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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5화 (5/85)

#005화

지금껏 뒤에 가만히 있던 맹욱이 정색을 하며 무흔 앞에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주군께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내 말에 틀림이 있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정을 두고 멋대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주군께선 우리를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맹욱의 외침과 동시에 땅이 흔들렸다. 그 울림이 지극히 인위적이었던 터라, 무흔은 그가 토양계 이능력자임을 눈치챘다.

살짝 겁이 난 무흔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 국공은 자기 사람만 챙기는 자인가 보군.”

“뭐요?”

“내가 겪은 바를 그대들도 봤으면서? 아니, 사람을 허공에서 떨어뜨리라 하질 않나. 그렇게 명줄을 갖고 노는 이의 인품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이 당연하지.”

“인품? 주군의 명예를 더럽….”

이러한 와중에도 예를 차리려 드는 맹욱을 보다 못해, 천홍이 냉큼 앞으로 튀어나왔다. 불같이 열이 올라서는 그의 말을 잘라먹고 제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우리 주군께서는 힘을 거하게 쓰셔서 지금 몸도 마음도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다구요! 그리고, 아까 은증왕께 그리하신 것은 교훈을 주려던 거 아닙니까!”

“아니, 왜 이리 화를 내시오. 나는 그저….”

“우리가 그쪽을 뭘 어쩐다고 함부로 죽느니 뭐니 합니까? 자기 목숨 우습게 아는 게 뭐 자랑이라고. 흥, 주군께선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마음 씀이 깊은 분이에요!”

“뭐… 거느린 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니 공명정대하기는 한가 보군.”

잔뜩 움츠러든 무흔의 대답에 씩씩대던 둘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공명정대함을 논하자면, 그들의 주군은 모두를 너무도 똑같이 대했다. 서운할 정도로.

맹욱이 은증왕을 노려보며 말을 더했다.

“백성을 보호하라 하늘에서 주신 능력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주군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인지라, 주군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더는 주군의 진의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말을 맺기 무섭게 맹욱은 걱정이 솟았다.

저나 천홍이라면 지인 한 번에 냉큼 몸이 가뿐해지겠지만, 그의 주군은 아니었다. 오늘의 경우, 지인 서너 번으로는 정화가 어림도 없을 터였다.

이환은 맹욱의 어깨를 꾹 감싸 쥐었다. 생산성 없는 언쟁에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주군께 지인을 받으시라 잔소리를 올릴 터이니, 너희 둘은 은증왕의 호송이나 준비해. 필요한 짐이 있다 하시거든 싸는 것을 돕고.”

짐을 싸라는 이환의 말에, 순간 무흔의 눈에 생기가 돌았고, 그것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흔은 막 냉궁을 나서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종사관. 궁금한 것이 있네.”

“말씀하시지요.”

“내가 포로로 끌려가면 건원의 수도에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환은 눈을 끔뻑였다.

“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물으십니까?”

“짐의 양을 가늠해보려 하지. 궤짝이 필요한데. 큼지막한 것으로 이 정도.”

무흔은 양팔을 쭉 벌려 대강의 길이를 표시했다.

지금까지 이들의 태도로 보아, 이야기책에 등장하는 포로처럼 자신을 험하게 취급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짐을 싸라 하는 것은 황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주는 것이리라.

“그리 가져갈 것이 많습니까? 옷가지나 장갑쯤이야 작은 봇짐으로 가뿐할 텐데요.”

“25현의 쟁(箏,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을 넣으려 해. 저쪽 방의 서가를 아직 보지 못하였는가? 내 보유하고 있는 장서가 수천 권이니 이 중 일부는 소지하고 싶어. 이곳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지.”

“아….”

“내 평생, 벗 하나 없이 서책과 음률만을 동반자 삼아 온 인생이라….”

무흔은 말끝을 흐리며 애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자태가 너무도 처연한지라, 이환의 심중에 동정심이 듬뿍 일었다.

“적당한 것으로 구해보지요. 일단은 서책을 추리십시오.”

“참고로, 무게가 좀 나갈 것이네. 책도 책이지만 보석과 금붙이가 좀 있거든.”

“패물은 압류 물품이니 여쭈어보고 오겠습니다.”

“돌아가신 모후께서 유품으로 남겨주신 것들이야. 이 괴물을 유일하게 아껴주시던 분이셨네. 어머니께선 아들이 포로로 잡힌 비참한 꼴을 보지 않으시고 세상을 뜨셨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무흔은 몸을 슬쩍 틀어서는 묶인 손을 힘겹게 들어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쳤다. 당황한 이환이 얼른 답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유품은 챙기십시오.”

“고맙소.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야.”

이환은 아까의 언쟁으로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는 세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냉궁을 나섰다. 그의 등 뒤에서 무흔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는 것은 보지 못했다.

*

석양이 지는 벽제성은 발 닿는 곳마다 피와 시신이 그득했다. 건원의 병사들은 이를 성 밖으로 옮겨 불태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환은 걸음을 재촉했다.

‘함락은 주군 홀로 하셨을지언정… 결국 병사들은 모두 칼을 뽑아 피 맛을 보았다.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걸까. 주군께서는 이 또한 염두에 두셨겠지.’

일반 병사들이 무력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평생 살며 한 번 보기도 힘든 이능력자의 힘 앞에 일개 병사의 의미는 없어질 테니. 그로 인한 허무함, 심리적 반발 또한 반드시 있을 터였다.

이환은 냉궁에 감시 병력을 늘리도록 지시하고 효명군에 철수 준비부터 명한 후, 대장군의 막사에 대기했다.

군사 회의를 마치고 나온 윤의 얼굴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회의 내용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화가 시급할 정도로 기가 흉폭해진 탓이었다.

“주군, 이제 지인부터 받으셔야….”

“너는 가서 은증왕이 탈 마차를 준비해. 제일 큰 것으로. 내일 아침 효명군이 떠날 때 정예 1군단과 흑성부대의 절반은 나와 함께 그를 황궁으로 호송한다.”

“예. 마차는 황자의 품위에 맞는 것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품위는 무슨. 내가 그와 동행하려 함이야. 가는 동안 심문을 할 예정이다.”

“넉넉한 마차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 은증왕의 포박은 풀어주는 게 어떨까요? 3교대로 20명씩 감시를 돌리고 있습니다. 잠이라도 편히 자게 해 주시죠.”

“그가 불쌍한가?”

“하하, 좀… 안됐잖습니까.”

“자네답군. 뭐 그리하게.”

지인을 받으라 주군을 등 떠민 후, 이환은 벽제성의 창고를 뒤져 맘에 쏙 드는 큰 마차를 확보해 두었고, 그다음으로 무흔이 요구한 궤짝을 찾았다. 어느 정도의 크기가 알맞을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모자란 것보다는 남는 게 낫겠지.”

*

그 궤짝이 무흔에 처소에 도착한 것은 밤하늘에 달이 뜬 지 한 식경쯤 지났을 즈음이었다. 이능력자들이 막사로 철수한 후, 스무 명의 건원국 병사들이 그곳을 지키던 중이었다.

무흔은 마루 위에 놓인 커다란 궤짝을 보고서는 신이 났다.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두 명의 병사를 향해 미소를 건넸다.

“짐을 싸는 것을 도울 필요는 없네.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라, 남들이 보는 것이 솔직히 부끄러운데… 둘이 좀 멀찍이 자리하여 내게 시간을 줄 수 있겠는가?”

병사들이 난감해하자 무흔은 방으로 들어가 묵직한 패물함을 끌어안고 나왔다. 금으로 된 가락지를 둘 꺼냈다. 병사들은 받을 수 없다며 대번에 물러섰다.

“다른 이들은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자네들은 운도 없게 나를 지키고 있으니 이게 무슨 고역이란 말인가.”

무흔은 은으로 된 비녀를 하나씩 더 꺼내어 금가락지와 함께 그들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모후께서 남기신 유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압류될 것이야. 너희 윗대가리의 배만 불릴 패물이란 말이지. 자네들이 요만큼 챙겨서는 티도 안 나. 포로로 끌려가면 나는 옥에 갇힐 것인데… 아주 잠시만이라도 나의 마지막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게.”

병사들의 눈빛이 누그러지는 듯하자, 무흔은 얼른 쐐기를 박았다.

“내 평생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과 고요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그러하네. 그대들은 고향에 가족과 벗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직….”

무흔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손을 꼭 맞잡아 가슴에 대고 몸을 웅크려 파르르 떨었다.

건원국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금과 은을 받아들고는 이를 재빨리 옷 안에 숨겼다.

“저희도 입장이 있으니 담 너머로 나가 대기할 수는 없습니다. 마당의 고목 아래에 있을 터이니 짐을 다 싸시면 불러주십시오.”

“고맙네. 혹 내가 부르는 것을 잊고 잠이 들 수도 있으니, 그때는 내가 싸 둔 짐짝 먼저 내어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벽제성에서 유폐된 황자로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무흔은 25현 쟁을 연주하고, 그 옆에 놓인 7현금을 뜯고, 그다음에는 활을 들어 얼후를 켜고, 그것도 모자라 네 종류의 길고 짧은 관악기를 한 번씩 죄다 불었다.

담장을 빙 둘러 감시하던 병사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애절한 음률에 동정심이 일었다.

그 소식은 벽제성 바깥에 진을 치고 있는 효명군에게까지 전해졌다. 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밤중에 홀로 연회라도 여는가?”

“평생을 함께해 온 악기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모양입니다. 음률과 서책만이 벗이었다 하지 않습니까.”

이환은 내일의 일정에 대한 보고를 위해 막사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25현 쟁은 꼭 가져가고 싶다 하여 큼지막한 궤짝을 준비하여 주었습니다.”

“무슨 여행이라도 가는 줄 아나.”

“그 정도는 허락해주시지요. 손때 묻은 악기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당연합니다.”

비록 적국의 황자이기는 하나, 원치 않는 모습으로 태어나 평생을 갇혀 산 사람이다. 몸집과 달리 마음이 여린 이환은 또다시 포로로 갇힐 그의 처지가 불쌍했다.

이환의 호소에 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말한 마차는 제대로 준비하였는가.”

“물론입니다.”

다음 날 아침, 윤은 기가 찼다. 부관의 일 처리가 이런 식으로 예상을 비껴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환이 막사 앞에 자랑스레 준비해 둔 것은 벽제성주의 부인이 사용하던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꽃 조각이 마차를 빙 둘러 장식되어 있었다. 금박이 입혀진 꽃잎들은 화려함의 극치요, 섬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장식이라도 좀 떼어낼까요?”

마차의 외양으로 인해 심기가 불편한 듯한 윤의 눈치를 보며 이환이 조심스레 말했다.

할 말을 잃은 윤이 이환을 노려보던 그때 근방에서 장난을 치던 천홍과 치유자 나령이 쪼르르 달려와 윤에게 인사를 올렸다.

“주군! 나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어딜 가십니까?”

“은증왕을 데려와야지.”

나령과 천홍이 서로 시선을 나누고는 주군을 향해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이댔다. 말에 오르려는 윤에게 바짝 들러붙었다.

“이환 형님 대신 저희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주군, 허락해 주십시오.”

둘의 나이를 합치면 딱 40이니, 한참 호기심이 끓을 나이였다. 하는 수 없이 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신이 나서 따라붙었다.

은증왕의 처소에 이르자 병사들이 우렁차게 인사부터 올렸다.

“주군, 오셨습니까!”

“은증왕은 기상하였는가?”

“아직인 듯합니다.”

윤은 천홍과 나령을 먼저 들여보냈다.

“너희들이 가서 은증왕을 깨워오거라.”

“네! 주군!”

둘은 침소 문을 요란하게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나령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주군! 은증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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