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카이얀과 루크는 당분간 지그문의 사업장에 머물기로 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 같았다. 게다가 지금 루크는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다.
루크의 몸은 엉망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균형도 제대로 잡지 못해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처음에 루크가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그대로 쾅 넘어졌을 때 카이얀은 얼굴이 새파래지도록 놀랐다. 그뿐 아니라 시력이 이상할 정도로 오락가락했으며 총에 맞은 어깨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꼼짝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할 처지였다. 시간이 가면 나아질까, 카이얀은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답답해할까 염려했지만 루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제 목소리 어떻습니까? 이상합니까?”
그렇게 물어오기도 하는 걸 보면 귀가 안 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그의 목소리는 아주 멀쩡하다는 말을 종이에 적어 주어 루크를 안심시켰다. 루크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많은 말을 하지는 못했다. 루크가 기절하듯 다시 잠든 뒤에야, 카이얀은 연락할 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덕분에 살았다.”
휴대폰을 다시 켜고 싶지 않았던 카이얀은 사업장 전화를 빌려 지그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상태 어때?
“안 좋아. 그래도 네가 신경 써 줘서 다행이지.”
- 말 몇 마디 한 거야. 머독은?
“바로 갔어. 걔도 일 바쁘니까.”
지그문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 당분간 거기 있을 거지? 의사라도 보낼까? 응급처치 정도는 했을 텐데.
“그래 주면 좋지. 신세 좀 진다. 집에 못 갈 것 같아.”
- 셋 중에 제일 조용히 사는 것 같더니.
그렇게 말하고 지그문은 그저 웃었다. 지그문과의 통화를 끝낸 후 카이얀은 다른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장군님, 카이얀입니다.”
- 아, 그래.
저쪽은 꽤 안도한 목소리였다. 그 군인이 다친 채 돌아왔는데 정확한 상황을 몰라 전하지 않았다, 연구소에서 소란이 있었던 모양인데 카이얀 전화가 꺼져 있어서 당황했다. 집에도 없는 것 같던데 지금 어디냐……. 그런 말들이 쏟아졌다. 말 많은 사람이 아니라 카이얀은 이 사람이 정말 많이 놀랐구나 싶었다.
“지금 루크 씨랑 같이 있습니다.”
- 잘된 일이군. 이번에 사바튼 연구소에서 일어난 사고를 조사한다고 해서 팀을 꾸렸는데, 거기 우리 쪽 사람을 몇 넣어 볼 계획이네. 사고가 사고인 만큼 연구와 관련해서 좀 더 제대로 감사할 수 있을 테니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고.
“감사합니다.”
카이얀은 덤덤하게 말했다. 감사 자체에 큰 기대를 갖고 있진 않았다. 감사야 이전에도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밀리엄 장군이 꾸준히 신경을 써 주고 있으니, 어떻게든 결판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 총격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네. 그 군인이 맞은 건가?
“네, 그랬습니다.”
그 총상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섬뜩해졌다. 루크가 저대로 영영 듣지 못하면 어떡하나. 저대로 평생 살아야 한다면 가여워서 그걸 어떻게 보겠는가.
- 그랬군.
밀리엄 장군은 한숨처럼 말했다. 그 뒤로 몇 마디가 더 오간 것 같은데, 카이얀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언뜻 당분간 사바튼 연구소 관계자들은 조사를 받느라 움직이지 못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게 기억날 뿐이었다.
대강 통화를 마무리하고 카이얀은 다시 루크 쪽으로 움직였다.
루크가 어서 기운을 차리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자기 멋대로 이것저것 사다 놓았는데 루크가 좋아할까. 사실 큰 의미를 두고 사 둔 건 아니니 전부 바꾸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루크와 그의 방을 새로 꾸미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 같았다. 아니면, 이사를 가도 좋을 것이고…….
루크가 다시 눈을 뜬 건 다음 날 정오 무렵이었다. 그 사이 의사가 와서 루크의 몸을 한 차례 살폈지만 붕대를 갈고 영양제를 투여한 것 말고는 별다른 처방을 해 내지 못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에 대해서도,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으니 좀 기다려 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귀는 곧 들릴 거라고 합니다.”
루크가 눈을 떴을 때, 카이얀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곧 아차 싶어 종이에 써 주려고 펜을 들었다.
“네.”
막 ‘의사가 왔었는데’라고 쓰던 카이얀은 잠시 멈추고 루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가 쓰던 부분을 지우고 새로운 물음을 적었다.
[무슨 말 한지 알아들었어요?]
“네. 귀에 대해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자기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지 루크의 목소리는 꽤 큰 편이었다. 카이얀은 내색하지 않고, 맞게 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다시 적어 주었다.
“입모양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아.”
배고프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루크는 괜찮다고 했다. 목이 좀 마르다고 해서, 카이얀은 물을 갖다 주었다. 루크는 여전히 혼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 했다. 카이얀이 붙잡아 일으켜 주자 통증 때문에 끙끙거리면서도 상체를 일으켰다.
카이얀은 컵을 루크 입술에 갖다 대고 조금 기울여 주었다. 총에 맞지 않은 쪽 어깨를 움직여 컵을 쥐려던 루크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카이얀은 개의치 않고 루크가 충분히 물을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카이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세심하고 다정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카이얀의 목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알고 있었다. 루크는 뒤늦게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졌다. 하지만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 입술도 아름다우니까, 괜찮았다.
말하고 싶은 게 많았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가짜라고 말했다. 믿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속고 말았다.
집까지 찾아갔었는데 문을 두드릴 때마다 다른 사람이 나와서, 그 집 문 앞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얼마나 간절히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그러나 루크는 말하지 않았다.
[다 나으면 하고 싶은 거 있습니까?]
카이얀이 그렇게 물었을 때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같이 집에 가고 싶습니다.”
카이얀은 그러자고 했다. 가서 좋은 음식도 많이 먹고, 여행도 다니자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는데, 카이얀이 덧붙여 썼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주겠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얘기해요.]
어떻게든 빨리 낫고 싶게 만드는 말이었다.
* * *
카이얀이 밀리엄 장군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도 루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걷는 것 정도는 얼추 가능해진 것 같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회복 속도가 느렸다.
밀리엄 장군은 굳이 카이얀을 밖으로 불러내지 않았다.
- 조사는 끝냈네. 루크라는 군인에 대한 자료는 다 파기되어서 전에 중앙 정부에 제출했던 것 말고는 남은 게 없더군. 관련된 연구원들도 다 침묵하고 있어.
“그렇군요.”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라 카이얀은 크게 낙담하지도 않았다. 불법 실험의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연구소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루크는 계속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숨어 지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답답해졌다.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확실히 이런 일은 밀리엄 장군 소관이 아니었다. 일의 진척 상황을 알려 주기 위해선 상당한 성의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루크를 찾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 카이얀은 부드럽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 방법이 하나 있긴 하네.
밀리엄 장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렇게 말했다. 별 소득 없이 통화를 끝내려던 카이얀은 얼른 수화기를 귀에 가까이 했다.
- 사바튼 연구원들에는 못 미치지만, 지금 정부도 꽤 괜찮은 과학자들을 데리고 있어.
카이얀은 이게 무슨 소린가 잠시 생각했다. 밀리엄 장군은 그 뒤로도 계속 뭐라고 말했는데 듣다 말고 카이얀은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것도 결국 인체 실험 아닙니까?”
- 실험을 하겠다는 게 아닐세.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건강검진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카이얀은 말을 잃고 침묵했다. 밀리엄 장군은 조금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카이얀이 할 말을 찾지 못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 내 말의 요지는, 지금 남은 증거는 그 군인의 신체뿐이라는 걸세.
그날의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카이얀은 루크 곁으로 돌아와 그를 지켰다. 그러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해져서 밖으로 나갔다. 마트로 가서 이것저것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음식들을 골랐다. 머무는 곳 사람들이 신경을 써 주고 있긴 하지만 루크에게 뭔가 좀 더 좋은 것을 직접 해 먹이고 싶었다.
주방을 빌려 칼질을 하는 동안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찔렀다. 루크에게 밀리엄 장군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끝내 루크에게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몇 년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 보면 연구소도 루크를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 안일한 기대라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다시 루크를 실험실에 보낼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카이얀의 기색이 달라진 걸 알고 루크는 그렇게 물었지만 카이얀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만 대답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조금만 먹어 보라며 이것저것 갈아 넣은 스프를 건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루크는 그릇을 받지 않았다.
“팔이 아픕니다.”
그릇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아픈 건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 아픈 것 때문에 움직임을 머뭇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서인지 조금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귀찮아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카이얀은 루크의 기대대로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루크의 말에 좀 당황하는가 싶더니, 정말 곧이곧대로 믿고 아이 대하듯 떠먹여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좋은 거구나.
루크는 만족하며 카이얀이 내내 곁에 앉아 있는 걸 즐겼다. 그러는 동안 카이얀은 이렇게 순수하고 아픈 사람을 절대 낯선 곳으로 보낼 순 없다며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 * *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주일 후, 갑자기 밀리엄 장군이 카이얀이 머무는 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카이얀은 너무나 놀라 한동안 방문 앞을 지키고 서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찾아오신 겁니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이쪽 전화번호를 가지고 조금 알아봤네.”
“왜 오셨죠?”
카이얀은 그가 대체 왜 왔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이라니. 서두르는 카이얀을 보며 밀리엄 장군은 조용한 장소로 가자고 말했다. 카이얀은 루크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런 복도에 서서 밀리엄 장군과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건물 근처 벤치까지 나가 카이얀은 밀리엄 장군의 말을 기다렸다.
“로스터드 군, 오해하지 말고 듣게. 나는 상부에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험체 군인의 일은 단순히 자네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말일세. 중앙 정부는 오랫동안 사바튼 연구소의 불법 실험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어. 이제까진 연구소에서 기록을 빼내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 않아졌고. 지금 상황에서 저 군인은 유일한 증거고, 나와 몇몇은 그걸 알고 있네.”
카이얀은 옆에 앉은 밀리엄 장군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신체를 갉아먹을 시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혈색 좋은 얼굴이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군인이었다. 밀리엄 장군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자기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 군인에게 얘기는 해 봤나?”
“아니요.”
“내 짐작일 뿐이네만, 아마 그 검사를 받은 후에 자네가 안전해진다고 하면 기꺼이 간다고 할 것 같은데.”
카이얀은 밀리엄 장군이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왜 이 사람에게 연락했을까. 조용히 숨어 지냈어야 하는 건데. 너무나 확고하게 루크를 도와준다 해서 덥석 믿은 게 실수였다.
“그렇게 협박하는 건 비열한 일입니다.”
감정이 격해지자 말도 강하게 나갔다. 밀리엄 장군은 기분 상한 기색도 없이 되물었다.
“비열한가?”
“물론이죠.”
“그 검사를 받지 않으면 사바튼 연구소는 건재할 걸세. 평생 쫓기는 삶을 사는 것보단 그 사람도 자기 신원을 회복하고 자유롭게 지내길 원하지 않을까.”
그런 식의 말에는 답할 말이 없었다. 카이얀은 허를 찔린 기분으로 침묵했다. 그야 루크는 당연히 그걸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위해 다시 실험대에 오르게 된다면. 밀리엄 장군은 그저 건강검진 같은 거라고 했지만, 인체가 어떻게 자극을 받았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아내는 실험이다.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절대 건강검진 수준은 아닐 것이다.
“저 사람은 자유니 신원이니 하는 걸 모릅니다.”
카이얀은 부러 단언했다. 그러나 밀리엄 장군은 여유로웠다.
“자네가 계속 저 군인을 숨겨 두기만 하면, 정말 죽을 때까지 자유도 신원도 모르고 살 걸세.”
“전 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라고 하면 물론 갈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가지 않으면 제가 위험할 거라고 하니까 가는 겁니다.”
“그게 나쁜가?”
밀리엄은 천연스레 물었다. 당연히 그런 식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 카이얀은 간신히 받아쳤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루크 씨는 아직 약하고 미숙해서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제 보호가 필요하고…….”
밀리엄 장군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웃는 얼굴을 잘 안 보이는 사람이라 카이얀은 말을 멈추었다.
“저 군인에게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자네밖에 없을 걸세.”
밀리엄 장군도 루크의 전공에 대해 들었다. 루크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일종의 살상 무기였다. 어디 던져 놔도 쉽게 죽진 않을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하다니, 어지간히도 정이 들었구나 싶었다.
“자네는 저 군인을 위해서 평생을 숨어 살 수 있겠나? 뭐든 희생할 수 있겠어? 남은 인생이나 이제껏 쌓아 온 명예나, 그런 모든 것들을 전부 다?”
“못할 것도 없죠.”
아무래도 루크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야겠다. 밀리엄 장군의 손이, 중앙 정부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어디든 좋다. 어디든 서둘러서…….
“그 군인도 마찬가지일 걸세.”
밀리엄 장군은 거의 사이도 두지 않고 말했다. 카이얀은 이번에야말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이얀도 알았다. 스스로는 ‘못할 것도 없다’고 애매하게 답했지만 루크는 다를 것이다.
카이얀을 위해서는 뭐든 다 감내하고, 다 버릴 것이다. 그게 루크의 놀라운 점이었다. 그런 일을 당연하다는 듯 해내는 것이.
“그게 비열한가?”
대답 없는 카이얀을 보며, 밀리엄 장군은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절대 위험한 일 만들지 않겠네. 약물 사용도 없어. 몸이 많이 망가졌으니, 정말 일반 건강검진 수준으로만 조사해도 될 걸세. 어차피 몸이 어떤 상태인지 한번 보기도 해야 하지 않나.”
결국 카이얀은 루크에게 밀리엄 장군의 말을 전했다. 연구소에서 루크에게 불법적인 실험을 진행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가 루크의 신체라는 것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루크는 ‘불법’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곁에 서 있던 밀리엄 장군은 카이얀의 손에서 펜을 받았다. 이 조사에 응하면 앞으로 계속 무리 없이 카이얀과 살 수 있다는 문장을 적자 결정은 쉬워졌다. 루크의 대답은 간결했다.
“가겠습니다.”
카이얀은 루크의 즉답에 당황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결정해도 됩니다.’라고 적었는데 루크가 그 문장을 보고 다시 말했다.
“가겠습니다.”
카이얀은 ‘천천히 결정해도 됩니다.’라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그 다음 ‘위험’에 동그라미를 쳤다. 루크는 고개를 기울이고 카이얀을 보았다.
“제가 그 실험을 받아야 카이얀과 계속 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카이얀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다가 종이에 적었다.
[좀 더 안전하겠죠.]
자기보다는 루크가.
“그럼 그 실험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카이얀은 불안했지만 루크는 결정을 바꾸지 않을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어딘지 먹먹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결정해도 된다는 문장 아래 다시 적었다.
[데려다 주겠습니다. 마중도 나가고요.]
“네.”
루크는 웃었다.
그 지긋지긋한 실험이라는데, 꼭 통증을 동반하지 않더라도 평생 루크를 괴롭혀 온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데, 루크는 좋아 보였다. 루크는 괴로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아프면 바로 아프다고 말해야 합니다. 참지 말고.]
“네.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루크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연구소 사람들을 따라갈 때는 그렇게 불안했는데, 카이얀이 말해 준 곳이니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루크의 말을 듣고 카이얀은 회의감을 느꼈다. 글쎄, 이걸 무사히 돌아왔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루크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카이얀 본인에게는 안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같은 말을 적었다.
[돌아온 다음엔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하는 겁니다.]
아래에, 덧붙였다.
[같이.]
루크는 카이얀이 쓰는 것을 보고 있다가, 그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뭔가 싶어 잠깐 머뭇거리던 카이얀은 잠시 후 아, 하고 펜을 내밀었다. 루크는 ‘같이’ 아래 적었다.
[카이얀.]
뭐지?
카이얀은 의아해서 그가 쓴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크는 카이얀을 흉내 내듯, 그 아래 다시 적었다.
[북극성.]
카이얀은 그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크는 카이얀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온기. 카이얀은 가슴이 뛰었다. 큰 의미를 두고 보여 준 것도 아닌데, 그것을 이토록 소중하게 품고 있었구나. 마음이 아픈 건지 설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크는 떠났다.
한낮이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피해 두 사람은 밀리엄 장군의 차를 타고 움직였다.
루크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정부 소속 연구소까지 함께 온 카이얀을 뒤돌아보고 염려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루크는 갔다. 루크는 두렵지 않았다. 부축을 받아 움직여야 했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스스로 각성제를 주사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번쩍이도록 달리던 그 밤, 자기를 약속된 장소까지 이끈 것은 바로 카이얀이었다. 그가 그토록 선명하게 빛나는데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겠는가.
햇빛 속에서 카이얀의 모든 것이 눈부셨다. 돌아오면 저 입술에 키스하리라. 루크는 손을 흔들었다. 카이얀도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루크는 웃었다.
나의 북극성, 당신은 언제나 내 모든 감각을 잡아끈다.
내 밤하늘에 뜨고 지는 그대,
영원히 내 마음에 오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