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아주 이른 아침, 마차에 윤이 올랐다. 북으로 향하는 행렬을 이끄는 것은 부관에게 맡긴 채였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자마자 윤이 무흔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주시오.”
맡긴 것이라도 찾는 듯, 너무도 당당하게 손을 내놓으라 하고 있었다. 무흔은 기가 차서 허허 웃어 버렸다.
“이 무슨….”
“손 좀 잡읍시다.”
윤이 덥석 무흔의 손을 잡아채고서는 맞은편에 다리를 접고 웅크려 누웠다. 맞잡은 손에서 흘러들어오는 정화의 기운이 맑고 시원하면서도 감미로운지라, 윤은 눈을 감은 채 이를 듬뿍 음미했다.
무흔은 어이가 없었다.
“주 국공, 제정신인가?”
“매우 제정신이지. 하아…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야.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요.”
윤이 꼭 붙든 무흔의 손을 뺨에 가져다 부비더니만, 입술을 가져다 살포시 붙여 버렸다.
“이런 미친 자를 보았나!”
무흔은 어떻게든 잡힌 손을 빼려 팔을 흔들어보았지만 허사였다. 윤의 몸을 힘껏 발로 떠밀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꼭 붙든 손에서 보들보들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정화의 기운을 만끽했다. 입술이 겨우 떨어진 것은 윤이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까지 몸의 기혈이 청명하게 개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아.”
“허, 그리 좋나?”
“좋다는 말로는 모자라지. 하지만 은증왕께서 불편해하시니 오늘은 입술을 대지 않도록 하겠소.”
“오늘은? 그럼, 내일 입술을 다시 대겠다는 말인가!”
윤은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피식 웃었다.
“하아… 이런 자와 거래 따위 하는 것이 아닌데.”
무흔은 저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윤에 대한 신뢰도가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국공의 작위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과연 이런 자가 성주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야 그의 사정이니 알 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멀쩡할 뿐, 지인 좀 받는다 하여 이리 멍청한 웃음을 흘리는 자가 과연 제 포로 교환을 막을 비책을 마련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그것이 못 미더웠다. 맨 처음 윤과 만났던 날의 그 비정한 첫인상이 차라리 더 믿음직했다.
“아직 효명성에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어제 하다 만 이야기나 계속하지.”
“회룬석 탈취 사건 말이오?”
“응. 희로국의 대신과 연이 닿았다는 건원국의 사람에 대해서 정녕 더 생각나는 것이 없소? 나중에라도 들었다거나….”
무흔은 이 와중에도 꾹 붙들린 제 손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윤이 어제 건네준 장갑이라도 끼고 있을 것을 그랬나, 하던 차에 문득 스승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 있다! 하나 있어.”
“무엇이오?”
윤이 슬그머니 다리를 펴고 눕다시피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그대도 누우시오.”
“뭐?”
“누워서, 같이 마주 보고 이야기합시다. 손도 꼭 잡고.”
“웃기고 있네. 본디 이리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일삼는 자였소?”
“말이 안 되기는. 나야 편히 손을 붙들고 있는데, 어색하게 팔을 편 그대가 불편해 보여 그러하지.”
“건원의 첩자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야?”
“중요하지. 허나 효명성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은 충분하니.”
“손에 땀이 나도록 붙들고 있는 이 짓이 그쪽이나 좋지 내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거늘.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그저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만 있을 뿐이야.”
“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 드리리다. 그대가 감흥을 원한다면야, 내 얼마든지.”
윤이 그제야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허리춤에 장식삼아 찬 은장도를 꺼내더니만, 자신의 팔뚝을 걷고 망설임 없이 칼날을 갖다 그어 버렸다.
설마 저 칼을 쓸까 하여 그저 바라만 보던 무흔은 놀라서 벌떡 일어나다가 마차 천장에 머리를 박고 다시 주저앉았다.
“윽! 무슨 짓이오! 주 국공! 피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대한 충격으로 어쩔 줄 모르는 무흔과는 달리, 윤은 그저 편안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가 무흔의 손목을 붙들어 끌었다.
“얹어보시오.”
“이… 살이 벌어진… 여기? 피가 나는데?”
“해 보면, 그 감흥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되겠지.”
평생을 고작 앞마당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에서 살아온 무흔에게 호기심은 그 무엇보다 강렬한 원동력이었다.
무흔은 숨을 짧게 흡, 들이켜고는 윤의 팔뚝에 제 손바닥을 얹었다.
“아….”
환부에서 빛이 번쩍거린다거나 신비한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요한 그 찰나, 무흔은 제 손에서 윤의 몸으로 넘어가는 그 치유의 능력을 눈으로 보고 살갗으로 느꼈다.
윤의 상처가 점점 아물어 씻은 듯이 사라져가는 순간을 무흔은 일각조차 놓치지 않았다.
“이런 것이 가능할 줄이야…. 내가… 내 손에서 이런 힘이….”
무흔은 윤의 팔뚝에서 손을 떼었다. 감격에 겨워, 상처와 맞닿았던 제 손바닥을 보려 손을 뒤집었건만. 비명부터 튀어나왔다.
“으아아아!”
손바닥에는 당연하게도 맨 처음 닿았던 팔뚝의 선혈이 낭자했다. 윤이 유쾌하게 웃으며 품에서 자그마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었다. 동시에 아까처럼 또 무흔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손.”
“개 다루듯 하지 마!”
“개를 이리 길들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보군?”
윤은 무흔의 손바닥을 정성껏 닦아내었다. 유난히 흰 살결이라 묻어난 피가 더욱 짙고 붉게 느껴졌다.
“내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 난동을 피웠더니, 만지지는 못 하게 하고 멀찍이 바라는 보게 해 주어서… 그래서 알지.”
“말을 못 타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나?”
무흔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잔함이 뚝뚝 묻어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나마 강아지를 구경이라도 하게 된 것은 다 스승님 덕분이었어. 그… 주 국공이 아까 물은 것도… 스승님께서 알려 주신 것이오.”
“희로국과 내통하였다는 건원의 사람?”
“응. 손자병법의 용간편을 읽던 중 스승께서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시다 나온 이야기요.”
“다섯 가지 간자 중 어디에 속하는 자이기에?”
“향간자(鄕間者)는 인기향인이용지(因其鄕人而用之)라. 그저 단순히 적국에 사는 자를 이용한 것이지.”
용간편의 다섯 가지 첩자는 향간자, 내간자, 반간자, 사간자, 그리고 생간자. 그중 향간자는 적의 마을 사람들을 꾀어 간첩 활동을 시키는 자를 의미했다.
“허면 북부에 거주하는 자? 너무 범위가 넓어. 스승께서 또 무어라 더 말씀이 없으셨나?”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자 하던 윤의 그 장난기 어린 모습이 어느덧 싹 사라졌다.
무흔은 그 변화가 신기했다. 손을 다 닦아갈 즈음엔 이야기에 완전히 집중하여 다시 손을 붙들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덥석.
무흔은 제 판단이 너무 일렀음을 깨달았다. 윤은 다시 무흔의 손을 쥐었다. 이번에는 심각한 눈빛을 한 채였다. 못 말릴 이였다.
“거 참. 그 당시 향간자였던 건원국의 그가, 더는 향간자가 아니라 하셨소.”
“간자가 희로국으로 전향이라도 하였다?”
“그럼 이야기가 너무 싱거워지지. 흠… 이 답을 두고 뭔가 약조를 하나 더 받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람을 이리 궁금하게 하고 말을 멈추면 쓰나.”
무흔의 손을 멀쩡히 잡고 있던 윤이 손가락으로 무흔의 손바닥을 손목 언저리에서부터 살살 훑어내렸다. 무흔은 기겁을 하고 주먹을 쥐고선 움츠러들었다.
“흐읏, 대체 내 몸에 뭘 한 거요!”
“뭘 하다니?”
“지금, 손바닥에 뭔가 했잖아!”
“느꼈나?”
“그래! 뭔가 이상한 걸 느꼈어. 이능력을 쓴 것이오? 아니면, 접촉 면적이 작아지면 이리 간질거리면서도 찌릿한 감각이 일며 지인이 이루어지는 건가? 방금 손끝을 세워서 내 손바닥을 훑었지?”
윤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일단 한 번은 참았다. 아무래도 면전에 대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실례인 듯하여.
하지만 지금 무흔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참기 힘들었다.
“풉! 프… 흡. 미안하오. 웃어선 아니 되는데.”
새하얀 무흔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삽시간에 물들어 있었다. 고작 손바닥 한 번 손끝으로 가만 쓸었을 뿐인데, 흥분감이 오른 모양이었다. 그 반응 하나하나가 윤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왜 웃는 건데?”
“팔을 이리 줘 보시겠소?”
“손에 이어, 팔이라?”
“방금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함을 참지 못한 무흔은 선뜻 팔을 내밀었다.
윤은 무흔의 펄럭거리는 긴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꿈치가 훤히 드러나도록 한 후, 무흔의 팔뚝을 단단히 붙들어 받쳤다.
“아까는 너무 찰나였을 것이고,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볼 테니 집중하시오. 크흠.”
윤은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헛기침 한 번으로 날리고, 사뭇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흔의 팔은 굳어 있었고 심지어 어깨에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긴장을 푸시지요, 은증왕.”
윤의 중지와 약지, 그 두 손가락의 끄트머리가 하얀 손바닥의 움푹 파인 곳에 아주 살짝 닿았다. 너무도 간질간질하게 정화의 기운이 흘러나가자, 무흔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하마터면 가느다랗게 신음을 뱉을 뻔했다.
무흔의 엄지 아래, 손바닥의 둔덕을 살살 스쳐 지나간 손가락은 핏줄이 선명히 비쳐 보이는 손목을 거쳐 팔뚝으로 향했다.
“후으으읏.”
무흔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듯한 숨결이 길게 흘러나왔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꼬았다. 윤의 길고 굵은 손가락과는 이질적으로, 마치 꽃잎으로 제 몸을 훑는 이 감각을 아예 모른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이미 아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윤의 손가락이 하얀 팔뚝을 지나 긴 팔이 반으로 접히는 오금의 자리를 지날 때였다.
“흐읏, 흡!”
무흔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소위 말하는 그 성감대라는 것이 제 손바닥과 팔목, 또 팔을 지나 오금에 이르기까지 뻗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미친 자를 보았나!”
무흔은 윤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 위로 양팔을 교차하여 제 몸을 꽉 끌어안았다. 앞에 앉은 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서 뿜어나오는 안광이 제법 무시무시했다.
“나를 능멸하려는 것인가.”
“대놓고 내가 말해주었다면 당신이 더 부끄러워했을 것 같아서.”
“이런 식으로는 안 부끄러울 것이라 생각했단 거요?”
“아… 하하하….”
윤이 난처한 눈매로 웃고 있었다. 무흔은 예쁜 호선을 그리며 양쪽으로 솟아오른 저 입술을 격하게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빰에 열감이 느껴졌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자, 화가 나는 통에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마치 새부리처럼 앞쪽으로 몰렸다.
그 입술 앞에 윤이 애써 웃음을 참았다.
“자, 주 국공 차례요. 팔을 내놓으시오.”
무흔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잔뜩 서렸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윤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거침없이 옷을 걷어 무흔 앞에 팔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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