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저주받은 황자와 각인을-1화 (1/85)

#001화

유폐된 황자 무흔은 처소의 담벼락 아래에서 한참을 불안하게 서성였다.

‘성이 함락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흔의 키를 훌쩍 넘길 만큼 높은 담을 두른 이 냉궁에까지 성벽의 흉흉한 긴장감이 전해져오는 듯했다. 출입문을 지키는 병사의 말을 듣자 하니, 적국의 대군이 새벽부터 성문 밖에 진을 치고 있다 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무흔은 전각 앞에 솟은 거대한 느티나무로 향했다. 17세 되던 해 희로국 황궁의 지하 석전에서 이곳 벽제성으로 처소를 옮긴 지 벌써 4년, 그 세월만큼 익숙한 몸놀림으로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은증왕 전하! 위험하십니다!”

담벼락 너머, 그를 감시하는 병사 하나가 늘 그러하듯 소리를 높였다. 무흔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희들은 수비에 동원되지 아니하고 어찌 아직도 여기 있느냐?”

“저들이 우리 벽제성에 쳐들어온 것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매번 실패였는데, 이번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하여 날 감시하는 것이 우선이다?”

“성주님의 명이십니다.”

“헌데 건원국이 곧 밀고 들어올 기세라 하더니, 어찌 이리 조용해?”

무흔은 고개를 빼고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갇혀 있는 냉궁은 편벽한 곳에 있었다. 성벽과 워낙 거리가 멀어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성벽 위에 촘촘히 선 희로국 병사들이 화살을 들어 활로 가져가는 몸짓 정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미 두 번에 걸친 건원국의 벽제성 함락 작전은 실패했다. 그만큼 희로국의 이 벽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철옹성이었다. 병사들이 무서움을 모를 만도 했다.

그러나 무흔의 마음엔 기대감이 솟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왠지 오늘만은 이전과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흔은 버릇처럼 목걸이를 매만졌다.

“얼른 내려오셔서 안으로 드십시오. 저번처럼 나무에서 뚝 떨어지시는 날에는 저희가 성주님께 크게 혼이 납니다.”

“저번 공성전 때는 너희들 등쌀에 하는 수 없이 보다 말고 내려왔지만, 이번에는 건원국이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다 보고 갈 거야.”

무흔은 나뭇가지의 튼튼한 부분을 꾹 붙들고는 성벽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담장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니 이리하는 수밖에.

‘제발… 성공해야 할 텐데.’

무흔이 저번에도 이번에도 응원을 보내는 쪽은 아군이 아닌 건원국의 군대였다. 나면서부터 지금껏 21년간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버텨왔다. 이 무료함을 벗어나는 길은 세 가지다.

하나는 이 전투의 혼란을 틈타 도망치는 것.

어지간히도 높은 담벼락을 맨몸으로 넘었다간 다리 하나 부러지는 정도로 끝이 나진 않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는 제대로 도망치기도 전에 붙잡힐 테니 그것이 문제지.

둘은 죽어서 시체로 나가는 것.

하지만 평생을 갇혀 산 무흔은 아직 삶에 미련이 있었다. 알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마지막, 허무하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포로가 되어 이곳을 벗어나는 것.

이 세 번째 방법이 바로 무흔의 현실적인 바람이자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들이 적국의 황자인 자신을 살려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리 생각하는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가 번쩍했다.

“활을 쏘았다!?”

성벽 위에 주둔해 활시위를 당긴 채 대기해 있던 자국의 궁병들이 일제히 활을 쏘아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향했던 엄청난 양의 화살들이 정점에 이르러서는 일제히 땅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허공에서 시커먼 모래 먼지 같은 것이 한가득 흩날렸다.

“아… 아니, 지금… 저, 저것이 대체 무슨 조화인가?”

“전하, 무슨 일인지 보이십니까?”

담장 너머의 병사가 고개를 쳐들고 물었으나 무흔은 답을 건넬 만한 정신이 없었다.

더 위로 올라가 굵직한 가지에 몸을 의탁했다. 까치발을 하고서는 더 멀리, 확실한 정황을 내다 보려 함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휘익.

바람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무흔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여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가을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분다 생각은 했건만. 성벽 위에서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정체 모를 것이 성벽 꼭대기를 따라 길게 뒤덮었다.

그것이 일순간에 바람을 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는 궁병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뭔가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흔은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팔에 소름이 오스스 돋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짚이는 부분은 있었다.

‘설마.’

무흔이 짐작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런 괴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이능력자다.

마물을 물리치기 위해 신이 주신 힘을 사용한다는 인간들. 그들이 아니고서야 지금 본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럴 리가. 아무리 예법 따위 모르는 야만의 건원국이라지만, 인명의 살상에 이능력을 쓰다니!’

- 돌격하라!

- 와아아!

그제야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듯 울리고 성벽 너머에서 흙먼지가 구름을 이뤘다. 이능력에 뚫려 버린 성문을 뚫고 건원국의 병사들이 쳐들어왔다.

도륙의 시작이었다. 무흔의 보라색 눈동자에 어려 있던 호기심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해 버렸다.

“헉! 으윽….”

놀란 무흔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으나, 다행스럽게도 손은 나뭇가지를 꽉 붙들었고 발은 나무의 몸통에서 가지가 막 뻗어 나가는 굵직한 지점에 닿았다.

“다들 도망가거라!”

무흔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냉궁을 감시하는 병사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

“성문이 뚫렸다.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너희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야!”

“그럼 전하께선….”

“너희들이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빨리 꺼지거라!”

정말로 누구 하나 남지 아니하고 싹 다 무흔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아… 날 모시고 튀는 놈은 없구나. 하기야, 내게 몸이 닿아봤자 저주밖에 더 옮겠나.”

다리에 힘이 풀린 무흔은 늘 앉아 담장 너머를 구경하던 자리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였다. 숨을 토하듯이 내뱉고는 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설렘이 아닌, 공포였다.

“전쟁이란 본디 이런 거였어….”

성벽이 붉게 물들고 잿빛 연기가 치솟으며 벽제성 곳곳에 피가 개울을 이루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바깥세상 구경하겠답시고 적군을 응원했던 그동안의 자신이 그저 한심하게 여겨졌다. 성문이 뚫리면 그 틈에 도망가려던 결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분명 무혈입성의 상황이었을 텐데, 굳이 발 닿는 곳마다 칼을 휘둘러야만 하나? 항복을 받아내면 그만인 것을. 과연 소문대로야…. 저들은 대체 어디까지 잔악하여질 것인가!’

전쟁의 실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건원국 병사들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중, 한 무리의 시커먼 자들이 무흔의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 쓴 투구에서부터 갑옷, 발끝까지 온통 검은 갑주를 걸친 자들이 성 안쪽으로 깊숙하게, 빠른 속도로 진입 중이었다. 마치 사신과도 같은 그 모습에 무흔은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검은 갑옷이라면, 건원국 북부의 효명군이다.’

겁을 먹은 무흔은 나무에서 내려올 생각조차 못 하고 가지를 꽉 쥐어 몸을 웅크렸다. 책에서 읽은 것을 떠올렸다.

황실에서 직접 이능력자들을 하나의 부대로 관리하는 희로국과는 달리, 건원국은 중부와 북부로 나누어 해당 지역 군주 지휘하에 이능력자 부대를 각각 운용한다 들었다.

그중 지금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북부의 최정예 흑성부대였다.

“아니, 저… 저자들이 왜 이쪽으로 오지?”

가뜩이나 흰 무흔의 얼굴이 공포로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흑성부대가 이동하는 방향은 자신이 있는 이 냉궁 쪽이었다.

무흔은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긴 채 검은 갑옷의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가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꿈꾸었던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는지. 무흔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다.

예상대로 무리는 냉궁 대문 앞에 도착했다. 무흔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나와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있습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청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은증왕의 처소 맞지?”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시커먼 차림의 부대원들 사이로, 유난히 몸이 성난 듯 건장한 무관이 다가왔다. 그의 손아귀에 잡히면 팔목이 가루처럼 으스러질 것 같았다.

무관이 문에 걸린 빗장을 간단히 치우자, 앞서 와 있던 이가 헤헤 웃으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군, 담이 유난히 높고 출입이 바깥에서 통제되는 것을 보니 이곳이 맞는 것 같습니다.”

웬만한 사내의 몸만 한 빗장을 손에 든 무관이 문으로 막 들어선 장신의 사내에게 보고를 올렸다.

무흔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옮겨갔다. 눈에 닿는 것은 그의 정수리뿐이었으나, 확실히 다른 이들과는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심장이 망가질 것만 같이 맥이 뛰었다.

“은증왕을 찾아보겠습….”

무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까 뛰어들었던 청년이 주군이라 불린 남자 앞으로 달려와 섰다.

“제가 찾았습니다! 저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청년이 팔을 높이 뻗어 나무 위를 가리키는 순간, 무흔은 얼어붙었다. 아래에 모여 있던 흑성부대 전원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포로 숨이 멎는 듯했다.

무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주군이라는 자의 눈빛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검은 갑옷이라면 저들 모두가 입고 있건만, 그는 달랐다. 사신을 연상케 했다. 칼날 같은 시선에 몸이 묶이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저런 인간들이 날 무탈하게 포로로 데리고 나가줄 것이라 기대했다니. 분명 잡히자마자 저자는 내 목을 비틀어버릴 것이다.’

“은증왕 맞습니까? 아니, 맞네. 우와… 주군, 세상에 저런 인물은 하나뿐일 겁니다.”

무흔을 처음 발견한 청년이 신이 나서 크게 외쳤다. 귀에 선명하게 때려 박힌 ‘저런 인물’이라는 표현에 무흔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괴이한 외모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 분명했다.

눈처럼 흰 얼굴에 마찬가지로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 그리고 피같이 붉은빛을 머금은 보라색의 눈동자.

그것이 바로 백자(白子)로 태어나 저주받은 황자라 일컬어지는 무흔의 생김새였다.

“저자를 끌어내려라.”

서늘한 목소리가 냉궁의 마당에 울렸다. 대륙 최강의 이능력자 주윤, 그가 은증왕 무흔을 자신의 앞으로 대령할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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