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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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은 윤의 책사이자 효명성의 행정을 맡은 사평이 보낸 것이었다. 매사 침착하고 여유로운 그가 이리 급하게 전령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다는 의미였다.
전령을 물린 후 서신의 내용을 한눈에 읽어낸 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숙부께서 효명성에 오신다는군.”
“예부상서께서 어쩐 일로… 일 년에 두 번, 제사 때만 오시는 분이 아닙니까?”
윤은 이환에게 서신을 넘겨주었다. 금세 이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말미에 적힌 내용을 읽고서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무흔의 마차를 힐끗 살폈다.
“예부상서께서는 매번 미리 연통을 주고 여유 있게 오시는데, 이번에는 굉장히 급하게 오시는군요.”
“그런 감이 있지.”
“수고한 병사들을 격려하고자 오신다는 말을 믿으십니까. 사평의 예상대로 예부상서께서 은증왕을 파헤치고자 함일까요?”
“글쎄.”
“수도에서 승전보를 받은 시점에 출발하였다면 이미 효명성에 도착했겠지요. 벌써 한재령을 넘었다니, 은증왕을 효명성으로 데려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하여 쉴 새 없이 달려온 것이 분명합니다.”
윤은 숙부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허허 웃고 넘기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사평과 이환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숙부의 갑작스런 효명성 행은 은증왕의 호송지를 변경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서신의 내용은 함구하라.”
“예, 주군.”
멀찍이서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천홍은 얼른 이환에게로 다가가 속삭여 물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천홍은 슬쩍 주군의 눈치를 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말도 못 하게 굳은 것으로 보아 궁금하다며 매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른 무흔에게로 향하여 소식을 전했다.
“썩 좋지 않은 내용인 것 같아요. 주군 표정이 심각하십니다. 여쭤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냥 왔어요.”
“아….”
“은증왕께는 아마 답해주실 거예요.”
“내가 물어보면? 왜?”
“두 분이야 각별하시니, 헤헤… 그럼 이만, 쉬십시오.”
무흔은 딱히 해명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잘 가라 하고, 천홍이 사라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서가는 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로 인함은 아닌지, 불안함이 솟구쳤다. 성에서 온 전령이라면 내부의 일을 미리 알리는 내용일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벽제성에서 출발한 효명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일 수도. 하지만 그 정도의 일로 내일 성에 도착할 이들에게 굳이 전령을 보낼 이유는 없었다.
‘궁금해 죽겠는데, 주 국공이 언제쯤 다시 마차에 들까. 어제도 그제도 석식을 같이 했으니 이따 물어볼까.’
하지만 밤이 깊도록, 잠이 들기 전까지도 무흔은 윤을 만날 수 없었다. 무거운 표정의 그가 무흔을 맞닥뜨릴 때면 시선을 피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는 달리 윤이 마차에 들지 않았다. 무흔은 그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어제 그 전령이 가져온 소식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둘째치고, 매일같이 출발할 때면 지겹게 나타나던 이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주 국공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뭐… 이능력으로 부리는 잔재주가 재밌긴 했지.’
무흔은 옆에 늘어놓은 자그마한 금 강아지와 두당 은자 하나씩에 해당하는 손가락 길이의 관우와 제갈량, 그리고 여포를 만지작거렸다.
얕은 한숨 한 번 내뱉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연히 달라진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북부에 온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중부의 산이 울긋불긋하게 아름다웠다면, 이미 북부의 산은 낙엽이 지나간 후였다. 삭막하기는 했으나 짙은 암녹색, 검은색, 또 회색의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세는 무척이나 독특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와 규모에 무흔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우와. 글로 읽었던 정경 그 이상이구나! 그런데, 확실히 추워졌어.”
창을 닫고 싶지는 않은 터라 무흔은 윤의 두봉을 뒤집어쓰고 목덜미를 여몄다. 마차로 다가오던 이환이 무흔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북부의 날씨가 아무래도 추우시죠?”
“아직은 견딜 만해.”
“오늘 해가 저물기 전에 효명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도착하면 따뜻한 이불과 털가죽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 국공이 내내 조용한데, 어제 효명성에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온 것인가?”
“도착 전에 주군께서 무어라 말씀이 있으실 것입니다.”
보통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는 이환인데, 그의 미소가 평소보다 확실히 어두웠다. 무흔이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질 즈음이었다.
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차에 들어서자, 무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효명성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윤이 마차 양쪽으로 난 창을 닫고 무흔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대뜸 손부터 잡았다.
“왜 이러시는데?”
당황한 무흔은 손을 빼려다 꾹 참았다. 자신이 치유자임을 비밀로 하는 대신 손 정도는 내어주기로 약조했으니. 그에게 잡힌 손에서 지인의 능력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짧은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내겐 숙부가 하나 있어. 내 부친의 아우이시고 지금 건원국의 조정에서 예부의 상서로 있는 분이시지.”
“알고 있소. 이름은 주한모. 그자의 외조부는 건원의 승상이며, 태자의 최측근이라지?”
“냉궁에 갇혀 어찌 그런 것까지 다 익히셨는가?”
“건원국의 고위 관직자들, 주요 지방의 군주들에 대해서도 다 읊을 수 있어. 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아닌가. 유폐된 황자가 가장 즐거워하는 소재야.”
잠깐이나마 눈을 휘둥그레 떴던 윤은 다시 진중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숙부께서 오늘 혹은 내일, 효명성에 도착할 것 같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와 내 참모들의 판단으로는 숙부의 방문이 은증왕 그대로 인함인 듯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무흔은 커다란 두 눈에 의아함이 그득 담겼다.
“그 이유를 모르겠소.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이렇다 할 것이 없어.”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다? 나를 자기 형님의 원수로 여기는 것은 아니고?”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숙부께서는 셈에 능하고 매우 영민하신 분이시라. 이치에 닿지 않는 의식의 흐름을 굉장히 저급하게 여기시오. 감정에 흔들리는 면모 또한 조금도 없으시지.”
“아니면, 주 국공 그대처럼 내게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아는지 묻고자 함이겠지.”
“천천히 와도 얼마든지 물을 수 있는 것을, 고작 그런 이유로 이리 급히 오실 것 같지 않아.”
“주한모 또한 황제의 밀명을 받은 것은 아니고?”
“황제께서는 내게 숙부에게조차 상의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어.”
“그가 태자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황제께서는 웬만해서는 아무도 믿지 않으시니까.”
“헌데 어찌 황제가 주 국공 그대는 믿고 조사를 맡기셨는가?”
“폐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간절함이 통하는 자는 오직 나밖에 없다 생각하시지.”
“주한모는 본인 형님이자 그대 부친의 죽음에 딱히 감흥이 없나 보군?”
“아니, 태자의 모친과 염록왕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황제께서 그 부분을 경계하시는 것뿐이야.”
숙부를 변호한 윤은 얼른 몸을 일으켜 무흔 곁으로 와 앉았다. 여전히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내게 알려준 정보들을 숙부 앞에서 함구할 수 있겠는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리 부담스럽게….”
무흔은 엉덩이를 슬쩍 움직여 윤에게서 새끼손가락 길이만큼 떨어져 앉았다.
“숙부께서 고문을 가할 수도 있어.”
고문?
무흔은 기겁을 하며 새파랗게 질렸다.
“고문을 하겠다 하면, 내버려 둘 셈이오?”
“그럴 리가. 내가 반드시 막아줘야지.”
무흔은 냉큼 손가락 두 개 길이만큼 윤에게서 더 물러나 앉았다. 잡힌 손도 빼려 했으나, 윤이 오히려 그 손에 힘을 주며 무흔에게로 더 바짝 다가가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서 말인데, 숙부께서는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오. 내가 그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차리시겠지.”
윤은 무흔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은증왕, 그대가 치유자임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하나? 차라리 공개하면 훨씬 상황이 쉬워질 수도….”
“그것이 지인 제공에 대한 거래잖나.”
무흔은 붙들린 손을 짜증스레 흔들었다.
“비밀로 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싫으니까.”
“무엇이?”
잠깐 무흔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민했다. 여전히 제게 힘든 이야기이기는 하나, 며칠 사이 윤과 제법 가까워진 탓에 이제는 일부만이라도 그 이유를 내보여줄 마음이 들었다.
“지인의 능력이 있음이 만천하에 밝혀지면, 희로국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나는 어쩌면 지하 석전이 아니라 화유관에 억류될지도 모를 일이야.”
희로국의 유화관. 황실의 감독하에 치유와 정화 이루어지는 곳. 윤 또한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동성 간의 관계가 철저하게 금기시되는 희로국에서 유일하게 그 행위를 허락받은 존재는 이능력자와 치유자뿐이었다.
지인이 필요한 경우 감독관의 허락을 받아 황궁 내의 유화관 별실에서만 교합이 이루어졌으나, 은밀히 이를 악용하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무흔은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다.
“나는 유화관에 갇혀 창기와 같은 삶을 살게 되겠지… 저주? 허, 더러운 욕망 앞에 내 보호장치가 되어주진 못할 거요.”
잊고 싶은 과거의 치욕이 떠오르자 무흔은 눈을 꾹 감고 머리를 털어 버렸다. 죽는 날까지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
“희로국은 건원국보다 치유자가 귀해. 사내에게 뒤를 대기 싫어 능력을 숨기고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비밀의 이유인가?”
무흔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을 건넸다.
“비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오해를 받아도 괜찮아.”
“오해?”
“그… 있잖소. 그대가 나를 마음에 두었다고들 여기는 것 같던데.”
“상대는 저 밖의 멍청이들이 아니라 나의 숙부요. 침소에서 태자를 쥐고 흔드는 것은 물론이요, 황제의 밤시중에 조언자로 있는 그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나?”
“애욕에 대해서는 전문가란 거로군.”
“나는 숙부를 속일 자신이 없어. 나도 문제고 당신도 딱히 자연스럽지는 못하실 것이야.”
윤이 손을 뻗어 뺨을 감싸려는 순간, 무흔은 방어적으로 움찔하며 몸을 최대한 뒤로 뺐다.
“이래서야… 숙부를 속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아예 포로와 성주의 관계,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상태를 연출합시다.”
“내가 어찌하면 되는데?”
윤이 죄책감을 듬뿍 담은 표정으로 무흔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감옥에서 지내줘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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