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무흔은 저와는 확연히 다른 굵기의 팔뚝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질투? 열등감? 부러움? 뭐가 되었든 마냥 좋아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살갗 아래의 핏줄이 더 잘 보이는 것은 저일진대, 윤의 단단한 팔뚝 위로는 핏줄이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게다가 굵기와 묵직함은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시작할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시오.”
무흔의 말에 윤이 그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윤이 제게 했던 것을 떠올리며, 무흔은 살살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치 나비가 날 듯 윤에게로 살랑살랑 정화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윤은 눈을 감은 채로 그 귀여운 지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흔의 손끝이 윤의 손바닥에서 출발하여 드디어 오금에 도착했건만, 윤에게선 미동조차 일지 않았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요?”
무흔은 윤의 팔을 붙들어 다시 한 번 시도해보고, 그래도 반응이 없자 마구 주물러대고, 고개를 갸웃하며 반대쪽 손도 붙들어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그만그만. 누구나 다 그리 팔을 만진다고 흥분하는 것은 아니거든. 백날 내 팔을 쥐고 만지작거려 보시오. 눈 하나 깜짝하나.”
“나만 그런 꼴을 보이다니!”
무흔이 왜 그리 억울해하는지 윤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단순히 순진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싶긴 했는데, 이리 승부욕을 불태울 줄이야. 그것이 새삼 귀엽게 느껴졌다.
“나야 그런 꼴을 언제든지 다양하게 보여 드릴 수 있으니, 기회를 노려 보시든지.”
윤이 무흔의 하얗고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시원한 눈매가 초승달처럼 가늘게 접힐 정도로 휘어지자, 무흔의 뜬금없는 억울함도 한풀 꺾였다.
“나를 놀리는 것이 재밌나 봐?”
“놀린다니 그런 뜻은 전혀 없었소. 그대와 있으면 지인 덕분에 어린 시절이 떠올라. 내 긴 세월 묻어둔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 같네. 미안해. 이상하게 은증왕과 있으면 내가 웃을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
“내게 사죄할 일도 많아지시는 것 같고.”
“은증왕은 내게 귀하고 어려운 존재요. 그걸 알아주시오.”
“날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무흔은 투덜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한 번 상대를 뜯어보아도 저를 어려워하는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려워. 남들에게 하듯 명령을 내릴 수는 있으나 그리할 수 없고….”
“왜 그리할 수 없는데? 나는 포로잖소.”
“내 손아귀에 쥐어진 포로이기는 해. 허나 그대는 좀 다르지.”
“내게 지인의 능력이 있어서?”
“치유자를 함부로 대하는 이능력자는 세상에 없소. 목숨을 내놓고 사는 자라면 모를까. 그대들이 우리의 명줄을 쥐고 있는 것이지.”
“아… 그런 것이었나….”
무흔은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의 말이 조금 서운하게 들린 탓이었다.
방금 마음을 쓰리게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 그것이 싫다거나 끔찍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썩 편치 않았다.
“은증왕, 아까 그 이야기나 마저 합시다. 21년 전 희로국 대신과 내통한 자.”
“아… 그대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다 말았군. 그 첩자는 아마도 효명성 인근에 거하는 자였겠지?“
“나 또한 그리 생각해. 그렇지 않고서야 태고산맥 일대를 그리 훤히 알 수는 없었을 테니.”
“헌데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처음과 달리 더는 향간자가 아니라….”
무흔은 뜸을 들였다. 저와 장난질을 칠 때는 언제고. 이리 말끝을 늘이자마자 윤의 눈에는 애가 타는 기색이 그득했다.
그는 윤에게로 몸을 가까이 숙여서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내어 다음 말을 느릿하게 속삭였다.
“내간자(內間者)는 인기관인이용지(因其官人而用之)라. 그자는 더는 향간자가 아닌, 내간자가 되었다 하였소.”
“그자가 건원국의 관원이 되었다?”
“응.”
“무슨 관직, 누구라 하던가?”
“아… 난 당시에 그렇게까지 캐물을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었지.”
“당시라 하면 몇 살 때?”
“아마 열셋, 넷 정도였을 거요.”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7, 8년 전, 북부 출신으로 그 당시 관원이었던 자라…. 그때 막 임관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 이미 관원이 된 상태였는지를 혹 들었소?”
무흔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이 제게 딱히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도 아닌 듯했다.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 긴 세월 동안 북부에서 관원이 된 자가 한둘이 아닐 터였다.
무흔은 윤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이 팔짱을 낀 채로 눈을 내리깔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방금까지 저와 농을 하던 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온도의 차이가 참으로 신기했다.
‘아까는 능글맞은 난봉꾼 같더니만, 지금 저러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 북부의 성주라는 게 납득이 가네.’
저와는 달리 머리카락과 눈썹이 짙은 검은색이었다. 눈동자의 색 또한 나무껍질보다도 훨씬 더 어둠에 가까운 색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몸에는 시커먼 갑옷을 두르고 있고.
그렇게 온통 검게 물들어 있는데도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시선을 잡아끄는 특별함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걸까. 저자에게는 거칠 것 없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 최강의 이능력자라는 명성이 없다 해도, 그는 종1품 국공이고 북부의 성주야. 눈치를 본다거나 주눅이 드는 일 따위 평생 없었겠지.’
황자라는 신분만 놓고 보면 내가 꿇리는 것도 아닌데, 무흔은 그리 스스로를 위안하다 말고 소리 없이 웃었다.
허, 한심하기가. 지극히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은증왕.”
조각처럼 굳어 앉아 있던 윤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서는 무흔을 바라보았다.
대놓고 쳐다보고 있던 것이 걸렸나 싶어, 무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아무런 답도 바로 하지 못했다.
“무얼 그리 놀라시오.”
“하하, 그러게나 말이야. 아하하….”
“그 간자 건으로 나는 부관과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겠소. 나갈 터이니 편히 쉬시오. 지인 후에 치유자들은 보통 몸이 피곤한 법이니 눈을 좀 붙이셔도 좋고.”
무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나른한 것 같기도 했다. 윤이 나가자마자 베개를 등에 받치고 다리를 접어 옆으로 몸을 뉘었다.
풍경을 감상하느라 창을 활짝 열어두었더니 가을바람이 안으로 들었다. 한쪽에 개어 둔 윤의 시커먼 두봉을 펴 이불처럼 덮었다.
“그가 이걸 직접 털어주었지. 사람을 시켜도 될 것을.”
어제 늦은 오후, 휴식을 위해 호숫가에서 진군을 멈추었을 때였다.
무흔은 나뭇등걸에 앉아 햇살이 물결에 부딪쳐 반짝반짝 별 같은 빛 조각을 흩뿌리는 광경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심지어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감동에 젖어 있었건만.
빈 마차에서 나온 윤의 손에 흙먼지가 그득 묻은 두봉이 들려 있었다. 그는 하필 무흔 옆으로 와 보란 듯이 두봉을 탈탈 털어대었다.
옆에 앉은 무흔이 콜록댈 정도로 먼지가 날렸건만, 그는 제 손으로 직접 말끔하게 턴 두봉을 자랑스레 펼쳐서는 무흔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 하늘이 맑고 해가 있기는 하나, 바람이 스산하니 늘 걸치고 있는 게 좋을 거요. 벽제성에 있을 때보다는 제법 쌀쌀하기도 할 테고.
- 아이고… 고맙소.
억지로 그리 받아낸 감사 인사에 윤의 입꼬리가 움찔거렸었다.
“이능력자들은 치유자들에게 보통 목을 맨다고들 하던데… 사실인가 보군.”
무흔은 다시 한 번 아까처럼 심장 언저리가 찌릿하는 것을 느꼈다. 이 묘한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잠이 쏟아졌다.
“입맞춤했던 날도 그랬지. 지인이라는 게 사람 진을 쭉 빠지게 하는 면이 있네.”
옆으로 돌아누워서는 새카맣고 도톰한 긴 천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무흔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은증왕을 호송하는 일행이 수도에서 효명성으로 진로를 틀어 북진한 지도 벌써 열흘째였다.
무흔은 늘 창을 열어놓고 바깥 풍경을 황홀하게 바라보곤 했다. 창 가리개가 닫힐 때는 윤이 마차 안으로 들 때뿐이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는 했으나, 이를 지켜보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대를 금욕 그 자체로 살아온 주군이 드디어 상대를 만났다고.
특히나 이환은 그것을 참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기혈의 정화도가 낮은 탓에 늘 기분이 좋지 못한 주군이 은증왕을 만난 이후부터는 확실히 유해졌다. 심지어 제게 장난까지 칠 정도이니, 이는 정말로 큰 변화였다.
‘은증왕이 섬뜩할 정도로 기이한 외모이기는 하나,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목석으로 의심되는 자신의 주군이 홀딱 반할 만한 얼굴과 자태이기는 했다.
어쩐지 수긍이 갔다. 어쩌면 주군은 이리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었기에 들이대는 그 모든 이를 지금껏 거들떠도 보지 않은 것이리라.
이환은 헤실헤실 웃어가면서, 주군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써 준 서신을 매의 발목에 잘 고정시켰다. 은증왕이 지낼 거처를 미리 훌륭하게 준비해 놓으라는 내용이었다.
“월영, 효명성으로! 드디어 집으로 가는 거다.”
매는 허공으로 멋지게 날아올랐다. 애지중지하는 월영을 윤이 직접 날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늘도 아침부터 그가 은증왕의 마차에 오른 탓에 서신을 보내는 것은 부관의 몫이 되어 버렸다.
“주군께 보고를….”
이환이 중얼거리며 마차로 향하려는데, 마차 뒤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따라 걷고 있는 천홍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귀를 기울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언가 엿들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병사에게 맡기고는 기척을 죽여 천홍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천홍, 네 이놈.”
“어휴, 이환 형님! 놀라 죽는 줄. 쉿!”
“왜 그러느….”
꺄르륵, 하는 소리가 마차에서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기? 허벅다리 위에?”
“주 국공, 어서, 시작하시오.”
그러더니 또 무흔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간지러워! 꺅, 아하하하하, 그만!”
이환과 천홍은 놀라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이환은 천홍의 뒷덜미를 확 붙들어 낚아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래 듣는 것은 안 된다는 신호를 주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읏, 거긴… 으….”
이환의 손에 질질 끌려나가며 천홍이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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