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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보호자 (11/12)

외전 6. 보호자

루크의 신분증이 나왔다.

카이얀은 매끈매끈한 신분증을 손에 들고 약간 감격에 젖었다. 루크의 신분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지 않아 초조하던 참이었는데, 마침내 일이 다 마무리된 것이다.

이제 루크는 미공개 실험체도, 신원 미상자도 아니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보험도 가입할 수 있고, 통장도 만들 수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할 권리를 마침내 인정받은 것이다.

카이얀은 아주 성의껏 파티를 준비할 작정이었다. 역시 축하 파티에는 케이크가 빠질 수 없다. 그는 처음으로 케이크를 주문 제작해 보았다.

“케이크 위에는 뭐라고 써 드릴까요?”

케이크 가게 직원의 물음에 카이얀은 잠시 망설였다.

‘신분증 나온 거 축하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당신은 이제부터 당당한 시민입니다.’라고 쓰는 것도 정말 우습지 않은가.

카이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작게 말했다.

“그냥 축하하고 사랑한다고 써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유쾌하게 대답하고 주문서를 거둬 갔다.

다음 날, 케이크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며 카이얀은 한참을 고민했다. 뭐라고 하면서 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까짓 게 뭐라고 이러나 싶었지만, 좋은 일이니 그만큼 특별하게 건네주고 싶었다.

좋은 와인도 하나 구했다. 생일 파티도 아니게 무슨 짓인가 의아했지만, 어쩐지 신이 나서 초도 샀다. 직접 구워 줄 요량으로 제일 좋은 부위의 고기도 샀고, 웃기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신분증을 넣을 작은 선물 상자까지 구매했다.

그날 저녁, 루크는 몇 번이나 부엌을 기웃거렸다.

“제가 안 도와드려도 괜찮습니까?”

“괜찮다니까요.”

카이얀은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하다 대답했다.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더니 그새 나와서 말을 붙인다. 카이얀은 왠지 신이 나서, 불 앞에 있으면서도 더운 줄 몰랐다.

고기를 근사한 접시에 올리고, 요리 잡지에서 본 것처럼 소스도 화려하게 뿌렸다. 직접 준비한 으깬 감자, 통후추도 갈아서 조금.

식사 준비를 마치고 루크를 앉힌 후, 케이크와 선물 상자를 가져왔다.

“열어 봐요.”

부드럽게 권하자 루크는 선물 상자를 열었다. 그러더니 그 안에 든 신분증을 보고 입을 벌렸다.

고개를 들어 기대로 부푼 카이얀의 얼굴을 한 번, 다시 신분증 한 번. 화려한 케이크와 먹음직스러운 저녁상 한 번, 다시 카이얀의 얼굴 한 번.

루크가 입을 벌렸다.

“와아. 정말 멋집니다.”

“…….”

“…….”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루크는 이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카이얀의 표정을 살피더니 한 어절씩 끊어 말했다.

“정말. 멋진. 신분증입니다.”

“됐어요, 애쓰지 마요.”

카이얀은 기가 막혀서 웃고 그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챘다.

루크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을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신분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는 게 어떤 건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으니까.

그래서 이 자리는 루크를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자리였다. 루크는 몰라도 카이얀은 알았다, 이 작은 신분증의 의미를.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국가가 당신을 실험체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인정한 거예요. 이제 아무도 당신을 함부로 잡아갈 수 없고, 이상한 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을 겁니다. 우린 적법한 관계로 함께 살 거고, 서로 아플 땐 보호자가 될 수도 있어요.’

카이얀은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래도 축하해요, 루크 씨.”

루크는 카이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반응에 실망한 것 같았다. 카이얀이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 줬는데, 좀 더 격렬한 반응을 보여 줄 걸 그랬다.

하지만 그는 신분증 나온 게 왜 이렇게까지 축하받을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 무지가 오늘은 정말 아쉬웠다.

* * *

‘요즘 좀 이상하네.’

루크가 꾸준히 외출을 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서. 어딜 가는지도 말하지 않고.

루크는 몰래 다녀오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카이얀은 다 알고 있었다. 외출은 어떻게든 티가 나는 법이다.

한번은 아침 산책을 하다가 카이얀이 넌지시 묻기도 했다.

“요즘 바빠요?”

“네? 아닙니다.”

“아니, 바쁜 것 같아서. 어제 낮에 산책갔었어요?”

“아… 카이얀이 일하는 것 같아서 혼자 다녀왔습니다.”

카이얀은 물끄러미 루크를 바라보았다. 다음엔 그냥 나 불러서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해도 되겠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알려 주지 않고 몰래 하는 건 좀 서운하지만, 루크도 혼자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그렇게 해 왔고. 하나하나 간섭하고 통제하고 보고 받으려 들면, 앞으로 펼쳐질 루크의 인생에 방해가 될 게 분명하다.

“그래요, 차 조심하고.”

차도 별로 안 다니는 한적한 동네에 살면서, 카이얀은 괜히 그렇게 말했다.

이런 걸 가지고 섭섭해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카이얀은 햇빛을 받으며 느긋하게 걷다가 루크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가 보고 싶은 곳 있으면 얘기하고요. 태워다 줄 테니까.”

“아.”

루크는 고개를 돌려 카이얀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주먹을 불끈 쥐면서 환하게 웃었다.

“안 태워다 주셔도 됩니다.”

“뭐라고요?”

“안 태워다 주셔도 됩니다!”

“…….”

운전면허 따고 있군. 카이얀은 너무 빤히 보이는 루크의 행동에 입을 벌렸다. 몰래 하려던 게 분명한데 이렇게 티가 날 수가!

위험한 일 하고 다니는 게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잠시 운전하는 루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루크에게 차가 생기면 그는 그걸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른 지역 친구를 사귈지도 모르고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겠지. 세상은 너무 넓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과 좋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 미치자 카이얀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카이얀?”

“아, 네, 들어가죠.”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어도, 루크는 이리로 돌아올까?

* * *

얼마 후, 루크가 고기를 구울 때 카이얀은 이미 앞으로의 일을 예상했다.

고기, 와인, 초, 흘러나오는 음악. 마지막으로 그가 케이크와 선물 상자까지 건네주었을 때, 카이얀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거기 있었다.

루크의 운전면허증이!

“어…….”

뭘 착각한 것 같은데 이건 루크 씨가 축하받을 일이지 나한테 줄 게 아닌데요. 그런 말이 먼저 나가려 했지만 카이얀은 꾹 참았다. 일단은 저 기대감 어린 표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면허 땄네요?”

“…….”

“우와,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갑자기 면허를 따다니! 정말 까맣게 몰랐지 뭐예요? 루크 씨 혹시 은신의 대가?”

“됐습니다.”

루크는 얼마 전의 카이얀과 똑같은 얼굴로 면허증을 가져갔다. 카이얀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아니,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해 놓고 놀라길 바랐다니 너무 양심 없지 않은가!

“오늘 태워 드리고 싶습니다.”

“아, 드라이브요? 좋죠.”

근처만 돌아다닌다면 걱정할 일이 없다. 차도 많지 않고 위험한 상황도 거의 없으니까. 그래도 카이얀은 안전벨트를 잘 매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며, 카이얀은 조금 긴장했다. 루크가 잘할 수 있을까?

예상외로 루크는 꽤 능숙했다. 의자 위치를 조정하고,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꾸고, 부드럽게 출발했다. 연습을 많이 한 모양이라 카이얀은 조금 놀랐다.

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달렸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비도 조금씩 떨어졌다. 루크는 와이퍼도 작동시켰다.

카이얀은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분이 왜 이런지 잘 모르겠다. 루크가 하나하나 새로 배워갈수록 기뻐해야 하는데, 이번만은 마음이 무겁다.

당연히 루크와 영원히 살 거라고, 헤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세상의 다른 면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떠나 버리면 어떡해야 할까.

그때,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던 루크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디 가실 때 제가 운전해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 매번 그럴 필요는 없어요. 루크 씨도 가고 싶은 곳 많을 테고.”

착한 척하네, 카이얀. 자괴감이 일어 카이얀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이 사람이 너무 먼 세상까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위하는 척, 자유를 누리길 바라는 척하면서, 의지할 데라곤 자신밖에 없는 어린아이이기를 바라 왔나. 그런 자신의 진심이 한심했다.

“가고 싶은 곳 없습니다.”

“생길 거예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울컥 감정이 치밀었다. 마치 뜨거운 덩어리가 배 속에서부터 밀려 나오는 듯 말이 쏟아졌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이제 운전도 할 줄 알겠다, 루크 씨도 가고 싶은 곳 많아질 거 아닙니까.”

“없습니다, 그런 곳.”

“왜 없는데요.”

이제 유치하게 굴고 있다. 카이얀은 이 한심한 짓을 멈추고 싶었지만, 루크가 단단하게 대답할수록 마음이 풀리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전 카이얀이 있는 곳이 좋습니다.”

“왜요?”

똑같은 걸 물었다. 루크는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멈춘 채, 고개를 돌려 카이얀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대답할까. 사랑해서 그런다고, 아니면 모르겠다고? 대답을 예상해 보는데, 루크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카이얀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뭐라고요?”

너무 황당해서 잠시 답이 늦었다. 그러나 루크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청소도 잘 못 하고, 일이 바쁠 때는 식사도 잘 안 챙기지 않습니까. 제가 카이얀을 돌봐 줘야 합니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거야. 아까까지의 아련한 기분이 싹 사라지고 그냥 우스웠다.

“그건 연구한다고 바쁠 때나 그렇죠. 나도 부지런하다고요.”

“그러니까 연구하는 동안 제가 돌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루크의 어조가 더없이 따뜻하고 달콤했다.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나. 잘 돌봐 줘야겠다고. 갑자기, 그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한 게 우스워졌다.

“제가 집 정리도 하고, 요리도 해드리고, 옷도 빨아 드릴 테니까 카이얀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나도 그런 거 다 할 줄 안다고,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았는데 그 정도 못 할 줄 아냐고 대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가기나 해요. 신호 바뀌었으니까.”

“도로에 저희밖에 없습니다.”

“근데요?”

루크가 눈을 깜빡이더니 조금 웃었다. 그러더니 출발할까요, 하고 묻는 듯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물었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카이얀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아주 잠시, 루크가 이 차를 끌고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다 픽 웃었다.

“내 차에서 섹스는 안 돼요.”

실망했다. 분명 실망한 표정이다. 카이얀은 봐준다는 듯 덧붙였다.

“나중에 루크 씨 차 사면 생각해 볼게요.”

“돈을 벌어야겠습니다.”

갑자기 근로 의욕을 불태우는 루크를 보며 카이얀이 웃었다. 입술은 따스하게 겹쳐졌고, 차는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둘이 함께 사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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