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윤이 힐끗 뒤편의 무흔을 살피고서는 다시 천홍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무엇을 묻고자 하느냐?”
“벽제성을 함락시키실 때 말입니다. 어찌하여 전술 회의에서 명 받은 바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홀로 책임을 떠안고 나서신 겁니까?”
다른 이가 그리 물었다면 그 저의를 의심했겠으나, 천홍은 딴생각 따위 요만큼도 품을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윤은 곡해하지 않고 그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 설명해주기로 했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은증왕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지 느껴지느냐.”
“예.”
“본디 계획했던 대로 흑성부대가 그리 쓸어 버렸다면, 과연 환호와 경외가 돌아왔을까? 아닐 것이다. 결과와는 아무 상관 없이, 지금 저러한 시선을 고스란히 우리가 받게 되었겠지.”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 그 뜻을 온전히 깨닫기까지 천홍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 어… 생각해 보니, 하아… 정말 그렇겠네요.”
작은 한숨을 덧붙인 그가 삽시간에 풀 죽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윤은 아직은 세상을 모르는 천방지축 이능력자에게 설명을 더해 주었다.
“인간은 본디 자신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법이다. 그것이 강력한 아군이든, 무력한 포로이든.”
앞서나가는 둘의 대화를 귀에 담은 무흔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해보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모를 감정이었다.
‘생김새만으로도 꺼려지는 백자(白子)와 대단하게 잘나신 너희 이능력자들이 어떻게 같겠어. 주 국공의 헤아림이 참으로 얕고 가소롭구나. 그대들은 영웅이고, 이 사람은 저주받은 괴물인 것을.’
무흔은 손목에 감긴 밧줄을 내려다보았다. 궤짝에 숨어들기 직전, 막연히 꿈꾸었던 그 자유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잠깐이나마 품었던 그 희망과 기대감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새삼 울컥해졌다.
‘내가 저주를 떠안고 태어난 것이 맞나 보다. 이리 끊임없이 속박되는 삶이라니….’
무흔은 만인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묶인 두 팔을 뻗어 나무 창살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마음을 그렇게 다잡는다 한들 소름 돋는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 해서 차마 좌우를 돌아볼 수 없었던 무흔은 제 바로 앞에 가고 있는 윤의 등에 눈을 고정했다.
꼿꼿하게 세운 단단한 허리 위로 흔들림 없는 넓은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오만해 보이는 당당함조차 불쾌했다.
성문을 나서면 좀 나을까, 하던 무흔의 바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성문에서부터 효명군의 주둔지에 이르기까지, 그를 구경하기 위해 건원의 전 군병들이 시야에 닿는 곳을 꽉 메운 상태였다.
윤이 행렬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말에서 내린 그가 무흔에게로 다가왔다.
“내리시오.”
“왜?”
“말을 탈 줄 아나?”
“모르지. 내가 만진 말은 저주받는다 하여 아무도 오르지 않으려 드니, 허락될 리가.”
하물며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조차 무흔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손을 탄 동물들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재앙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오라 말했잖나.”
윤이 손을 내밀었다. 무흔은 이게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하면서도 일단 커다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성문 앞의 광활한 대지를 꽉 메운 구경꾼들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괴롭게 느껴졌다.
“주둔지에 마련해 둔 마차까지는 내 말을 같이 타고 갈 것이니 꽉 붙드는 게 좋을 거요.”
윤의 말은 단연 눈에 띄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암흑색으로,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그의 주인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무흔을 태우기 전, 윤이 말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서는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말에 오르시오.”
밧줄로 손이 칭칭 묶인 무흔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결국 윤이 무흔의 허리를 붙들어서는 가느다란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흡!”
당황한 무흔은 숨을 급히 들이켜고는 윤이 쥐여주는 고삐를 있는 힘껏 잡았다. 말의 등에 일단 어찌 앉기는 했으나, 지면에서 상당히 높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덜컥할 정도로 놀랐다.
이어 윤이 말에 올랐다. 당연하게도 다리를 벌리고 밀착해 앉았으며 그의 복부와 가슴이 무흔의 등에 닿았다.
가뜩이나 말을 처음 타 긴장한 무흔은 그 서늘한 갑옷의 느낌에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이것을 두르시오. 그럼 좀 낫겠지.”
윤이 자신의 양어깨에 고정된 두봉(=斗篷, 망토)을 풀어냈다. 밤처럼 새카맣고 커다란 천이 무흔의 어깨에 걸쳐지고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무흔은 이제야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하얀 머리카락 한 올 바깥으로 나오지 않도록, 창백한 낯빛이 드러나지 않도록 도톰한 천을 잘 정돈해 가슴 위로 여미었다.
그렇게 무흔은 편안한 어둠 속에 숨었다.
“출발.”
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진동에 당황한 무흔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윤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가 제풀에 놀라 얼른 허리를 바로 세웠다.
“왜 날 이런 식으로 데려가지?”
“효명성주는 잔인하고 매정하여 백자인 포로를 눈요깃거리로 삼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남의 입으로 듣는 것은 사양이라.”
“허….”
“또한, 그대가 딱히 관심받길 좋아하는 종자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나를 동정하는 거요?”
“물론. 당연한 것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무흔은 뺨이 확 달아올랐다. 모두가 저를 기피하는 것에는 익숙했으나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부끄러울 정도로 스스로가 초라하게 여겨졌다.
“갑자기 너그럽게 구는 이유가 뭐요? 아까 천홍이란 자와 나눈 대화 때문에 이러는 건가?”
“응? 그런 것은 아니고. 그대가 딱히 저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야유를 받을 필요 있나. 몸에 힘이나 좀 빼시오. 올라탄 이가 긴장하면 말이 불편해하는 법이니.”
“아….”
“은증왕을 중경으로 데려가는 것이 나의 임무이지, 굳이 치욕을 처발라서까지 끌고 갈 필요는 없지 않겠나.”
“애초에 함거에 태우질 말든가.”
“걷지도 못하는 자를 말에 올릴 수는 없었소.”
무흔은 투덜대며 제 몸을 뒤덮은 천을 더 바짝 당겨 목덜미 즈음에서 움켜쥐었다. 몸을 요란하게 움츠리자 말이 엉덩이 아래에서 요동쳤다.
“가랑, 워, 워….”
윤이 몸을 깊게 숙여 말을 달래고 아름다운 긴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자 말은 다시 안정적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로 커다란 몸이 제게 밀착되는 통에, 무흔은 심장이 터져나갈 지경이 되어 버렸다. 사내의 숨결이 낯설게도 제 귓가에 바짝 스쳤다.
“거 참, 얻어 타는 주제에 말 더럽게 안 듣네.”
“뭐라?”
“과하게 몸을 굳혀 내 가랑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 이거요. 알아듣겠소?”
“가랑이를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무흔은 화들짝 놀라 되묻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내내 뒤에서 단단하다 느꼈던 것이 갑옷인 줄로만 알았는데… 불편하다니!? 나를 상대로, 설마 이자가 발, 발정을….’
무흔은 아예 허리를 뒤로 틀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아 윤의 다리 사이를 확인하고 다시 위로 치켜들어 윤의 표정을 확인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경악에 찬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허, 뭘 생각하는 거요. 귓구멍이 막혔는가? 내 말의 이름이 가랑(佳郎)이오. 아름다울 가에 사내 랑.”
윤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서는 무흔의 허리를 꽉 끌어당겨 제게 몸을 밀착시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 데다, 말 위에 올라앉아 있었으니. 무흔은 피할 곳 없이 윤의 몸 안에 갇혀 버렸다.
“무슨 짓이야! 이거 놓으시오!”
“가만히 좀 있으라고. 가랑이, 아니 내 말이 푸르릉거리는 걸 못 느끼겠소? 불편하다잖아! 내려서 묶인 채로 질질 끌려 남은 길을 걸어가고 싶지 않으면 말 들으시오.”
“얌전히 있을 테니, 안지 말라고!”
“가랑은 그 어떤 말보다도 빠르고 강인하나, 무척 세심하고 예민한 아이라. 이리 그대를 태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시오.”
“고맙소, 충분히 고마워. 허나 내 허리에 두른 팔은 치워주시는 게 좋겠는데.”
“가랑이 그쪽 때문에 심기가 상해 날뛰게 되면, 나야 말 등에서 허벅다리로 잘 버티며 온전히 머물 것이나, 그쪽은 아마도 대번에 떨어져 바닥에 구르게 되겠지. 그 꼴이 나고 싶나?”
안 그래도 흑마가 아까보다 거칠게 걷는 것에 무서움을 느꼈던 무흔은 정말로 인형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숨만 들이켜고 내쉬고, 그 와중에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여전히 꽂혀 있을까 차마 겁이 나서 눈도 들 수 없었다.
윤이 그를 꽉 끌어안고 있기에 무흔의 머리는 윤의 한쪽 가슴에 닿아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들자 반대쪽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천홍에게 들은 대로 흑성부대의 흉갑 좌측 상단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무흔은 눈에 들어오는 두 글자를 나지막이 읊었다.
“주. 윤.”
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 품에 안고 있는 이가 따뜻하다는, 그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던 차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란 윤은 예기치 못하게 울린 제 이름에 자연스레 반응하지 못했다. 움찔하며 무흔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갑옷에 글자가 적혀 있기에… 그저 읽었소만. 혹 국공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된다는 법도라도 있나? 왜 그렇게 놀라는데?”
“법도까지야, 보통은 누군가 멋대로 성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지.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은증왕, 무흔.”
무흔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입에서 제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
고개를 들어 윤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새카만 천이 어깨로 툭 떨어져 내렸으나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럴 정도로, 무흔은 방금 귀에 닿은 자신의 이름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무흔의 머리카락과 얼굴이 드러남과 동시에, 소문의 그 은증왕을 보고자 행렬 양측에 길게 늘어선 건원국 병사들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일었다.
그제야 무흔은 당황하며 흘러내린 천을 움켜쥐었다.
“이런.”
윤의 입술 사이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좌우로 늘어선 인파가 과하게 술렁이고 또 무흔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통에, 그들을 태우고 있는 말은 결국 성질을 내고야 말았다.
“히히힝!”
효명성주의 애마답게 가랑은 새까맣게 윤기 나는 털과 단단한 다리, 쭉 뻗은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성질만큼은 외형처럼 곱지 못했다.
말은 콧김을 거세게 내뿜어대며 결국엔 제 등에 자리한 불청객을 떨구어내려 앞발을 높이 들었다.
“으악!”
비명과 동시에 무흔의 몸이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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