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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칭찬해 주세요 (8/12)
  • 외전 3. 칭찬해 주세요

    카이얀은 활동적인 여가 활동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때문에 카이얀과 함께 사는 루크도 자연 그렇게 되었다. 카이얀은 가끔 루크가 스킨스쿠버 같은 특별한 일을 해 보고 싶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기본적으로 루크는 카이얀이 아닌 다른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세상에 대해 알아갈수록 모든 것이 카이얀만 못하다는 듯 굴었다.

    카이얀은 그게 걱정이었다. 물론 좋기도 했지만.

    “아니면 수영은 어떻습니까? 근처에 센터 있는데.”

    “물에 있기 싫습니다. 숨 막힐 것 같습니다.”

    당연히 숨이야 막히겠지…….

    스키, 골프, 테니스에 이어 수영까지 거절당하자 카이얀은 그냥 권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오늘 뭐할까요? 하고 싶은 거 있습니까?”

    “전 가만히 있어도 좋습니다.”

    카이얀은 잠깐 루크를 보았다. 어쩌면 피곤한 건지도 모른다. 루크가 피곤하다니,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루크도 사람이었다.

    “집에 있을래요? 나 서점 좀 갔다 올 건데.”

    “같이 가겠습니다.”

    루크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일어났다. 카이얀은 루크가 옷을 갈아입겠다며 돌아섰다가, 갑자기 다시 뒤돌아서는 걸 지켜보았다.

    “오늘 뭐 입으실 겁니까?”

    “뭐… 그냥 코트랑, 어, 니트랑?”

    안 정했지만 엉겁결에 가장 무난한 걸 뱉었다. 루크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그제야 제 방으로 올라갔다. 카이얀은 픽 웃었다.

    뭘 입을지 알면 어쩌게. 애 같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얀도 옷을 갈아입었다.

    루크는 자주 아이처럼 굴었다. 그는 무구하고 순전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과는 별개의, 자기만의 의식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운전하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아이 마음 키우기.>

    그런 책이 눈에 들어온 건, 분명 그 생각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크는 조금 떨어진 서가에서 팝업북을 뒤적이고 있었다. 신기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정말 어린애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육아 서적을 들었다. 계산대로 들고 가면서도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우스웠다.

    “뭐 살래요?”

    “아닙니다.”

    루크는 손에 들었던 걸 미련 없이 내려놓고 카이얀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카이얀이 손에 든 책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를 기르실 겁니까?”

    “아뇨.”

    이미 기르고 있어서. 카이얀은 그 말을 삼켰다.

    어차피 특별히 살 게 있어서 나온 건 아니었다. 연구에 필요한 책은 대부분 원서였으니 이런 서점에서 살 일도 드물었고. 카이얀은 루크에게 커다란 프레즐을 하나 쥐여 주었다. 루크는 즐겁게 먹었다. 맛보다는 모양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카이얀은 느긋하게 소파에 늘어졌다. 요즘 카이얀은 침실이나 연구실에 있기보다 거실에 있는 일이 많아졌다. 루크와는 여전히 다른 방을 쓰고 있지만, 둘 다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카이얀은 소파에서 책을 읽었고, 루크는 카이얀이 골라준 책을 읽거나 책 읽는 카이얀을 지켜보곤 했다.

    카이얀은 목차를 먼저 펼쳤다.

    우리 아이, 주의력 결핍증은 아닐까? 아이와 함께 상상화를 그려요. 자기 전에 책을 읽어 주세요. 아이에게 공부는 즐거운 놀이!

    형제끼리 너무 자주 싸운다고요? 먼저 표현하세요. 행복한 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해 주세요.

    의미 없이 쭉쭉 읽어 내려가다 카이얀이 문득 동기 부여에 눈길을 고정했다.

    동기. 동기라.

    루크의 동기는 카이얀이었다. 그냥 모든 일이 다 그랬다. 카이얀과 하면 뭐든 다 좋았고, 같이 하지 않으면 뭐든 금세 시들해졌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카이얀이 책을 자주 읽기 때문이고 뛰는 것보다 걷는 걸 즐기는 것도 카이얀과 천천히 산책하는 게 더 좋으니까. 자전거를 좋아하지 않는 건 예전에 카이얀이 넘어진 적이 있어서.

    물론 루크의 행동 양상은 카이얀에게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걱정이기도 했다. 루크에겐 다른 동기,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을 기회가 필요했다.

    “루크 씨, 이거 한번 봐요.”

    그래서 카이얀은 책이 시키는 대로 ‘행복한 동기를 부여하고 격려’하기로 했다.

    언제나 카이얀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루크는 바로 책을 덮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카이얀이 뭘 하나 보던 차였다.

    “칭찬 스티커라는 겁니다.”

    별거 아니지만 카이얀은 왠지 뿌듯하게 말했다. 물론 루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카이얀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자, 여기 스물다섯 칸짜리 표가 있잖아요. 루크 씨가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내가 여기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려 줄 겁니다.”

    생각해 보니 스티커가 아니네?

    카이얀은 잠깐 멈칫했다. 그 사이 루크가 물었다.

    “어떤 좋은 일입니까?”

    “뭐, 그냥 루크 씨가 이건 잘한 일 같다 싶을 때 나한테 얘기하세요. 그럼 내가 들어 보고 동그라미를 쳐 줄 테니까.”

    당연히 루크는 감을 잡지 못했다. 카이얀도 사실 구체적으로 어떨 때 동그라미를 쳐 줘야 할지 잘 몰랐으니까. 어린애처럼 설거지를 시키거나 심부름을 보낼 수도 없고.

    어, 심부름 괜찮은데?

    카이얀은 이리저리 상황을 재보았다. 정말 어린애도 아니니 차 사고가 날 일도 없을 거고, 납치당하거나 할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강도를 만나도 이기겠지?

    게다가 혼자 나갔다 올 수 있는 일이고, 점원하고 얘기하면서 사람 대하는 법도 배우고… 옆에 카이얀이 없을 때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배우고…….

    “편의점 가서 잼 하나 사 올래요? 동그라미 그려 줄 테니까.”

    카이얀이 웃으며 말하자, 루크는 두말없이 일어났다.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서 루크는 조금 어색하게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카이얀은 즐겁고 흐뭇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책이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이리저리 뒤적여 보기도 했다. 오감을 자극하세요. 건강한 식습관과 올바른 식사 예절을 알려 주세요. 아이는 함께 놀며 자라요. 눈에 띄는 부분을 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젠 열쇠로 문도 잘 열고. 카이얀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

    “무슨 잼을 사 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루크는 조금 숨이 찬 것 같았다. 이렇게 급하게 올 필요 없었는데. 아마 카이얀이 잼을 먹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당황해서 멍하게 그를 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어, 그냥 아무거나… 루크 씨 먹고 싶은 걸로 사오면 됩니다.”

    “전 별로 먹고 싶지 않습니다.”

    아, 머리야.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

    카이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땅콩 잼이요.”

    “네.”

    루크는 또 바로 뒤돌아서 나갔다. 그리고 10분 후에 다시 돌아와 또 물었다.

    “품절이라고 합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잼 좀 사 와 달라’는 간단한 심부름이 왜 이렇게 길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노릇이었다. 사실 카이얀도 단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뭘 주문해야 할지 잘 몰랐다. 사실 그는 편의점 음식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바나나 우유가 좋겠네요. 잘 모르겠으면 직원한테 물어봐요.”

    “네.”

    그리고 잠시 후 또 돌아온 루크는 어떤 회사 바나나 우유가 좋으냐고 물음으로써 다시 카이얀을 기막히게 했다.

    결국 잼-우유- 심부름은 루크가 집과 편의점 사이를 다섯 번이나 왕복한 후에야 끝났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사 온 귀한 우유를 받아 들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동그라미 그릴까요?”

    그래, 이제 시작이야. 루크 씨는 빨리 배우니까.

    카이얀은 자기가 손으로 그린 스물다섯 칸짜리 표 첫 번째 칸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잠깐 멈칫했다. 루크가 너무 기대감 어린 얼굴로 자길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카이얀은 기지를 발휘해 동그라미 안에 웃는 표정을 그려 넣었다.

    “자. 이건 루크 씨가 갖고 있어요.”

    루크는 기대 이상으로 좋아했다. 어떻든 동기 부여는 확실히 된 것 같네. 카이얀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루크는 변했다. 다음 날부터, 루크는 이상할 정도로 카이얀에게 잼과 바나나 우유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카이얀은 그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시내 베이커리까지 심부름을 보내기도 하고 간단한 청소를 부탁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써 달라는 주문도 해서 사심을 채우기도 했다. 물론, 나도 사랑하고 루크 씨와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고 성의껏 답장도 썼다.

    루크는 정말 빠르게 변해서, 일주일쯤 지나자 혼자 뭐든 해내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하루에 두 개, 많으면 세 개의 동그라미를 받으며 루크는 무척 신기해했다.

    “와, 요리한 겁니까?”

    불 조절을 잘못했는지 소고기가 좀 타긴 했지만, 어쨌든 루크는 혼자서 고기도 구워 내놓을 줄 알게 되었다. 카이얀에게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일일이 물어보지 않고도. 카이얀은 한껏 고무되어 식탁 앞에 앉았다. 어깨 너머로 몇 번 본 적 있다고 나름대로 소스까지 내어놓은 게, 귀엽게 느껴졌다.

    “동그라미 그려 주실 겁니까?”

    “아. 다 먹고 그려 줄게요. 고맙네요,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카이얀은 입으로 하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조금 탔어도 먹을 만했다. 애초에 그저 굽기만 하면 되는 요리니 실패할 확률도 낮지만, 어쨌든 루크가 물어보지도 않고 부엌에서 뭔가 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 루크는 바로 표를 가져왔다. 카이얀은 펜을 들었다가 잠깐 멈추었다.

    “딱 하나 남았네요.”

    “네.”

    루크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루크가 웃는 걸 보면 행복해진다. 안절부절못하고 긴장한 얼굴보단 웃는 쪽이 훨씬 더 보기 좋다. 무엇보다도 카이얀 자신 때문에 웃는 것 같아서, 그게 좋았다.

    카이얀은 마지막 웃는 얼굴을 그려 주었다. 각양각색의 표정이 그려진 표를 보다가 카이얀은 자기 옆에 선 루크에게로 눈을 돌렸다.

    “다 모았네요. 잘했습니다.”

    “다 모으면, 어떻게 됩니까?”

    루크는 무구한 얼굴로 물었고 카이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요, 뭐 하고 싶은 거나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사실 이런 식의 보상은 별 의미가 없었다. 굳이 칭찬표를 다 채우지 않아도, 카이얀은 루크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고, 갖고 싶은 걸 갖게 해 주니까. 그리고 루크는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드물었다.

    “네.”

    의외로 대답은 빨리 나왔다.

    “오, 뭔데요?”

    카이얀은 표를 말끔히 정리된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루크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먼저 키스하고 싶다고 말해 주십시오.”

    “…….”

    “사랑하니까, 키스하고 싶다고.”

    아니…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지, 이걸 왜 말로 하라고……. 아니, 나 참, 이건, 그러니까 뭔가 정말……. 카이얀은 혼자 어버버하다가 다른 말을 했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죠?”

    루크는 단호했다.

    “키스하고 싶다고 말해 보십시오.”

    카이얀은 저 육아책을 갖다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하셨잖습니까.”

    “내 말은, 아니,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제가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겁니까?”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키스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해도 된단 겁니다.”

    “저는 키스하고 싶은 게 아니라 카이얀이 저한테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습니다.”

    젠장. 카이얀은 얼굴로 확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루크는 그답게 기다렸다. 이럴 땐 루크가 좀 더 참을성 없는 성격이었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그냥 기다리지 않고 입을 맞추었을 텐데.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필요 없이.

    “어, 키스하고 싶습니다.”

    “좀 더 진심처럼 말해 보십시오.”

    “…진심인데요.”

    카이얀은 잡아뗐다. 그는 체질적으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했다. 루크는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이었다.

    “다시 한번만, 안 됩니까?”

    열 번을 다시 해도 루크가 바라는 표정, 바라는 말투로 ‘나 지금 당장 키스하고 싶은데 해도 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카이얀은 제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확신하며 다시 말했다.

    “키스, 하고 싶습니다.”

    루크는 당연히 이번에도 만족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됐다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또 곧장 물어왔다.

    “얼마나?”

    “어… 많이……?”

    원하는 대답이 이거야? 하는 얼굴로 추측하듯 대답하자 루크는 비로소 만족했다. 그러더니 그는 꽤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전 카이얀이 원하면 뭐든 합니다.”

    아니, 나한테 뭐든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은데.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다가온 루크의 목을 껴안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배우는 게 빨라서 그런지 아니면 본인이 즐기는 일이라 그런지 루크의 키스 실력은 정말, 그야말로 일취월장 수준이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허리를 강하게 안으며 그를 식탁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다시피 했다.

    “이거 다음에도 합니까?”

    실컷 키스해 놓고 루크는 또 천진하게 물었다. 카이얀은 정말, 이 사람이 애인지 어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물론 루크가 다음번엔 섹스하고 싶다고 말해야지 결심한 걸 알았다면 그런 헷갈림 따윈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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