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이사
몇 년이 흘렀다.
많은 게 변했고 또 많은 게 그대로였다. 카이얀과 루크는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일은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되었다. 카이얀이 차고에서 물건을 꺼내고 있는데, 오래된 전구가 갑자기 퍽 터져 버린 것이다. 유리 조각이 와르르 쏟아졌지만 다행히 카이얀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
카이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갑자기 차고 전구가 깨지네요. 갈아야겠어요.”
물론 루크는 그 일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카이얀에게 다가와 얼굴과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괜찮습니까?”
“멀리 있어서 스치지도 않았어요.”
카이얀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잠시 잡았다 놓았다. 그러나 루크는 마주 웃는 대신 심각한 어조로 다른 말을 했다.
“서재 바닥이 심하게 삐그덕거립니다.”
“아, 그래요? 점점 더 심해지네.”
“부엌은 저번에 수리했는데 상태가 안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카이얀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루크는 전쟁에라도 나가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사요? 크게 불편한 것도 아닌데 이사까지 할 필요는…….”
“카이얀이 다치는 게 싫습니다.”
루크가 진지한 얼굴로 카이얀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런 스킨십에는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러니 카이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음에 대해, 사람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치고 루크는 대담하고 솔직했다. 그러나 카이얀은 아직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쑥스러워지곤 했다.
“흠, 새, 생각해 보죠.”
카이얀은 그의 손에 슬쩍 얼굴을 기댔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혼자 생각해 보니, 이사를 갈 때가 되긴 했다. 처음 이 집을 구해 이사할 때는 마음에 들었는데, 루크와 함께 지내다 보니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생각하고 마련한 집인데 동거인이 생겼다. 당연히 다른 구조의 집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큰 불편함 없이 이럭저럭 지내 오긴 했지만, 루크와 둘이 지내기 더 적합한 집을 구하고 싶기는 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카이얀은 식사를 하기 전에 발표했다.
“중대 발표입니다, 루크 씨.”
“네?”
“우리 이사 갑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사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 *
카이얀은 동거인이 루크라서 좋았다. 물론 루크를 사랑하는 덕도 있지만, 루크의 성향을 좋아했다.
일단 정리정돈을 잘 한다. 통제된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망가지지 않게 관리하며 지내는 일에 능숙했다. 카이얀이 어지른 주방을 루크가 치울 때도 많았다.
다음은 깔끔하다. 아침저녁으로 씻고, 옷을 다리고,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외출을 한다. 빨간 티와 빨간 바지를 입던 루크는 사라졌다. 이제 그는 ‘어울린다’는 게 뭔지 잘 알아서, 화려하지는 않아도 깔끔하게 차려입는다.
집안일에도 열심이다. 카이얀이 연구로 바쁠 때는 그가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세탁물을 넌다. 카이얀의 일터나 마찬가지인 서재는 건드리지 않지만, 나머지 공간은 루크 덕에 깨끗했다.
새로 구할 집에서도 잘 지낼 수 있겠지. 카이얀은 어느 집으로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산책을 하다 말고 루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저, 카이얀.”
“네.”
새는 명랑하게 지저귀고 햇빛은 언제나처럼 따스하고 다정하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 루크와 함께하는 아침 산책은 매일 새롭고 상쾌했다. 카이얀은 평화로이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새로 이사를 가면…….”
“가면?”
“짐을 좀 줄이고 싶습니다.”
카이얀은 고개를 돌려 루크를 보았다. 얼굴이 비장해서 웃음이 났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 심각하게 말하나 싶어 귀여웠다.
“이사하면서 짐 버리는 건 당연한 거예요. 어차피 짐 싸면서 이것저것 버리게 될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아, 제 말은…… 미니멀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 애니멀을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카이얀은 귀를 의심하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는 루크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필요 없는 짐을 대부분 버리고 최소한의 물건으로 생활하는 미니멀리즘이 유행했던 건 안다. 요즘은 한물가지 않았나 싶지만 카이얀도 사진을 몇 번 본 적 있다.
엄밀히 말해 카이얀은 미니멀리스트가 아니었다. 절대, 절대, 절대 아니었다!
“난 그런 거 싫습니다.”
카이얀이 전에 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게다가 직업상 그렇게 할 수도 없어요. 책이며 책장이며 전부 다 필요하단 말입니다.”
“카이얀의 서재는 그렇게 꾸밀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거실이나 주방, 침실은…….”
“거실, 주방, 침실이면 집 전체라고요. 난 무슨… 수행하는 승려처럼 살기 싫습니다.”
루크는 눈을 깜빡이며 카이얀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그 애처로운 강아지 눈을 해도 소용없어, 카이얀은 그런 심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곧, 루크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카이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꼭 한번 해 보고 싶어서 이야기한 건데… 카이얀이 정 싫다니… 알겠습니다.”
“…….”
“꼭 해 보고 싶었는데…….”
그날 루크는 카이얀의 꿈속에서도 ‘꼭 해 보고 싶었는데!’라고 외쳤다. 카이얀은 악몽에 시달리며 한참을 끙끙거려야 했다.
* * *
이사하자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집을 알아봐야 하고, 짐도 싸야 하고, 이사하기 직전까지 필요한 짐은 또 따로 빼놔야 하고, 이사할 집에 가서 가구 배치도 고민해야 하고…….
연구가 없는 시기라 다행이지, 바쁠 때라면 절대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크의 인테리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게 마음에 걸려서, 카이얀은 집만큼은 최대한 루크 취향에 맞춰 주기로 했다.
“여긴 수영장이 있어요. 수영장 어때요?”
“물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싫습니다. 차라리 산책로는 어떻습니까?”
“산책로, 산책로… 아, 여기 있다. 이런 집도 있더라고요.”
슬쩍 루크의 표정을 살피니 이번 집은 마음에 든 것 같다. 직접 가서 보긴 해야겠지만, 일단 임대료가 높은 집만 보고 있으니 어딜 가든 기본은 할 것이다. 적어도 차고 전구가 터지진 않겠지.
전단지를 살피는 루크의 옆얼굴을 응시하다가, 카이얀이 불쑥 물었다.
“우리 지금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데, 혹시 도시 가까이로 가고 싶어요?”
사실 계속 생각했다. 루크에게는 북적거리는 도시가 더 잘 맞지 않을까. 혹은, 한 번쯤은 그에게 도시를 경험시켜 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가 미니멀리즘이니 뭐니 하고 나니, 너무 정적인 교외 생활에 지쳤나 하는 의구심도 싹텄다.
루크는 카이얀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도시 말입니까?”
“네. 좀 큰 데로.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볼거리나 먹을거리도 여기보다 훨씬 많을 텐데요.”
“전 그냥 조용한 곳이 좋습니다.”
“그래요? 도시를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아니요, 전 조용한 게 좋습니다.”
루크는 꽤 확실하게 대답하고 가만가만 말을 이어갔다.
“가끔 카이얀 따라서 도시에 갔을 때, 너무 사람이 많고 시끄러워서 다니기 어려웠습니다. 바깥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너무 복잡한 곳에 가면 머리가 아플 것 같습니다. 저, 하지만…….”
“하지만?”
“만약 카이얀이 무료해서 도시에 살고 싶은 거라면,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카이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도시에서 살고 싶을 리가. 애초에 대도시를 떠나 교외로 집을 옮긴 건 카이얀의 선택이었다. 그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조심 말하는 루크는 예뻤다. 복잡한 곳에 살면 머리가 아플 것 같다고 하면서도, 카이얀의 선택에 따른다.
이제는 안다, 루크의 선택은 미숙한 어린애의 충동이 아니라 배려라는 걸.
“미니멀리즘 말인데요.”
카이얀은 기분에 이끌려 내뱉었다.
“내 서재로 쓸 곳만 아니라면 루크 씨 원하는 대로 인테리어 해도 됩니다. 루크 씨도 같이 살 집이니까요.”
“정말입니까?”
루크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갑자기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더니 잡지를 가져왔다. 카이얀 앞에 잡지를 펼치며 그가 어린아이처럼 들떠 외쳤다.
“요즘은 맥시멀리즘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잡지에는 온갖 장식품, 가구, 옷, 식물이 놓인 거실이 소개되어 있었다. 카이얀은 잠시 입을 벌리고 잡지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안 돼.”
“네?”
“아니, 이건 또 너무…….”
심하잖아요, 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루크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안 된다는 말이 쑥 내려가 버렸다.
“좋다고요. 너무, 좋네요, 참.”
“그렇죠?”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라. 카이얀은 즐거운 체념과 함께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어차피 청소는 루크 몫이었으니, 물건이 적든 많든 루크가 애쓸 일이었다.
그가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았다. 거실이 뭔지도 모르던 사람이 이제는 인테리어 얘기를 한다. 새삼스러운 기쁨이 밀려와 카이얀은 약간 웃고 말았다.
“루크 씨.”
“네.”
“좋아요?”
뭐가 좋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루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뭐가 좋은데요?”
“다 좋습니다. 전부 다. 카이얀과 하는 것 전부.”
정직한 사람이다. 이 정직함이, 단단함이 카이얀을 편안하게 했다. 그는 루크의 입술을 응시하다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나도 좋아요, 그럼.”
그렇게 둘은 이사를 했다. 수영장은 없지만 정원이 넓고 아담한 산책로까지 갖춘 집이었다.
많은 게 변했고 또 많은 게 그대로였다. 루크는 거실은 미니멀하게, 주방은 맥시멀하게 꾸며 카이얀을 기막히게 했지만, 둘은 여전히 사랑했고 한집에 살았다.
주석페이지
주석을 읽으신 후, 해당하는 번호 혹은 단어를 누르면 그 페이지로 돌아갑니다.
1) 윤성택, 『리트머스』, 「주유소」, 문학동네, 2011, 82~83쪽,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우회로에 있다”
2)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너를 기다리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1998, 14~15쪽,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