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우리 사귀는 거야?
조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루크는 바로 잠들었다.
카이얀은 밀리엄 장군으로부터, 루크의 몸에 무리가 와서 한동안 회복기가 필요할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돌아오는 차에서는 내내 들떠 있더니 막상 집에 오자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잠든 조용한 집에서 혼자 할 일을 했다.
대부분은 루크를 위한 일이었다. 카이얀은 전날 미리 사둔 온갖 채소와 과일을 꺼내고 고기까지 삶았다. 혹시 딱딱한 걸 못 씹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오래 삶을 생각이었다. 도마 소리에 깰까 염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크가 무척 깊이 잠들었음을 기억해 내고 난 후에는 움직임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음식을 해 놔도 먹을 수 있을까. 당분간 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밀리엄 장군은 몸에 엄청난 이상은 없고 조사 중에 귀도 조금 들리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몸이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카이얀.”
카이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요리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루크가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카이얀은 너무 놀라서 거의 싱크대 위 선반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루크 씨!”
“네.”
부르니 또 태연하게 대답한다. 카이얀은 루크 쪽으로 돌아섰다. 기척 좀 하고 다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먼저 걸리는 게 있어서 다른 걸 물었다.
“귀는 어때요?”
“들립니다. 작게.”
같이 차를 타고 올 때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좀 자고 일어났으니 혹시나 했다. 카이얀의 얼굴에 미미한 실망이 스쳤다. 몇 시간 자고 일어났다가 나을 리 없다는 건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꾸 기대하게 되는 건 별수 없었다.
“그렇군요. 앞으로 더 나아질 겁니다.”
카이얀이 안타까운 얼굴로 잠시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말했다.
“카이얀은 제가 잘 듣는 걸 불편해하지 않았습니까?”
“네?”
카이얀은 멍하게 되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루크도 어리둥절했다. 카이얀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 눈치기에 루크는 좀 더 길게 설명해 보기로 했다.
“예전에, 제 청력이 민간인보다 훨씬 더 좋다는 걸 알고 불편해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카이얀은 얼른 기억을 뒤졌다.
생각 안 나! 안 난다고!
한참을 돌이켜 짚어 보다 간신히 한 장면을 건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 통화 다 엿들었던 거 맞습니까?”
“엿들은 건 아닙니다.”
“아, 몰래 엿들은 건 아닌데 그냥 들렸다?”
특별히 빈정거리려고 했던 건 아니다. 루크가 너무 기가 죽어 있기도 했고, 그냥 좀 재미있어서. 그걸 저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카이얀은 자기는 이미 한참 전에 잊어버린 일을, 루크가 너무 다른 방향으로 기억하고 있어 놀랐다.
“그때 내가 농담이라고 안 했어요? 신경 안 쓴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니, 루크 씨가 저런 말도 알았나?
카이얀은 좀 당황하고 어리둥절해서 특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루크의 생각을 정정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난 루크 씨가 잘 듣는 게 좋습니다.”
“네. 저도 카이얀이 잘 듣는 게 좋습니다.”
아,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카이얀이 끙끙대고 있는데 루크가 덧붙였다.
“듣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카이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들릴 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루크가 다가왔다. 이미 가까웠는데, 그가 한 걸음 나아오자 정말 코가 부딪칠 것처럼 가까워졌다. 카이얀은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뒤에 싱크대가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루크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이마를 카이얀의 어깨에 기댔다. 카이얀은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어색하게 루크를 불렀다.
“어… 루크 씨?”
“이렇게 하면 잘 들립니다.”
“아.”
“숨소리까지.”
카이얀은 머뭇거리다가 루크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루크가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음 순간, 카이얀이 후다닥 다시 싱크대 쪽으로 돌아섰다. 괜히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며 카이얀은 더듬더듬 말했다.
“어, 저, 좀 앉아 있을래요? 저녁 좀 주려고 했는데. 저녁이라기엔 좀 이르긴 한데, 루크 씨가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네.”
루크는 의외로 깔끔하게 대답하고 식탁 앞에 앉았다. 뒤에서 계속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져서 카이얀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아, 망할. 왜 의식되는 거야. 자연스럽게 좀 움직여.
스스로를 타박하며 카이얀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고기가 얼마나 익었나 뒤적여 보다가 카이얀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루크는 다행히 그날 저녁을 무리 없이 잘 먹었다. 카이얀은 안도했다. 식사를 하다가, 총상 입었던 곳은 아프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루크는 많이 나아졌다고 대답했다. 총상이 그렇게 빨리 나을 것 같지는 않아서, 카이얀은 당분간 그를 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일주일이 더 지났지만, 루크의 신원 문제는 빨리 해결되지 않았다. 연구소 관련자들의 일이 모두 처리될 때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카이얀은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루크에게 신분증이라도 쥐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얀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으니 그는 잠시 그걸 잊기로 했다. 대신 지금 루크와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로.
“우리 나갈까요?”
“네.”
루크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어딜 가는지, 왜 나가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방 안에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럼 옷 갈아입고 나와요. 나도 나갈 준비 하겠습니다.”
“네.”
여전히 대답은 빨랐다. 카이얀은 자기도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지갑을 챙기고,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그러고 있으니 루크가 내려왔다.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카이얀은 당황했다.
“그, 점퍼…….”
“네? 점퍼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 없죠. 미안합니다.”
루크를 기다리는 동안 쓸데없이 가구나 사들이지 말고 코트라도 몇 벌 사다놓을 걸 그랬다. 카이얀은 후회하며 자기 옷장을 뒤졌다. 키 차이는 크지 않지만, 체격 차이는 있다. 뭘 입혀도 썩 잘 맞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급한 김에 두툼한 점퍼를 입히니 못 봐줄 만하진 않았다.
“오늘 나가서 옷도 좀 사죠.”
“네. 하지만 전 크게 춥진 않습니다.”
“나가면 추울 겁니다.”
카이얀은 꽤 단호하게 말했고 루크는 밖에 나가자마자 정말 날이 추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계속 집에만 있어서, 바깥 날씨가 어떨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목도리까지 둘러 주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감기까지 걸리면 큰일 납니다.”
루크의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카이얀은 또 백화점으로 차를 몰았다. 어릴 때부터 넉넉하게 자란 편이라, 그 외에는 옷을 살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살 수도 있지만 그건 외출이 아니니까. 지하에 차를 대놓고 카이얀은 루크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몸 이상하면 바로 얘기하고요.”
이제는 이 말이 인사 같았다. 루크가 돌아온 후, 카이얀은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말하곤 했다.
“네. 이젠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요.”
“카이얀이 키스해 준 덕분입니다.”
“어…….”
생물학자는 아니지만 내 생각엔 그냥 루크 씨 세포들이 힘낸 것 같은데요. 카이얀은 그 말을 삼켰다. 이른 시간이라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카이얀도 쇼핑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크의 옷을 고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옷을 잔뜩 들려 줘도 루크는 피팅룸 가는 것을 귀찮아 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카이얀이 시키니까 필요한 일인가 보다 할 뿐이었다. 루크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휴대폰을 보거나 루크가 입어 볼 다음 옷을 고르기만 하면 되니 카이얀은 꽤 편리한 입장이었다.
“카이얀 옷은 안 삽니까?”
“아. 난 내 옷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카이얀은 지금 루크가 입은 옷이 어떤지 잠시 생각했다. 키가 큰 편이라 뭘 입혀도 괜찮긴 한데, 색깔을 바꿔보는 편이 좋을까. 이것저것 재보고 있는데 옆에서 점원이 말했다.
“체격이 좋으셔서 뭘 입어도 모델 같네요. 잘 어울리세요.”
루크는 잠깐 점원을 보더니 다시 카이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울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카이얀은 예전에 루크에게 ‘어울린다’는 말을 가르쳐준 게 떠올랐다. 뭐 때문이었지, 그런 일상적인 대화가 다 그렇듯 정확한 경위가 기억나진 않았지만 루크가 그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음, 루크 씨가 입으면 보기 좋다는 겁니다. 루크 씨 얼굴이나 몸이나 분위기나… 그런 거랑 잘 맞는다고요.”
옆에서 점원이 이상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이얀은 무시했다.
“꼭 옷 고를 때만 쓰는 말은 아니고… 사람끼리도 쓰고, 아무튼 전체적으로 씁니다.”
“아.”
루크는 뭔가 혼자 이해한 부분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다가와 카이얀 옆에 앉았다. 카이얀은 이게 뭔가 싶어서 가만히 루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루크가 점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울립니까?”
점원은 할 말을 잃었고 카이얀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점원은 잠시 잃었던 미소를 띠며 더듬더듬 대답을 꺼냈다.
“네, 저, 잘 어울리시네요. 그러니까 두 분, 옷이, 물론 두 분도 잘 어울리고…….”
“그런 게 아닙니다.”
카이얀은 당황해서 부정했다. 루크가 곧장 카이얀에게 물었다.
“안 어울립니까?”
“아니, 내 말은 옷 얘기가 아니라…….”
카이얀은 일단 루크가 입은 옷을 계산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루크는 카이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듯 나란히 걸으면서도 계속 카이얀이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카이얀은 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오래 머뭇거렸다.
“제가 뭔가 실수했습니까?”
“딱히 실수랄 건 없지만…….”
실수가 아니면, 이게 뭐지?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정확한 표현을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결국 카이얀은 백화점 내 손님 없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루크는 계속 카이얀의 말을 기다리다가, 그가 말할 기미가 없자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카이얀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까?”
“글쎄요. 점원한테 그걸 왜 물어본 겁니까?”
“카이얀과 어울리게 입고 싶었습니다.”
다른 의미로, 카이얀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에야 루크의 말에 대답을 해 줄 수 있었다.
“그 점원은 아마… 우리가, 어, 연인? 그런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
루크도 연인이 뭔지 알았다. 예전에 카이얀이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결혼이나 가족이나 사귀는 것이나 사랑에 대해서도. 물론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건 연인과 결혼이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연인에 대해 이미 설명해 줬었다는 걸 잊고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둘이 서로 사랑해서 같이 지내는 사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왜냐면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말은, 물론 친구끼리도 쓰지만 대체적으로…….”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카이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루크는 물었다.
“저희는 연인이 아닙니까?”
“…….”
스물일곱 해를 살았지만 이렇게 할 말 없기는 처음이었다. 카이얀은 입만 벌린 채 루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크는 그가 늘 그랬듯, 어떤 부끄러움도 난처함도 없이 카이얀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저희는 사랑해서 같이 지내는 게 아닙니까?”
“어…….”
루크와 대화하다 보면 유난히 ‘어’ 소리를 잘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왜 이 사람은 저런 말을, 이런 데서,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하는 거야?
“저는 카이얀을 사랑합니다.”
“네. 그러니까… 고맙네요.”
카이얀의 대답에 루크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카이얀도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음…….”
“그래서 절 기다리고, 저한테 와 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말하자면… 그렇죠?”
“그리고 우린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연인입니다. 맞습니까?”
카이얀은 이 상황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백화점 프랜차이즈 카페. 연두색 가죽 소파 위. 가격표도 안 뗀 새 옷을 입은 루크.
‘우리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야?’
대충 이런 내용의 질문을 받기엔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연인이 되려면 사랑이나 동거 말고도 많은 게 필요한데, 동거가 필수적인 건 아니고, 어…….”
루크는 참을성 있는 청자였다. 카이얀은 자기가 원래 이렇게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이 상황에선 누구라도 이럴 거라고!
카이얀은 끙끙대며 말을 골랐다.
근데 뭐가 필요하지? 고백? 꽃, 와인, 노래, 편지, 뭐 이런 것들?
급기야 카이얀은 교제했던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랑은 왜 만났지? 호감이 생겼고, 괜찮은 사람 같았고, 그러던 차에 고백을 받았고… 혹은 고백을 했고…….
루크 씨랑 뭘 안 했지?
카이얀은 막막하게 루크를 보았다. 루크와 ‘일반적인 상황’을 연관 짓는 건 늘 무리한 일이었다.
카이얀이 간과한 게 있다면, 그가 ‘우리 사귀는 거지?’라는 예민한 질문 앞에 너무 오래 망설였다는 것이다.
“그럼 저는 카이얀의 연인이 아닙니까?”
루크의 얼굴에 아주 명백한 실망감이 스치는 것을 보고, 어째서인지 카이얀은 좀 기겁했다.
“우리는 연인도 아닌데 같이 사는 겁니까? 그러면 저는 카이얀의 ‘같이 사는 사람’이 됩니까?”
아무리 단어의 뉘앙스에 무지해도, ‘연인’과 ‘그냥 같이 사는 사람’ 사이에 뭔가 엄청난 벽이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카이얀은 얼른 수습에 나섰다.
“아, 음, 아니요, 그게. 물론 맞죠, 연인. 네, 그렇죠. 그러네요. 하하.”
루크는 대답이 없었다. 어지간히 낙심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카이얀을 보고 있긴 했지만 시무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이유도 모르고 마음부터 급해졌다.
“루크 씨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같이 살고, 사랑… 도 하고, 그렇죠.”
“제가 카이얀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렇습니까?”
와, 이 사람 정말 땅 잘 파네.
카이얀은 이제 식은땀까지 났다.
“저는 민간인에 대해 잘 모르고, 늘 물어보고, 이제는 소리도 작게 들리고, 카이얀만큼 멋지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게 적고…….”
“아, 맞다고요! 우리 사귀는 거 맞다고!”
카이얀은 더 못 듣고 소리를 질렀다. 카운터 쪽에 있던 점원이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손님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라 그들의 시선까지 카이얀에게 몰렸다.
내가 미쳐.
졸지에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입으로 커밍아웃을 하게 된 카이얀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루크는 아주 태연했다. 그의 다음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럼 결혼도 합니까?”
카이얀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잃었다. 어느 핀트에서 왜 기가 막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기막혔다. 루크는 성실하게 부연 설명까지 해 주었다.
“연인이 되고 나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으면 결혼하는 거라고…….”
그러다 뭔가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아, 우린 이미 결혼한 겁니까?”
카이얀은, 이쯤 되자 그냥 웃겼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 한 겁니다.”
“와.”
루크는 감탄했다. 결혼이 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는 있는 걸까.
카이얀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루크는 뭔가 대단하고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듯, 아주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이얀을 계속 바라보았다. 카이얀은 자기가 왜 웃는지도 모르고 계속 픽픽 웃었다.
쇼핑이고 뭐고 그만두고 주차장으로 가면서 카이얀은 잠시 루크를 살폈다. 특별히 조건을 따지는 편은 아니지만, 결혼하려면 루크 정도는 돼야지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럼 지금부터 신혼인가?
아니, 언제부터 신혼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