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윤의 숙부이자 건원국의 예부상서 주한모. 그가 효명성에 도착했다.
성문을 들어서는 10여 대의 커다란 수레에는 술 단지와 과일이 그득했다. 날씨가 변덕스럽던 올해, 고기보다도 값나간다는 과일을 보란 듯이 쌓아 가져온 자가 말에서 막 내렸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주한모의 적색 말은 황제의 준마에 버금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말의 주인은 옥황상제도 초라해 보일 정도의 화려한 비단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듣던 대로 훌륭한 말이군요.”
윤의 오른팔, 사평이 웃으며 다가가 주한모를 맞이했다.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사평, 그간 잘 지냈는가.”
“먼 길 오시느라 힘들지 아니하셨습니까?”
“힘은 무슨. 명마의 덕을 톡톡히 보았지.”
“들어가시지요. 어찌 이리 갑자기 오셨습니까.”
“갑자기는 무슨. 내가 나의 고향집에 방문하는 것이 격의를 차려야 하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입니다. 회군 후 연회의 풍습을 기억해주시고 이리 좋은 음식을 준비하여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평, 우리 사이에 이리 예의를 차릴 것은 또 무언가. 응?”
우리 사이, 좋을 리 없는 사이였다. 그 말에 사평은 허허 웃으며 겉으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장사(長史)의 관직을 맡아 효명성의 일을 총괄하고 있으나, 사평은 북부 변두리의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다.
윤의 부친, 전 효명성주가 자신의 영민한 어린 아우 주한모를 위해 신동으로 이름난 동년배의 꼬마를 공부 도우미로 들였고, 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어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두가 주한모의 깍듯한 성품과 눈부신 외모를 찬양할 때, 사평만큼은 오만하고 표리부동하며 권력지향적인 그의 본성을 알고 있었다. 타고난 두뇌와 탁월한 처세술 덕에 사평은 주한모의 실체를 겪고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주한모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뻔뻔하게도 한껏 지어 보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며 그를 힐끗거리던 이들이 전부 넋을 놓고 그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쓰시던 방을 깨끗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시지요.”
“윤이는 도착하였는가?”
“예, 오늘 오후에 도착하셔서 밀린 일 처리부터 하시고, 이제야 간신히 씻고 편히 환복을 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와서 반겨주려 열심히 말을 달렸거늘, 아깝네… 고작 몇 시진 차이라.”
사평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주한모의 핑계가 그답지 않게 조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숨기고는 있으나, 뭔가 조급한 것이 분명했다.
“윤이는 그럼 지금 무얼 하기에 이리 숙부가 왔는데 얼굴도 내비치지 아니하는가?”
“벽제성에서 귀한 포로를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의 상태를 살피러 옥사에 가셨습니다.”
일부러 사평은 은증왕의 이야기를 넌지시 흘렸다. 정말로 은증왕을 보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이라면 낚일지도 모를 일이니.
“아니, 옥에 가두었다?”
“성주께선 워낙 원칙을 중시하는 분이시라. 포로이니 응당 법대로 하신 것이지요.”
“윤이는 그런 면까지 형님을 꼭 닮았어. 굳이 법을 따지자면, 녀석의 직권으로 적당한 곳에 머물게 할 수도 있는 것을.”
“웬만해서는 예외를 두지 않으시니까요.”
“허허, 그 녀석답군.”
갈림길이 나왔다. 서쪽에는 옥사가, 동쪽에는 주한모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시절을 보냈던 옛 처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평은 주한모의 걸음이 어느 쪽으로 향할 것인가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 벽제성에서 윤이의 활약이 중경에서는 아주 난리도 아니라네. 내 어찌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지,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주한모는 자연스레 몸을 동쪽으로 틀었다. 옥사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서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사평은 그것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모두가 관심을 두는 은증왕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주한모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자는 어떻던가? 정말 저주가 들러붙은 상인가?”
“확실히 독특하긴 하였습니다. 길고 흰 머리카락이 노인의 그것과는 달리 탄력이 있으며 빛이 났고 눈의 색상은….”
그로부터 몇 마디 더 은증왕의 겉모습에 대한 평범한 설명과 질답을 나눴으나, 사평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감옥의 경비 인원을 배로 늘렸다. 주한모가 데려온 호위무사 몇이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와는 다른 의미로 불안함을 느낀 것은 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옥사에 홀로 있을 무흔이 염려되었다. 웅크린 채로 귀를 틀어막고 있던 아까의 모습이 뇌리에 틀어박혔다.
그리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던 윤은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
무흔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찍찍거리는 쥐의 울음은 여전했고, 이제는 벌레에 대한 공포까지 일었다. 정체 모를 벌레를 하나 발견한 이후, 그것이 몸을 기어 다닐 것만 같은 상상이 드는지라 도저히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희미하게 들리는 귀곡성이었다. 윤은 귀신이 지하에만 나온다고 했지만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귀신은 형체도 없는데, 이리로 올라올지도 모르잖아.”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뱉고, 좌우에 놓인 화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왼쪽의 화로는 이미 불이 꺼졌다. 오른쪽 숯불에 빨갛게 열이 오른 것을 바라보고, 타닥타닥하는 그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아… 내가 누굴 원망하겠어.”
붉게 타오르는 숯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주 국공이 떠올랐다. 전장의 음침한 검은 갑옷과는 달리 금실로 화려하게 수가 놓인 붉은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등 뒤로 길게 풀어 내렸던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 저와는 달리 어찌 그리 깊고 어두운 색인지. 화가 날 정도로 부러웠다. 멱살을 잡았을 때, 덜 말라 촉촉한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윤이 두고 간 찬합과 물통이 눈에 들어왔다. 배가 고파도 손을 대지 못한 것은, 괜히 뚜껑을 열어 냄새라도 풍겼다가 쥐가 나타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배고파….”
저도 모르게 옆으로 쓰러져 누웠던 무흔은 제풀에 놀라 냉큼 몸을 일으켜 앉았다. 품을 뒤져 분홍빛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배가 고플 때마다 한 알 한 알 까먹었던 사탕도 이제 하나 남았다. 찬합으로 다시 눈이 갔다.
찍찍.
쥐 울음소리에 무흔은 몸을 흠칫 떨었다.
“주 국공, 망할 새끼. 뒈져.”
욕지거리를 뇌까려도 속이 풀리질 않았다. 마지막 사탕을 먹을까 말까 고민했다. 눈을 감고 입안 가득 머금어지는 달콤함에 집중하고 있으면, 이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상상을 하기가 한결 수월했으니.
저벅저벅.
복도 저편에서부터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간수들이 불이 꺼진 화로를 갈아주러 오는 것인가 하는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들었는데… 내 욕을 하는 중이었군.”
창살 너머에 와서 선 자는 윤이었다. 그가 온 것이 반갑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지금의 제 처지가 지독하게도 끔찍한 모양이었다.
“귀도 밝으셔라.”
“피곤할 텐데 눈을 좀 붙이지 왜. 뜨끈하게 화로도 두 개나 가져다 두었는데.”
“그리 좋아 보이면 주 국공이 들어와 눕지 그래?”
꼬르르륵.
말을 매섭게 받아치기 무섭게 무흔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것도 길게.
윤이 바닥에 놓인 찬합을 힐끗 바라보았다.
“식사가 부족했나? 일부러 간식거리까지 충분히 싸라 일러두었는데….”
“주 국공, 혹시 검을 가지고 왔으면 잠깐 안에 들렀다 가지?”
“검이라 할 것은 없고, 은장도뿐이야.”
“그거면 충분해. 벽에 무시무시한 것도 많이 걸렸으니, 뭐 그걸 써도 되겠지. 일단 좀 들어와 주겠는가.”
무흔은 팔을 들어 요란하게 두 손을 펄럭여댔다. 간절함이 듬뿍 배인 몸짓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안으로 들어섰다. 한쪽 화로의 불이 식은 것을 보고, 간수를 불렀다.
“화로의 불을 갈아오너라.”
“예, 주군.”
간수가 식은 화로를 들고 나가자마자, 무흔은 얼른 찬합 뚜껑을 열었다. 차게 식기는 했으나 극한의 배고픔에 시달리는 그에겐 전혀 문제될 바 아니었다.
젓가락을 들어 맨 위의 노릇하게 지져진 육전부터 입에 넣었다. 고소함과 풍부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찼다. 무흔의 얼굴에 대번에 행복함이 번졌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윤이 5단짜리 찬합을 하나하나 펼쳐 내려놓았다. 무흔이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 안 먹고 대체 뭘 했어. 이걸 먹는데 난 왜 들어오라고 한 거야?”
무흔은 이어 작고 동그란 찹쌀떡을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잠깐 기다리라고 눈으로 열심히 말해보았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윤은 가만히 기다렸다.
무흔은 물 대신 과일 한 점을 얼른 씹어 삼키고 한참 만에 답을 건네주었다.
“음식 냄새를 맡고 쥐가 달려들 것 같아서 말이지. 무서워. 난 이제 마음 놓고 식사를 좀 할 터이니, 주 국공은 쥐가 나타나거든 그걸 처리해주시면 고맙겠어.”
“쥐? 허, 그래서 지금껏 굶었다?”
무흔은 식사에 열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가 버리면 다시 찬합의 뚜껑을 닫아 두어야 하니 그가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이 먹어 둘 생각이었다. 물을 챙겨 마실 여유 따위 없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음식들과 무흔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벽에 걸린 고문 기구 중 무쇠로 된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무흔은 만두를 입에 넣고 볼이 빵빵해진 채 놀란 눈으로 윤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인두. 본래는 불에 달구어 빨랫감을 곱게 다리기 위한 물건이나, 감옥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몸을 지져 고문하는 용도의 기구였다.
“이거면 되겠지.”
중얼거린 윤이 화로 앞으로 다가섰다. 하필 한 입 크게 베어 물은 만두가 목에 걸린 지라, 무흔은 심하게 콜록대었다.
‘무얼 하려고? 설마, 지금 저자가 인두로 나를 지지려 하는 것인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무흔을 보며 윤은 제 손에 쥔 것에 가볍게 이능력을 불어넣었다. 마치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 시커먼 무쇠 인두를 간단히 두 동강 내더니만, 그것을 변형시켜 끝이 뾰족하며 길쭉하고 가느다란 쇠꼬챙이 두 개를 새로 만들어냈다.
“켁켁, 컥, 흐… 으… 물 좀….”
윤이 수통을 건넸다. 무흔은 우선 물부터 한 모금 삼키고, 영문도 모른 채 그가 내미는 쇠꼬챙이 하나를 받아들었다.
“이건 왜 주는데. 나보고 쥐를 직접 찔러 잡으라고?”
식사를 방해받은 무흔의 표정에 불편한 심기가 역력히 드러났다. 반대로 윤의 입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이상야릇하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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