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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11화 (11/85)
  • #011화

    윤의 손이 무흔의 뒷목에 촘촘하게 걸린 회룬석에 닿았다.

    꾹 손에 쥐자, 그것만으로도 물먹은 솜에 전신이 눌린 듯 묵직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윤은 목걸이의 망가진 걸쇠에 손가락을 대어 힘을 밀어 넣었다.

    툭. 툭. 투둑.

    열두 개의 보석과 그것을 연결하던 가느다란 황금 사슬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떻소? 갇혀 있던 저주가 뿜어져 나가 그대의 친족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느껴지는지?”

    장난기 듬뿍 어린 윤의 말에 무흔 또한 가볍게 웃으며 응수했다.

    “주 국공이 내 속내를 이해할지 모르겠으나, 나 또한 바라는 바야. 희로국 황실의 장수와 번영 따위 개한테나 줘 버리라지.”

    지난 21년간 단 한 번도 풀릴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물건이 제게서 벗어난 것이 어떤 기분인지. 개운한지 허전한지,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이 기묘한 감각은 무엇인지.

    무흔은 바닥에 흩어진 보석을 멍하니 바라보며 텅 빈 목 언저리를 더듬어 보았다.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무흔은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몸 중심에서부터 손끝 발끝 말단에 이르는 방향으로 스멀스멀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차 여기저기에서 굴러 뒹구는 보석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던 윤이 고개를 들고 무흔을 살폈다.

    “은증왕? 왜 그러시오?”

    무흔은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지듯 엎어졌다. 바로 머리 위에서 울리는 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희미해져 갔다. 무어라 그가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공포가 솟구쳤다. 제 몸을 가득 채우는 이 낯선 힘이 두려워졌다. 회룬석! 목걸이를 원래대로 해 놓으면 다시 이 힘을 가둘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무흔은 윤의 주먹 안에 담긴 보석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것을… 회룬석을… 헉! 흐윽… 주시오, 어서!”

    제 손끝에 윤의 손이 닿은 순간, 무흔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당황했다. 막 움켜쥐었던 회룬석을 떨어뜨렸다.

    “이, 이게… 대체 뭐지?”

    당황한 무흔이 손을 뒤로 빼려 하자, 윤이 그 손을 냅다 움켜쥐었다.

    틀림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상대로부터 그에게 흘러들어온 것은 분명 지인의 힘.

    무흔은 겪어본 적 없는 미지의 감각이었으나, 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윤의 손바닥에서부터 손목을 타고 팔을 따라 온몸에 이르기까지, 붕 뜨는 듯한 아찔함이 퍼져나갔다.

    “놓으시오! 이 손 놔!”

    붙들린 몸을 빼내려 힘을 주던 무흔은 그만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은 무흔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무흔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쪽은 그였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21년 만이었다. 제게 지인을 행해주던 모친이 돌아가신 이후로, 이렇게 넘쳐흐를 듯한 정화의 능력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벽제성 함락을 위해 쓴 이능력이 어마어마했던 만큼 기혈이 심히 오염된 상태였다. 어제 2시진이나 치유자들이 들러붙어 있었음에도 정화된 것은 고작 전체의 1할에 불과했다. 온몸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제 몸이 이보다 더 강렬한 지인을 원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윤의 시선이 무흔의 입술로 향했다.

    상대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나, 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겨를이 없었다. 파르르 떨림이 이는 무흔의 턱을 움켜쥐고 입부터 맞추었다.

    “읍!”

    예상치 못한 윤의 행동에 무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손을 맞잡는 정도의 지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정화의 능력이 윤에게로 울컥 쏟아져 들어왔다.

    거대한 해일, 제 키의 몇 배나 되는 파도가 저를 덮치는 듯했다. 윤은 제게 쏟아지는 지인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으윽… 그만…!”

    저항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무흔은 제 능력을 내어주는 중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이 감각의 호불호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목에 두른 회룬석의 결계가 풀린 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제 안에 갑자기 솟구친 힘을 견디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난데없는 입맞춤은 무흔의 몸과 머리를 동시에 마비시켰다.

    ‘숨이,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아!’

    막힌 것은 입술이지 코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도 호흡이 가빴다. 손에서 흘러나갔던 것보다 더 엄청난 힘이 입술을 타고 넘는 중이었다.

    무흔은 그제야 윤에게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상대의 몸을 마구 쳤다. 그것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으나 의사 표시 정도는 된 모양이었다.

    윤 역시 아직 충격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놀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서는 제게서 무흔의 몸을 떼어냈다. 그것도 찰나였다.

    죽도록 사막을 헤매다 기적같이 발견한 샘물 앞에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윤은 무흔의 양 팔뚝을 붙든 손에 더 힘을 주어 상대를 제게로 다시 한 번 끌어당겼다.

    “흡! 으… 으윽… 읍….”

    무흔은 턱과 이빨에 힘을 주어 입을 꾹 다물려 했으나 허사였다. 방금 보았던 윤의 눈은 뒤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넋이 빠진 채였다. 상대의 혀끝이 입술 사이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이자는 미친 것이야! 방금 눈이 마주쳤을 때, 제정신이 아닌 듯하였어. 역시 건원의 사내란. 번듯한 껍데기 안에 남은 것은 저급한 욕구뿐이다!’

    무흔은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 보려 몸을 뒤흔들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윤의 손이 제 허리와 뒷덜미를 움켜쥐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어 버렸다.

    “흐… 읍… 으… 하지 마… 흡… 놓으….”

    무흔은 혀와 혀가 엉키는 감각을 도저히 버텨낼 수 없었다. 가뜩이나 난생 처음 느껴보는 힘이 뽑혀 나가는 와중에, 상대의 혀가 제 혀에 얽히려 들고 입안의 촉촉한 점막을 헤집고 있었다.

    발끝까지 힘이 들어가고 몸이 저릿하게 떨렸다. 단전 아래가 기묘하게 꼬이는 기분이었다.

    입안에 넣어두었던 사탕이 두 개의 혀 사이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지는 통에, 지금 혀끝에서 이는 감각이 달콤한 것인지 무시무시한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등바등 저항하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입술을 맞대며, 윤이 무흔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주군, 월영이 토끼를 잡아왔….”

    말을 타고 마차 옆으로 붙은 이는 이환이었다. 가리개가 막 활짝 젖혀진 마차의 창 너머로, 팔에는 윤의 매 월영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얀 토끼 귀를 움켜쥔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죄송합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당황한 그가 냉큼 자리를 떴다.

    상대가 멈칫하는 순간, 무흔은 윤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윤이 제 눈앞에까지 이른 희고 가느다란 손목을 단번에 낚아챘다. 무흔의 몸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퉤.”

    두 손을 모두 쓸 수 없게 된 무흔은 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것으로도 울분이 풀리지 않아, 있는 힘껏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감히 멋대로 입술을… 악! 으….”

    아픈 쪽은 무흔이었다. 윤의 정강이에 단단한 철갑의 보호대가 있었으니. 결국 무흔은 그 자리에 쓰러져 발을 붙들고 끙끙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멍하게 선 채로, 윤은 호흡을 가다듬고 제 안에 도는 기를 느껴보았다.

    ‘이런 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윤의 기혈은 분명 상태가 엉망이었다. 효명성의 치유자들을 전원 동원하여 몇 날 며칠을 제 곁에 묶어둔다 하여도 반의 반이나 해결될까 할 정도였는데, 그것이 방금의 지인으로 7할가량이나 정화된 것이었다.

    윤은 무흔의 옷깃을 움켜쥐고서는 그 무력한 몸을 거칠게 일으켜 앉혔다. 추궁이라도 하듯 다급히 물었다.

    “지인의 힘이 있음을 본디 알고 있었나?”

    무흔은 일순간 발의 통증을 잊었다. 흰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고 마른 입술의 핏기가 싹 가셨다.

    “지금 무어라 하셨소?”

    “본인이 치유자임을 모르고 있었나? 맥을 짚어 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세상 어떤 의원이 내 손목을 쥐어 맥을 짚으려 하겠는가?”

    무흔은 윤을 노려보며 있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밀쳐 버렸다. 보란 듯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냈다.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등을 마차 모서리에 딱 붙이고 무릎을 웅크려 앉았다.

    “미안하오. 내 그대의 입술을 범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어.”

    “그것이 사죄이고, 변명인가? 더럽고 천박하기가… 어찌 사내가 사내의 몸에 손을, 입을 댈 수 있지?”

    무흔의 입술이 먼저, 그런 후에는 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품에 갇힌 채로 무력하게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미리 허락을 구했어야 했어. 사죄하리다.”

    “허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신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애도 아니고, 사탕 좀 쥐여주었기로서니, 내가 어리석었어.”

    “은증왕께 실례를 범하였소. 나의 잘못이고,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건원의 사내들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하여도 그대의 귀에 닿지 않을 것이오. 마음을 좀 추스르고, 그때 다시 얘기하십시다.”

    윤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무흔에게 묵례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흔은 마차를 나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차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바닥에는 윤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보석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고이 품어둔 분홍빛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탕을 받고 답례로 회룬석을 내어주려다 이런 사달이 난 것이었다.

    ‘내가 치유자? 아까 기가 빨려 나가는 것 같던 그 느낌이 바로 지인이란 말인가!’

    입술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윤과 살갗이 닿는 모든 부분에서 정화의 힘이 흘러나갔었다. 주체할 수 없이 새어 나가는 통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실은 지인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라 하지 말고 물어볼 걸 그랬나.”

    그리 후회로 머리가 가득 차다가도, 아까의 입맞춤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분명 당황했고 화가 치밀어 올랐었는데, 몸이 묘하게 떨렸던 그 생경한 감각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엄지로 살살 제 입술을 훑은 무흔은 살그머니 그대로 손가락을 입안에 밀어 넣어 보았다.

    “내가 미쳤나. 하아….”

    제 짓거리가 한심하게 여겨지는 통에 긴 한숨이 났다.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까 마물로 인해 다친 천홍에게 지인을 해 주던 치유자가 생각났다. 저 또한 그리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찌 되었든 제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이 싫지 않았다.

    *

    마차에서 나온 윤은 출입문 난간을 붙든 채로 넋이 나간 듯 잠시 멍하게 섰다.

    긴 숨을 내뱉고, 무흔의 몸을 쥐었던 제 손바닥을 응시했다. 손끝이 떨리는 듯 보였다.

    환영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장마저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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