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윤은 흔들리는 마차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리 넘칠 듯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지인이 대체 얼마 만인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지인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1년전, 윤이 7살 때의 일이었다. 치유자였던 모친이 유명을 달리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효명성주 주광모의 외아들, 7살의 주윤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또 동글동글한 두 눈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귀여움만큼이나 장난꾸러기였다.
그날, 연병장의 병사들은 칼집에서 검을 꺼내는 순간, 긴 강철의 검날 대신 귀엽기 짝이 없는 온갖 아기 동물들의 조각품을 만나게 되어 버렸다.
평소라면 웃음이 터졌겠지만, 하필 성주가 훈련 시찰을 나온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연병장에는 침묵이 고였다.
“주윤! 당장 나오거라!”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풀숲에 숨어 있던 윤은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조그마한 엉덩이를 씰룩대며 앞으로 기어갔다.
“이 녀석! 얼른 이리 뛰어 올라와!”
윤은 냉큼 일어나 달려가 넙죽 엎드렸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무기는 백성을 지키기 위한 도구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한 죄인지 아느냐!”
“죄송해요.”
“적의 기습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찌할 셈이야!”
말을 그리 해 놓고 나니 어쩐지 정황이 우스웠다. 적군들을 상대로 칼을 뽑았는데 동물 대잔치라니. 윤의 아버지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의 등 뒤로 선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 무기로 장난을 치지 않을게요.”
윤의 부친은 이번 일을 기회 삼아 따끔하게 혼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주방에서도 아니된다. 더는 식사 시간을 앞두고 주방에서 너로 인해 곤란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예, 조리기구로 장난을 치지 않겠습니다.”
“농기구도!”
“예, 흑… 농기구도….”
“고개를 들거라.”
윤의 커다란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늘 다정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매서웠던 탓에, 오동통한 뺨 위로는 눈물이 뚝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상복귀.”
“예!”
간결한 명에 신속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윤은 눈물을 훔치며 연병장으로 뛰어 내려가 100자루의 검에 하나하나 손을 얹고 본래의 형태로 되돌려 놓았다.
“어쩐지… 전보다 더 검에서 광이 나는 것 같은데?”
“날이 더 날카로워졌어. 웬만큼 숫돌에 갈아서는 이리 되질 않는데. 역시 우리 도련님 실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병사들이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흑성부대원들의 훈련소로 터덜터덜 걸었다. 이능력을 잔뜩 쏟아붓고 난지라 몸도 불편하고 기운이 쭉 빠졌으니 지인을 받아야만 했다.
“어머니!”
모친을 발견한 소년은 남은 힘을 다 짜내 달려가 어머니의 품에 폭 안겼다.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길, 양 뺨에 또 이마에 한 번씩 입 맞춰주는 그 따스함만으로도 정화의 기운이 충만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하였기에 이리 기혈이 흉폭하여졌어?”
“죄송해요. 실은 제가 연병장에서 무기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아버지께서 크게 혼내셨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호호호, 그래서 우리 윤이가 기운이 쪽 빠졌구나?”
어머니를 끌어안고 그저 웃다 보면, 어느새 온몸의 기혈이 말끔히 정화되어 있었다.
명의 도학 선생 말에 따르면, 윤의 모친이 회임한 상태에서 남편과 각인을 맺었고 그로 인하여 복중 태아에게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윤이 특상등급 이능력자의 몇 배나 되는 힘을 가진 이유는 그 때문이라 짐작되었다.
각인이란 본디 신비로운 작용이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았다.
부모 자식 간의 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주 특별하게도, 치유자인 부모가 이능력자 자녀에게 해 주는 지인은 마르지 않는 폭포수와 같이 작용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윤의 경우 워낙 가지고 있는 이능력의 양이 어마어마한 터라 모친이 아닌 다른 치유자들로부터의 지인은 마치 낙숫물이 똑똑 떨어지듯이, 그리 답답하게 느껴졌다.
윤도 그의 부모도 언제까지나 이런 풍요로운 안락함이 계속될 줄로만 알았다.
그날 밤, 자정을 훌쩍 넘어 이른 새벽에 막 접어들 즈음이었다.
“성주님, 비상입니다! 마물이 산 아래로 내려와 마을을 덮치고 있습니다!”
태고산맥 곳곳에는 마물의 출현을 알리는 초소가 세워져 있었다. 뿔나팔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먼저 출동한 흑성부대 야간 대기조의 뿔나팔 소리가 그제야 울렸다. 연달아 세 번. 마물이 출몰했던 혈(穴, 구멍)자리를 봉인해 둔 회룬석 결계가 무너졌다는 신호였다.
흑성부대 전원, 그리고 효명군까지 동원되었다. 회룬석을 요청하는 서신을 매에 날려 중부의 수장고로 보냈으니, 그것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윤은 그저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었다. 흑성부대 전체가 투입되었는데도 평소보다 진압에 시일이 더 걸리는 것도 불안했고 부모님의 소식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내가 도움이 될 텐데!”
“그럼. 네 이능력은 웬만한 흑성부대원들보다도 훨씬 뛰어나.”
곁에서 윤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이는 성주의 아우인 17세의 주한모였다.
“숙부, 내가 나가서 도울래요. 평소보다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성의 문은 모두 닫혔어.”
“방법이 없나요?”
“나갈 수야 있지만, 넌 후계자야.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갈 수 있다고요?”
윤은 숙부의 도움을 받아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홀로 몰래 성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가 산에서 목격한 것은 모두의 죽음뿐이었다.
내가 더 강했더라면 부모님을 지켰을 텐데.
어린 윤은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종의 책임감, 심지어 죄책감과도 비슷했다.
고통의 기억을 잊어보려 훈련 중 과하게 이능력을 쏟아부었던 어린 윤은 결국 앓아누웠다. 흑성부대의 치유자들이 전원 돌아가면서 정화를 했으나, 혼탁한 저수지에 술잔으로 맑은 물을 애써 부어보는 격이었다.
“주 국공께서는 이능력을 반드시 아껴 쓰셔야만 합니다.”
대륙 최고의 명의라 불리는 도학 선생이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와 어린 윤의 맥을 짚은 후 처음 한 말이었다. 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펑펑 쓰던 이능력을 찔끔찔끔 아껴 써야만 하는 신세인 것도 싫었고,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게 된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주 국공의 이능력은 특상등급을 넘어 측정이 불가능한 데다, 날 때부터 어머니와 아들 간의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잦은 접촉으로 인해 지인이 이루어지는 통로의 폭이 보통 이능력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어진 상태입니다.”
“폭이 넓으면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닌가?”
의원은 책상 위에 크기별로 나란히 걸려 있는 붓 중, 중간 굵기의 붓을 집어 들었다. 이어 그 붓의 대를 가리켰다.
“상등급의 치유자가 기능하는 통로가 이 정도라고 하면, 주 국공의 몸에서 원하는 것은 효명성의 남쪽을 지나는 호청강 정도의 너비와 깊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
사형선고. 윤은 그때의 기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폭주에 이르면 몸의 상태가 어찌 되는지, 기혈의 7할 이상이 오염된 채로 몇 날 며칠을 버티는 것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아무리 지인을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어떠한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자에게는 설명하기조차 불가능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잊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껏 이능력을 쓰는 그 쾌감을 삶에서 지워 버렸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정화에서 오는 그 맑디 맑은 개운함은 잊고자 노력할 필요조차 없었다. 오늘 은증왕과의 그 마법 같은 순간이 있기까지, 21년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명의 도학 선생이 윤에게 꼭 맞는 치유자를 찾아오겠다며 길고 긴 유람을 떠났던 날, 그가 남겼던 말이 지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 오행에 대해 배우셨을 겁니다. 금(金)의 힘을 가진 이능력자에게 최고의 적합성을 갖는 치유자는 토(土)의 기운을 가졌음을 기억하시고, 당장의 등급이 낮다 하더라도 곁에 두십시오. 치유자는 이능력자와 달리 후천적으로 지인의 힘을 더 크게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잡으십시오.
윤에게 희망 따위는 없는 시절이었다. 그리하겠노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도학 선생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어린 국공의 손을 꼭 붙들어 힘을 주었다.
- 이 넓은 세상에 딱 한 사람 없겠습니까. 그 이가 주 국공의 생명줄이 되어줄 것입니다. 반드시 꼭 맞는 치유자를 곁에 두게 될 거라, 그리 믿으십시오.
단 한 번도 그 말을 믿은 적 없었는데, 정말로 생명줄이 눈앞으로 툭 떨어진 상황이었다.
윤은 느릿하게 이동하는 무흔의 마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이 넓은 세상에, 정말 하나는 있었어.”
그 노인네, 틀린 말은 안 하지. 그리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윤은 순간 발을 멈추었다.
“도학 선생이 일단 잡으라 했어. 곁에 두라고. 그래. 허, 그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뛰다시피 행렬 선두로 향했다. 아까의 무흔을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환, 지필묵을 준비해라. 황제께 서신을 보내야겠다.”
행렬이 멈추었다. 이환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길가의 커다란 나무 아래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펴고 상을 놓으며 종이와 붓, 그리고 먹물통을 대령했다.
“주군, 무슨 연유로 이리 급히 서신을 쓰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방향을 돌린다. 은증왕을 효명성으로 호송할 것이야.”
“예에? 아아아, 예. 하하.”
막 자리에 앉으려던 윤은 다가온 이환을 향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야 그런대로 놔둘 수 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싱글벙글 웃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맑기 그지없는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의 자신이 생각났다.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지인을 받던 그때.
애써 억눌러왔던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든 순간, 20년이 넘도록 묻어두었던 장난기가 솟아올랐다.
윤은 이환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윽! 주군!”
“가서 전해.”
윤이 턱짓으로 무흔의 마차를 가리켰다.
*
덜컹.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이유를 궁금해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무흔은 윤과 눈이 마주쳤다.
번듯한 저 낯짝에 화색이 도는 게 기분 나빴다. 휘어진 눈으로 인사를 보내는 것이 이 시점에서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아까 나한테 그리 호된 소리를 듣고도 뭐가 좋다고 저리 실실 쪼개는 건가. 함부로 남의 입술을 범하는 것이 그리 즐거워?’
그에 반대로 응수하여 사납기 짝이 없는 눈빛을 되돌려주었다. 그사이 이환이 마차로 훌쩍 다가왔다.
“잠시 멈추었다 가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환이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였다. 그가 해맑게 웃으며, 주군과의 특별한 사정을 다 안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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