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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6화 (6/85)

#006화

나령과 천홍이 은증왕의 침소에 들었을 때, 바닥에는 어제 입었던 하늘하늘한 긴 바지와 화려한 겉옷이 널브러진 채였다. 침대 위에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긴 형체가 있었다.

“은증왕, 기상하십시오.”

나령은 어제 천홍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소문의 그 백자를 볼 생각에 잔뜩 들떴다. 천홍이 은증왕을 부르고 또 불렀건만 답이 없자,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은증왕, 가실 시간입니다.”

참다못한 천홍이 이불을 살그머니 들추었다. 그에게 들러붙어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던 나령은 순간 사색이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 은증왕이 없습니다!”

은증왕의 거처를 감시하던 병사들의 수는 스물이었다. 침실 창문 바깥에 둘, 전각 내부에 둘, 그리고 대문 앞에 둘. 나머지 열넷은 사람 키보다 훌쩍 큰 냉궁의 담을 따라 촘촘한 간격으로 서 있었으니, 누군가 잠입하기도 빠져나가기도 불가능했다.

“이런 감시를 뚫고 은증왕이 사라졌다?”

병사들이 하나같이 드나드는 이는커녕 발자국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하자 윤은 짜증이 솟았다. 가뜩이나 간밤에 받은 지인이 시원찮은 탓에 심기가 뒤틀린 상태였다.

“혹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을지 모른다. 벽이나 바닥에 특별한 장치가 있는지 철저히 찾아.”

병사들이 내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환이 병사 둘을 데리고 윤에게로 왔다.

“이들이 제게 이실직고를 하였습니다. 주군께 속히 말씀드리거라.”

두 명의 병사는 품에서 각기 금가락지 하나와 은비녀를 꺼내 윤 앞에 내밀었다. 동시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저희 잘못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이어질 내용이고 뭐고, 날뛰는 기혈 탓에 윤은 버럭 화부터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애써 참고 그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은증왕이 청하기를, 자신에게 평생의 벗이 되어준 물건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얼마나 시간을 주었는데?”

“그가 악기 연주를 제법 오래 하였고, 그런 후에야 짐을 싸기 시작하였습니다. 침소에 불이 꺼지기까지 반 시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나무 아래에서 저희가 시간을 보내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은증왕이 짐을 다 싸고 침소에 든 상태였습니다.”

“자러 가면서 너희들에겐 일언반구 없더냐?”

“…예. 잠들 수도 있다고 은증왕이 미리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자는 것은 너희들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방에 들어서니 바닥에 입고 있던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희 잘못입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병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윤은 후, 하고 길고 긴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화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기혈이 정화되지 못한 상태로 분노를 내뿜게 되면 그 뒤처리가 말도 안 되게 고역이라는 것을 이미 수차례 경험한 바 있었다.

“처분은, 뇌물 수수에 대한 건만 벌할 것이다. 가 봐.”

“으흑, 감사합니다, 주군.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가서 은증왕이나 찾아!”

병사들이 나가자마자 이환이 금은보화로 그득한 커다란 나무함을 들고 나타났다.

“주군, 어제 은증왕이 챙긴다던 패물함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 많은 걸 다 두고 가는 것인가? 허면, 가져갈 짐에는 이것 말고도 챙긴 패물이 더 있다?”

“모후께서 유품으로 남긴 재물만을 챙겼나 봅니다. 서가를 돌아보시겠습니까?”

냉궁에서 침실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서가였다. 문을 열고 발을 들이자마자 책 냄새가 그득했다.

“와… 주군, 효명성의 서가 그 이상입니다.”

“유폐된 황자가 거하는 것치고는 전각의 규모가 제법 크다 하였더니, 이 때문이었나.”

“이리 많아서야, 책 몇 권 드는 자리 나는 자리 티도 안 나겠습니다.”

윤은 서가를 쭉 둘러보며 물었다.

“책은 얼마나 가지고 간다 했지?”

“그렇게까지 자세히 묻진 않았습니다. 궤짝을 제법 큼지막한 것으로 가져다주었으니 원하는 만큼 넣었겠지요.”

“얼마나 크기에?”

“이 정도… 25현 쟁이 들어가고도 남습니다.”

거구의 이환의 양팔을 쫙 펼치는 순간, 윤의 눈에 의심의 빛이 솟았다.

“네가 말하는 그 쟁은, 저 벽에 기대어 있는 저 물건이냐?”

서가의 한쪽 벽에 붙은 선반에는 갖가지 피리와 대나무로 된 퉁소, 단소가 놓였다. 그 옆에는 13현 쟁, 18현 쟁, 그리고 문제의 25현 쟁이 열을 맞춰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합니다. 아니 어찌 저것을 짐에 넣지 않고… 헉! 설마!”

“궤짝은 지금 어딨나?”

“새벽에 내어갔다 들었습니다. 효명성으로 가는 짐을 한데 모아 싣는 중이니 아마 지금쯤….”

“당장 그리로 안내하거라!”

하역장에서는 그득하게 쌓인 물건들이 차곡차곡 수레에 실리는 중이었다.

병사들은 출발 준비가 완료된 짐부터 조속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문제의 궤짝을 찾아냈다. 뒤주보다는 가로가 길고 관보다는 짧은 큰 나무함이었다.

바닥 네 군데의 모서리가 무쇠로 한 번 더 마감되었고, 경첩과 잠금쇠는 황동으로 큼직하게 제작된 견고한 물건이었다.

윤은 성질이 턱밑까지 오른 채로 궤짝 앞에 다가섰다.

“다들 물러서. 내가 열지.”

윤은 큼직한 나무 상자를 향해 손을 쫙 폈다.

툭, 끼익, 툭, 투둑.

제일 먼저 잠금쇠가 떨어졌고, 그다음으로 뚜껑의 경첩을 고정시키는 쇠못이 뽑혀 나왔다. 바닥의 모서리를 받치는 네 개의 무쇠 판이 바깥으로 튕겨나가는 순간, 쿵 하는 울림과 함께 궤짝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몸통에 해당하는 네 개의 나무판이 단번에 벌어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큼지막하고 깊은 궤짝 안에는 무흔이 웅크려 있었다.

그 모습을 윤은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안 들킬 곳에 숨어 계셨습니다?”

윤의 입에서는 비아냥부터 튀어나왔다. 그가 무흔의 몸 위로 툭 떨어진 묵직한 나무판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으윽….”

긴 다리를 바짝 접어 무릎을 가슴에 대고 웅크렸던 무흔은 신음을 뱉었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이 부셔, 장갑을 착용한 손으로 얼굴부터 가렸다. 제법 무게가 있는 뚜껑이 내려앉은 충격 탓에 몸도 욱신거렸다.

그러한 와중에도 실패, 그 단어만이 머릿속을 뱅뱅 돌며 저를 비웃었다. 탈출을 계획할 때까지만 해도 천재일우의 기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리 금세 발각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일어나시오.”

“불가하오.”

“뭐라?”

“몸이 굳어… 못 움직이겠어.”

무흔은 마치 어머니의 복중 태아처럼 둥글게 몸을 굳힌 채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누운 그 엉성한 모양새에 실소가 나올 법도 했으나, 윤의 얼굴엔 웃음기가 싹 빠졌다. 목소리에는 짜증이 실렸다.

“이 말도 안 되는 난리 탓에 출발이 늦어졌어.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일어나시오.”

팔꿈치로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한 무흔은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푹 수그린 고개 탓에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힘을 주는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리 숨어 성을 빠져나가면,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여겼나?”

“안 될 것은 또 뭔데. 기회를 보아 얼마든지… 윽… 주 국공, 몸이 풀릴 때까지 좀 기다려주면….”

“그럴 여유 따위 없어.”

긴 머리카락이 쏟아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무흔은 눈을 치켜뜨고 윤을 올려다봤다.

둘을 병풍처럼 둘러친 병사들은 그 모습에 숨을 집어삼켰다.

오싹함을 느끼는 이도, 괴물을 쳐다보듯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찌푸리거나 혹은 아예 외면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생명체가 앞에 놓인 것처럼, 불안한 일렁임이 퍼져나갔다.

“일으켜라.”

윤의 명에 근방에 섰던 병사 둘이 등 떠밀려 나왔다. 저주가 옮는다는 자를 만져도 안전한 것인지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던 이들은 주군의 매서운 시선에 하는 수 없이 무흔의 양팔을 붙들었다.

“으…윽!”

무흔은 짧은 신음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몸을 굽혔던 탓에 팔과 다리가 전혀 펴지지 않는 상태였다. 다리를 어색하게 구부린 채로 몸이 들렸으니 발을 땅에 딛는 것은 무리였다.

“은증왕을 포박하라. 너희들은 저쪽의, 함거를 끌고 와. 걷지도 못할 테니 성 밖 주둔지까지 타고 나갈 것은 있어야겠지.”

윤이 가리키는 것은 나무로 된 격자 창살이 사면에 박혀 있고 머리 위까지 창살로 막힌 함거. 죄인을 호송하거나 맹수를 이동시킬 때나 사용하는 수레였다.

무흔은 손목이 묶인 채 번쩍 들려 함거에 내던져졌다. 엎어지기 무섭게 윤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항의했다.

“감히 누굴 이리 취급하는가! 몸이 풀리기를 기다려주면 될 것을.”

“정해진 시각에 맞추어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딱 질색이고, 이 사태에 대해 모두에게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것 또한 나로서는 지독하게 번거롭고 불쾌한 일이다.”

“허….”

“나의 병사들이 당신을 찾느라 쓸데없는 고생을 했어. 그 대가를 치른다 여기면 억울하지는 않겠지.”

꽉 다문 무흔의 입술과 턱이 파르르 떨렸다. 윤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독기가 서리자 보랏빛에 감도는 붉은색이 더욱 도드라졌다.

“출발한다.”

말을 탄 윤을 선두로 하여 행렬이 이어졌다. 윤의 바로 뒤로는 은증왕의 함거가 있었고,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효명군의 회군을 위한 짐과 식량이었다.

벽제성은 희로국에서 황궁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으로, 성 내에 수레가 드나드는 넓은 길이 따로 있었고 그것이 성문까지 이어졌다.

은증왕을 구경하겠다며 나온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그 대로변 양쪽을 빼곡하게 메웠다.

함거를 끄는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흔의 심장도 동시에 덜컹거렸다.

‘아주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구나. 4년 전, 황궁에서 벽제성으로 올 때는 창문 하나 없는 가마에 갇혀 왔으니… 치욕이랄 것도 없었지.’

닥친 현실은 그를 조금도 반기지 않았다.

신기함과 놀라움보다는 이질감에서 오는 혐오가 앞섰다. 더군다나 희로국 황실의 저주와 액운이라는 소문이 덧씌워져 있으니, 은증왕을 구경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못 볼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를 향한 시선들은 어찌 이리 한결같을까. 눈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듯해.’

함거를 끄는 말의 고삐를 붙들고 있던 천홍이 절망에 푹 젖은 무흔을 돌아보았다. 포로가 저리 갇혀 이송되는 일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괴물 보듯 하는 구경꾼들의 시선과 웅성거림은 잔인하리만치 적나라했다. 안됐다는 생각이 울컥 밀려들었다.

천홍이 고삐를 최대한 길게 잡아 제 바로 앞에 있는 윤에게로 다가갔다.

“주군, 주군!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천홍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리자 윤이 말의 걸음을 늦추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흔은 방금 천홍과 눈이 마주친 것을 떠올렸다. 제 얘기를 할 것이 분명한 만큼, 저 둘의 대화를 들어보려 고개를 들고 귀를 바짝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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