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은증왕의 처소 마당에 솟은 느티나무는 이 냉궁에서 유일하게 볕이 드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장정 셋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둥글게 원을 그려 몸통을 끌어안아도 간신히 손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대한 나무였다.
그저 이능력자의 손바닥이 닿았을 뿐인데, 하늘에 닿을 듯한 그 나뭇가지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땅으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헉!”
단단하게 딛고 서 있던 발밑이 꿀렁거리는 순간, 무흔은 다급히 눈앞의 굵직한 나뭇가지를 꽉 붙들었다.
“인질 교환에 쓸 중요한 포로다. 다치면 곤란하니 살살해라.”
“예, 주군.”
윤의 목소리가 무흔의 귀에 닿았다. 인질의 교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무흔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꽉 쥔 채로 발을 떼자, 허공에 몸이 위태롭게 매달렸다.
‘저자들에게 몸을 내어주기도 싫고, 황궁의 지하 석전으로 돌아가는 건 더 싫어. 죽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야.’
생각은 그러했으나, 무서웠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 무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리 궁지에 몰린 상황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아아….”
떨리는 숨결을 내뱉고 이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승에서 호흡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거라 그리 여기며 나뭇가지를 붙든 손을 확 놓아 버렸다.
‘이렇게 죽는구나. 나의 혼령은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겠어.’
그리 생각이 스치는 찰나, 떨어지던 몸이 공중에 훅 붙들렸다.
“이게 뭐야!?”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무흔의 허리와 몸통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가지의 단단함은 사라지고, 마치 넝쿨처럼 몇 겹으로 둥글게 몸을 조여왔다. 공포에 사로잡힌 무흔은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며 버둥거렸다.
“주군, 이대로 땅에 내리면 되겠습니까?”
한 손은 뒷짐을 진 채로, 다른 한 손을 가볍게 뻗어 무흔을 붙들어 둔 재이가 윤에게 물었다.
“놔둬 봐라. 포로의 호송을 수월히 하려면 지금 기를 꺾어두는 것도 좋겠지.”
허공에서는 아래를 향한 무흔의 외침이 울렸다.
“무슨 짓이야! 내려놓지 못할까!”
무흔은 몸에 감긴 것을 풀어내려 애써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진은 다 빠졌으니 버둥댈 기운조차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공중에 매달린 이 상태엔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걸 풀으라고! 풀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던 무흔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목이 쉬어 더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친 그는 힘을 쭉 뺀 채로 허공에서 늘어져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윤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허리에 찬 칼을 뽑아서는 그것을 띄워 두 발을 올리더니만, 위로 향해 단숨에 무흔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놀란 무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로 힘들게 구해 읽었던, 무림의 한 문파의 비급에 적혀 있던 검술 중 이러한 것이 있었다.
“어검비행술?”
“내 검술이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고, 그저 이능력이오.”
순수한 궁금증을 해결한 무흔은 목이 쉬어 갈라진 음성으로 다시 버럭 화를 내질렀다.
“사람을 이리 능멸해도 되는 것인가!”
“당신이 은증왕, 맞소?”
“아니면 누구겠나. 허, 세상천지에 이리 허여멀건 괴물이 둘씩이나 될 리가.”
무흔은 두려움을 삼키고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독기를 담아 윤을 노려보았다. 귀신같은 눈매로 무섭게 쳐다보면 매번 상대는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헌데 이자는 아니었다.
“괴물치고는 참으로 무력하군.”
지독하게도 무심한 표정으로, 윤이 나뭇가지에 얽혀 있는 무흔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눈이 무흔의 목에 걸린 회룬석 목걸이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떨어져 죽을 생각이었습니까?”
“이미 말했잖나. 파렴치한 너희들 손에 던져질 바에야 죽는 것이 낫지.”
“정녕 그리 생각하신다면야.”
윤은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명을 내렸다.
“풀어주거라.”
재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세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대로 땅에 떨어져 시체가 되어 버릴 은증왕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녀가 동에서 서의 방향으로 손목을 돌리자, 무흔의 몸에 얽혀 있던 나뭇가지들이 단번에 풀렸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무흔의 몸이 아래로 쏠리며 하강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하더니만 하복부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찌릿하고도 묘한 감각이 솟았다. 진짜 죽는구나, 싶은 극한의 공포가 온몸을 가득 채운 바로 그때였다.
바닥에 처박히기 직전, 검을 타고 내려온 윤이 추락하는 무흔의 몸뚱이를 낚아챘다.
“헉!”
무흔은 저를 받아낸 서늘한 금속의 갑옷을 남은 힘을 다해 붙들었다. 이미 상대가 자신을 안전하게 끌어안고 있었으나, 미친 듯이 내달리던 맥은 더 심하게 날뛰었다.
“여전히 죽을 마음이 드십니까?”
“하아… 하아… 아, 아니… 아니오. 하아….”
무흔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와중에 윤이 이끄는 대로 땅에 발을 디뎠다. 휘청이며 그 자리에 무너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졸지에 무릎이 꺾인 채로, 매달리다시피 윤의 갑옷에 들러붙는 꼴이 되었다.
“살려주시오.”
죽음의 위기를 막 벗어난 자의 간곡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윤은 다리를 접고 몸을 낮추어 무흔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제 좀 아셨습니까. 희로국에 억류되어 계신 우리 염록왕 전하와의 인질 교환이 이루어지기까지, 은증왕께선 목숨을 제대로 부지하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무흔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분노가 일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저 오만하고 잘난 낯짝을 찢어발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지금, 나를 가지고 놀았는가?”
“내 어찌 일국의 황자를 두고 장난질을 칠까. 목숨을 소중히 하라는 교훈을 준 것뿐이지.”
무흔은 윤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저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눈빛이 견딜 수 없으리만치 불쾌했다.
“지랄. 감히.”
무흔은 힘을 쥐어 짜내 여전히 파르르 떨리고 있는 팔을 위로 뻗었다. 윤의 몸통을 두르고 있는 갑옷의 목 언저리를 냅다 붙들어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둘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무어라 일컫는지 아나?”
“희로국 황실의 저주와 재앙을 떠안고 태어났다 하지. 과연 그 눈을 보니 혈왕(血王)이란 별칭이 제대로 이해가 가는군.”
핏빛 어린 보라색 눈동자 위로 새하얀 속눈썹이 촘촘하고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눈매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윤은 놓치지 않았다.
평생을 유폐되어 살아온 허울뿐인 황자에게 남은 것은 알량한 자존심뿐인가, 하는 생각. 그것이 전부였다.
순간 무흔의 두 손이 윤의 얼굴을 감쌌다. 길고 가느다란, 열 개의 새하얀 손가락 또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무흔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허면 이런 소문도 들어보셨나? 혈왕의 손에 닿으면 저주가 옮는다지?”
둘을 둘러싼 주변에서 헉 하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윤의 뺨에 닿은 무흔의 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윤 또한 의외의 행동에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무흔의 양 손목을 붙들어 거칠게 떼어냈다. 그 손목을 놓지 않고, 무흔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맞받아쳤다.
“애석하게 됐군. 이 몸은 이미 저주를 받은 듯하니 허술한 일격 따위 딱히 의미 없겠어.”
무흔의 가느다란 손목을 붙든 윤의 손아귀에 점점 더 힘이 세게 들어갔다.
“으윽! 놓아주…!”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린 무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이 무흔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 힘을 주어 내친 것은 아니었으나, 무흔의 기력이 쇠한 탓에 쓰러진 것이었다.
“처분이 내려지기까지 이자는 처소에 가둬두고 감시해. 담을 따라 병사들을 배치하고, 전각 내부에도 감시병을 둬라.”
“예, 주군.”
고개를 떨군 채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무흔을 윤은 힐끗 쳐다보고 몸을 돌렸다. 냉궁을 떠나려는 그의 곁으로 부관 이환이 얼른 따라붙었다.
“막사로 돌아가십니까?”
“그 전에 대장군을 뵈어야지.”
“군사 회의 전에 꼭 지인을 받으시고 조금이라도 기혈을 정화하신 후에 참석을 하십시오.”
“입 다물고 짜증 안 내고 가만 앉아 있다 올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
“안 됩니다. 꼭, 받고 가십시오. 꼭!”
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냉궁을 나서자 이환은 한숨부터 푹 쉬었다. 그와 똑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토양계 이능력자인 맹욱이 다가와 이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한 선배들과는 달리, 신이 나서 냉궁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천홍이 그들 앞으로 잽싸게 달려왔다.
“이환 형님! 은증왕은 가까이서 보니 정말 하얗네요. 와… 인간이 저렇게까지 흴 수가 있나? 혹 마물이 사람의 형체로 둔갑한 게 아닐까요?”
“구미호냐? 둔갑을 하게. 포박은 했느냐?”
“손목은 못 봤어요. 어휴, 그나저나 저주라니. 아까 우리 주군 얼굴을 콱 움켜쥐는데 내가 그냥 식겁했다니까요. 소름. 아, 그런데요… 형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뭔데.”
“아까 주군께서 은증왕에게 자신은 이미 저주받은 몸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이환은 미리 허리춤에 매달아 온 밧줄을 꺼내며 근심 어린 표정을 보였다.
“지인이 잘 듣지 않는 체질 아니시냐. 치유자이시던 모친께서 살아 계시던 때만 하여도 아무런 걱정이 없으셨는데, 그 후로는 합이 맞는 이가 전무하여 늘 폭주의 위험을 안고 사시니.”
“에이… 그것을 두고 저주받은 몸이라 하신 것입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이 긴데! 치유자들이야 그 수는 원체 적지만 어린애들이 새록새록 발현되고 있으니, 찰떡같이 맞는 이 하나는 나오겠죠.”
“그리되길 내가 늘 기원하지. 은증왕은 어느 쪽으로 데려갔어?”
“제가 알아요. 이리로!”
셋이 함께 무흔의 침소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문밖에 나와 있었다. 이환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찌 포로와 같이 있지 않는가?”
“나뭇가지에 옷이 찢겼다며 은증왕이 의복을 갈아입겠다 합니다. 창문 바깥에도 두 명이 감시 중입니다.”
“안에서 자결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환이 벌컥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천홍과 맹욱 또한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아….”
그들의 눈앞에 드러난 은증왕은 정말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봄날 하늘의 구름같이, 또 겨울날의 눈같이 백색의 뽀얀 등이 일행의 눈앞에 드러났다.
상의를 막 벗어든 무흔은 제 침소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인 자들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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