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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19화 (19/85)

#019화

설하는 재랑과 강문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얘들아, 그만 가자.”

“어딜? 난 나령 형님이랑 더 있고 싶은데.”

“안 돼! 얼른 따라와. 나령, 이만 안녕. 저녁에 봐. 유모가 그러는데 맛있는 음식을 가득 해놨대.”

설하를 필두로 하여 아이들이 향한 곳은 효명성의 감옥이었다. 오며 가며 가끔 지나치기는 했으나, 들어가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

“설하야, 아무래도 좀 무서워.”

“우릴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거야.”

“누가 들어간대?”

설하는 저보다 어린 재랑의 손을 꼭 붙든 채로 감옥 외벽을 따라 조심스레 걸었다.

“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작은 창이 나 있잖아.”

설하가 가리키는 곳은 외벽의 하단부였다.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으면 딱 들여다볼 수 있을 만한 자리에 손바닥 두 개를 펼친 크기만 한 작은 창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었다.

“저 중에 은증왕이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아?”

“하나씩 들여다보자.”

“그러다 흉악범이랑 눈이 마주치면 어떡해?”

“으… 그래도 너무 궁금해.”

결국 아이들은 조심조심 쇠창살 너머로 감방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잔뜩 긴장하여 시도했던 첫 번째 방은 비어 있었다.

“휴….”

두 번째 감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까지도 그러하자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감옥에 아무도 없지?”

“효명성은 평화로우니까. 죄인들이 없는 거 아닐까?”

“근데, 한 층 더 내려가면 완전 무시무시한 감방이 있다고 했어.”

“맞아! 거긴 귀신도 나온대.”

은증왕의 투옥을 위해 죄수 전체가 지하로 옮겨졌음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아이들이 종알거리는 소리가 감옥 천장 바로 아래에 나 있는 창을 통해 흘러들었다. 시커먼 두봉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던 무흔은 일어나 창 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보고 그만 돌아가자아아악!”

창문을 들여다보던 설하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창살을 움켜쥔 채로 창에 딱 달라붙어 그녀를 바라보는 허연 형체 때문이었다.

“사람이냐! 귀신이냐!”

강문이 희멀건 존재를 보고 흠칫하여 뒷걸음치며 외쳤다. 놀란 재랑이 설하를 얼른 일으켜주며 그녀 뒤에 숨었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동그랗게 놀란 자색 눈동자가 창살 너머로 향했다.

“아… 이분이 은증왕이신가 봐. 방금 귀신이냐고 물어서 죄송해요.”

설하가 냉큼 창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사과를 건넨 강문이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았고 재랑은 여전히 설하 뒤에 숨은 채였다.

“우와.”

“우와.”

“우와.”

셋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들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도 머리카락도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탄성에 오히려 놀란 쪽은 무흔이었다.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하나. 똘망똘망한 눈망울 여섯이 경탄을 담아 저를 보고 있었다. 편견 따위 없는, 맑고 고운 눈빛이었다.

한참이나 넋이 나갔던 셋 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설하가 나섰다.

“은증왕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공설하라 합니다. 효명성주의 외사촌 누이죠.”

설하가 여전히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은증왕의 눈을 폭 빠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작고 귀여운 입술에서는 한 번 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저는 강문이라 하옵니다. 우와… 은증왕님은 선계에서 오신 분 같다. 그치? 재랑, 그러구 있지 말고 앞으로 와.”

강문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를 자신과 설하 사이로 끌어들였다. 머뭇거리던 막내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정말 눈처럼 하얗다! 하얀 꽃 같아요. 여기, 이렇게….”

재랑이 잡초에 손을 갖다 대었다. 풀이 점점 자라 가느다란 덩굴이 되어서는 쇠창살을 칭칭 휘감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이능력에 놀란 무흔은 얼른 창살에서 손을 떼었다.

하얀 꽃이 하나둘씩 봉오리를 맺고 피어나 고운 꽃잎을 드러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환상일까?’

무흔은 장갑을 벗고 홀린 듯이 꽃잎으로 손을 뻗었다.

“아… 진짜 꽃이로구나.”

손끝에 닿는 야들야들하고 뽀얀 꽃잎의 감촉이 참으로 보드라웠다. 그것이 짜증으로 날뛰던 제 속을 다독여주는 듯했다.

무흔은 다른 한 손으로 심장 언저리를 꾹 눌렀다. 마음이 말랑하게 녹아 버렸다.

“평생에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본 것은 처음이야. 참으로 고맙구나.”

무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와!”

“우와!”

“우와!”

아이들의 탄성에 무흔은 깜짝 놀랐다. 순수한 그 감탄이 자신의 해사한 미소에서 비롯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꼭 쥔 설하가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열변을 토했다.

“눈동자가 어쩌면 그리 예쁠 수 있죠? 저희 어머니께서 아끼시는 자수정 귀걸이보다도 더 반짝거리고 색이 고와요! 저도 그런 눈을 갖고 싶어요.”

그때였다.

“거기 웬 놈들이냐!”

“헉, 들켰다!”

감시병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이들이 흠칫 놀라 시선을 교환했다. 다급히 무흔에게 속삭였다.

“저희가 여기 온 거 절대 말씀하시면 안 돼요!”

“다음에 또 와도 되나요?”

마음이 조급해진 아이들은 당장에라도 일어나 뛸 듯 움찔거리며 은증왕의 답을 기다렸다.

“말하지 않을 터이니, 언제든지 오거라.”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경비병의 소리가 나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적막이 다시 고인 후에야 무흔은 깨달았다. 저를 이렇게 반기는 이들은 처음이었다. 무흔은 눈앞의 작은 꽃송이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

윤이 무흔을 찾아온 것은 석양이 막 지고 난 후였다.

감옥은 어둠침침하고 습했으며 희미한 악취가 곳곳에서 풍겨났다. 정체 모를 벌레들은 물론이요, 찍찍거리는 쥐의 울음에 무흔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흔은 양 무릎을 세워 그 위에 머리를 푹 수그리고서는 귀를 양손으로 꼭 막고 있었다. 창살 너머로 인기척이 일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주 국공, 이 망할 놈.”

욕부터 튀어나왔다. 무흔을 위해 특별히 바닥에 푹신한 보료를 깔아 두었으며 비단 이불과 보드라운 털가죽 또한 구비해 두었으나,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것은 무흔에게 아무 의미 없었다.

“감히 이런 곳에 나를 처박아?”

“많이 힘드시오?”

“그쪽도 한 번 들어와 앉아 있어 보든가!”

감옥 창살에는 초록 잎사귀와 하얀 꽃송이가 탐스럽게 감겨 있었다. 이능력자 아이들이 다녀간 흔적이 윤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을 만나셨나 보군.”

“사촌이라는 아이가 그대와는 딴판이야.”

“혹 바닥이 너무 차지는 않고?”

“허, 어디 바닥만 차겠는가.”

“식사를 가져왔으니 좀 드시오.”

창살 너머에 서 있던 윤이 강철로 된 옥의 자물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끄트머리가 닿기도 전에 철컥, 하는 소리가 울렸다. 끼이이익 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윤이 굳이 이능력을 써 가며 감옥 안에 들어섰다. 무흔은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찬합을 보고서는 고개를 틀어버렸다.

“내가 지금 음식이 넘어갈 것 같나?”

“그래도 좀 들지.”

윤이 찬합 뚜껑을 열어 내밀었지만 무흔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뻗지 않았다.

“감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알고는 있나? 바람 소리 같기도 한데 좀 다르고, 스산해.”

“아, 귀신.”

윤의 대답이 대번에 튀어나왔다. 무흔은 옆에 놓여 있던 털가죽을 가져다 얼른 등과 어깨에 둘렀다. 으스스한 기운이 몸을 싸고 돌았다.

“여기… 귀… 귀신이 있어?”

“이 층에는 없으니 안심해.”

“아니, 그럼, 이… 있긴 있단 말이야?”

“아래층에. 거기도 4실에만 귀신이 출몰하니 여긴 안전하지.”

무흔은 이불까지 끌어다 덮고 몸을 웅크렸다.

“식욕이 없으니 도로 가져가.”

“배가 고프면 더 춥게 느껴질 거요. 밤이 깊어갈수록 한기가 몸으로 파고들 텐데.”

“불이나 더 피워 주든가.”

“화로를 들여주지. 먹을 것은 여기 두고 갈 테니, 시장할 때 들어.”

무흔은 윤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전장에서 올리고 있던 머리를 지금은 등 뒤로 길게 풀어 내렸고, 금실로 수가 놓인 붉은 겉옷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 처지와 비교되는지라, 금관까지 얹은 지나치게 잘난 그 꼴이 유독 보기 싫었다.

“집에 오더니 신수가 훤하시네. 주한모는 아직 안 왔는가.”

“정찰대 말로는 곧 도착할 거라 하더군.”

“그가 이리로 와 나를 보겠다 할 수도 있나?”

“염려 마시오. 그 정도야 내 선에서 막아줄 수 있으니.”

그 대답에 무흔은 빈속이 다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가증스럽게. 무흔은 후려칠 기세로 윤을 노려보았다.

“염려는 내가 아니라 주 국공의 몫이지. 아니 그러한가?”

정보의 독점, 즉 무흔의 함구를 바라는 쪽은 윤이었다. 그의 숙부가 무흔과 대면하게 되면 무흔의 입에서 무슨 말이 어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대 말이 맞아. 은증왕께서 나 대신 숙부께 의탁하여 중경으로 가 버리려는 것은 아닐지… 나는 심지어 그런 걱정까지도 하고 있어.”

윤의 대답은 지나칠 정도로 솔직했다. 무흔은 이것저것 재지 않는 그 마음만큼은 곱게 봐 주었으나, 아직 화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코웃음부터 튀어나왔다.

“예부상서가 등에 진 권력이 효명성주, 국공 주윤의 힘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었나?”

“대 봐야 알겠지.”

“갈아탈 길이 있다면, 그자를 독대하여 어느 쪽이 나은지 비교해보고 싶군.”

“그리하지 마시오.”

“자신 없는가?”

“내 숙부께선 그대를 우리 황제께 노리개로 바치거나, 혹은 상품으로 삼으려 할지도 몰라.”

“뭐라?”

“그대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니 새겨들어. 숙부께서는 그대의 옷을 벗겨 새장에 가둬두고 돈을 받아 구경거리를 삼으실 것이며, 한 번 만질 때마다 추가금을, 또 교합에는 그 몇 배의 화대를 받아낼 것이야.”

“허, 망상이 구체적이네.”

“난 그렇게까지 창의적이지는 못해. 3년 전, 남부의 정묘국을 정복하였을 때… 바다 건너 이국 출신인 정묘국 왕비를 숙부께서 노예로 삼고 그리하셨었지.”

내내 부루퉁하게 입이 나와 있던 무흔은 충격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거대한 새장에 갇힌 채 벌거벗은 제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지는 통에, 입을 틀어막고 눈조차 깜빡거리지 못했다.

“숙부께서는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혈육이나, 타인에겐 그리 즐거운 이가 되지 못해. 나도 그건 인정하는 바요. 숙부와의 만남은 딱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도록 약조하리다.”

“빨리 꺼내주기나 해. 고작 몇 시진 있었을 뿐인데… 하아….”

“무료한가?”

무흔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고문 기구 몇 가지와 수갑, 족갑이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곰팡이가, 바닥에서는 냉기와 귀곡성이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눈의 착각인지 기분 탓인지, 벽에 걸린 것들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허, 무료? 유폐된 황자에겐 무료가 일상이야. 여긴 감옥이라고! 설명이 더 필요해?”

무흔이 윤의 멱살을 붙든 순간, 바깥에서 이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군, 예부상서 일행이 성문 앞에 도착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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