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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18화 (18/85)

#018화

무흔은 방금 들은 말을, 제 귀를 의심했다.

17년간 지하 석전에서, 또 4년을 더 냉궁에서 갇혀 산 것은 사실이나 진짜 감옥은 아니었다. 이야기책에서 읽은 감옥이라는 곳은 자신의 거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로 처소를 마련한다고 들은 것이 어제였는데, 난데없이 감옥이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숙부는 매우 바쁜 분이야. 보통 효명성에 오시면 길어야 사흘 밤을 보내고 중경으로 바로 돌아가시거든.”

“허, 나더러 사흘 밤, 그러니까 최소 나흘씩이나 감옥에서 보내라?”

무흔은 화를 참기 위해 눈을 꾹 감은 채 후, 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귀하게 각별히 여긴다는 둥 사람을 붕 띄우며 밑밥을 계속 깔아놓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괘씸했다. 눈썹 사이를 있는 대로 구기며 윤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의 숙부가 고문을 할지도 모르는데 입 꾹 다물고 정보는 주지 말아야 하며, 그를 속이기 위해 옥살이도 해야 하고, 게다가 그대에겐 지인까지 해 줘야 하지. 허, 이 무슨 도둑놈의 심보인가?”

“나도 그에 상응하는 은증왕의 청을 들어드리리다.”

무흔의 입술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울분을 담아 윤을 노려보았으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포로’라는 자신의 위치만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일전에 내가 거래를 요청하였을 때, 저자는 조건이 기운다 하였다. 나는 포로이고 주 국공은 승전의 주역이자 나를 구류하고 있는 책임자야.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기울겠지. 내 그것을 모르겠는가.’

무흔은 고개를 돌려 윤을 외면했다. 윤이 손을 뻗었으나 무흔은 제 어깨에 닿는 손을 거칠게 쳐냈다.

“어쨌든 주 국공 뜻대로 할 거면서 내 바람 따위는 왜 묻는데?”

“원하는 바를 말해주시오.”

“이미 이야기했어. 조건이 기운다며 기각당했지.”

“아… 포로 교환의 무산에 대해서라면, 타개책을 찾아보겠다 하였잖나. 그것은 기다려주시오.”

무흔은 고개를 홱 돌려 윤을 찢어발길 듯 노려보았다. 상대는 태평하고 뻔뻔하며 그것이 지독하게 불쾌했다.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간신히 말을 뱉었다.

“주 국공은 감옥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없어.”

“갇혀본 적은?”

“……없지.”

윤의 입에서 난처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한숨이 스며나왔다. 그것이 무흔의 신경을 긁었다.

“불편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쓸 테니, 그리 힘들지 않을 거요.”

무흔의 흥분한 어조와는 달리 윤의 목소리는 줄곧 차분했다. 성질이 오른 무흔에게 그것은 지독히도 불쾌한 일이었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만 같아서.

“평생을 갇혀 산 자가 고작 사나흘 더 갇혀 지내는 게 뭐 대수겠나, 그리 생각해?”

“은증왕.”

“당신 마음대로 해. 나는 포로이니. 의사를 묻는 척하지 마. 이미 처음부터 그리 마음 먹고 내게 얘길 꺼낸 거잖아?”

이제야 알았다. 어제 전령이 온 후 윤이 왜 저를 피했는지, 오늘 아침에 봤던 이환이 저를 보며 왜 그리 어색하게 웃었는지, 그리고 마차에 오른 이후로 내내 왜 그리 저를 어르고 달래는 말투로 아부를 떨었는지.

투옥은 이미 결정된 게 분명했다.

무흔은 손끝에 닿는 것을 한꺼번에 움켜쥐어 윤에게로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옆에 소중히 곱게 모아 놓아두었던 은자 셋, 작은 금덩어리 하나로 만들어진 조각들이었다.

“부탁을 한다느니 청이 있다느니, 허울 좋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나가!”

윤의 뺨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 그가 은자로 지나치게 세밀하게 만들어 놓은 관우의 손에 들린 청룡언월도가 날카로웠던 탓이었다.

무흔은 윤의 얼굴에 맺히는 핏방울을 보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무어라 대꾸 하나 없이 저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덜커덩. 덜걱.

마차가 멈추었다.

“주군! 도착하였습니다.”

바깥에서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무흔의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도착했으니, 이제 감옥으로 갈 차례였다.

“나가.”

무흔은 얼른 이를 악물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목이 메는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로 달갑지 않은 신호였다.

“당장 나가. 그쪽 숙부 앞에서 함구하고, 감옥에 얌전히 있어줄 테니까.”

무흔은 빠르게 말을 쏟아놓고는 윤에게서 몸을 틀어 앉았다.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주한모의 눈을 가리는 방법이 과연 감옥뿐인 걸까. 묘안을 짜내기 귀찮고 어려우니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렇다 한들, 치유자임을 숨겨 달라 한 건 내 쪽이니까 감옥에 들어가지 않겠다 무작정 버틸 수도 없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무흔의 무릎 위로 검은 것이 떨어져 내렸다. 윤이 마차 구석에 놓여 있던 장갑을 챙겨준 것이었다.

“새로 만들어 줄 터이니, 당장은 불편해도 버텨.”

윤이 가볍게 묵례를 건네고선 마차를 나섰다. 그 버티라는 말이 마치 옥에서 견디라는 뜻처럼 들리는 통에 아까보다도 더 서러워졌다.

홀로 남은 무흔은 장갑을 가만 노려보다 손을 넣었다. 이전에 맛봤던 그 따스함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린 것이 손인지 마음인지.

바닥에 널브러진 황금 강아지가 더는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

효명성의 아침이 분주했다. 며칠 전 성주의 매가 가져다준 소식에 모두가 병사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 살 남짓한 이능력자 아이들 셋이 숨을 몰아쉬며 성벽으로 달렸다. 누구보다 먼저 효명군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은 망루에 올랐다. 수비병들에게 한껏 귀여운 표정을 지어가며 높은 망루의 거대한 난간에 들러붙었다.

“희로국의 황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머리가 하얗다고 했으니까 도학 의원님과 비슷할 거야. 얼굴도 하얗다고 했으니까 피부는 쭈글쭈글하지 않고 설하 같겠지?”

남자아이 둘은 그들의 대장 격인 설하를 바라보았다. 담비 털로 된 조끼를 입고 머리에 홍옥으로 된 장신구까지 꽂은 여자아이는 웃으며 또랑또랑하게 답했다.

“유모가 그러는데, 나보다 더 흰 피부일 거래. 눈썹과 속눈썹까지도 하얗다고 했어.”

“우와. 근데 눈동자는 정말 피 색일까? 혈왕이라고 하잖아.”

“혈왕이라고 부르면 안 돼. 은증왕이라고 불러야지.”

“왜 안 되는데?”

“유모가 그러는데, 그건 나쁜 별명 같은 거라서 본인이 들으면 속상하댔어. 아, 유모가 어제 은증왕의 처소를 보고 왔대.”

“어디래?”

“서가 옆에 있는 빈 전각. 청소도 하고 침상도 큰 걸로 들이니까 제법 지낼 만해 보이더래.”

“포로라고 해도 왕인데? 거긴 설하 네 방보다 더 작잖아.”

“근데 포로는 원래 감옥에 가는 거 아니야?”

“저기! 온다!”

아이들은 효명군이 성문에 가까이 이르자 쏜살같이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

작은 가마 하나가 무흔의 마차 앞에 당도했다. 사면이 막힌 형태의 가마였다.

무흔은 두봉을 더 깊이 당겨 얼굴을 가리고 옷깃을 더 단단히 여몄다. 죽을 날을 맞이한 이나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가마에 올라 감옥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환의 표정이 썩 편치 못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가마가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저 멀리서부터 그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환! 이환! 이화아아안!”

그 열렬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이환이 환히 웃었다.

“설하 아가씨, 무탈히 잘 지내셨습니까.”

“응! 보고 싶었어.”

설하가 덥석 그를 끌어안았다. 주군의 사촌인 귀한 아가씨를 뿌리칠 수도 쓰다듬어줄 수도 없어 난감해하며, 이환은 두 손을 등 뒤로 하여 뒷짐을 지었다.

“재랑과 강문은 어디에 두고 이리 홀로 계십니까?”

“걔네들은 나령한테 갔어.”

“아.”

“분명 비비적거리고 있겠지.”

이환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어린 이능력자들은 유난히 나령을 졸졸 따랐다. 치유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거니와, 18세의 나령이 그나마 가장 그들과 나이가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다.

“희로국 황자가 왔다면서? 어딨어? 벌써 처소로 갔어?”

“감옥으로 갔습니다.”

“감옥? 어째서? 월영이 서신을 달고 날아왔을 때는 은증왕의 처소를 잘 마련하라고 적혀 있었다던데?”

“그것이… 하하….”

“나는 못 만나 보는 거야?”

이환은 난처하게 웃었다. 원칙을 중시하기로 유명한 주군이 투옥된 포로를 만나게 해 줄 리 만무했다.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가씨께서 대면하실 수 있는지 주군께 여쭤보겠습니다.”

“음… 아니야! 내가 물어볼게.”

안 될 걸 알겠다는 듯, 설하는 애매하게 웃어 보이며 몸을 홱 돌려서는 벗들을 찾아 나섰다.

“나령! 나도! 나도!”

설하는 나령을 발견하고서는 열심히 달렸다. 재랑과 강문이 이미 나령의 손을 각각 하나씩 점령하고 가벼운 지인을 받는지라, 설하는 나령 앞에 서서 두 손을 위로 쭉 뻗었다.

“설하 아가씨, 무탈히 잘 계셨습니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넨 나령은 설하가 제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허리를 아래로 숙여주었다.

“왜 나만 보면 다들 무탈하냐 물어?”

손도 모자라 나령의 팔뚝까지 끌어안은 재랑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기는. 설하 네가 사고뭉치니까 그렇지. 또 서툴게 능력 쓰다가 불냈을까 봐 다들 걱정하는 거라구.”

“재랑, 아가씨께 그리 언사를 막 하면 아니 되지.”

나령은 엄한 눈빛을 하고는 설하의 손바닥에 눌린 양 볼 사이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막내 재랑이 설하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설하가 이리하라 했는걸요. 아가씨라고 부르고 존대를 하면 눈썹을 태워 버릴 거라고 했어요.”

설하는 냉큼 야무지게 재랑을 변호하고 나섰다.

“우리 셋은 신분을 따지지 않아. 우린 벗이니까 예는 갖추되 격의 없이 대해야 해!”

“주군께서 알게 되시면 혼쭐이 날 텐데요.”

“오라버니 앞에서만 조심하면 되지. 아, 나령, 은증왕은 봤어? 어때?”

“하얗습니다.”

“그게 다야?”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나령은 슬쩍 설하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주군께서 황제께 서신까지 써 가며 은증왕을 이리로 데려온 것은 사욕이 있음이 분명해. 입맞춤은 물론이고 마차에서 이상한 소리도 났었어. 비밀을 지켜드려야만 해.’

내막이 설하를 통해 그녀의 어머니에게로 들어간다면, 주군은 범 같은 이모로부터 분명 원치 않는 참견을 받게 될 것이었다.

“혹 주군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려나.”

“쳇, 다들 똑같은 소리만 해.”

나령 또한 이환과 마찬가지로 성주의 허락을 운운했다. 영민한 설하는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단박에 내렸다. 게다가 불을 다루는 이능력자답게 급한 성정인지라, 궁금증은 바로바로 풀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순간, 반짝이는 생각이 하나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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