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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4화 (4/85)

#004화

무흔은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눌려 주눅이 든 꼴을 적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그들을 흘겨보며 투덜댔다.

“옷 갈아입을 시간을 좀 달라 했거늘, 참으로 야박하네.”

무흔은 어색하게 몸을 틀었다.

마지막으로 남들 앞에서 맨몸을 보인 것이 대체 언제인지, 닿으면 저주가 옮는다 해서 목욕을 할 때도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그저 준비된 물에 홀로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았다. 옷을 갈아입을 때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선 천홍이란 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와… 이환 형님, 보십시오!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가 보랏빛입니다. 혈왕이라고들 하기에 저는 완전 빨간 핏빛일 줄로만 알았거든요.”

“천홍!”

눈치코치 없는 발언에 당황한 이환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무흔은 기분이 단번에 상했다. 찢어진 옷가지를 그러모아 가슴을 가리고, 소리를 낸 자를 돌아봤다.

‘이건 뭐야. 날 능멸하는 새로운 방법? 이 몸을 욕보이기 전에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겐가.’

그러나 천홍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흔은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했다.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 혐오와 공포, 그 차가움에 익숙했기에.

하지만 그는 달랐다. 이리 면전에서 거침없이 신기하다 말하는 이는 지금껏 없었을뿐더러, 천홍이란 청년의 땡글땡글한 눈동자엔 가식이 없었다.

건원의 사람이라 해서 다 야만인이고 무자비한 건 아닌 걸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는 효명군에 종사관으로 있는 이환이라 합니다.”

셋 중 가장 연배가 있는 자가 대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했던 무흔은 그를 뜯어보았다. 서른 전후로 보이는 큰 몸집의 무관이었다.

“종사관이면, 효명성주의 부관인가?”

“그러합니다.”

무흔은 금세 깨달았다. 이들에게서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저 뒤에 선 남자는 혈왕이고 뭐고라는 식의,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겁간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던 염려가 오히려 한결 누그러졌다.

침소에 나타난 자들을 그리 하나씩 뜯어보던 무흔은 민망하게도 자신이 여전히 상반신을 훤히 드러낸 상태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잠깐 의복을 갖출 시간을 줄 수 있겠어?”

이환이 일행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서려 했건만, 그중 하나가 쏙 빠져나갔다.

무흔은 속이 비칠 정도로 얇고 보드라운 내의를 입고 매듭을 묶는 중이었다. 겉옷을 꺼내 드는데, 천홍이 불쑥 곁으로 다가와서는 훈수를 두었다.

“그보다 더 두꺼운 옷은 없습니까?”

무흔은 깜짝 놀랐지만, 아닌 척 답을 건넸다.

“이 옷이 계절에 알맞은 것 같은데.”

“옥에 갇힐 수도 있는데 더 따뜻한 것으로 입어야죠.”

“투옥이라. 하아… 포로이니 응당 그리되겠지.”

무흔은 옆에 놓인 큼직한 장의 문을 열었다.

“우와!”

차곡차곡 쌓인 의복의 화려함에 천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흔은 그중 도톰한 예복을 한 벌 꺼내어 펼쳤다. 하얗게 빛나는 긴 상의는 섬세하고도 화려한 자수와 함께 많은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천홍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심하리만치 툭 내뱉었다.

“그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생김새로 인해 이목이 집중될 텐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간에 서 있던 맹욱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쳇, 맹욱 형님… 은증왕께선 별말 없는데 왜 그러십니까? 내가 뭐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천홍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옷깃을 여미는 은증왕을 바라보다 이내 화려하게 꾸며진 방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리 사치스러운 방에 무슨 은경 하나가 없나.”

무흔은 못 들은 척 돌아서서 옷의 매무새를 다듬었다.

희로국에서는 백자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면 그 액운과 저주가 반사되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여겼기에, 은증왕의 방에 은경을 넣는 건 황실 내 금기였다.

“내 물건을 하나 더 챙겨도 될까?”

무흔은 맞은편 벽에 놓인 가로로 긴 서랍장을 가리켰다. 그 앞에 서 있던 이환이 옆으로 비켜섰고 무흔은 맨 윗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수십 개나 되는 장갑이 열을 맞추어 곱게 놓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본 이환이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여기에 무기라도 숨겼을까 봐?”

살포시 웃으며 농을 건넨 무흔은 손끝으로 장갑을 훑으며 이내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건원국에선 아는지 모르겠으나… 희로국에서는 나와 닿으면 저주가 옮는다 하지. 장갑 착용은 필수요.”

무흔이 고른 것은 옷과 같은 새하얀 색의 비단 장갑이었다. 손등에는 붉은 실로 禁(금할 금)이라는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

장갑을 착용한 무흔은 침소를 나와 널따란 마루로 향했다. 이환이 난감한 얼굴로 포승줄을 꺼내 들자 무흔은 저항 없이 두 손을 내밀었다.

“주군께서 회의에 들어가셨으니, 명이 있기까지 이대로 처소에 계시면 되실 것입니다.”

“하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었나….”

무흔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듬뿍 묻어났다. 희로국의 황궁에서 이리로 거처를 옮기던 날, 문 하나를 넘어섰던 해방감이 떠올랐다. 비록 이곳에 다시 갇히기는 했으나 딱 한 번만 더 그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무흔은 답답함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캐한 연기가 솟는 허공을 가로질러 매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오늘의 승전보를 건원국으로 전하는 것이리라.

언제나 그렇듯, 냉궁의 마당에 나와 하늘을 나는 새를 볼 때면 그 자유가 부러웠다. 자그마한 참새, 까치, 산비둘기 따위만 보다 시원하게 활공하는 매를 보고 있자니 부러움이 더욱 격하게 솟구쳤다.

“건원국 장수들은 매를 기른다지.”

“예.”

“벽화로만 보았었는데, 실제로 매가 저리 큰 짐승일 줄이야. 비둘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아.”

“물론입니다. 전서구를 날려 소식을 전할 때와 속도 또한 큰 차이가 있지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 무흔의 손목에는 줄이 수차례 감기고 이내 매듭이 단단하게 묶였다. 무흔의 눈이 이환의 팔뚝에 채워진 가죽 보호대로 향했다.

“그대도 매를 기르는가?”

“이것은 저희 주군의 매를 위함입니다.”

거듭되는 주군 소리에 무흔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아까 나무 아래로 떨어지던 때의 아찔함이 떠오른 탓이었다. 무릎을 굽힌 모양새로 윤에게 살려 달라 했던 그 굴욕의 순간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희로국에서는 나와 닿을 뻔하기만 해도 다들 기겁을 하며 나동그라지는데. 그자는 내가 얼굴을 움켜쥐는데도 움찔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허, 대단하신 특상급 이능력자라 이건가?’

주군이라 불린 그자는 북부의 효명성주. 국공 주윤이 분명했다.

온 대륙을 통틀어 그 숫자가 다섯 손가락에 꼽힐까 말까 하다는 ‘금’의 힘을 다루는 이능력자. 모든 금속을 일순간에 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엿가락처럼 늘이기도, 또 다른 형체로 빚어낼 수도 있다 했다.

순간 소름 돋을 정도로 싸늘하게 그가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이 뇌리를 스쳤다.

그 시커멓고 차가운 갑옷과 등에서 펄럭이던 길고 검은 천이 새삼 아니꼽게 느껴졌다.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저를 괴물 취급하지 않는다 해서 건원의 더러운 본성까지 다를 리 없었다.

이 세 사람도 분명 이능력자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조금 전, 나무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자를 떠올렸다. 검을 타고 하늘로 오르던 윤의 모습을 생각하니 다른 궁금증이 일었다.

“그대들도 이능력을 쓰나?”

무흔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맞은편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까 본 이능력이 신기했거든. 그대들은 어떤 능력인가 궁금해서 물었어.”

천홍이 앞으로 한 발 나서려 하자, 맹욱은 그의 뒷덜미를 붙들었고 이환은 팔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천홍은 배시시 웃으며 자신 있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자그마한 주홍빛의 불꽃이 허공에서 동그랗게 타올랐다.

“전 화염계 이능력자입니다. 소박하게나마 궁금증이 채워지셨는지요?”

무흔의 창백한 뺨 위로 삽시간에 홍조가 차올랐으며, 커다란 두 눈동자에는 자색의 수정보다도 더 반짝이는 빛이 그득히 감돌았다.

“참으로 신비로워. 어찌 그러한 것이 가능한지….”

“저희 주군의 능력에 비하면 잔재주죠.”

“불을 만들어내다니, 충분히 놀라운 것을! 그럼, 종사관은 무슨 능력이 있나?”

무흔이 이환을 향해 묻자 천홍이 싱글싱글 웃으며 대신 답을 건넸다.

“이환 형님은 무능력잡니다.”

맹욱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고, 이환은 눈을 부라리더니만 기가 차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능력자, 하고 중얼거렸다.

“헤헤, 없을 무(無)가 아니라 무예 무(武)! 무예능력자! 이환 형님은 북부 최강의 무장이십니다. 그러니 주군의 최측근인 호위무사이자 부관 자리를 맡을 수 있죠.”

이환이 멋쩍음에 헛기침을 했고, 천홍은 자신의 왼쪽 가슴 위를 가리켰다.

“효명군의 갑옷은 다 같은 흑색 같지만, 여기 이렇게… 흑성부대의 갑옷에만 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엄청 정교하죠? 임관 때 주군께서 이능력으로 직접 새겨주시거든요. 이환 형님 갑옷은 그냥 판판하잖아요.”

무흔은 둘의 가슴을 번갈아 바라보고 이환의 건장한 몸을 눈으로 훑었다. 아까 보았던 그들의 주군, 윤의 외모가 다시금 머리에 떠올랐다.

‘이자도 상당한 몸집이라 거구로 보이는데, 아까 그자는 이 종사관보다도 키가 더 컸어.’

그래서일까? 위압감이 대단했다. 자신을 움켜쥐던 손도 무시무시했고. 갇혀 살며 그리 많은 사람을 봐 온 것은 아니었으나, 윤의 얼굴이 지금껏 봐 온 그 어떤 사내들보다도 잘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둥글고 커다랗게 몸집을 불린 천홍의 불덩이는 수십 개의 작은 불꽃이 되어 허공을 빙 둘러 날고 있었다.

그걸 빤히 바라보던 무흔은 지금 제 머릿속에 든 이에 대한 질문을 건넸다.

“주 국공이 정말 그리 대단한가? 칼을 타고 나는 것 외에 또 뭘 하지?”

“우리 주군께서 마물을 상대하시는 것을 보면, 캬… 기가 막히죠. 땅속 깊이 묻힌 온갖 금속들을 솟구치게 하시어 이를 마물의 몸에 박아넣고 가르기도 하고. 장정 일곱이 들기도 힘든 긴 쇠사슬을 가벼운 실타래처럼 허공에 휘두르실 때면 그 절경에… 엄청난 위력에….”

허공에 팔을 이리저리 휘저어가며 손짓 발짓 곁들인 자랑을 늘어놓던 천홍은 짝 소리 나게 두 손을 맞잡고 신이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도 말입니다, 주군께선 벽제성 수비군의 칼이며 창이며, 갑옷, 화살촉까지 죄다 먼지로 만들어 버리셨지 뭡니까.”

무흔은 아까 나무 위에서 보았던 성벽 위의 그 불가사의한 광경에 대한 해답을 이제야 얻었다. 윤으로 인해 벽제성이 참혹하게 피로 얼룩졌다는 것을 깨닫자,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혼자? 여럿 끌고 온 다른 이능력자들은 남겨두고, 저만 빛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무흔의 어조에 비꼬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

천홍은 심각한 표정으로 불꽃 장난을 멈췄고, 이환은 사람 좋게 웃던 미소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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