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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16화 (16/85)

#016화

천홍과 이환이 소리로만 들었던 그 내부의 상황은 이러했다.

마차 안에는 여기저기 금속으로 된 자그마한 세공품이 널려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매일 금이나 은, 혹은 쇠붙이를 들고 나타난 윤이 이능력으로 잔재주를 부린 것이었다.

무흔이 유난히 이능력을 쓰는 것만 보면 눈을 빛내며 즐거워했기에, 윤은 무료하고 긴 행군을 그리 달래주었다.

며칠 전에는 검을 가져다가 온갖 꽃송이를 만들었고, 어제는 은자를 몇 덩이 들고 들어와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을 하나씩 만들었다 녹였다 다시 만들었다 하며 무흔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그런 후에는 이능력을 많이 써서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윤이 꼬박꼬박 강탈하듯 무흔의 손을 꽉 잡고 지인을 받아냈다.

오늘은 자그마한 금덩이를 하나 주먹 안에 쥐고 윤이 마차에 올랐다. 그것을 본 무흔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어렸다.

“오늘은 어째 금의 양이 좀 적은 것 같은데….”

“하하, 마차에 붙어 있던 금박을 싹 떼어다 뭉쳤는데도 이 정도밖에 나오질 않더군. 금붙이들은 죄다 짐짝 안에 들어가 있어서. 대신, 더 재밌는 걸 생각해 왔지.”

“무엇이기에?”

“어떤 동물을 좋아하오?”

“갑자기 그 무슨?”

“하나 골라 보시오.”

“그럼… 강아지가 좋겠어.”

윤의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뭉쳐져 있던 금덩어리는 자그마한 강아지로 모습을 바꾸었다. 무흔은 탄성을 내며 반짝이는 장식품을 집어들었다.

“이리 귀여운 것을 다 생각해 오다니. 주 국공에게 의외의 면이 있네.”

“내가 생각해 온 것은 그다음이지. 자, 이제 진짜 능력을 발휘해 봅시다.”

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손을 맞대어 비비고서는 무흔이 쥐고 있는 자그마한 강아지를 톡톡 두드렸다.

“이 녀석을 걷게 할 것인데, 어디에 내려놓으면 좋을까?”

어린아이처럼 환호 섞인 웃음을 터뜨린 무흔은 다리를 길게 뻗었다. 새끼손가락 길이만 한 금강아지를 무릎 위쪽에 내려놓았다.

“여기 말이오? 허벅다리 위에?”

“주 국공, 어서, 시작하시오.”

이환과 천홍이 마차 밖에서 듣고 오해한 부분은 이즈음이었다. 윤이 금으로 된 강아지를 움직이게 하자,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네 개의 발이 움찔대며 무흔의 허벅지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흔의 웃음이 연신 터져나왔다.

“간지러워! 꺅, 아하하하하, 그만!”

윤은 손을 살살 흔들어 강아지가 조금 더 빠른 걸음 종종거리며 걷게 만들었다. 네 개의 앙증맞은 발이 무흔의 허벅지 안쪽에까지 이르렀다.

“아읏, 거긴… 으….”

참다못한 무흔은 엄지와 검지로 냅다 발칙한 강아지를 집어 올렸다.

“주 국공, 이러기요?”

“은증왕과 망중한을 보내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이야.”

“평소엔 이런 건 하지 않나?”

“이능력을 써서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은 내게 대단히 사치스러운 일이야. 지금이야 당신이 있으니….”

윤이 무흔의 손을 끌어당겨 덥석 잡았다.

“지인이 해결되지.”

“아….”

“황금 강아지를 만들고 또 아장아장 걷게 하느라 이능력을 많이 썼어. 같이 웃고 즐겼으니 정화는 그대의 몫이오.”

“뻔뻔하기가 아주.”

윤이 눈을 마주치며 씩 웃더니 제 손에 붙들린 무흔의 손등 위에 장난스레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무흔은 기겁을 하며 눈을 부라렸지만,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흔은 있는 힘껏 손을 털어 윤을 내쳤다.

윤은 아쉬움 그득한 얼굴로, 심지어 난데없이 아련한 눈빛이 되어 옛 추억을 늘어놓았다.

“어릴 때야 치유자인 어머니만 믿고 이런 건 마음껏 만들고 놀았어. 내 장난을 제일 좋아하셨던 건 지금 희로국에 억류되어 계신 염록왕 전하셨고. 염록왕께서 효명성에 오실 때마다 나는 그간 만들어 놓은 것들을 모아서 선물로 드리곤 했지.”

“염록왕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나?”

“그분은 어머니의 사촌 오라비이시자 아버지의 가장 친한 벗이셨어. 날 무척 예뻐해 주셨는데… 염록왕 전하께서는 회룬석 탈취 사건과 내 부모님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황제께 허락을 받아 그 조사를 하다 희로국에 끌려가신 거요.”

“스승께 들어 알고 있어. 일전에 말한 그 건원의 내간자가 그 일에 힘을 썼다지.”

“지금 뭐… 뭐라고…?”

“내가 무엇을 잘못 말했는가? 어찌 그리 놀라?”

윤은 숨조차 멈추고 머리를 회전시켰다.

염록왕은 납치되기 전날 밤 짐작 가는 배후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의 내간자는 자신이 의심받는 것을 알고 미리 손을 써 염록왕을 친 것이 분명했다.

‘어찌하여 그 간자는 염록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두었을까? 그것이 더 확실한 입막음이었을 텐데.’

의문이 들었으나 답이 바로 솟진 않았다. 더 캐야 할 부분인 만큼, 윤은 얼른 질문을 덧붙였다.

“그와 관련하여, 다른 이야기는 더 들은 것이 없소?”

“관련하여… 아, 상단! 상단의 용병들이 그를 납치하는 데 동원되었다 했어. 아마도 회룬석의 강탈에도 그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상단 이름은?”

“그 이상은 아는 바가 없어. 미안하오.”

“미안하다니. 덕분에 내간자가 연루된 것도 알았고, 용병단을 보유한 상단으로 범위가 좁혀진 것만으로도 큰 발전인데.”

“그럼, 상단 후보는 얼마나 되는가?”

“뭐… 중상 규모의 이상의 상단엔 모두 용병단이 있기는 하지. 그래도 건원국과 희로국 양국과 모두 거래하는 상단으로 범위가 한정되니, 어느 정도 추려질 것 같기도 해. 효명성에 도착하면 조사부터 착수할 거요.”

무흔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윤은 무흔의 손을 다시 꼭 붙들었다. 왜 이러냐는 식의 눈빛이 돌아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맞추며 자세를 바로 하여 앉았다.

“은증왕, 나는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아 비밀리에 염록왕 전하의 납치 사건을 조사해 왔어. 물론 조사에 열심인 것에는 내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그런 연유로 지금 은증왕께서 내게 주신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소. 고마워.”

윤의 눈빛이 너무도 진중하여 무흔은 오히려 그것이 의외였다. 예의까지 차려가며 고맙다는 소리를 할 정도로 대단한 정보는 아닌 것 같은데.

“개인적인 이유는 무엇이기에?”

윤은 쥐고 있는 무흔의 손을 다른 손으로 두 번 보드랍게 토닥이고, 잠시 망설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21년 전, 염록왕 전하께서는 회룬석 사건의 배후, 내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간자의 정체를 짐작하신 모양이야. 증좌가 없어 이름은 밝히지 않으셨어.”

무흔은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희로국에서 건원의 땅에 잠입하여 회룬석을 훔친 이유는 자신이, 3황자 은증왕 무흔이 백자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앉은 이가 효명성주임을 알았을 때부터 제 마음에 묵직하게 걸렸던 이야기를 꺼냈다.

“미안하오.”

“응?”

“그대가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한 것은 사실상 내 출생으로 인한 것이라. 하여… 나는 지금의 효명성주가 나를 원수로 여기고 있을 줄로만 알았어.”

“어릴 때, 한때는 본 적도 없는 희로국의 은증왕이라는 자를 원수로 삼자 마음먹은 적이 있었지. 막연하게 원망을 퍼부을 곳이 필요했으니까. 허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선명해지더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윤은 무흔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편안한 미소를 드리웠다. 한 번 더 토닥토닥. 아까처럼 무흔의 손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이제 손을 뗄 때가 되었는데, 윤은 그리하지 않았다. 쏟아져 흘러들어오는 지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흔은 여느 때처럼 타박을 주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약간의 시간을 허락한 후, 중얼거렸다.

“빠른 시일 내에 지인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지, 원.”

“…굳이 원하신다면, 유람 중인 도학 선생께서 돌아오시자마자 비밀리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리다.”

마차 밖에서 이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린 것은 그때였다.

“전군, 정지!”

무슨 일인가 하여 무흔은 창을 걷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의 동시에 천홍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주군, 전령입니다! 효명성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윤이 그제야 무흔의 손을 놓았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네고는 서둘러 마차를 나섰다. 무흔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창문에 매달려 싱글벙글 웃는 천홍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리 보는가?”

“헤헤,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계셨군요?”

“아니, 그것은… 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주군께서 이렇듯 마음에 합한 분을 만나시다니, 저희는 모두 그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있어요.”

“모두?”

“예, 두 분이 입맞춤을 나누시는 것도 이환 형님이 보았다고 하던데요.”

무흔은 삽시간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것을 모두가 다 안다고?”

“헤헤, 좋은 소식은 나눠야죠. 제가 다 전하였지요.”

무흔은 이마를 짚었다. 천홍이 말하고 있는 입맞춤이라는 것은 제게 지인의 능력이 있음이 드러났던 날, 윤이 확인을 한답시고 눈이 돌아가 입술을 갖다 댔던 그 행위였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차라리 이렇게 오해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반짝 스쳤다. 효명성에 도착하여서도 윤이 이렇게 제 손을 자꾸만 잡으려 든다면 분명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이환 형님 말로는, 주군께서 은증왕의 처소를 잘 준비하라 적어서 효명성에 매를 띄우셨답니다. 저는 분명 합방을 하실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랄까….”

“합방은 무슨!”

무흔은 펄쩍 뛰었다. 합방이라니! 다른 사람과 방을 같이 쓴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처소를 준비한다는 그 말에 가슴 한편이 따스해졌다.

줄곧 외로이 갇혀 살았던 자신도 이제는 사람답게 지내볼 수 있는 걸까. 타인과 섞여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은근한 기대가 실렸다.

“그런데, 전령이라니?”

“효명성에서 온 전령입니다. 궁금하신가요? 알아보고 올까요? 잠깐 기다리세요. 얼른 다녀올게요.”

늘 들떠 있는 천홍은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놓더니만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은 윤과 이환, 그리고 전령이 모인 곳에서 몇 보 떨어진 자리였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무흔은 마차 창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윤이 전령으로부터 건네받은 서신을 펼치고 있었다.

‘내일 성에 도착한다 들었는데 전령이 미리 나오다니, 무슨 일이 난 걸까?’

글을 읽어내려가던 윤의 표정에 순간 놀라움과 의아함이 차례로 어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가 미간 사이를 잔뜩 찌푸렸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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