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효명성주 주윤, 그가 벽제성 공격을 위해 성문 앞에 홀로 나왔던 것은 아까 무흔이 나무에 막 오를 즈음의 일이었다.
종1품 국공(國公)의 작위를 가진 그가 애초에 누군가로부터 명령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그의 아래로 공작, 후작, 백작이 즐비했고 그의 위로는 황제와 황자가 전부였으니.
그러한 윤에게 하달된 황제의 명은 지독하게도 내키지 않는 내용이었다.
벽제성 함락에는 본디 효명군만 출정시키면 되었을 것을, 그 군령을 수행하기 위해 윤은 억지로 이능력자 부대까지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선봉에 선 윤은 잠시 후 일어나게 될 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땅이 울리고 꺼짐과 동시에 저 높이 솟은 성벽이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겠지. 흙과 돌에 함몰된 적군 위로 화염계 능력자의 불덩이가 내리꽂힐 것이며, 적군의 검과 창이 그들 자신을 베어버리고 나면 무혈입성이라… 허, 누구 맘대로.’
그것이 흑성부대에 하달된 군사 작전이었다. 참혹한 아수라장 위로 손 쓸 틈도 없이 불타는 적군의 시체 더미가 쌓일 정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기색이 윤의 표정에 역력히 드러났다.
“무슨 일에든 처음은 있는 법이지.”
관록과 위엄이 그득한 대장군이 젊은 장군 주윤을 다독였다.
이능력자들이 나라 간 전쟁에 동원되는 것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이능력은 오로지 나라를 어지럽히고, 인간을 먹이로 삼는 마물을 상대하는 데 쓰여야 마땅했다.
“주 국공, 이능력을 사람에게 쓰는 것이 옳지 않다 하는 자네 뜻을 잘 아네. 허나 단번에 기선을 제압하고 적의 허를 찌를 수 있으니, 이리하는 것이 오히려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야.”
강력한 황권하에 건원국의 대륙 정복은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다.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지긋지긋한 전쟁의 끝, 이제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희로국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건원의 황제는 벽제성 함락에 두 차례나 실패한 것에 대노했고, 특단의 조치로 이능력자들을 출병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함이라 해도, 인명 살상에 이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윤의 신념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타격으로 단번에 기선을 제압하고, 전의를 상실케 하도록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다른 방법을 쓰고자 합니다. 믿고 맡겨주시겠습니까.”
건원국 북방의 효명성 성주 주윤은 감히 견줄 자가 없다는 대륙 최강의 이능력자였다. 확신과 결의에 찬 젊은 무장의 기백 앞에, 대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의 뺨 위로 바람이 매섭게 스쳐 지나갔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검은 갑옷의 양어깨에 매달린 길고 검은 천이 펄럭였다.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건원국의 명시인 왕유안이 윤을 두고 읊었던 구절로 유명한 그 모습을 모두가 눈에 담았다.
“엄호는 필요 없습니다. 전군 진격 준비를 해 주십시오.”
윤은 홀로 적진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로 건원국의 5만 대군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열을 맞추어 섰고, 그 앞에는 희로국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벽제성이 있었다.
전투를 목전에 둔 이들의 찌르르한 긴장감이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건원국 진영에서 홀로 걸어 나온 장수가 성벽을 두른 벽제성 궁수들의 사거리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말을 타고 창을 든 것도 아니었으며, 허리에 찬 검을 위협적으로 빼 든 것도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같이 검은 갑주.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먼저 술렁이기 시작한 곳은 벽제성의 망루였다. 곧이어 성벽 방어를 지휘하는 장군과 병사들 또한 당혹감에 휩싸였다.
“미쳤는가? 혼자 적지로 기어 나오는데?”
“저, 저 검은 갑옷, 저것은 북방의 이능력자 아닌가?”
“마물을 상대하는 이능력자가 전장에 왜?”
“설마….”
적군의 의도를 뒤늦게 눈치챈 벽제성 성주는 윤이 성벽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다급히 명을 내렸다.
“화, 활을 쏴라!”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일제히 화살이 날아 하늘을 빽빽하게 메웠다. 장마철에 쏟아지는 폭우와도 같이, 성문으로 다가오는 까만 점 하나를 향해 화살이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윤은 한 팔을 높이 들어 손을 폈다. 허공의 정점을 막 찍은 화살촉들이 순식간에 잿빛 가루가 되어 바람결에 흩어졌다.
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화살대가 거슬렸던 윤은 손짓 한 번으로 공중의 쇳가루들을 그러모아 우산으로 삼았다.
투두두두둑.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제성 앞의 대지를 그득 메웠다.
당황한 벽제성 병사들이 활을 다시 시위에 메기기도 전에 윤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둥글게 모아 기를 응축시켜, 벽제성을 향해 팔을 뻗었다.
요란한 폭발음이나 엄청난 파괴력이 성벽을 뒤흔드는 일 따위는 없었다.
정적이 고이는 순간. 적의 칼과 방패, 화살촉, 그리고 갑옷과 투구는 먼지가 되어 바람결에 새카맣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 나의 검이! 헉!”
“갑옷이 사라졌어!”
“금(金)을 다루는 힘이다…!”
“금속이라면… 저자가 그 효명성의 주윤이란 말인가!”
거친 호흡을 세 번 들이켜고 내쉴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쿵.
묵직한 성문을 지탱하던 강철의 경첩 또한 더는 그 자리에 없었다. 거대한 성문 두 짝이 그대로 엎어져 땅을 울렸다.
벽제성 병사들은 일순간에 전의를 상실했다.
“돌격하라!”
대장군의 굵직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퍼졌다.
천혜의 요새라 불리던 희로국의 벽제성은 이능력자 단 한 사람의 힘으로, 허무할 정도로 쉽게 건원국의 손에 떨어졌다.
*
살육의 참상, 그것이 윤이 초래한 결과였다. 곳곳에 난무하는 비명과 쌓여가는 시신들을 외면해 보았으나, 그렇다 해서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까지 떨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벽제성 함락의 일등 공신인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말에 올라 부대원들과 합류했다.
그의 부관 이환은 염려 그득한 얼굴로 그를 맞으며 청을 올렸다.
“주군, 얼른 막사로 돌아가 지인(指引)부터 받으시지요. 힘을 과하게 쓰셨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능력을 운용하는 만큼, 이능력자는 힘을 쓰고 난 뒤 혼탁해진 기를 정화시키는 지인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를 행하는 치유자가 둘이나 그를 위해 막사에서 대기 중이었다.
“지금 받나 나중에 받나.”
윤의 목소리에 퉁명스러움이 묻어났다. 몸을 타고 도는 기가 심히 오염되어 편치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린 탓이었다.
부관이 걱정하는 것은 윤의 특이체질이었다.
제 주군의 밑도 끝도 없는 힘의 원천을 말끔히 정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효명성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치유자들을 데려오기는 했으나, 그들조차 윤에게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이었다.
윤은 오늘 특상등급 마물 세 마리를 홀로 상대할 때와 같은 수준으로 이능력을 과하게 쏟아부은 상태였다. 거슬리는 자의 목을 당장 베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비록 정화의 정도가 주군의 양에 차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를 진정시킨 후에 이동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희로국 3황자를 찾는 일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 목걸이가 있는지, 정말로 저주받은 백자가 맞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건원국 병사들이 검을 휘둘러대는 동안, 윤은 흑성부대를 데리고 목표로 하는 이를 찾기 위해 성을 구석구석 뒤졌다.
그렇게 벽제성 깊은 곳에 자리한 냉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높이 솟은 거대한 나무 위에, 길고 흰 머리카락을 날리고 선 은증왕 무흔이 있었다.
‘과연… 홀릴 듯하구나. 귀신의 생김새라 그러한가.’
높이 솟은 거대한 나무에 올라 있는 은증왕의 모습은 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본디 확인하고자 했던 청록색의 보석들이 목에 촘촘히 걸려 있는 것은 보았으나, 일순간 그것을 잊게 만든 것은 은증왕의 자태였다.
어둠에 갇혀 살아온 듯 창백하리만치 흰 살결, 햇빛을 반사해 마치 은빛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피를 머금은 듯한 보라색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이질적이었다.
적군의 시선을 피해 나뭇가지 뒤에 몸을 감추려는 요량이었겠으나, 그 특이하고도 아름다운 외관은 쉬이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항시 괴물 취급을 받는 그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저자를 끌어내려라.”
“넵! 제가 나무에 오르겠습니다.”
윤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맨 처음 냉궁에 발을 들였던 천홍이 나무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윤의 곁에 서 있던 부관 이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천홍, 나무에 기어올라 은증왕을 어찌 데리고 내려올 셈이냐?”
“아… 그건… 올라가서 보면 수가 나오겠죠?”
아래에서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사이, 무흔은 나뭇가지를 꽉 붙든 채로 발에 애써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잡아먹을 듯이 올려다보고 있는 시커먼 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솟았다.
하필, 얼마 전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가며 읽었던 「건원국 성(性) 문화에 대한 고찰」이라는 서책의 내용이 무서우리만치 선명하게 떠올랐다.
‘건원국은 우리 희로국과는 달라. 짐승만도 못한 것들. 근본이 없다. 사내가 사내를 취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며 색을 드러내놓고 즐긴다고 했어.’
설마 포로로 끌려가면 저들에게 범해지는 것이 아닐까.
윤과 눈이 마주친 무흔은 발밑이 팽팽 도는 듯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저를 올려다보는 자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갑옷을 둘렀으며 그중 절반은 체격 또한 보통의 사내들 그 이상이었다. 호흡이 가쁘게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내려가면, 나는 분명 저 상종 못 할 자들에게 더럽혀지게 될 것이다.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그러한 행위를… 내 몸을, 내 혼을… 짓밟히고 싶지 않아!’
과거의 끔찍한 기억,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그 상처가 머리를 헤집고 생각을 극으로 치닫게 하고 있었다. 무흔은 아래를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감히… 너희들 건원의 개들에게 잡힐 바에는 죽음을 택할 것이야!”
무흔은 뛰어내리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이 위치에서라면 거꾸로 머리부터 떨어져야 죽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팔짱을 낀 채로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단하신 이능력자 우두머리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가득한 꼴을 보고 싶었다.
“재이, 네가 해결해.”
윤의 부름에 맨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나무에 막 기어오르려 했던 천홍이 투덜대며 뒤로 물러섰고, 재이는 가볍게 한 손을 들어 나무 기둥에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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