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무흔은 도무지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마차 앞에 선 이환을 바라보았다.
“주군께서는 지금 황제께 올릴 서신을 쓰시는 중입니다.”
“무슨 급한 서신이기에?”
뒤이어 튀어나온 이환의 목소리는 거구가 무색할 정도로 낭랑하며 해맑았다.
“은증왕께서는 저희와 함께, 효명성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효명성. 함께. 황제. 서신.
이환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무흔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켰다. 여러 갈래로 흩어졌던 생각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 무흔은 다급히 외쳤다.
“주 국공에게 할 말이 있소!”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내 직접 해야 해. 그를 불러주시오. 지금 당장!”
“아… 알겠습니다.”
당황하며 말을 달리는 이환의 뒷모습을 무흔은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저 멀리, 상까지 펴 놓고 윤이 붓을 놀리고 있었다. 이환이 말을 전하자 그가 순순히 일어나 무흔에게로 향했다.
“나를 보자 하셨는가?”
무흔은 얼른 윤을 마차 안으로 들인 후, 창밖으로 머리를 빼고 주변을 살폈다. 가리개를 이중으로 쳐 창을 닫자마자 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황제에게 쓰는 서신에… 그… 내가….”
무흔은 창을 바라보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윤이 놀라서는 몸을 움찔했다.
“내가 치유자라는 얘기를 적었소?”
“이제 막 적을 참이었는데. 그대가 불러서 이리 왔지.”
“적지 마시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식으로, 윤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를 대고 내가 황제를 설득하겠소?”
“애초에 왜 날 효명성으로 데려가려 하는 것이오?”
“내게 필요하니까.”
윤의 표정은 단호했다. 무흔은 그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 너를 낳았기에 네 어미가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야. 다 네놈 때문이다. 네가 황후를 죽였어!
- 너만 없었어도!
신경질적인 부황 특유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울려댔다. 무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윤을 노려보았다.
“필요? 나를? 허, 그럴 리가. 왜, 입을 맞춰보니 몸까지 탐하고 싶어졌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나는 이능력자고 내 휘하에는 흑성부대가 있어. 이능력자도 드물고 귀하지만, 치유자는 그보다 더하지. 발견되는 대로 데려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그게… 진짜 이유라고?”
사실 무흔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윤은 진짜 이유를 숨기고 있었다.
아마도 그대는 나에게 유일무이한 존재일 테니까.
대놓고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상대가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왜 황제께 그대가 치유자임을 숨겨야 하나?”
“황제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비밀로 해 줬으면 해.”
“내 입장에서는 그대를 내 성으로 데려갈 명분이 필요하니, 비밀로 하기를 원한다면 그 이유를 알려주셔야지.”
무흔은 옷자락을 꼭 쥐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다 털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주 국공, 이것부터 물읍시다. 포로 교환은 피할 수 없는 일인가?”
“피할 수 없소. 우리 황제 폐하의 1순위야.”
다시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는 듯, 윤의 답이 단호하게 떨어졌다. 무흔의 눈에 절망과 간절함이 동시에 어렸다.
“내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건원국에 머물 방도는 없을까?”
윤으로서는 의외의 질문이었다. 이것이 말 그대로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윤은 무흔의 표정을 한참이나 뜯어보고 난 후에야 그것이 진심인 것을 알았다.
포로로 잡힌 자가 귀국을 거부하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리 황제께서 단번에 희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음에도 참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하나뿐이오. 희로국에 억류되어 계신 동복아우 염록왕 전하 때문이야. 그분께 혹시라도 해가 갈까 싶어 참고 참으시던 와중에, 희로국의 3황자 은증왕이 걸려들었으니. 황제께서는 신이 나서 포로 교환을 위한 사신단부터 꾸리시겠지.”
“그대는 건원국에 셋밖에 없는 무려 국공의 작위를 가졌잖소. 어떻게든 그대의 선에서 해결해줄 수 없나? 그리해준다면 나 또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드리리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 줄 알고?”
“왜 이러시나. 내게 정화의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황제에게 서신을 써 놓고선? 날 효명성으로 데려간다면서.”
무흔을 효명성으로 데려가는 것은 그답지 않게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그를 희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치면 어쩌면 은증왕 당사자보다도 윤 자신이 더 절박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그대가 치유자임이 밝혀졌다 하여도 나로서는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 일단 포로 교환 전까지는 나와 함께 효명성에서 지냅시다. 황궁에 갇히는 것보다는 그것이 낫기도 할 것이고.”
“어찌 나은데?”
“뭐… 여러 가지로….”
윤이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이어 무흔을 불편할 정도로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월의 달을 떠올리게 하는 고운 흰 빛으로 빚어진 존재였다. 사람이라 여기기 힘들 정도로 신비로운 눈동자와 신의 손으로 그린 듯한 콧날과 턱선. 고운 입술. 우아한 목덜미, 길게 뻗은 팔과 다리, 그리고 유독 가느다란 허리.
건원의 황제는 이리 독특한 미색을 내버려 둘 이가 아니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호기심 또한 많으신 데다….”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하다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정복 전쟁의 성과와 백성을 잘 살핀다는 면에서 볼 때 역대 가장 빼어난 성군이라 칭송받고 있으니, 독특한 성적 취향 정도야 누구도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흠, 어찌 되었든 그대는 효명성으로 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약조를… 아니, 거래를 하십시다.”
“무슨 거래?”
무흔은 제 눈앞에 놓인 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정화의 힘이 윤에게로 질질 새듯이 흘러나갔다.
“지인을 원하는 대로 제공할 터이니, 주 국공께서는 내가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지켜줘.”
“조건이 너무 기울지 않나?”
“어째서? 지인이 안 들기로 유명한 주 국공이 황제에게 서신까지 써 가며 굳이 날 효명성으로 데려가는 걸 보면, 내 힘이 제법 그쪽 마음에 드는 거 아닌가?”
무흔은 윤의 손을 붙든 제 손을 활짝 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고 깍지를 꼈다. 접촉 면적이 넓어지자 지인의 양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계산도 빠르고 제법 여우 같은 구석이 있으십니다만… 본인이 포로라는 것을 잊고 계신 듯해.”
무흔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윤은 오만함이 듬뿍 배어나게 미소지었다.
“건원국의 법에 따르면, 정3품 이상의 관직 혹은 정2품 이상의 작위를 가진 자는 전장에서 잡은 포로를 취함에 있어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가 없지. 나는 조건을 훨씬 상회하니, 그대를 이 자리에서 벗겨 바로 품은들 황제조차 뭐라 할 수 없다는 말이야.”
무흔은 경악에 찬 눈으로 윤을 쳐다보고, 이어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얼른 손깍지를 풀어 손을 빼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상대가 손에 힘을 꽉 주어 둥글게 말아 손을 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은증왕, 내 쪽에서 거래를 다시 제안하겠소. 그대가 치유자라는 사실은 비밀로 해 드리리다. 이유야 뭐, 천천히 듣도록 하지. 대신 그쪽은 내게 지인을 행해주면 돼. 어떤가?”
“조건을 상세하게 하겠소.”
“조건?”
“지인을 행하는 방법 말이야. 손으로 하는 것만 가능해. 아까처럼 입? 그런 건 절대 불허요.”
“흠… 그럼 손으로 하는 것은 다 되는 건가?”
윤의 눈에 장난기가 그득히 담겼다. 그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던 무흔은 윤이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다리 사이를 흘끗 보고 저를 쳐다보는 통에 사색이 되어버렸다.
“미쳤나!”
“그러게, 뭘 그리 구체적으로 정하려 들어? 상세할수록 사각지대에 구멍이 생기는 법이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면 되는 것을. 내가 마물에 당하여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어도 고작 손만 잡아 날 치유해주려는 거요?”
“내게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건원의 사내를 상대로 하는 거래인데,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무흔의 복잡미묘한 표정 탓에 윤의 얼굴에 미소가 살포시 머금어졌다.
고작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제게 이런 정도의 지인이 가능한 치유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았으나 윤은 지금 나름 대단히 흥분한 상태였다.
“은증왕. 내가 그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오.”
윤은 여전히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갇혀 있는 무흔의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보드랍게 토닥여주었다.
“내 어찌 믿으라고?”
여전히 무흔에게서는 의심과 불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치유자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이능력자, 그 관계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무흔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자, 나는 이만 서신을 마저 써야 하니 일어나리다. 거래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소. 그대가 요청한 포로 교환 무산의 건은… 최선을 다해 타개책을 마련해 볼 터이니, 그에 대한 계약은 그때 가서 새로 협의하도록 하지.”
윤이 활짝 웃으며 출입구 가리개를 잘 닫아주고서는 마차를 나섰다.
무흔은 지금 이 상황이 제게 유리한 것인지, 옳게 풀린 것인지, 혹 느물느물하게 웃던 저 사내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를 두고 생각을 거듭했다.
툭.
그때, 마차 창문 안으로 시커먼 무언가가 떨어졌다.
“으아아….”
흠칫 놀라 몸을 웅크렸던 무흔은 이내 그것이 장갑 두 짝임을 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다 말고 되돌아온 윤이 고개를 창 안으로 들이밀고 조용히 속삭였다.
“꼭 착용하시오. 저주를 예방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함이니.”
무흔은 아직 지인의 제어를 익히지 못했으니 흑성부대원과 살이 스치는 순간 치유자임이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윤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건네고서는 자리를 떴다. 미소 띤 얼굴 위로 빛나던 그 눈동자가 참으로 진중하여, 무흔은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다.
“자신의 장갑을 내어준 건가….”
검을 쥐고 전투를 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군용 장갑이었다. 튼튼한 가죽으로 된 그 검은 장갑의 손목에는 朱(붉을 주), 윤의 성이 금실로 새겨져 있었다.
무흔은 장갑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길이에도, 손등 폭에도 여유가 있었다. 헐거웠으나 착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분이 나아졌다. 그것이 의외의 배려 때문인지, 애매하기는 하나 일단은 비밀을 지킬 수 있게 된 거래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를 딱히 구분하지는 않기로 했다.
따스함이 두 손을 감싸고 있었다.
다음 날, 윤의 얼토당토않은 행동에 무흔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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