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무흔의 비명이 윤의 귀에 닿았다. 물론 그 전부터 윤은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선 채로 흑성부대원들의 활약과 무흔의 안위를 번갈아 확인하고 있던 터, 마차에 곧 벌어질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마차에 들어가 있으랬더니… 손이 많이 가는 황자네.”
윤이 손을 들어 가볍게 내저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의 검이 하늘로 솟구쳤다.
슈욱. 푹.
무흔은 방금 스친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핏줄이 터진 회백색의 거대한 눈알이 그의 코앞에서 멈추어 있는 탓이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숨이 멎었다.
“은증왕, 괜찮으십니까? 호흡을 하셔야 합니다.”
마차 호위를 맡고 있던 군단장의 목소리가 무흔의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헉, 하아… 하아….”
무흔은 그제야 그 흉물스러운 마물의 머리통이 검에 박힌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을 다시 한번 크게 들이켠 순간, 폐부에 이르기까지 마물의 역한 냄새가 흠뻑 밀려 들어왔다.
“읍… 우웩!”
참지 못하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 길가에 엎어져 한 번 더 토악질을 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도, 이번엔 따라온 병사가 무흔의 긴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긴 검이 꽂힌 채 다른 마물의 사체가 불타고 있는 쪽으로 둥둥 떠 가는 온갖 신체 부위들이 보였다. 그중, 역하기 이를 데 없는 마물의 내장이 코앞을 지나갔다.
“우웩!”
무흔은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토하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검이 박힌 마물의 사체 조각들이 한데 모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한심하다는 듯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윤과 하필 눈이 마주쳤다.
“젠장.”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자, 당연하게도 장갑이 더러워졌다. 토사물 냄새가 진동하기는 하나, 남들에게 저주를 옮길까 두려워 장갑을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이런.”
무흔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마차로 돌아가려는데, 이번엔 다리가 후들거리는 통에 결국 제게 따라붙은 병사의 부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물의 시체가 길 바깥쪽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그 냄새에 또 구역질이 올랐다.
“우웁….”
무흔은 완전히 맥이 빠진 채로 간신히 마차에 올랐다. 더러워진 장갑을 벗어 내려놓고 베개에 기대어 늘어져 누웠다. 물 한 모금이 간절해졌다. 잠시 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머리가 울리고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죽겠다.”
한숨 한 번, 제 구취에 미간이 다 찌푸려졌다. 마물의 사체가 불타는 지역을 벗어난 다음에야 무흔은 창 가리개를 젖히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겨우 숨을 돌리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까와는 달리 윤이 마차를 세우지 않고 바로 올라탄 것이었다.
“좀 괜찮으신가?”
윤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 와중에도 무흔은 쭉 뻗은 다리를 거두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윤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린 것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과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뭐가 재밌어서?”
“그대는 마물을 처음 보니 놀랄 수밖에. 자, 받으시오.”
윤이 내민 것은 대나무로 된 긴 수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사용해보는 물건인지라, 무흔은 뚜껑을 열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어찌 되었든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니 좀 살 것 같았다.
“고맙소.”
무흔은 윤에게 수통을 돌려주려 내밀었다.
“안에 두고 필요할 때 마시도록 하시오. 그리고 저 장갑은… 좀….”
마차 한쪽에 대충 내팽개쳐진 장갑을 힐끗 바라본 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버리셔야겠어.”
윤은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더러워진 장갑을 집어 들더니 무흔이 막을 새도 없이 창밖으로 휙 내던져 버렸다.
“여벌 장갑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짐 챙기라 할 때 궤짝에 숨을 생각 말고 얌전히 필요한 짐을 챙기셨으면 여벌이 충분히 있으셨겠지.”
“나로 인해 저주가 옮으면 다 주 국공 탓이오.”
“그런 것을 믿소?”
“그런 것이라니?”
“저주니 액운이니 하는 것 말이야. 그저 백자로 태어난 것뿐인데, 정말로 황실의 액받이라 그리 믿느냐는 말이야.”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래 그러한 것 아니겠는가.”
“나는 말이야, 강아지도 그대처럼 희게 태어나는 녀석을 봤어. 그럼, 그 강아지는 우리 효명성 개들의 저주를 다 품고 태어난 건가?”
윤이 무흔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의 난리통에 헝클어진 새하얀 머리, 그 잠깐 사이에 퀭하게 꺼진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구토로 지쳐 창백한 얼굴은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다. 물론 세간에서 충분히 온갖 전설이나 비화를 끼워다 맞출 법하기도 했고.
“희로국 천년 황조의 선대 백자는 그래봤자 둘 아니오? 그것도 최근 몇백 년 동안이고. 정말 그들이 저주와 재앙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 기근과 홍수가 그들의 시대에 유난히 더 많았다거나 역도의 난이 일었다거나, 그런 걸 확인해본 적은 있소?”
“그렇다 하니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딱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
“합리적인 인과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럼 모를 일이지.”
무흔은 입술까지 살짝 벌어진 채로 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껏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고통이고 업보라 여겼거늘, ‘그저 외형이 다를 뿐’이라는 식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자는 어제 내가 만졌을 때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건가?’
윤이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품에서 자그마한 분홍색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 안에 든 무언가를 하나 꺼내어 무흔에게 건넸다.
“이거나 좀 드시고 아까의 얘길 계속하십시다. 아무리 마물을 처음 봤기로서니, 무슨 토악질을 그리 심하게 하는지 원.”
무흔은 느릿느릿 간신히 몸을 일으켜 윤이 주는 것을 받아들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작고 딱딱한 물체가 얇은 종이에 싸여 있었다. 돌돌 말린 양 끝을 풀어내자 노르스름한 빛깔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환약인가?”
“응?”
“구토로 놀란 속을 다스려주는 약인가… 환약치고는 너무 단단한데?”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약재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면서 예상치 못한 향이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무흔은 제 후각을 확인해 보려 혀를 내밀어 끝을 살짝 대어보았다.
“아! 혹 이것이 말로만 듣던…?”
윤으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저 황당하고 또 흥미롭다는 듯 저를 가만 지켜보고 있는 시선만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제게 머물러 있었다.
무흔은 손에 든 것을 조심스레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처음 맛보는 극한의 달콤함이 순식간에 입안으로 퍼져나갔다. 눈을 감고, 맛을 음미했다.
‘사탕이란 본디 이리 감미로운 것인가. 지금 내 입안이 써서 더욱 그리 느껴지는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예상치 못한 호의에 감동이라도 한 겐가.’
혀끝으로 사탕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달그락거리는 느낌도 좋고 금세 달콤한 침이 가득 고이는 것도 행복한 감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이 쥐고 있던 그 작은 분홍색 주머니를 무흔에게 통째로 내밀었다.
“받으시오.”
무흔은 지금껏 사탕이란 자고로 철없는 아이들이 노점에서 사 먹는 주전부리인 줄로만 알았다.
이리 멀쩡하게 커다란 사내가 왜 이런 걸 가지고 다니는지? 건원국 사람들은 다 이런 건지,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어쨌든 준다는 사탕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날 다 주는 거요?”
무흔은 양 뺨이 위로 밀려 올라갈 정도로 헤벌쭉하게 웃으며 사탕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슬쩍 윤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내리깔아 주머니 안에 사탕이 몇 개나 들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리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윤이 흠, 헛기침을 하고서는 본론을 꺼냈다.
“이제 아까 하던 얘길 마저 하십시다. 회룬석 탈취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 하셨지?”
무흔은 입안에서 굴리고 있던 사탕을 우선 한쪽 볼로 옮겼다.
“아마 문헌으로 기록된 것은 주 국공도 다 아는 내용일 것이고, 내 스승께 들었던 것을 위주로….”
입안에서 사탕이 한 번 뱅그르르 돌아 다른 쪽 볼로 옮겨갔다.
“…얘기해 보자면, 당시 희로국 황실 창고의 회룬석 재고가 바닥 난지라, 재상 하나가 묘안을 냈다 하지. 자신이 건원국 북부의 사람과 연이 있는데, 그의 도움이면 태고산맥 동부의 건원국 결계에 설치된 회룬석을 훔쳐 올 수 있을 것 같다 하였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했어.”
윤은 잠깐 할 말을 잃고 무흔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주씨 집안의 가신이자 지금 효명군을 대신 이끌고 북부로 돌아가고 있는 노장군 계원이 예전에 해 준 말이 있었다.
─염록왕께서 희로국에 납치되시기 전날 밤, 제게 털어놓으셨습니다. 회룬석 탈취 사건의 배후에 이쪽의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 이름은 언급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이쪽의 누군가’라 지칭된 이가 바로 무흔이 이야기하는 자일 터였다. 윤은 무흔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는 다급히 물었다.
“희로국의 그 재상은 누구이며, 건원 북부의 그 사람은 누구요?”
눈을 희번득 뜬 윤의 돌진에 놀란 무흔은 그만 다 녹이지도 못한 사탕을 꿀꺽 삼켜 버렸다. 아깝다 여기며, 일단 윤의 물음에 대한 답을 건넸다.
“내가 알 리가 있나. 내 입장에선 그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니 더 캐물을 생각도 들지 않았어.”
“모른다고?!”
“내 팔은 좀 놓고… 말하시오.”
“아….”
“사탕 하나 더 먹어도 되나?”
“뭘 묻나? 이제 그대의 것인데.”
“그럼 딱 하나만 더 먹고 아껴야지. 희로국에서도 달콤한 것들을 많이 먹었지만, 사탕은 저급한 것이라 하여 아무도 내게 주지 아니하였거든.”
껍질을 까 동그란 사탕을 입에 쏙 넣은 무흔은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주 국공께 보답을 해야지.”
“무엇으로?”
“이 목걸이. 애초에 그대의 관할에 있던 회룬석으로 만든 것이니 회수해가시오.”
무흔은 자신의 목에 걸린 묵직한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윤의 눈이 놀라움으로 일순간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걸 풀어내면 희로국 황실의 저주가 사방팔방으로 뻗쳐나간다 하던데, 정녕 괜찮겠나?”
윤이 농담을 건네며 무흔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풀어주시오.”
“응?”
“주 국공밖에 풀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무흔은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너머로 가지런히 모았다.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채, 그대로 몸을 납작하게 접어 윤의 양 무릎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은증왕, 이게 무슨 짓이오!”
난데없는 무흔의 행동에 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손을 어찌할 줄 모르고 번쩍 들어 버렸다.
“주 국공의 이능력이라면 이 목걸이의 걸쇠도 간단히 풀 수 있겠지.”
그제야 윤은 자칫 잘못 해석하면 낯뜨거울 수 있는 무흔의 자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났다.
정신을 차린 후, 무흔의 뒷목에 걸린 목걸이의 걸쇠 부분을 확인했다. 저와 같은 금속계 이능력자가 목걸이를 열고 잠그는 장치를 짓뭉개 버린 상태였다.
“어디, 회룬석을 풀어내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 한 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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