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마물이라고?’
무흔은 벽제성과 건원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소천산에 대한 서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꼭대기의 분화구에 고인 물에서 마물이 솟아오르는 경우가 간혹 있다 했다. 삽화도 없었을뿐더러, 책에 미약하게나마 묘사되어 있던 마물의 모습은 상상으로 도저히 그려내기 힘든 형체였다.
무흔의 왼쪽 가슴에서 또 양 손목에서 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과 흥분이 원인이었다.
‘나가서 구경할까? 그래도 되나?’
쿵.
한 번 더 큰 울림이 일고, 마차도 더 요란하게 흔들렸다. 밖으로 막 나오던 무흔이 놀라 마차를 꽉 붙드는 순간, 하필 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목소리가 무흔의 귀에 닿았다.
“이환, 가서 은증왕을 지켜라. 마차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해.”
“제 임무는 주군의 엄호입니다.”
불복종이라고는 모르는 이환이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윤은 더 설득하지 않고 뒤쪽으로 몸을 틀어 명을 내렸다.
“정예 1군단, 은증왕을 호위한다. 마차에서 나오지 못하게 지켜.”
예, 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마차 바로 뒤쪽에서 울리기 무섭게 병사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마차를 둘러쌌다.
“아… 굳이….”
무흔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멀리 선 윤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윤이 무흔을 향해 손을 터는 듯이 펄럭여댔다.
“뭐야, 들어가라는 거야?”
쿵.
울림이 아까보다 더 가까워지고 땅의 진동도 거칠어졌다. 전원 방어태세에 돌입해, 윤을 비롯한 이능력자들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집결했다.
“주군, 울림의 방향과 정도로 미루어 보아 산을 거의 다 내려온 것 같습니다.”
“몸집이 그리 큰 녀석은 아닌 듯하니. 산으로 들어가서 공격한다. 천홍과 지유는 올라가지 말고 대기하라.”
둘은 화염계 능력자들이었다. 지유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 반면, 천홍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예? 어째서입니까?”
“마른 바람이 불고 있으니 산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번질 것이다. 물을 쓰는 자는 지금 제룡 하나뿐인데, 마물 처리는 뒤로하고 일일이 널 쫓아다녀야 하겠느냐.”
“예, 주군! 그럼 저는 잠깐 1군단에 합류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거라.”
무흔은 천홍이 마차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너머에 선 윤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마물을 보게 생겼는데, 마차 안에 처박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은증왕, 들어가시죠.”
“밖에서 보면 안 되나?”
“주군께서 아까 이렇게 막, 펄럭펄럭 들어가라고 하셨잖아요? 손을 쓰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심기 불편의 3단계쯤 온 겁니다.”
“1단계, 2단계는 뭐길래?”
“들어가세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드릴게요.”
이능력자가 저를 끌어당겨 불쑥 마차 안으로 들이닥치자, 무흔은 장갑부터 확인하고 옷깃을 더 바짝 여몄다.
그런 움직임 따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홍은 넉살 좋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헤헤, 3단계는 그냥 하는 소립니다. 주군께서 어제 지인을 받다가 성질이 나셨는지 치유자들을 다 내쫓으셨거든요. 지금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하세요. 당연히 기분도 엉망이실 테고.”
“왜 성질이 나지?”
“찔끔찔금 정화되는 게 답답하셨겠죠. 그 와중에 오늘은 게다가 아까… 은증왕께서 말에서 떨어지는 걸 받으시느라 그 사람 많은 데서 슝 날으셨잖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이능력 보이는 걸 엄청 싫어하세요.”
무흔은 뜨끔하여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무엇보다 바깥이 궁금한지라, 윤이 닫아놓은 창문 가리개를 다시 활짝 열어젖혔다.
“아, 마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실 텐데, 잡는 건 못 보시겠습니다. 그래도 이따 사체를 불태우는 걸 구경하시면 되죠.”
“잡는 것은 왜 못 보나?”
“땅의 진동이 워낙 약하니까요. 크기가 작은 마물이니 산에서 간단하게 처치하고 내려들 오실 겁니다.”
무흔은 창틀에 바짝 들러붙어 앉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이능력자들은 그렇다 치고, 효명군 병사들도 다들 침착한 것 같군.”
“물론이죠. 효명성은 태고산맥으로 북쪽과 서쪽이 둘러싸였잖습니까. 흑성부대가 마물을 물리치려 출동할 때마다 마을을 보호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효명군도 군단을 이루어 매번 같이 출동합….”
쿵.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세 명의 이능력자들이 산으로 향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땅의 울림이 더 극심해지고, 요란한 파열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무흔은 밖으로 뛰쳐나가 구경하고 싶은 것을 일단은 참았다. 호기심이 극에 달하였을 즈음, 사람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마물의 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맹욱이 흙에 힘을 불어넣어 그 사체를 간단하게 산 아래로 옮겨 내렸다.
“저것이 마물인가!”
무흔은 코와 입부터 손바닥으로 가렸다. 바람결에 마물 사체의 역한 냄새가 실려 오기는 했으나 이리 가까이에서 보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지유 형님, 불 쓰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같이 태울래요! 은증왕, 이따 또 뵙겠습니다.”
천홍이 마차 밖으로 막 뛰쳐나가던 순간, 쿵 하는 울림이 산에서 한 번 더 울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땅이 꺼질 듯한 울림이었다. 천홍은 마차에서 요란하게 떨어졌다.
비탈에서 구른 듯, 흙투성이가 된 재이가 산에서 막 튀어나오며 외쳤다.
“잡은 놈과 같은 종입니다. 몇 배는 더 큽니다!”
쿵.
쿵.
쿵.
쿠쿵.
땅이 울리는 간격이 점점 줄어들더니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
낮은 울음소리가 퍼져나감과 동시에 썩은 물 냄새가 진동했다. 모습을 드러낸 마물의 크기는 아까 것의 네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하필, 햇빛을 받아 금박 장식이 번쩍거리는 마차를 향해 그것이 달리기 시작했다.
“으허… 헉, 허, 헉….”
무흔은 순식간에 제 쪽으로 다가오는 마물을 확인하고는 숨을 거칠게 들이켜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차 주변을 정예병들이 둘러싸고는 있으나 저런 마물 앞엔 무용지물일 터였다.
‘이렇게 죽겠구나. 객사하면 귀신이 되어 죽은 자리에 머물게 된다던데… 나는 죽어서도 길에 얽매여 자유로이 다니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걱정에 허우적대는 무흔과 달리, 윤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마차를 힐끗 바라본 그는 마물을 향해 일부러 장검을 딱 한 자루 날렸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 검은 마물의 목덜미에 상처를 입히고는 다시 큰 호선을 그리며 윤의 손아귀로 되돌아왔다.
“캬악! 크르르….”
그다지 큰 타격은 아니었다. 마물은 질척거리는 거대한 몸뚱이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여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마물을 마차에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한 윤의 계책이 먹혀들었다.
휙. 휘리릭.
바람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산자락에서 무섭게 뻗어 나온 뿌리와 넝쿨이 마물의 사지에 칭칭 감겼다. 초목계 이능력자인 재이였다. 맹욱이 그와 합세하여 일격을 날리려던 순간, 마물은 힘 한 번 주는 것으로 간단하게 몸에 감긴 것을 끊어냈다.
“크아아!”
짧은 포효를 내지른 후, 고개를 휙 돌린 마물은 병사들 쪽을 향해 달렸다. 천홍이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해 거대한 불덩이를 내리꽂았으나, 물의 성질을 가진 마물의 몸뚱이에 닿은 불꽃은 증기를 내며 미약한 타격만을 입히고 사그라들었다.
“으악!”
오히려 마물에게 역습을 당한 천홍은 무흔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단번에 내동댕이쳐졌다. 허벅지에 피가 솟구치자 진서가 달려와 바로 치유를 행했다.
창 너머로 어깨까지 빼고 있던 무흔은 피가 멎고 살이 아무는 순간을 생생하게 눈으로 확인했다.
‘저것이 지인의 힘이구나! 기의 정화뿐만 아니라 상처의 치료까지 되는 게 사실이었어.’
무흔은 홀린 듯이 치유자의 손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벽제성 함락 이후 겪은 놀라운 광경들 중 그 무엇보다 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지인임을 깨달았다. 그것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크아아악!”
소름 끼치는 마물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무흔은 다시 그리로 시선을 돌렸다.
맹욱이 능력을 쓰자 흙이 마물의 발을 타고 다리를 올라 삽시간에 몸뚱이 전체를 뒤덮었다. 그대로 굳는 줄 알았건만, 마물은 오히려 거대한 흙덩이가 되어서는 질척거리는 팔다리를 거칠게 휘저었다.
무흔은 더 이상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정도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흥분되는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다시 마차 밖으로 슬그머니 몸을 빼낸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능력의 위력이라는 것이 저리 대단한데, 어찌 마물은 쓰러지질 않는단 말인가!’
아까의 몇 배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넝쿨과 뿌리들이 마물의 온몸을 칭칭 감아 살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치유자 나령이 재이에게 달려가 드러난 목덜미에 손을 얹어 기를 실시간으로 정화시켰다.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무흔의 시선에 윤이 걸렸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리 상황이 급박한데, 그는 멀찍이 떨어져 서서 다른 이능력자들의 활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주 국공은 어찌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지? 정녕 대륙 최강이라면 간단히 처리하여 끝낼 수 있을 것을. 소문이 부풀려진 것인가?’
맘 편히 구경하는 이들은 윤뿐만이 아니었다. 마차를 둘러싼 효명군 정예 1군단 또한 딱히 긴장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것이 바로 윤과 흑성부대를 향한 그들의 신뢰였다.
마물의 몸에 흙이 엉긴 덕에 이제는 불의 타격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불과 흙의 힘을 쓰는 이능력자들이 마물과 대치하는 동안 윤은 나서지 않고 이를 지켜보았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이들을 일부러 골라 데려온 만큼, 그들에게 기회를 주려 함이었다.
윤은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무흔의 얼굴이 있었다. 놀라움과 두려움, 경탄, 그리고 호기심을 넘어 정말 오만가지 감정이 다 섞인 듯한 그 자색 눈동자에 그만 윤의 웃음이 터졌다.
“풉, 흠흠.”
정말 죽을힘을 다해 마물을 상대하고 있는 초짜 이능력자들 앞에서 민망해진 윤은 얼른 헛기침으로 웃음을 무마시켰다.
무서울 정도로 격렬한, 마물의 마지막 발악이 이어졌다. 넝쿨에 더욱 강력한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단말마의 괴성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수십 토막으로 잘려 나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헉!”
무흔은 마차 출입문에 선 채로 얼어붙었다. 괴물의 머리통이 하필 마차를 향해 정통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눈 한 번 깜빡이면 닿을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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