치고 또 죽습니다. 병력의 동원이란 시간이 소요되고, 많은 인원이 필요하며, 기동성이 떨어지고, 이쪽의 뜻을 숨길 수가 없지요. 무엇보다….”
사평이 살짝 뜸을 들이고 윤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적국의 황자 하나를 사사로이 취하기 위해 우리 귀한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윤은 손을 들어 사평의 말을 끊었다. 재고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적에게 이능력을 쓰시면 간단히 끝날 일임을 아시잖습니까. 물론 오염도가 치솟고 지인이 시급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정인을 곁에 두는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셔야지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미 성주님께서 벽제성 전투에 나서셨을 때, 암묵적인 금기는 깨졌습니다. 희로국에서는 이제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든 이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우리를 맞을 것입니다. 포로 교환 장소에 이능력자들을 끌고 나올 테고요.”
윤이 우려하던 일 중 하나였다. 전투에 이능력이 동원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개싸움이라고, 입이 거친 흑성부대장이 그리 떠들던 것이 생생하게 귓가에 울렸다.
“원하는 이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우선 그 손을 비워야 하는 법입니다. 성주님께서는 신념을 포기하십시오.”
“제일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군.”
말은 그리하면서도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반응에 사평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런 발상에 화를 내지 않으시다니요! 제가 아는 성주님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사이 대체 은증왕과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역시 입만 맞추신 것이 아니군요?”
“뭐… 뭐가 어째?”
“천홍은 했다, 이환은 안 했다. 이리로 오시는 동안 마차에서 그걸 놓고 얘기가 퍼져 심지어 수십 명이 참여한 내기가 벌어진 것은 아십니까?”
“전부 잡아들여.”
“예?”
“성주를 모욕하고 능멸한 자들이니, 전부 잡아들여 옥에 가둬라. 마침 은증왕이 든 옥사 한 층을 다 비워두었으니 잘 되었구나.”
윤의 극단적인 지시에 사평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평소의 윤이라면 허허 웃고 지나갈 정도의 일인데.
“당장!”
*
멀쩡한 건원국 병사들이 끌려와 서넛씩 한 방에 투옥되었다.
무흔은 조속히 전달된 해독환을 먹은 후, 이환이 한가득 들고 온 식사를 막 마친 상태였다.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차를 음미하던 무흔은 난데없는 소란에 복도 쪽을 내다보았다.
“종사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 저들은 정예 1군단 소속인데… 아니, 흑성부대원들도….”
“벽제성에서 효명성으로 오는 동안 우리와 동행하였던 이들이 아닌가?”
이환은 얼른 일어나 감옥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이들 중 제일 요란한 청년 하나가 무흔의 감방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환 형님! 이제 우린 어떡합니까!”
천홍이었다. 심지어 그 뒤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나령까지도 함께였다.
“무슨 일이냐?”
“주군께서 그 내기에 대해 아셨어요. 대노하셔서는 내기에 참여한 자를 다 처넣으라 하셨답니다.”
“이상하다. 이런 정도로 절대 역정을 내시는 분이 아닌데. 내가 가서 싹싹 빌고 잘 말씀드리도록 하마. 간수! 나 이제 나갈 것이니 와서 문을 잠그시게.”
간수 대신 이환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사평이었다.
“사평 형님. 하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제가 주군께 가서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환이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끼이익 소리를 내는 철문을 사평은 그대로 쭉 밀어 버렸다. 이환은 영문도 모르고 감방 안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형님?”
철컥.
사평이 잠금쇠에 열쇠를 넣어 그대로 돌렸다. 이환과 무흔, 둘 다 놀라서는 입까지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안에 계시게. 반성의 기미를 보이면 성주님께서 어련히 풀어주시겠지.”
“형님! 사평 형님! 장사(長使) 나으리!”
이환은 평소 부르지도 않는 직함에 호칭에, 다 동원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옥사를 나서는 사평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천홍이 이야기하는 그 내기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주 국공이 화가 났는가?”
무흔의 질문이 툭 떨어졌다.
이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가 어색하게, 아주 뻣뻣하게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새로 깔아둔 보료에 우아하게 앉은 무흔은 윤의 호랑이 모피를 어깨와 등에 폭신하게 얹은 채였다. 그야말로 황자다운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고, 그는 이환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 그것이… 저희가 무엄하게도 주군의 명예를 더럽힌지라… 하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예와 관련된 내기라?”
하필, 복도 맞은편에 갇힌 이가 천홍이라. 입이 한없이 가벼운 그가 철창살에 착 달라붙어서는 무흔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은증왕께서 답을 주십시오! 이리 갇힌 것도 억울한데, 누가 이겼는지는 알고 싶어요!”
“내가 아는 일?”
“예, 저희가 내기를 했거든요. 마차에서 주군과 은증….”
이환이 무흔 뒤에서 요란하게 손짓 발짓을 해댔다. 다행스럽게도 그 신호를 알아챈 나령이 잽싸게 천홍의 입을 틀어막아 감방 안쪽 구석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흠… 마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내기려나?”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이환이 무흔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다. 유일하게 같은 방에 갇혔으니, 사실이 드러나면 난처한 입장에 처할 이는 오로지 이환뿐이었다.
대충 눈치를 챈 무흔은 푹 한숨부터 쉬었다.
“하아… 더 캐묻지 않겠네. 헌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무흔은 철창 앞으로 다가가 복도 맞은편 감방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보았다.
“건원에서는 투옥 때 무기 소지를 허락하는 것인가? 소설에서 읽기로는 도검류를 빼놓고 죄인들을 들여보내던데. 희로국의 법전에도 그리 적혀 있고.”
이환은 뒤늦게 이를 알아차렸다. 자신을 비롯하여 정예부대 전원이 다 검을 허리에 찬 상태였다. 간수들이 깜빡했다 쳐도 옥에까지 왔던 사평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러네요. 이상합니다. 간수! 이리 좀 와 보게.”
간수 대신, 효명성의 수비대장이 이환 앞에 와 섰다.
“아니, 대장께서 어찌 여기….”
“간수들은 죄다 계원 장군께 불려가 심문을 받고 있네. 주군께서 오늘 하루는 내게 이곳을 맡기셨어. 유사시에 바로 그대들을 동원하라는 명이 있으셨네.”
수비대장이 이환에게 열쇠 꾸러미를 내보이고서는 씩 웃었다.
“물론, 벌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으시다 하니… 그 정도는 달게 받아야지?”
그가 이환 뒤에 선 무흔에게 살짝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불편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괜찮소.”
“날이 밝는 대로 조반을 올리라 주군께서 명하셨습니다. 혹 드시고 싶은 것이 있는지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배불리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가벼운 다과면 충분하네.”
“주방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아, 주군께서 이환 자네에게 명을 남기셨네. 감방에 쥐가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이라고.”
“쥐요? 예… 그리하지요.”
수비대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이환은 무흔을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저도 이제 내기 결과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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