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윤이 얼른 아래로 팔을 뻗었으나 한 발 늦었다. 무흔의 몸은 이미 중심을 잃고 머리부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젠장.”
반사적으로 윤이 몸을 날렸다.
묶인 양손을 위로 쳐든 무흔이 땅에 닿기 직전, 윤이 그를 끌어안아 순식간에 공중으로 가볍게 솟았다. 지면에서 무릎에 이를 정도의 높이에 둥둥 떠 있었다. 두 팔로 무흔의 등과 다리를 받쳐 올린 상태였다.
말은 익숙하다는 듯 편히 멈추어 서서 제 주인을 끔뻑끔뻑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은증왕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는 그렇지 않았다. 격한 술렁임이 침묵으로 멎어버렸다.
“지… 지금… 하늘을 난 건가?”
“그럴 리가.”
무흔은 경악과 경탄,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잖아!”
“생각을 해 보면 될 것을. 그저 이능력으로 내가 입은 갑옷을 띄운 거야. 내가 왜 이렇게까지 대체… 하아….”
웬만해서는 이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윤이 좌중 앞에 아주 대단한 볼거리라도 제공한 꼴이 되어 버렸다.
오만상을 찌푸린 그는 천천히 날아 조심스레 말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아예 품에 가둔 채로 무흔의 두 다리를 옆으로 모아 앉혔다.
“가랑, 좀 봐 줘. 가자.”
윤이 말을 토닥이고, 바로 출발했다.
그 난리통에도 무흔이 꼭 붙들고 있던 윤의 두봉은 흙먼지가 그득 들러붙은 상태였다.
무흔은 그것을 잽싸게 머리에 둘러썼다. 먼지로 인해 몇 번 콜록거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가릴 수 있는 유일한 장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흔은 아까 자신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이 저를 보며 손가락질하던 것만을 내내 떠올리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해 보려 아무리 애써도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 백자다! 저주받아 피가 다 빨렸다지?
- 귀신이지, 저게 어디 사람인가!
- 역시, 저주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봐.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의 눈인가?
- 쳐다보지 마! 눈이 마주치면 액운이 닥친다 했어.
천이 흘러내려 모습이 드러났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저를 향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때려 박혔다. 무흔은 떨쳐지질 않는 그 환청에 갇혀 버렸다.
그렇게 효명군의 주둔지에 이르기까지,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는 것으로 보아 딱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으로 짐작되었다. 무흔은 그것이 저로 인함인가 싶어 더욱 심란해졌다.
“거의 다 왔소.”
윤의 목소리에 무흔은 전방으로 아주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혹시라도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은 아닌가 염려한 탓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그저 멀리 열을 맞추어 선 효명군이 보일 뿐이었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그 안에 들어가 대기하면 돼. 아까처럼 불편할 일은 없겠지.”
“고맙소.”
“중경까지 타고 갈 마차를 구해둔 것뿐, 고마울 것까지야.”
퉁명스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무흔은 때를 놓쳤던 인사를 지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도, 고마웠다는 말을 못 했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나만 구경거리가 되면 족할 것을, 나 때문에 주 국공까지….”
“됐어. 나야 워낙, 시선에 익숙하니.”
“이능력에 절로 시선이 가는 것도 당연하겠어.”
“이능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주이기 때문이지.”
“아….”
“내가 아까처럼 사람들 앞에서 이능력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소. 고작 시선 따위? 그쪽도 익숙해지도록 마음을 단단히 하시오. 중경은 여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곳은 아니니까.”
무흔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건원의 황궁이 어떤 곳일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모국의 황궁에서 17년을 살았다고는 하나 지하의 석전에 갇혀 보낸 시간이 대부분인지라, 사실상 무흔이 경험한 세계는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윤의 말이 마차 앞에 다다를 때까지, 무흔은 내리깐 눈을 들지 않았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마차의 외양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몸을 숨길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무흔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가리개를 쳐 좌우로 활짝 열린 창부터 굳게 닫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왔다.
*
벽제성에서 건원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북부의 태고산맥에서 나와 대륙 중부에까지 이르는 소천산맥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산자락 바로 아래 곧게 뻗은 지름길, 다른 하나는 그 산맥을 멀리하여 빙 둘러가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를 이용했다. 태고산맥의 혈과 이어진 모든 산자락에는 마물의 출현이 잦기 때문이었다.
이는 은증왕을 호송하는 효명군의 정예 제1군단에게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소수이기는 하나 일부 흑성부대원들이 함께였고, 무엇보다 최강의 이능력자라는 그들의 주군이 있으니.
그러한 사정이야 무흔의 안중에도 없었다. 벽제성을 떠나던 당시의 울적한 마음이 제법 가라앉았고, 이제는 창 가리개를 살그머니 젖혀 창 바깥 풍경을 구경할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산이라는 것이 이리 다채롭단 말인가!’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후, 두 시진 내내 창을 꼭 닫아두고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이 후회되었다. 무흔은 눈을 빛내며 창밖에 얼굴을 살짝 내밀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행군으로 인해 이는 흙먼지조차 그저 좋았다.
‘진작 이리 즐길 것을. 남은 날이 얼마나 될 줄 알고….’
마차 내부는 두 사람씩 마주 보고 앉기에도 불편함 없이 널찍하고, 방석과 등받침은 푹신하며 좌우로 난 창은 큼직했다. 창 가리개는 두 겹으로, 안쪽의 것은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천이며 바깥쪽의 것은 술로 장식된 도톰하고 화려한 비단이었다.
무흔은 다리를 뻗고 편히 기대어 앉아 활짝 열어젖힌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소천산맥의 긴 자락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끊임없이 그저 하늘과 산뿐이었으나, 무흔은 그 웅장하고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덜컹.
가벼운 울림과 함께 마차가 멈추었다. 입구를 덮은 커다란 천을 젖히며 윤이 안으로 들어서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을 놓고 있던 무흔은 뻗었던 다리를 얼른 거두어 몸을 바로 하고 어색하게 그와 마주 앉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나도 이걸 타고 갈 것이오.”
“아니, 왜… 멀쩡한 말을 놔두고….”
“애초에 내가 동행할 요량으로 이리 큰 마차를 준비하라 한 것인데?”
무흔은 아직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한 자유를 빼앗겨 버렸다.
슬그머니 튀어나온 입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홱 돌려서는 창밖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똑같은 풍경인데, 아까처럼 신이 나지 않았다.
“은증왕께서는 희로국의 황궁에서 17년, 벽제성에서 4년을 보냈지. 맞소?”
“첩자라도 심었나? 남의 집안 자잘한 사정도 다 알고.”
무흔의 목소리에는 은근히 툴툴거리는 느낌이 묻어났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윤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최대한 달래는 어투로 말을 꺼냈다.
“내 오늘 이리 마차에 든 것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야. 답만 전부 잘 내어준다면 얼른 이 자리를 떠 드리리다.”
“아…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을 텐데.”
말을 꺼내려다 말고, 윤이 활짝 열린 창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가 창 가리개부터 2중으로 단단히 닫자, 무흔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그득해졌다.
“21년 전의 일에 대해 묻고자 하오. 그 목걸이부터.”
무흔은 목덜미를 더듬었다. 윤이 가리키는 것은 금빛 가루가 섞인 청록색의 보석 열두 덩이로 엮인, 회룬석 목걸이였다.
세상 모든 힘을 가둔다는 회룬석. 그것으로 자신에게 깃든 재앙과 저주를 가둔다 했다.
“그 목걸이는 우리 건원국, 효명성의 관할하에 있는 산의 결계에서 훔친 회룬석으로 만든 것이지. 알고 있소?”
무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로국에서 그것을 훔쳐 결계를 깬 탓에 마물들이 쏟아져 나와 북부의 성주 내외가 죽고 백성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을 읽었다. 스승 또한 제게 설명해주었었고.
“은증왕께서는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지게 된 것인지 들은 바가 있는가?”
무흔은 윤의 표정과 꽉 맞잡은 두 손을 확인했다. 마주 앉아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에게 분명 이 정보가 꼭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읽고 듣고 한 것은 물론 있는데… 흠….”
오랜 세월 갇혀 사는 동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무흔은 눈치가 백단이었다. 이번에도 뭔가 하나를 얻어낼 작정이었다.
“내가 손이 불편하여. 여기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영 기억을 더듬기가 힘드네.”
윤이 순간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칼이 쏟아질 듯한 그 표정에 무흔은 움찔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최대한 뻔뻔한 얼굴로 윤을 향해 두 팔을 쭉 내밀었다.
“부탁합니다, 주 국공.”
“내가 마차에 같이 있는 동안에만 풀어주는 것으로 하지.”
“뭐, 그 정도에서 합의를 보자고.”
윤이 밧줄을 칼로 끊지 않고 잘 풀어서는 양손에 쥐어 다시 말기 시작했다. 밧줄을 다시 사용겠다는 뜻이 정확히 전달되는지라, 무흔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은근히 야박한 면이 있네. 아까의 마음 씀을 보면 좋은 사람 같긴 한데, 이럴 때 보면 벽창호 기질이 있는 듯도 하고.’
그러한 와중에도 궁금증이 일었다.
“분명 이능력을 써서 칼을 띄워 이 밧줄을 잘라낼 줄로만 알았는데, 평범하게 직접 손으로 풀을 줄이야.”
“아시다시피, 지인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이라. 그런 연유로 자잘한 것에까지 이능력을 쓸 여력이 없소.”
무흔은 그가 ‘아시다시피’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을 눈치챘다. 처소에서 그의 부하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자, 손목도 자유롭게 풀어 드렸으니 이제 답을 내놓으시오.”
그때였다. 마차가 과하게 덜컹이며 바닥에서 묘한 진동이 일었다. 무흔이 무슨 일이냐 채 묻기도 전에, 윤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뭔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저리….”
무흔은 창문 밖으로 머리를 쭉 빼 행렬의 선두 쪽을 바라보았다. 달려나가는 윤의 뒷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묻고 싶었으나, 마차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순간 무흔의 눈이 반짝였다.
‘기회가 아닌가! 손에 밧줄도 풀렸으니 도망을 칠까. 여기서 산을 넘으면 어떻게든 숨을 수 있을지도?’
무흔은 주먹을 꼭 쥔 채 마차의 출입문으로 향했다. 튼튼한 천으로 된 덮개를 조심스레 열어 머리만 쏙 내밀어서는 좌우를 살피고 발을 막 밖으로 내딛던 순간.
쿵.
산 쪽에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마차가 다시 흔들렸다. 병사들의 술렁임이 무흔의 귀에 닿았다.
“마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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