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2권) (3/12)

작전명 폴라리스(개정증보판) 02

3장.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그 뒤로 루크의 생활 자체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카이얀보다 한 시간쯤 일찍 일어나 미리 씻고 그를 기다린다. 일곱 시쯤 카이얀과 함께 아침 산책을 나간다. 대체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지만 내키면 뛰기도 한다.

여름은 깊어져 돌아올 때쯤에는 환하게 해가 뜬다. 집에 와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카이얀이 요리하는 걸 돕고-망치고- 같이 식탁에 앉는다.

이후 카이얀은 연구실로 들어간다. 새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 같은데, 미리 준비해 놓은 것도 없고 동서양 문학을 비교문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해서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바빠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

연구실 밖으로 나오던 카이얀이 움찔 놀랐다. 문 바로 앞에 루크가 서 있었던 것이다. 카이얀은 너무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 뭐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카이얀은 그럼 왜 여기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네. 그럼 전, 물 좀 마시려고요.”

그러면서 루크를 지나치는데 루크가 덥석 카이얀을 붙잡았다. 팔뚝을 가볍게 잡은 거라 걷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카이얀은 의아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가져다 드릴 수 있습니다.”

“아, 아뇨. 제가 떠다 마시면 되니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카이얀은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는 사이 루크는 대답도 듣지 않고 부엌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카이얀은 루크가 대체 왜 저러나 잠시 생각하다 그냥 제 연구실로 다시 들어왔다.

연구를 시작한 지 사흘쯤 지나자, 연구실은 또 슬슬 어질러지기 시작했다. 나름의 체계를 두고 분류하지만 남이 보기엔 그냥 엉망으로 흩어 놓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카이얀 본인이 보기에도 좀 지저분했다. 오늘 계획한 분량만 끝나면 대강이라도 정리를 해야겠다 생각할 때쯤 루크가 노크를 했다.

“이젠 노크도 잘 하네요.”

카이얀은 들어오는 루크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 컵을 받아 들며 싱긋 웃었다. 청각 때문에 상대가 가까이 오면 바로 알아차리는 루크에게 노크의 개념을 설명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루크 씨도 뭐… 배 안 고파요? 점심때 지났는데.”

“괜찮습니다.”

“그렇게 안 먹다간 몸 다 버려요. 몸도 좋은데 유지하는 편이 낫죠.”

“제 몸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카이얀은 컵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내심으론 좀 놀란 상태였다. 어째서일까, 요즘은 루크와 이야기할 때마다 놀라고 당혹하는 것 같았다. 루크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얀은 더듬더듬 되는대로 뱉었다.

“아니, 제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근육이라는 게, 기초체력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전 로스터드 씨의 몸이 더 마음에 듭니다.”

카이얀은 또 할 말을 잃었다. 루크가 그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바람에 아주 잠깐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제대로 알아들은 후에도 할 말이 없긴 마찬가지여서 카이얀은 그냥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분명 칭찬인데 왜 위험한 느낌이 들지?

카이얀은 고개를 저으며 그 화제를 접어 두었다.

“그럼 뭐… 책이라도 읽고 있을래요? 아니면 정원에 나가 있어도 되고.”

네, 하고 바로 나갈 줄 알았는데 루크는 의외로 뜸을 들였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건가 싶어 카이얀은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루크는 자기가 한 번밖에 만져보지 못한 미지의 물체인 컴퓨터와, 그 앞에 앉아 자기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카이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카이얀이 의자에 앉아 있어 본의 아니게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상관과 있을 때라면 시선을 위로 들었겠지만, 카이얀의 깊은 눈매와 제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 좋아 그러지 않았다.

“여기 있고 싶습니다.”

카이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자 루크가 얼른 덧붙였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그냥 당신이 여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방햅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마음대로 하라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이 좀 바빠서, 말상대 해 줄 수는 없는데. 괜찮습니까?”

루크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카이얀이 말을 바꿀까 염려스러웠는지 얼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이얀은 그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편리한 세상이다. 몇 번 클릭만 하면 논문부터 고서적까지 온갖 자료들을 다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카이얀이 하는 연구라는 게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때가 많아서, 직접 국립도서관에 가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답사를 가야 할 일도 생긴다. 하지만 아직은 선행 연구 조사 단계니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선행 연구 조사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계속 논문을 읽고 책을 검토해야 한다. 카이얀은 기본적으로 3개 언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고 그 외 많은 언어도 읽고 쓰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번역 안 된 외국 논문을 쉽게 줄줄 읽어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안 읽히는 글을 계속 읽고 있자니 지겹고 몸이 늘어졌다.

루크는 정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거기 앉아서, 정말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카이얀만 보았다.

카이얀은 루크를 잠시 잊고 있다가도 깜짝 놀라 그쪽을 보곤 했다. 카이얀과 눈이 마주치면 루크는 깜짝 놀라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 심심해요?”

그 상태로 세 시간쯤 지났을 때, 카이얀은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가볍게 어깨를 풀고 목을 돌리는데 루크가 다가왔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뭘요?”

“근육에 통증이 있는 게 아닙니까?”

카이얀은 루크의 말을 알아들었다. 루크는 책상 너머에 서 있었는데, 카이얀은 문득 그의 머리카락이 좀 자랐다고 생각했다.

“아, 심하게 뭉치거나 한 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머리카락 안 불편해요?”

눈을 가릴 정도는 아니지만 처음보단 많이 길었으니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크는 카이얀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머리카락 말씀이십니까?”

“네, 많이 길었는데.”

“아…….”

루크는 어물어물하며 제대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카이얀은 지극히 일상적인 이 대화가 왜 이렇게 끊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머리카락이라는 말에 대해 모르나?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해 보다가 카이얀은 결국 루크를 데리고 욕실로 갔다.

“자, 봐요. 이게 머리카락이라는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왜 말을 못 알아들었지?

카이얀은 의문을 담아 루크를 보았다. 루크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조금 긴장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제 머리가 길어질 줄 몰랐습니다.”

“네?”

카이얀이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루크는 거울을 통해 카이얀을 보며 조금 멋쩍게 웃었다. 평생 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카이얀은 그 표정을 보고 약간 놀랐다.

“모발이 계속 자라면 관리하기가 불편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머리카락은 자라지 않는 거라고, 캠벨 박사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런데 머리가 자랐다고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확실히 길어진 것 같습니다.”

카이얀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답할 말들이 확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크기를 조절하려고 약물 투여를 받는 실험쥐도 아니고, 머리카락 정도야 자라게 뒀다가 잘라 주면 되는 건데…….

“보기 이상합니까?”

카이얀이 조용해지자 루크가 얼른 물어왔다. 카이얀은 아뇨,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카이얀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마 그 약을 끊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자르겠습니다.”

“아니…….”

카이얀은 머뭇거렸다. 머리를 자르느냐 마느냐 하는 건 순전히 루크 마음대로 할 일이었다. 그런데 루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런 말을 한다. 카이얀은 연구원이 아닌데도.

루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틀렸던 모양이다. 카이얀은 모든 행동에 허락을 구하는 루크를,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루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루크 씨가 자르고 싶다면, 잘라 줄게요.”

“관리하기 불편하시다면…….”

“전 루크 씨의 관리자 같은 게 아닙니다.”

카이얀은 잘라 말했다. 이 타이밍에선 좀 더 강경해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이것저것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뭐든 하고 싶은 쪽으로 하세요.”

루크는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식사는 배가 고플 때마다 하고 물은 목이 마를 때마다 마신다. 그런 단순한 것은 이해하기 쉬웠는데 이건 좀 어려운 것 같다. 카이얀은 좀 더 부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머리가 긴 게 루크 씨 스스로 불편하거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같이 나가서 다듬으면 됩니다. 계속 길러 보고 싶거나 머리 긴 게 마음에 들면 그냥 그대로 두면 되고요.”

이 시점에서 문득 카이얀은 루크의 지난 질문이 떠올랐다.

“취향이 무슨 뜻입니까?”

이때가 그것에 대해 설명할 기회인 것 같았다.

“그걸 취향이라고 합니다. 음… 좀 헷갈릴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그런 거죠. 머리가 짧은 게 좋은지 긴 게 좋은지, 옷은 어떤 색이 어울리는지, 신발은 어떤 스타일이 좋은지, 그런 것들이요. 그게 다른 사람한테도 적용되면 남에 대한 취향이죠.”

루크는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카이얀은 얼른 워드 창을 내리고 인터넷 검색 엔진을 돌렸다. 그러면서 루크를 제 쪽으로 불렀다. 루크는 책상을 빙 돌아 카이얀의 의자 뒤에 섰다. 모델, 검색어를 입력하자마자 수많은 이미지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봐요, 이중에 어떤 쪽이 가장 좋아 보입니까?”

루크는 얼결에 카이얀 쪽으로 허리를 굽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수많은 모델 사진이 그 안에 있었는데 어느 쪽도 별로 근사해 보이지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음, 전 이쪽이 괜찮아 보입니다.”

카이얀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머리는 짧은 편보다 긴 편을 좋아하고, 목이 길고 쇄골이 예쁘면 시원해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카이얀은 고개를 돌려 루크를 보았다.

“이런 걸 취향이라고 합니다. 옷이나 머리나 음식이나, 다른 것들도 다 이런 식이고요. 이해가 갑니까?”

“네. 그럼 로스터드 씨는 머리 긴 편이 좋으십니까? 로스터드 씨의 머리카락은 짧아 보입니다.”

“음… 다른 사람을 볼 때랑 절 볼 때는 좀 다르죠. 각자 어울리는 게 또 있는 거고, 그게 취향이랑 언제나 똑같을 수는 없는 거고.”

“기르겠습니다.”

루크는 카이얀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머리 기르고 싶습니다. 괜찮습니까?”

“내가 괜찮은 게 아니라 루크 씨가 괜찮아야죠. 마음대로 하세요.”

카이얀은 픽 웃었다. 사실, 루크의 머리는 지금도 그리 긴 편은 아니다. 머리카락이 눈썹에 근접한 정도. 루크는 정말 군인처럼 단단하고 성실한 얼굴이라, 머리도 짧은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분명 루크는 머리를 자르라는 지시를 받은 걸로 이해할 테니, 카이얀은 입을 다물었다.

카이얀의 진심을 알았다면 루크는 주저 없이 머리를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는 카이얀의 속마음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한동안 루크는 모니터 속 흰 드레스의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카락 색을 바꿀 수는 없습니까? 기술이 있을 것 같습니다.”

루크가 카이얀에게 그렇게 물은 건 저녁 식사 때였다. 카이얀은 한동안 말을 잃고 루크의 파란 눈을 한참 보기만 했다.

그날 카이얀은 저녁 식사 시간을 통째로 날리고 말았다. 루크에게 ‘어울린다’는 말에 대해 설명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루크는 금발을 포기했지만, 다음 날 아침 흰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내려와 카이얀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 * *

카이얀은 나다니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되도록 혼자만의 공간에 조용히 있는 게 좋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순 없는 법이었다.

“그냥 집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가 봤자 제가 신경 써 줄 수도 없고.”

카이얀은 차키를 챙기며 그렇게 말했지만, 말하면서도 왜 이 말을 하고 있나 의문이 일었다. 나갈 때마다 루크에게 이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루크는 한 번도 네, 하고 집에 남은 적이 없었다. 이젠 그냥 습관처럼 하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

“운전은 내가 할 건데요?”

차키를 빙빙 돌리며 카이얀이 웃었다. 루크가 문가에서 멈칫했다.

“가르쳐 주시면 배우겠습니다.”

또 진지해졌어.

카이얀은 그냥 픽 웃고 됐으니 오기나 하라고 말했다. 루크는 얼른 카이얀을 따라갔다. 카이얀이 운전석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수석으로 들어갔는데, 그걸 본 카이얀은 시동을 걸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괜히 시간 걸리고, 그럴 필요도 없고요. 벨트 잊어버리지 말고요.”

“네.”

카이얀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다 문득 이 차에 루크를 태우고 연구소까지 갔다 허탕 쳤던 날이 떠올랐다. 그땐 어떻게든 루크를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태우고 제 일을 보러 가고 있으니 재밌는 일이었다.

“도서관으로 갈 겁니다. 거기선 작게 말해야 돼요.”

“네, 알겠습니다.”

도서관은 그리 멀지 않았다. 도서관 별관 홀에서 진행되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그 김에 필요한 자료도 복사해 올 계획이었다. 카이얀이 주로 이용하는 도서관은 내부 열람과 복사만 가능하고 대출은 불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도서관에만 있게 될 것 같았다. 루크가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이얀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줄 책을 먼저 골랐다. 이제 슬슬 동화책이 아닌 다른 책을 권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 소설집을 택했다.

처음에 루크에게 소설집을 들려 줬던 게 기억났다. 기본적인 단어를 전혀 알지 못해 결국 소설은 포기하고 동화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함께하는 동안 루크는 다양한 어휘를 빠르게 흡수했고 웬만한 일상적 단어는 대부분 알게 된 상태였다.

아이를 기르는 게 이런 느낌인가? 카이얀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루크에게 책과 사전을 함께 갖다 준 후 카이얀은 본격적으로 서가를 뒤졌다. 기본적인 자료는 검색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으므로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가장 방대한 양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도서관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서, 카이얀은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다. 카이얀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루크는 얌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카이얀은 루크의 뒷모습을 보고 새삼 기분이 묘해졌다. 햇빛 드는 창가, 약간 길어진 흑발 위로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책을 읽는 루크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따금 사전을 뒤적일 때면 허리가 약간 굽혀지기도 했다. 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흰 책장이 빛을 반사해 눈이 부셨다.

초봄까지만 해도 카이얀은 루크의 존재를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나이란이 무책임하게 루크를 떠맡기고 사라진 이후에도, 관계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눈 안 부셔요?”

카이얀이 루크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루크는 덩달아 소리를 낮춰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난 눈부십니다. 자리 옮기죠.”

아까 처음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카이얀은 루크와 함께 좀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카이얀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노트 한 장을 쭉 찢었다. 그러더니 거기 글자를 써 루크 쪽으로 쭉 밀었다.

[두 시간쯤 있다가 전 세미나 가야 됩니다. 루크 씨는 여기서 책 보고 있으면 될 겁니다.]

루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늠하듯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카이얀은 루크가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시선을 돌려 버린 후였다.

별지에 한참 중요한 것을 메모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종이가 슥 밀려 시야에 들어왔다. 카이얀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루크를 보았다. 그러다 종이에 눈길을 주었다.

[괜찮으시다면 모시고 가겠습니다.]

필체를 본 건 처음인 듯도 싶었다. 카이얀은 참 루크다운 글씨를 보다가 그 아래 사각사각 답을 적었다.

[거기 가선 정말 제가 조금도 신경 써 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함께 식사했던 홀튼 교수의 세미나였다. 문학 검열이 큰 주제였는데, 제가 최근에 발표한 논문도 주요 논의 중 하나라기에 나온 참이었다. 질의도 있을 테고 아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 정신이 없을 게 뻔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겠습니다.]

이후 비슷한 말들이 몇 차례 더 오갔다. 언제나 그랬듯 카이얀은 루크에게 졌다. 그럼 정말 가만히 있어야 됩니다, 다짐을 받은 후 카이얀은 일을 계속했다.

세미나를 위해 빌린 학술관 3층에는 과연 사람들이 북적였다. 학자들의 네트워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촘촘했다. 카이얀은 아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학자가 지정 좌석에 앉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됩니다.”

카이얀은 루크를 뒤쪽에 앉혔다. 카이얀 본인의 자리와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크는 알겠다고 짤막하게 대답한 뒤 평소의 그처럼 반듯하게 앉았다. 카이얀은 잠시 루크를 바라보았으나 곧 사람들이 마구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여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루크는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워낙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라 다른 이들도 낯선 루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카이얀은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바빠 보였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선뜻 카이얀에게 먼저 다가갔고, 카이얀도 제 자리에만 머물러 있진 않았다.

이후 세미나가 시작된 후에는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카이얀 양옆에 앉은 사람들은 가끔 필담으로 카이얀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럼 카이얀은 그 특유의 정갈한 글씨로 또박또박 답을 적어 종이를 슥 옆으로 밀어 주는 것이다.

루크는 앞에서 무어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그저 자리에 앉아 앞을 보는 카이얀만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루크는 세미나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러니 카이얀이 어떨 때 자기 의견을 말하는지, 어떨 때 앞에 불이 들어오고 켜지는지, 그런 것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을 때 움직이는 카이얀은 언제나 그랬듯 놀랍고 신기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발표자가 갑자기 카이얀의 이름을 말했다. 거의 듣지 않고 있었는데 그 이름만은 귀에 확 박혔다. 잘은 몰라도 카이얀의 연구에 대해 말하는 모양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카이얀 쪽으로 눈이 몰렸고, 카이얀은 웃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이 카이얀에게 무얼 묻고 있는지도 몰랐다. 루크가 전혀 모르는 수많은 작품과 인문서, 작가, 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기관장의 이름이 정신없이 오갔다. 그 많은 말들을 다 알아듣고 대답하는 카이얀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세미나는 지겨운 자리일 뿐이다. 그러나 루크는 별로 지겹지 않았다. 루크의 신경은 카이얀에게 쏠려 있었다. 집에서와는 조금 다른 말투, 상기된 표정, 가벼운 손짓들, 질문을 듣고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 그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카이얀이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젊은 천재는 어딜 가나 주목과 질시의 대상이 된다. 카이얀은 아직 스물일곱이었다. 그런데도 학계에서 만만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나이가 발목을 잡아서 그렇지 서른에 들어서는 순간 대형 강연 요청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사실 지금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지만 않으면 매스컴에서도 두 팔 벌려 취재하러 달려올 테고. 루크는 그런 자세한 것까진 잘 몰랐지만, 사람들이 유독 카이얀에게 관심을 두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에도 카이얀은 곧장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의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줄을 대려는 사람도 있었고 원래 안면 있던 사람들도 있어서, 카이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루크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허전한 것 같기도. 허전하다는 건 이럴 때도 쓸 수 있는 말인가. 루크는 아까 책을 보면서 새로 익힌 단어들을 무수히 떠올려 보았지만, 자기 상태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루크는 그냥 앉아서 계속 기다렸다. 하염없이 카이얀만 바라보면서. 그러나 카이얀은 루크를 완전히 잊기라도 한 것인지, 실수로라도 시선을 돌리는 일이 없었다.

루크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며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카이얀이 낯설고, 또 조금은 부럽고, 어째서인지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런 모든 것보다도 카이얀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멀지. 5미터 정도.’

루크는 영양가 없는 생각으로 자기를 달래려 했다. 물론 조금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왜 늘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을까.

연구소에 있을 때도 그랬다. 작전에 참여하지 않으면 무한정 대기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도 전혀 모르는 채.

그래도 루크는 꾹 참았다. 참는 것이야 익숙하다. 늘 그래왔으니까. 참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카이얀에게 자길 봐 달라고 매달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의도치 않게 떠맡겨진 실험체. 루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카이얀은 마침내 루크에게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흘끗 뒤를 돌아보더니 루크에게 가볍게 눈짓만 하고 휙 그 곁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반갑게 벌떡 일어났던 루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루크는 잠시 그대로 멍하게 서 있다가, 허둥지둥 카이얀의 뒤를 따랐다.

불안감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왜 이러지. 왜 이런 느낌이 들지. 루크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카이얀을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었지만, 나가는 사람이 너무 많이 카이얀의 모습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카이얀 씨,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던데.”

웅성거림 속에서 카이얀의 이름만이 정확히 들렸다. 루크는 사람들을 밀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카이얀이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도 모르겠는데요.”

루크는 반사적으로 우뚝 멈췄다.

“그보다 요새 뭐 이슈 거리 없어요? 텔레비전도 안 보고 살다 보니까. 그래도 그런 소식 제일 먼저 들으실 거 아니에요.”

카이얀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들리는데, 보이는데, 뒤따라갈 수가 없었다. 루크는 그 자리에 선 채 망연히 카이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카이얀은 언제나 그랬듯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반짝거렸다. 탐이 났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려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모르겠는데요.”

혹 내가 ‘모른다’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아닐까.

루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서서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걷히고 고요해지고 있었다.

왜.

루크는 늦은 오후 볕이 들이치는 창밖을 보며 자문했다.

왜 이렇게 어둡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카이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루크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갑자기 세계에서 색깔이 사라졌다. 명암도. 향기도. 세상이 갑자기 흑백으로 변해 루크는 너무나 놀랐다. 무색무취, 어떤 감각도 없는 세상 한가운데 루크는 혼자 남겨졌다.

* * *

카이얀은 주차장까지 가서야 사람들과 헤어질 수 있었다. 자꾸 저녁을 먹고 가자고 붙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응낙해야 했다. 대학 시절 배웠던 교수도 많은 자리라 거절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안에 뭘 두고 온 것 같습니다. 가져올 테니까, 먼저들 출발하시고 장소 알려 주세요.”

카이얀은 뒤에 남겨 둔 루크 때문에 몹시 불안했다. 마음대로 어딘가 가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다 누굴 마주쳐서 내 이름을 꺼내면 정말 큰일인데.

카이얀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곧장 달렸다. 폐관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엘리베이터도 운행 중단된 상태였다. 카이얀은 계단을 두 개씩 뛰어 올라갔다.

에어컨을 껐는지 몹시 더웠다. 금세 땀이 나 와이셔츠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카이얀은 아까 뒤따라오던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루크를 발견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3층까지 쉬지도 않고 뛰어 올라온 탓에 숨이 가빴다. 카이얀은 옆구리에 손을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숨을 고르는데, 어째서인지 루크는 카이얀을 못 본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는 별관 복도, 카이얀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루크에게 다가갔다. 좀 지친 기분이었다. 루크를 식사 자리에 동행시킬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혼자 쓸쓸하게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은데,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루크 씨.”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루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까 상황에 대해 뭐라 설명하려 했던 카이얀은, 루크의 표정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왜… 어디 아픕니까?”

“로스터드 씨!”

잠깐 굳어 있던 루크는 곧 펄쩍 뛰다시피 해 카이얀에게 다가왔다. 루크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눈가가 발갛다.

카이얀은 너무 당황해서 정말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울었냐고 묻고 싶은데 운 것 같진 않다. 루크가 너무 넋 빠진 얼굴이라 무슨 말을 건네면 들을 수 있긴 한가 싶을 지경이었다.

설명. 설명을 하자.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크가 놀랄 건 충분히 짐작했다. 하지만 그때 카이얀과 같이 걷던 사람은, 신문사에 주기적으로 칼럼을 싣는 데다 프리랜서로 기자 일도 겸하는 사람이었다.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루크를 소개시킬 수는 없었다. 열일곱 살 이후, 카이얀은 기자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괜히 카이얀 로스터드가 전직 군인과 살고 있다는 기사라도 났다간 일이 끔찍하게 복잡해질 것 같았다.

루크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더라도, 신비주의 은둔 학자가 낯선 남자와 같이 움직이는 건 아주 좋은 가십거리였다. 거기까지 계산하고 곧장 루크를 모르는 척했다. 돌아와서 충분히 설명해 주면 된다고 여겼는데.

“루크 씨.”

“네.”

루크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카이얀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얼른 그의 팔뚝을 잡았다.

“설명하겠습니다.”

“로스터드 씨.”

“네.”

“만져 봐도 됩니까?”

“뭐라고요?”

카이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확 반문했다. 루크는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카이얀은 혹시 자기가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잠시 기다렸다. 다행히 루크는 곧 정신을 차렸다.

“버리고 가신 줄 알았습니다.”

“네?”

카이얀은 하려던 말도 잊고 되물었다. 책망하려는 뜻은 결코 아니었는데 루크는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기가 죽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냥 가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이얀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쪽이야말로 미안하다고? 그래, 이게 먼저인 것 같다. 그 순간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놈의 타이밍, 카이얀은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고 일단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아, 네.”

정해진 장소를 알려 주려고 전화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난처해서 네, 네, 하고 대답하며 루크를 흘끔거렸다. 루크가 너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라 식사는 같이 못할 것 같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미 주차장에서 같이 가겠노라 대답한 상황이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루크는 카이얀이 통화를 마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루크는 차마 카이얀을 붙잡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이얀이 난색을 표하며 루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약속이… 아무래도 루크 씨가 차에서 좀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게 한심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이얀이 루크에게 이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사실 루크가 이렇게까지 당혹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루크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게 목을 매고 마치 버려진 사람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카이얀도 자연스레 그 분위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괜찮겠어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거절할까요?”

거절하면 욕이야 좀 먹겠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면 되니까. 카이얀이 머뭇머뭇 루크에게 물었으나 루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데려가 주십시오.”

“방해된다는 게 아니라… 차에 루크 씨 혼자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저기 기자도 있고, 여러 가지로…….”

카이얀은 말끝을 흐렸다. 루크에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루크는 끝까지 괜찮다고 우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 다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카이얀은 루크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루크는 차에 오르고 나서도 말이 없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루크는 계속 카이얀만 바라보았다. 처음엔 왜 그렇게 보냐고 농담조로 몇 마디 건네던 카이얀도, 그 일이 계속되자 그냥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루크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카이얀이 자길 버리고 간 줄 알았다. 이제 필요가 없어서. 귀찮아져서. 정말 가만히 있었는데 방해가 된 걸까, 그런 생각도 했다.

상대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으니 그 감정은 고스란히 돌아와 자기를 공격했다. 뭘 잘못했는지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도저히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 루크는 좌절했다. 실수한 게 뭔지 모른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잘못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에어컨 틀어 놓고 가겠습니다. 더우면 이거 눌러서 온도 낮추고, 이 버튼 눌러서 바람세기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식당으로 올라가면서도 카이얀은 영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역시 데려오지 말걸. 혼자 차에 남은 루크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루크는 또 기다렸다. 주차장은 조용했다. 에어컨을 틀어 놓고 가서, 차에서는 웅웅 소리가 났다. 루크는 참았다. 원래 기계음에는 익숙했다.

하루 종일,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괜찮았다. 루크는 기다리는 일에는 자신 있었다.

아까 세미나가 끝나기를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루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조금 초조하긴 했지만. 카이얀이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을 때 기분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것 자체가 힘겹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가 내려와서 또 모르는 척하면 어쩌지. 이번엔 정말 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여기선 가는 길도 모르는데, 오는 길에 길을 유심히 봐두긴 했지만 그 먼 길이 전부 기억날 리 없었다. 루크는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 두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맥이 풀렸다.

카이얀이 자길 여기 버려두고 가면, 집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자 앉아 있으니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다. 카이얀이 원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쨌든 그 집은 카이얀의 것이고, 저는 거기 떠맡겨진 입장이니까. 이제 루크는 그걸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루크는 바르게 앉으려 애썼다. 목이 말랐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하지만 카이얀에게 갈 순 없었다. 방해가 될 것이다. 루크는 좀 더 참기로 했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조금도 덥지 않았다. 루크는 에어컨을 끄려 했지만 카이얀이 온도를 낮추는 법과 바람을 강하게 하는 법만 알려 주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건 카이얀의 소유물이다. 함부로 만졌다가 망가뜨리면 어쩌나 싶었다.

이쯤 되니 아무 것도 만질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실수하게 되진 않을까. 그래서 버려지는 건 아닐까. 다시는 카이얀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면 어떡해야 할까.

루크가 혼자 전전긍긍하는 사이, 카이얀도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왜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나?”

홀튼 교수가 카이얀 앞을 가볍게 탁탁 쳤다. 루크가 혼자 괜찮을까 염려 중이던 카이얀은 깜짝 놀라 그쪽을 보았다. 식욕이 없어 별로 뭔가를 먹고 싶지 않았는데, 보는 눈들이 있어 무겁지 않은 것으로 대강 골라 먹었다.

그냥 식사 자리는 거절하는 게 나을 뻔했다. 자리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려 있던 루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에서라도 제대로 설명을 해 줬어야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어색해서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이따 돌아가면 바로 말해 줘야지. 카이얀은 그렇게 결심했다.

카이얀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비싸게 군다며 타박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져 봐도 됩니까?”

분명 그렇게 물었지. 그만큼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이다. 얼마나 놀랐을까. 카이얀은 미리 루크에게 언질을 해 줬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 그 정도 나이의 성인이라면,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자기 입장과 상대 입장을 헤아려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루크는 달랐다. 그는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불협화음이나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루크 씨.”

카이얀이 급히 뛰어와 차 문을 열었을 때, 루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루크는 얼른 일어나려다가 쾅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카이얀은 그냥 앉아 있으라고 말한 후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면서 에어컨부터 껐다.

“안 추웠습니까? 에어컨 꺼도 괜찮았는데… 내가 버튼을 안 알려 주고 갔구나.”

뒤는 거의 혼잣말이었다.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루크는 다른 말을 했다. 사실 좀 당황스러워서 말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네?”

카이얀은 또 바보처럼 되물었다. 출발하는 것도 잊고 멍하게 루크를 보고 있으니, 카이얀을 뚫어져라 보던 루크가 어물어물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마음대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안 오실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왜 안 옵니까?”

카이얀은 역시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루크는 제 마음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까, 아까… 그냥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못 알아듣겠습니다. 루크 씨 실수한 거 전혀 없고, 언제 그냥 가는 줄 알았단 건지 잘… 아.”

아리송한 표정이던 카이얀이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주저주저 물었다.

“도서관에서요?”

그 간단한 물음에 대답하는 게 어려운지, 루크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네.”

겨우 그 말만 꺼내 놓고 루크는 긴장한 듯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카이얀은 아까 분위기를 잘못 타 도서관에서의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카이얀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차 안의 온도가 지나치게 낮아 생각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때 일은,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내 옆에 있던 사람이 기자였습니다.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고, 아, 아무튼, 기자가 뭔지 내가 설명해 줬나요? 이런저런 사건에 대한 글을 써서 신문에 싣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는데, 그게, 루크 씨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언론의… 그러니까 제가 그런 기자들이 좋은 기삿거리로 보는 사람입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못 했던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은 얼굴의 루크를 보며 카이얀은 멍하게 생각했다. 머리는 팽팽 돌아가는데, 말은 왜 이렇게 버벅대며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일단 루크에게 설명해야 할 게 많았고, 그걸 다 설명한다 해도 루크가 납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저랑 루크 씨가 같이 있는 게 알려지면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겁니다.”

“제가 방해가 됩니까?”

루크는 잔뜩 기가 죽은 채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카이얀이 길게 설명했지만 그게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제가 카이얀에게 붙어 있는 게 나쁘다는 뜻 같았다.

카이얀은 어쩐지 스스로 점점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아까 처음에 설명했어야 하는데. 카이얀은 얼른 루크의 말을 부정했다.

“아뇨… 아니, 그래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단 일반인들은 루크 씨 존재를 모릅니다. 그리고 전 사람들 앞에 노출되는 걸 꺼려서 더 관심이 집중된 상태고요. 그러니까 제가 루크 씨와 같이 산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루크 씨에 대해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고, 그러면 일이 여러모로 복잡해질 수가 있다는 거죠.”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까. 카이얀은 루크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루크는 언론에 대해 몰랐다. 인터넷에 대해서도 몰랐다. 사람들의 관심이나 이슈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아는 세계는 딱 세 종류로 나뉜다. 연구소, 전쟁터, 카이얀.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루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로스터드 씨와 함께 사는 걸 알게 되면 문제가 생긴단 말씀이십니까?”

“아. 네, 그겁니다.”

“왜 문제가 생깁니까? 어차피 민간인들은 저에 대해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니까 문제가 없는 겁니다. 모르게 두는 게 낫습니다. 그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쉽게 할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크는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 이런저런 인체 실험을 하고 실제 전쟁에 투입해 성과를 거두기까지 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 루크는 사회적으로 ‘문제적 실험체’가 될 것이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 시민단체, 군부, 정부 기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나이란이 지난번에 꽤 순순히 물러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카이얀 역시 호기롭게 협박하긴 했으나 그런 문제에 본인까지 엮이는 건 당연히 사양이었다.

더불어 루크에겐 보호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루크를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다.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카이얀은 어렵게 말했다. 여전히 차는 출발도 못하고 우뚝 서 있었다. 루크는 주의 깊게 카이얀의 말을 들었다.

“왜 제가 루크 씨를 모르는 척해야 했는지, 왜 같이 갈 수 없었는지, 그런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질 거 압니다. 지금 바로 설명해도 잘 모를 겁니다.”

“네.”

루크는 간단하게 수긍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전혀 밝아지지 않아, 카이얀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루크 씨를 버리거나, 그런 낯선 곳에 혼자 두고 가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잠시 남겨 두고 어딜 다녀오는 일은 있어도,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꼭 다시 찾아갈 겁니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네.”

루크는 더 이상 카이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정직한 눈, 오직 자기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파란 눈을 보고 카이얀은 당황해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루크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럼 출발할까요?”

“로스터드 씨.”

루크가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이얀을 좀 더 잘 보기 위해서인 듯했다. 카이얀은 기어를 당기고 룸미러를 확인하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네?”

카이얀은 루크를 보았으나 루크는 제 할 말만 반복했다.

“만지고 싶습니다. 아까 도서관에서, 제가 홀로그램을 보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이얀이 사라진 세계는 너무나 적막했다. 그래서 다시 훈련 프로그램에 접속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고는 자연 그런 식으로만 흘러가서, 루크는 정말 겁에 질렸었다.

“안 만져 봐도 전 진짠데요……. 네, 만져도 됩니다.”

루크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서 카이얀은 그냥 체념하듯 허락해 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홀로그램과 실제를 헷갈리는 실험체니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다.

루크는 기어 위에 있는 카이얀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루크의 손은 차가웠다. 확실히 에어컨 때문에 추웠구나. 카이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루크의 손은 예상보다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다. 카이얀은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어 그대로 굳어 있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생각해 보면 지그문이나 머독과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접촉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루크는 친구와 좀 다르지만.

“루크 씨.”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놀라고 있었다. 그저 닿았을 뿐인데,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고 시야가 또렷해지는 것 같다. 생기가 사라진 세계에 다시 온기가 돌아오고, 불안이 가시고, 심장이 안정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여전히 카이얀이나 제 대외적 입장 같은 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카이얀의 체온은, 루크에게 무언가를 이해시켰다.

“출발해야 하는데요.”

어색한 목소리. 루크는 겹쳐진 손에 묶였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카이얀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난처한 표정. 그럼에도 선뜻 먼저 손을 빼지는 않는다. 루크는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카이얀은 입을 딱 벌렸다. 지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간신히 그 물음을 삼켰지만 루크는 틈을 주지 않고 반복했다.

“해도 됩니까?”

“어… 왜요?”

“하고 싶습니다.”

루크는 강경했다. 카이얀은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루크는 침착했다. 아주 당연한 말을 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만져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이거랑 같아요?”

“다릅니까?”

“당연히 다르죠!”

“뭐가 다릅니까? 결국 신체 접촉 아닙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같은 말이…….

카이얀은 뭐라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루크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단 눈으로 자길 빤히 보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저렇게 말하니 왠지 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이건 아니야! 카이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붙들었다.

“그럼 그냥 손만 잡아요. 둘 다 같은 건데 왜 굳이 키스까지 하겠단 겁니까?”

“손은 잡고 있습니다.”

“아…….”

이 대화를 더 지속했다간 없던 병이 생길 것 같았다. 카이얀은 상대를 말아야지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루크가 슥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끌려간 카이얀은, 루크가 제 손바닥에 입 맞추는 걸 멍하게 보고 있어야 했다. 다음 순간, 카이얀이 확 손을 뺐다.

“루크 씨! 이러면 안 됩니다.”

“손만 잡으라고 하셔서…….”

“이게 그거랑 같습니까?”

이 계속되는 같고 다름의 논쟁이 루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루크는 조금 기운 없이 대답했다.

“뭐가 같고 다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카이얀은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1분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후,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게 손잡는 겁니다.”

카이얀이 루크의 손등 위에 턱 제 손을 올렸다. 루크가 자연스럽게 손을 돌려 깍지를 끼웠다. 그 손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루크를 모르는 척하며 카이얀은 그대로 그 손을 잡아당겼다. 루크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건 교육이야. 교육이라고.

카이얀은 자기에게 암시를 걸었다.

이 사람은 순수해. 나한테 아무 흑심도 없어. 오버하지 말자.

“이거랑, 손잡는 건 다른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이얀은 탁 루크의 손을 놓았다. 루크는 어느새 진지한 학생의 얼굴로 카이얀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선생님을 노리는 학생의 시선 같지만 않았다면 카이얀은 조금쯤 덜 민망했을지도 모른다.

“키스하는 것도 다른 거고요. 알겠어요? 다 다른 거라고요. 내가 손만 잡으라고 하면, 정말 손만 잡는 겁니다.”

“네.”

루크는 아주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키스는 안 해 주십니까? 해 주시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습니다.”

카이얀은 잠깐 멍해져 있다가 이번에야말로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건 어떤 건지 이미 알잖아요.”

“네, 이제부턴 손만 잡겠습니다.”

루크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번에도 매달리면 정말 호되게 한마디 쏴붙이려 했던 카이얀은 어쩐지 맥이 풀렸다. 키스 따윈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루크한테 완패한 기분이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일로 자존심이 상하지. 카이얀은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오자마자 창문을 내렸다. 차 안이 좀 더운 것 같았다.

* * *

“루크 씨, 면도해야겠네요.”

어느 날 아침, 카이얀이 루크의 턱을 보고 말했다. 루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면도라니, 그게 뭡니까?

카이얀은 절 돌아보는 루크의 표정을 읽었다.

“루크 씨 턱에, 보이죠? 그걸 수염이라고 합니다. 수염 깎는 걸 면도라고 하고요. 어쩐지 왜 수염이 안 나나 했는데, 그것도 아마 약 때문이었나? 어쨌든 머리카락보단 좀 늦네요.”

머리카락은 꽤 전부터 자라기 시작했는데, 수염은 이제야 자란다. 아예 세포를 다 지져 버린 거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어색해하는 루크를 욕실로 데려가 쉐이빙 크림과 면도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카이얀은 전기면도기를 사용했는데 기계에 익숙한 루크라면 이것도 금방 익히겠지 싶었다.

“손.”

루크는 훈련된 것처럼 척 손을 내놓았다. 카이얀은 그 손바닥 위에 쭉 쉐이빙 크림을 짜 주었다.

“턱에 바르는 겁니다. 나 하는 거 잘 봐요.”

차라리 시범을 보이자 싶어 카이얀은 제 턱에 쉐이빙 크림을 발랐다. 루크도 그걸 보며 따라했다. 그 후, 루크는 카이얀이 거울을 보며 면도하는 걸 유심히 관찰했다. 시선이 지나치게 집요했지만 카이얀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얼굴을 말끔히 씻어 낸 후 척 루크에게 면도기를 건넸다. 그런데 루크는 카이얀이 주는 걸 받는 대신 제 질문을 내놓았다.

“로스터드 씨도 그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순간 카이얀은 면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사람은 왜 또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해? 무슨 소리냐며 쳐다보자 루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거울을 오래 보셔서, 로스터드 씨의 얼굴을 좋아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까?”

“아닌데요.”

카이얀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다시 루크에게 면도기를 내밀었는데, 루크는 손을 내밀어 그걸 받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얼굴이 싫으십니까?”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지금 화장실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당혹스러웠다. 루크가 너무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어 좀 재밌기도 했다. 세상에, 면도를 하려니 당연히 거울을 보게 되지. 그걸 이해 못 하는 모양이다.

아마 감각이 예민하다는 이 사람은 면도할 때 거울 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청각으로 다 해결될지도. 얼굴에 잔뜩 흰 크림을 묻혀 놓고 입술을 움직여 묻는 게 우스워, 카이얀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거울을 본 건 면도를 해야 하니까 본 겁니다. 제가 제 얼굴을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라요. 루크 씨도 아마 거울보고 해야 할 겁니다. 잘못하다간 베일 수도 있거든요. 나 하는 거 봤을 테니까, 지금 해 보세요.”

루크는 그러겠다고 하더니 면도를 시작했다. 전기면도기라 피 볼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처음이니 조금 불안해서 카이얀은 루크 옆에 서 있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시선을 의식하며 면도를 마쳤다. 카이얀이 했던 것처럼 얼굴을 씻어 내고 나니 카이얀이 면도기를 가져가 어떻게 헹궈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음… 루크 씨 면도기를 하나 더 사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거의 혼잣말이었다. 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면도기를 제자리에 두던 카이얀이 짓궂게 물었다.

“어때요? 루크 씨는 자기 얼굴이 맘에 듭니까?”

좀 부끄러워하거나 난처해하는 표정이 보고 싶었던 건데, 루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잘 모릅니다. 로스터드 씨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아, 뭐. 잘생겼습니다. 맘에 들어 해도 될 것 같네요.”

카이얀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을 내놓았다. 확실히, 루크는 잘생긴 축에 든다. 물론 카이얀처럼 모델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몸이 균형 있게 짜여 있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데다 인상이 성실해 보여서 어딜 가나 눈에 띌 얼굴이었다.

“네. 저도 로스터드 씨의 얼굴이 좋습니다.”

카이얀은 그냥 웃은 후 욕실 밖으로 나갔다. 진심이었는데, 장난치는 걸로 들린 걸까? 루크는 고개를 갸웃한 후 카이얀의 뒤를 따랐다.

그날 카이얀은 루크에게 새 책을 주었다. 세계 신화 모음집. 특별히 나르키소스 신화 페이지를 접어 주었기에, 루크는 카이얀의 연구실에서 그 부분을 유심히 읽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수선화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수선화.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며 루크는 카이얀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꽃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얀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가 거울이나 물속의 자신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루크는 고개를 들어 컴퓨터 앞에 앉은 카이얀을 보았다. 그는 살짝 인상을 쓴 채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모니터에 고정된 눈동자가 계속 좌우로 오가는 걸 보면 뭘 다시 검토해 보는 모양이었다. 루크는 그 섬세한 눈짓이나 잘 만들어진 얼굴, 가볍게 이마에 닿은 손가락들을 보았다.

루크는 카이얀이 왜 어딘가에 비친 자기 모습에 도취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반사된 모습보다 카이얀 본래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으니까. 아마 로스터드 씨도 그걸 아는 거겠지. 루크는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카이얀이 나르키소스 페이지를 접어 놓은 데는 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욕실에서의 대화가 생각나 루크에게 그런 이야기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다.

책을 찾으러 서재로 올라갔는데 신화 책이 눈에 띄었다. 순간 루크가 떠올랐고, 거울 얘기가 생각났고, 나르키소스 얘기를 알려 주면 즐거워할까 싶었다.

카이얀은 그저 지나가다 물을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루크를 위해 책을 뽑았다. 아무 일도 아닌 듯 그를 위해 페이지를 찾아 접었다. 그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어서, 카이얀은 팔랑팔랑 가볍게 넘어가는 제 일상의 책장이 한 장씩 접히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 * *

루크는 카이얀의 연구실에서 퍼즐을 맞추는 중이었다.

카이얀이 얼결에 사다준 500피스 퍼즐은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카이얀 본인도 퍼즐을 맞춰 본 적이 없어서, 루크에게 적당한 난이도를 골라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얀이 사다준 만큼, 루크는 퍼즐을 다 맞춰 놓고 싶었다.

끙끙대고 있으면 카이얀이 와서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퍼즐은 정말 어려웠다.

‘별이 빛나는 밤.’

루크는 카이얀이 알려 준 그림의 제목을 읊어 보았다. 루크는 슬쩍 카이얀을 보았다. 뭐가 잘 안 풀리는지, 아까부터 계속 서재와 연구실 사이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지금 불러서 물어보면 방해가 되겠지. 루크는 참았다.

“별을 좋아하십니까?”

루크가 그렇게 물은 건 저녁 무렵이었다. 원래 점심을 먹을 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카이얀은 정말 바쁜지 대강 샌드위치를 만들어 책상에서 식사를 해결해 버렸다. 정말 일이 바쁜가 싶어 더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루크는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별 보는 걸 좋아하셨는데 그거 보면서 어깨 너머로 본 정도?”

카이얀은 역시 대강 만든 샐러드와 구운 닭고기를 먹으며 루크를 보았다.

“왜요? 아까 그 퍼즐 때문에?”

“아.”

루크는 카이얀이 바로 이유를 알아차려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카이얀은 루크의 순진함이 놀라웠다. 하루 종일 별이 빛나는 밤 퍼즐을 맞추다가 별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그걸 못 맞출까.

“네.”

“아, 그럴 것 같았어요. 루크 씨는 별 좋아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잘 모르겠는 건 뭔가. 카이얀은 흘끗 루크를 보았는데 그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는데.

“그 그림을 주셔서, 별을 좋아하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 전 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아.”

“보통 작전지로 갈 땐 눈이 가려진 채 이동했습니다. 하늘을 날았는데, 눈이 가려져 있어서 별을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습니다.”

카이얀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런 얘기가 갑자기 나올 줄은 몰라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루크는 딱히 무슨 위로 같은 걸 바라진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위로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일생 거짓된 위로조차 받아 본 적이 없었을까?

카이얀은 이제 음식을 씹어 삼키는 데 익숙해진 루크를 보며, 물음을 삼켰다.

“하늘을 날아도 별에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카이얀은 간신히 그 말만 했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습니다. 별이 더 크게 보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까?”

“별은 여기서 아주 멀리 있거든요. 망원경 같은 걸로 봐야 됩니다.”

다행히 루크는 망원경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체망원경 같은 것에 대해 알 리는 없었다. 카이얀은 창고 어딘가 부모님이 쓰던 망원경이 남았을까 생각했지만 창고 정리를 한 게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별 같은 걸 볼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저녁을 다 먹고 카이얀은 어쩐지 창고를 뒤지게 되었다. 작은 불을 켜고 한참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다 보니 목까지 아팠다. 먼지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다. 카이얀은 마스크라도 끼고 할 걸 뒤늦게 후회했다.

“루크 씨, 물 좀.”

뒤에서 카이얀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루크가 재빨리 움직였다. 루크는 허둥지둥 부엌에 가서 물을 떠왔다. 이제 이런 심부름도 해 줄 수 있고, 많이 발전하긴 했다 싶어 카이얀은 물을 마시다 웃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원경은 창고에 있었다. 그래도 유품이니, 과거의 제가 함부로 버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먼지가 끼고 망가진 상태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별을 본 게 벌써 십 년 전이다. 흥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사용법도 다 잊어버렸고.

“기껏 찾아냈는데 보람이 없네요. 생각해 보니까 찾아도 사용할 줄을 모르니까.”

카이얀이 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저었다. 날이 더워서 그새 옷이 달라붙었다. 연구하기 싫은가, 안 하던 짓을 다 했네. 카이얀은 샤워부터 해야겠다 싶어 창고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라 밤에도 그리 시원하진 않았다. 카이얀은 뒤따라 온 루크가 아쉬워하는 기색은 아닌가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나중에 천문대에 가 보죠. 거기선 별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네. 아깐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다시 좋아지신 겁니까?”

너무 순진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서 카이얀은 기가 막혔다. 그는 그냥 픽 웃고 셔츠 단추를 풀며 욕실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욕실 문 앞까지 따라온 루크에게 말해 주었다.

“내가 좋아서 보자는 줄 압니까? 루크 씨가 별 보고 싶다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더니 탁, 카이얀이 문을 닫았다.

혼자 남은 루크는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별이 보고 싶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냥 하늘을 봐도 보이니까.

루크는 별에 대해 생각했다. 눈이 가려진 채 이동하다보면 청각은 더욱 예민해져서, 바깥 소리가 선명했다. 비행체에서 나는 소리나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바람소리…….

처음으로 별을 본 건 꽤 오래 전인 것 같은데, 전장에 처음 나갔을 때였다. 하늘을 보니 반짝이는 게 보여서 나중에 나이란 캠벨 박사에게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별이야. 우주에 있는 항성과 행성이지.”

루크는 우주도 항성도 행성도 몰랐다. 캠벨 박사는 카이얀과는 달라서 그런 걸 꼬치꼬치 물을 순 없었다. 그래도 그 반짝이는 것의 이름이 별이라는 건 알아들었다.

별. 별이라고 하는구나.

세계에 대해 알아가는 건 그토록 더뎠다. 루크는 눈을 가린 채 비행기에 올랐고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 전쟁터는 같은 듯 다 달랐는데, 루크는 세계지리를 조금 배웠으므로 그게 다 다른 나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한된 경험과 제한된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는 무서울 정도로 넓었다. 그 넓은 공간이 텅 비어 있기만 해서 막막했다. 그러나 카이얀과 함께 채워가는 세계는 달랐다. 그곳에서는 여백도 오히려 편안했다. 아무 말도 없이 공유하는 시간들.

당신은 누구일까.

루크는 카이얀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청각이 전 같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그의 세밀한 움직임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당신은 무엇일까.

그의 눈짓 하나만 달라져도 가슴이 철렁한다. 당신이 별을 보고 싶다니 보러 가자는 거라고 말하는 그 입술이 반가워서. 아무 뜻 없이 던지는 물음에도 진지해지고, 그가 자기를 어떻게 볼까 신경이 쓰이고.

별은 멀어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가까이 있는데도 알 수 없었다. 사랑이 다 이런가. 이게 사랑인가. 왕자도 잠자는 공주도 서로에 대해 잘 몰랐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게 사랑이구나. 몰라서 사랑하고, 몰라도 사랑하는 거구나. 당신은 나를 모른다. 나를 모르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가.

루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당신을 왜 알 수 없는지.

왜 언제나 당신은 내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지.

* * *

시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어느새 늦여름이었다. 루크는 여전히 카이얀을 좋아하고 그를 훔쳐보고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했다. 카이얀은 그동안 제가 진행하던 연구를 거의 끝내고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환절기라 아침저녁으로 쌀쌀했지만 건강체질인 둘은 가벼운 코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루크는 좀 더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퍼즐을 3분의 1정도 맞추었다.

“내가 도와줄까요?”

끙끙대는 루크를 보고 카이얀이 물었을 때, 그는 드물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혼자 해 보겠습니다.”

카이얀은 그 순간 무척 놀랐다. 루크의 대답이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좀 섭섭하기도 했다. 예전엔 하나하나 모든 것을 제게 물어보고 의지했는데-심지어 이 사람은 거실이 뭔지도 몰랐다-, 이젠 스스로 하겠다고 도움을 거절하는 법도 알게 된 것이다.

자식 키우는 게 이런 느낌인가?

픽 웃다가 카이얀은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수그려 고개를 퍼즐 쪽으로 가까이 한 루크에게 물을 한 잔 갖다 주었다.

카이얀은 종종 루크에게 청각에 대해 물었다. 루크는 이제 차 엔진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진 않는다고 대답해 카이얀을 안심시켰다. 그래도 카이얀은 가까운 시내로 나갈 땐 되도록 걷기를 권했다.

둘은 가끔 시내로 나가 외식을 했고, 집에서 성적 자극 요소가 없는 코미디 영화를 보며 낄낄대기도 했다. 물론 루크는 많은 유머를 이해하지 못해 카이얀은 그 옆에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어야 했지만. 그래도 카이얀은 루크와 과자를 먹으며 영화 보는 걸 꽤 즐기게 되었다.

딱 한 번, 나이란에게 연락이 왔었다. 전화는 아니고 문자였다.

[별일 없지?]

뭘 궁금해하는 거야.

같잖았지만 더 이상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도 없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누구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화를 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때가 생각나 카이얀은 나름대로 덤덤하게 응대해 주었다.

[아무 일도 없어.]

그 대단한 약 안 먹어도 말이지.

한마디 빈정거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카이얀은 픽 웃었다.

밀리엄 장군에게서도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가 너무 바로 루크의 정체를 알아차려 내심 긴장했던 카이얀은, 일상이 너무나 평온하게 흘러가자 많이 안심했다. 카이얀에게는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루크의 존재에 거의 완전히 익숙해졌고 타인과 함께 사는 것도 아주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밤, 카이얀은 오랜만에 머독과 지그문을 만났다. 활동 시간이 다른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반 년 만에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카이얀은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의 모친은 간과 심장이 좋지 않아서, 의사는 그녀에게 아주 소량의 술도 마시지 말라고 말했다. 카이얀의 모친 라냐 아이사트는 카이얀의 체질이 저와 같지 않을까 염려해 샴페인 한 잔도 못 마시게 했다.

실제로 카이얀은 아주 건강체질이었지만 모친이 하도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자라 술을 꺼리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선 꼭 맥주 한 캔 정도는 들어가니, 모친 라냐가 살아 있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너 아직도 그 사람이랑 같이 살아? 그 병 있다가 없다가 했던?”

적당히 취기가 오른 카이얀은, 지그문의 말을 듣고 픽 웃었다.

“아직 같이 살아. 병 같은 거 없어. 하도 건강해서 탈이지.”

그 말대로, 루크는 아주 건강했다. 특히 성적인 면에서 더욱 그랬다. 사실 카이얀은 루크가 요즘도 그 망할 놈의 성욕 때문에 고생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루크는 몇 차례 끙끙거렸지만 다행히 그는 본능적으로 마스터베이션을 익혔다.

“다른 사람을 골라 봐도 됩니다. 여긴 매춘이 합법이라…….”

“싫습니다.”

기껏 꺼낸 권유를 딱 잘라 거절하더니,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냥 그러라고 해 버렸다. 그쯤에서 카이얀은 루크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잡아내지는 못했다.

“근데 너 누구랑 같이 사는 거 괜찮나? 안 불편해?”

머독이 감자튀김을 씹으며 물었다. 머독은 음식을 참 맛있게 먹는 편이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이얀도 식욕이 동했다. 감자튀김은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이걸 좀 싸갈까, 루크도 이제 완전히 일반식에 익숙해졌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밀리엄 장군과 외부 음식을 먹었을 때도 괜찮았고.

자연 루크 쪽으로 흐르는 생각을 그저 내버려 두고,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익숙해졌어.”

가끔 알 수 없게 구는 것만 빼면 루크와 같이 지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누구와 같이 사는 건 물론 피곤한 일이지만 루크는 모든 것을 카이얀에게 맞추려 했고 카이얀도 루크에게 맞춰 가는 부분이 있었다. 둘의 일상은 평화롭고 잔잔했다.

“와, 나랑 살자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막무가내로 눌러앉을 걸 그랬네.”

이젠 애인도 있는 주제에 머독이 툴툴거렸다. 카이얀은 그냥 웃고 넘어갔다. 말할 필욘 없지만 만약 머독과 살았다면 누구와 같이 산다는 느낌도 못 받았을 것이다. 작가 겸 배우인 머독은 바쁘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지루한 걸 견디지 못한다.

카이얀은 내심 머독이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는 게 신기할 때가 많았다. 너 같은 성격으로도 작가가 될 수 있구나, 하고 말했다가 그런 편견 좀 버리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지금 어디 있지? 집에 있나?”

“어. 시간 늦어졌네, 기다리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요샌 말을 안 들어서.”

카이얀이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감자튀김을 집어먹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술 마셔본 적도 없지. 하지만 알코올을 줘도 될까? 사실 루크는 제 몸에 대해 시시콜콜 보고하는 편이 아니어서 카이얀은 늘 주의 깊게 루크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몸이 예상보다 더 건강하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현대 의학의 힘과 잔인함에 놀라기도 했다.

“하숙 들일 만큼 궁해? 너 부자잖아. 언제까지 같이 사는데?”

지그문은 꽤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사실 그는 카이얀의 속내가 궁금했다. 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걸 즐기던 친구가 갑자기 사람을 들이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기에?

카이얀은 지그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대신 짤막하게 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상황 돌아가는 거 봐서 결정하겠지.”

카이얀은 분명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자기 친구들을 보며 루크에 대해 자세히 말해도 될 것인가 고민했다. 머독과 지그문은 믿을 만한 친구들이다. 틀어박혀 연구만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감정 교류를 피하는 카이얀 곁에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고, 카이얀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위험을 감수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그들에게 루크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말한다 해도 뭘 말해야 할지.

머독도 지그문도 카이얀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카이얀은 확실히 변했다. 어째서인지 카이얀은 한층 여유로워졌으며 조금 유쾌해지기까지 했다. 그건 아주 사소한 변화였는데 사소해서 더 놀라웠다. 카이얀의 두 친구는 그와 함께 사는 하숙생이 그를 바꿨으리라 짐작했으나 캐묻지는 않았다.

카이얀은 자기가 변하고 있음을 몰랐다. 원래 본인은 잘 모르는 법이었다.

술을 마시게 될 걸 예상해 택시를 타고 왔던 카이얀은 또 택시를 타고 집까지 갔다. 적당히 들어간 술은 기분을 좀 띄워 주었다.

카이얀은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좀 걷고 싶었다. 청각이나 시각만큼은 아니지만, 루크는 후각도 꽤 예민하다. 친구들을 만난 곳은 흡연이 가능한 곳이었으니 옷에서 담배 냄새라도 좀 빼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벼운 걸음으로 걷다 보니 금세 정원이 보였다. 그리고 울타리 밖에 서 있는 한 사람도 보였다.

“어?”

카이얀은 잠깐 멈춰 섰다. 허깨비라도 보나 싶었다. 밖에 나와 있는 건 루크였다. 어떻게 봐도 그 사람이었다.

뭔가,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조금 들떴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가 또 불안하게 요동쳤다. 집에 불이라도 났나? 다행히 집은 멀쩡해 보였다. 아니면 가스? 수도관이 터졌나?

“루크 씨!”

카이얀이 허둥지둥 그쪽으로 달려갔다. 루크는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아픈 기색은 없었다. 옷도 멀쩡히 입고 있었고. 그러나 루크가 아직도 어린애 같은 카이얀으로서는 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요? 왜 나와 있습니까? 안에 뭐 문제 있어요?”

루크의 어깨 너머로 다시 한번 집을 살폈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는데.

“아닙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근데 왜 나와 있어요?”

카이얀은 루크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에도 별 문제는 없었다. 카이얀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많이 나아졌지만 워낙 서툰 모습을 많이 봐와서 돌발행동을 하면 긴장부터 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카이얀은 순간 맥이 빠졌다. 안심이 된 탓이었다. 마음을 놓고 나자 카이얀은 아차 싶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냄새나죠? 미안합니다, 술을 좀 마셔서……. 흡연 구역이어서 담배 냄새도 좀.”

“아닙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해 주는 건 고맙지만 신경이 안 쓰이진 않았다. 루크를 배려하는 것도 있지만 걱정이 더 컸다. 구취가 심하지 않을까 걱정하듯, 제게서 불쾌한 냄새가 전해질까 염려되었으니까.

“이제 아침저녁으로 좀 추운데, 그냥 들어가서 기다려도 됩니다. 안 기다려도 된다고 했는데… 안 피곤해요?”

“네, 피곤하지 않습니다. 로스터드 씨는 안 추우십니까?”

“손만 좀 시리네요.”

카이얀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때 턱, 루크가 손을 붙들어 그는 깜짝 놀랐다. 루크가 카이얀의 오른손을 자기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오래 밖에 나와 있었을 텐데, 루크의 손은 생각 외로 따뜻했다. 카이얀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굳어 있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루크가 전혀 흑심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 말간 눈을 보다가 카이얀은 그냥 그렇다고만 대답했다. 이거 느낌이나 상황이 좀 이상한데 싶었지만, 그냥 저가 예민하겠거니 하고 카이얀은 넘어가기로 했다.

요즘 이런 식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잦아졌는데, 어린아이처럼 손을 붙잡는 루크보다 하나하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자기가 더 어린애 같았다.

“네, 손 따뜻하네요. 전 손이 좀 쉽게 차가워지는 편인데.”

물론 카이얀은 어린애였다. 루크의 스킨십에 민감하게 반응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자기에게 흑심 같은 걸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린애였다.

하지만 루크도 제 마음이 흑심 같은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실 루크는 그냥 그 단어를 몰랐다. 어떻든 루크는 카이얀이 좋았고, 그와 닿는 것, 그가 자기를 보는 것, 함께 있는 것, 그런 것들이 전부 좋았다.

그 좋은 것들이 가끔 루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해서 그는 좀 혼란스러웠지만, 어떻든 그는 카이얀과 살고 있었다. 그걸로 좋았다.

“근데 앞으론 점점 추워질 테니까 마중 나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춥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싶습니다.”

“기다리기 지겹잖아요. 감기 걸릴 수도 있고… 들어가서 뜨거운 차라도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카이얀은 티백으로 녹차를 끓여 주었다. 컵에 담아 들려 주니 루크가 두 손으로 받아 든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데 두 손으로 컵을 꼭 잡은 걸 보니 그냥 웃음이 났다. 그게 차라고 하는 겁니다, 하고 알려 줬더니 루크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지겹지 않습니다. 감기도 걸리지 않습니다.”

카이얀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그게 아까 자기가 한 말에 대한 대답임을 깨달았다.

“아…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루크 씨가 건강한 건 저도 알고요.”

“말이 그렇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을 말았어야 되는데. 카이얀은 약간 후회했지만 그렇게 성가시진 않았다. 루크는 좋은 학생이었다.

“별 의미 없다는 뜻입니다.”

“네.”

루크는 아주 잘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제 손에 들린 차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차를 마시게 하는 건 처음이다. 카이얀은 되도록 루크에게 물 아닌 다른 마실 것을 주지 않았는데 그의 몸 상태를 염려해서였다. 녹차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루크는 곧 차를 마셨다. 쓴맛이 났다. 냄새도 강했다. 하지만 흡족할 정도로 따뜻해서 마음에 들었다.

연구소에 있을 땐 따뜻한 음료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늘 찬물에 알약이었으니까. 카이얀과 살면서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음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따뜻한 걸 좋아하는 사람일까. 루크는 카이얀을 보며 생각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하는 일에도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카이얀이 언제나 그 부탁을 들어주는 건 아니라 여전히 조금 불안하지만. 그래도 카이얀은 그가 ‘불가능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게 아니면 되도록 루크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다. 루크도 그걸 알고 있었다.

“네, 하세요.”

카이얀은 느긋하게 찬장을 정리하며 대꾸했다. 루크는 그가 자길 돌아봐 줬으면 하고 바랐다. 카이얀의 눈은 녹색인데, 그가 좋아하는 정원과 닮아서 아주 보기 좋았다. 카이얀이 정원을 닮은 게 아니라 정원이 카이얀을 닮아 간 것이리라. 우연찮게 찻물도 그와 비슷한 빛깔이었다.

“다음에도 기다리고 싶습니다.”

아직도 그 얘기야?

카이얀은 별수 없다는 듯 그냥 픽 웃었다.

“네, 맘대로 하세요. 가을 되면 옷 좀 따뜻하게 입고.”

“그때도 차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카이얀이 마침내 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루크를 돌아보았다. 루크는 이래도 되나 조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약간 눈치를 살피는 듯한 그 얼굴을 보고 카이얀은 새삼스레 나이란과 다른 연구원들이 싫어졌다. 이 남자 평생에 따뜻한 차 한 잔도 내주지 않았을 그들이.

“네. 그리고 마중 안 나와도 차 같은 건 언제든지 줄 테니까.”

딱히 녹차에 감동한 건 아닌데, 카이얀은 루크가 녹차라는 음료에 대단히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저 카이얀이 뭔가 해 주고 손에 들려 주는 게 좋았던 것이고, 이 차가 카이얀과 닮아 보기 좋았던 것인데.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아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루크는 그게 정확히 뭔지 몰라 그냥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카이얀은 녹차 티백이 든 종이 상자를 식탁에 꺼내 놓았다. 내일은 정수기로 뜨거운 물 받는 법을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 *

루크는 차 우리는 법을 배웠다. ‘차 우리는 법’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냥 뜨거운 물을 받아 그 안에 티백을 넣고 잠시 기다리는 법을 알게 된 것뿐이었다.

카이얀은 루크가 차를 신기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타주면 즐겁게 마셨지만 스스로 티백에 손대는 일은 없었다.

“아, 끝났다.”

마침내 연구가 끝난 날, 카이얀은 그야말로 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번 연구는 정말 오래 걸렸다. 카이얀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여서, 한 연구를 진득하게 붙들고 있는 법이 없었다. 답사가 필요한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정확하고 새로운 결과를 빠르게 내놓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루크와 여기저기 한눈을 파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런 자기가 낯설었지만 카이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하셨습니까?”

역시 연구실 바닥에서 끙끙대며 퍼즐을 맞추던 루크가 얼른 카이얀에게 다가왔다. 그 움직임에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카이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지도 모르면서 얌전히 기다리다가, 일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 했느냐고 물어오는 게 꽤 귀여워 보였다.

기분이 좋아진 카이얀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가을이다. 이 사람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 특별한 일 없이 일상을 보내다 보니 벌써 계절이 바뀐 것이다.

카디건을 챙기며 카이얀이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우리 나갈까요?”

“네?”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라면 되묻는 일이 드문 사람인데, 갑작스러운 말에 좀 당황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마트 가자고요. 신경을 못 썼더니, 냉장고 텅 비었을 겁니다. 배달도 한두 번이지, 계속 풀만 먹을 수도 없고.”

카이얀은 흘끗 루크의 몸을 살폈다. 야윈 것 같진 않다. 속속들이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근육은 좀 약해졌을지도. 매일 아침마다 산책을 하지만 그런 게 제대로 된 운동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카이얀은 너무 신경을 기울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약에 노출되었던 사람 치고 루크는 아주 건강한 편이었다. 어쩌면 약에 오래 노출되었기 때문에 건강해졌는지도 모르지만.

“전 풀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로스터드 씨는 풀을 드십니까?”

루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서 카이얀은 그만 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은 양상추나 치커리 같은 걸 풀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잔디를 뜯어 드시는 겁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식용 식물이었습니까?”

“아니요.”

카이얀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잔디를 먹고 사느냐고? 카이얀은 토끼가 아니었고 솔직히 그는 토끼가 잔디를 먹는지 안 먹는지도 몰랐다. 내가 토끼라면 잔디 말고 다른 걸 먹겠다는 생각에까지 빠졌다가 카이얀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풀이라는 건 그냥 샐러드를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그냥 그렇게 말한 거죠.”

“네. 알겠습니다.”

카이얀은 기가 막혀서 잠깐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한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마다 당혹스럽다. 그러나 싫지 않은 당혹이어서 카이얀은 군말 없이 차키를 챙겼다.

그러고 보니 운전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지. 요즘은 루크도 차에 탈 때마다 제가 배워 모시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 잊고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운전도 가르쳐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이얀은 차를 출발시켰다.

루크 입장에서 마트에 대해 말하자면, 그곳은 별세계였다. 영화관에 갔을 때도 사람이 많아 놀랐지만, 도서관에 갔을 때도 그랬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창고식 대형 마트라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귀 괜찮아요?”

“네.”

“문제 있으면 바로 얘기하고,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길 잃어버린다고요.”

카이얀은 루크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루크는 저를 붙든 카이얀의 손을 보다가 몸을 좀 더 그에게 붙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카이얀은 루크를 밀어내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자기와 붙어 이동하기 편하도록 걷는 속도를 맞춰 주었다.

마트란 좋은 곳이구나. 루크는 기쁘게 움직였다.

카이얀은 이것저것 식재료를 골라 담았다. 카트를 끌고 걸으면서 그는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일반 대형마트에 가지 않고 창고식 마트에 온 건 순전히 루크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일반 마트보다는 볼 것이 많아 구경이라도 시켜 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여길 와서 보니, 뭐든 묶음으로 팔아서 사갈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습니까? 그거나 사고 구경이나 하다가 가죠.”

“저는 물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렇겠지, 싶어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일반 마트로 가서 시식이나 시켜 볼 걸 그랬나? 휴지 같은 거나 사서 빨리 나간 다음 다시 좀 작은 마트로 갈까? 생각을 거듭하며 오래 먹을 수 있는 팝콘 같은 거나 골라 담고 있는데, 루크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옆에서 루크가 슬쩍 손을 뻗어 카이얀의 팔을 잡았다.

카이얀은 그걸 별로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치이는 참이라 이렇게 붙어 있는 게 나았다. 내심 마음을 졸였던 루크는 안심하고 카이얀의 팔을 좀 더 힘주어 잡았는데, 그 순간 카이얀이 열두 개 묶음 타르트를 집어 들었다.

“이거 먹어 본 적 없죠?”

“네.”

카이얀은 대강 타르트를 카트 안에 집어넣었다. 군것질은 좋지 않지만 루크는 슬슬 단 음식을 먹을 때도 된 것 같았다. 카이얀은 단 음식을 이것저것 챙겼다.

“저것 좀 꺼내 볼래요?”

카이얀은 제 키가 아슬아슬한 높은 곳의 쿠키 세트를 가리켰다. 루크는 여전히 한 손으로는 카이얀을 잡고, 다른 손을 뻗어 그 상자를 내렸다. 카이얀은 그걸 받아 겉봉을 대강 확인하고 카트에 넣었다. 키가 엄청나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런 사소한 곳에서 편리하구나 싶었다.

두 사람의 첫 마트 방문은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순조로웠다. 사람들에게 좀 치이긴 했지만 서로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고,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마트에 온 것뿐인데 마치 천국에 온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루크는 끝까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카이얀은 그게 좀 우습고 귀엽고 흐뭇했다.

문제는 카이얀이 고기를 사기 위해 냉동 매대로 손을 뻗었을 때 일어났다. 카이얀은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 하며 고기를 골랐다. 마침내 손질된 닭고기를 골라 카트에 넣으려 몸을 돌렸을 때, 카이얀은 루크가 제 옆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이얀은 온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루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났다.

이게 무슨 일이야? 10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내가 여기서 물건 고르는 동안 한 세기가 지난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대체 어딜 간 거야?

카이얀은 어쩔 줄 모르고 헤맸다. 그는 아이 같은 걸 키워 본 적이 없었으므로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없었고, 자기가 부모님 손을 놓친 적도 없었다. 카이얀은 너무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찾았다. 홈 화면을 멍하게 들여다보다가, 루크에게 핸드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루크 씨!”

카이얀은 다음 행동을 정하지 못하고 소리를 높여 루크를 불렀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을 뿐, 루크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카이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살피다가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을 헤치고 카트를 밀쳤다. 큰 소리로 루크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땀이 찼다. 쓸모없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맨 것 같다. 흘끔거리는 사람들, 낯선 얼굴들, 밀치고 나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카트는 이미 팽개친 지 오래였다. 창백한 얼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카이얀은, 갑자기 누구에게 턱 붙잡혔다.

루크인가 싶어 반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낯선 사람이었다.

“괜찮으세요?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그제야 카이얀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루크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당황해서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혹시 키가 저랑 비슷하고 머리 까만 사람 보셨습니까?”

키가 카이얀과 비슷하고 머리가 검은 사람은 그 마트에 한 오십 명쯤 있었을 것이다. 상대는 난처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방송을 해 보시지 그래요?”

참으로 현명한 충고였다. 카이얀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다 큰 성인 남자라는 것조차 잊고 또 정신없이 고객센터로 뛰어갔다.

“하늘색 셔츠에 블랙진이고요, 키가 180이 좀 넘습니다. 이름은 루크고……. 방송 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네, 고객님. 바로 해 드리겠습니다.”

몇 번 성가신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바로 응낙했다. 카이얀이 찾는 게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지만 카이얀은 그걸 전혀 몰랐다. 연락처를 남긴 후, 카이얀은 또 고객센터에서 나와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며 루크를 불렀다.

이상한 일이다. 카이얀은 순간 한기가 들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루크는 여전히 일반인에 비해 청각이 뛰어나다. 물론 약을 끊은 지 오래되어 전만은 못하지만, 이 정도로 외치고 부르는데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어디론가 가 버렸더라도 금세 돌아올 사람이다.

이럴 리 없어.

순간 온갖 상상이 휘몰아치며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연구소 쪽이 너무 조용했다. 일상에 취해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이럴 리가 없다. 루크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었다고 했으니, 인권이니 뭐니 하는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루크를 쉽게 놓으려 들진 않을 것이다.

애초 나이란과 약속한 것도 루크의 자유가 아니었고……. 얼마 전엔 뜬금없이 나이란에게 연락도 왔었다. 별 문제 없느냐는 문자 한 통이었지만, 이유 없이 연락했을 리 없다.

왜 몰랐을까. 왜 몰랐지? 이럴 줄 왜 몰랐을까. 대비했어야 하는데,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는데, 카이얀은 이렇게 뛰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는 좌절감 때문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버렸다.

귓가에 루크를 찾는 방송 소리가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카이얀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전화. 전화 뒀다 뭐해, 나이란에게 전화라도 해 봐야지.

마트가 너무 시끄러웠다. 마음이 급했다. 카이얀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나이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다. 카이얀은 받을 때까지 걸었다. 다행히 세 번 만에 나이란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너 어디야? 루크 씨 어디 있어?”

- 무슨 소리야? 천천히 말해. 루크 없어졌어? 잃어버렸어?

갑자기 나이란의 목소리가 확 날카로워졌다. 처음엔 반쯤 잠긴 목소리였는데, 루크 얘기가 나오자마자 톤이 변한다. 카이얀은 순간 당황해서 우뚝 멈춰 섰다. 차에 올라타 시동까지 걸었는데 나이란은 전혀 모른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 카이얀, 제대로 얘기해. 루크 없어졌냐고!

“조용히 해. 나도 모르겠어, 난 당연히 너희가…….”

- 기다려, 지금 당장 추적부터 해 볼 테니까.

카이얀은 너무 당혹한 상태라 그 말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핸드폰에서 통화음 아닌 다른 소리가 났다. 얼른 액정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스팸인가 싶어 인상을 구기며 거절 버튼을 누르려다, 카이얀은 황급히 나이란과의 통화를 끝내고 그쪽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고객님, 지금 찾으시는 분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어딘지 좀 난처한 기색이 어린 목소리였다. 카이얀은 순간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왔는데, 하지만 일단 루크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싶었다. 카이얀은 일단 나이란에게도 찾았다는 문자를 보내 주고, 허둥지둥 다시 마트로 뛰어갔다.

과연 루크는 고객센터에 있었다. 그가 자폐증 환자 정도일 것으로 생각했던 직원들은,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 이 어른 미아의 모습에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얀은 대강 감사 인사를 남기고 루크부터 끌고 나왔다.

“대체 뭐하는 겁니까?”

카이얀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루크를 잃어버린 시간 동안 느낀 온갖 불안과 초조가 그런 식으로 터져 나왔다. 어딘지 지친 얼굴의 루크는 그 소리에 찔끔해 뭔지도 모르고 죄송하다고 고개부터 숙였다.

“뭐가 문젠지 알고나 그럽니까? 내가 사람 많아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어린애도 아니고 휩쓸려 갈 만큼 기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카이얀이 잔뜩 흥분해 큰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흘끔거렸다. 그러나 그런 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카이얀은 평소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말 좀 해봐요.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사람들한테 밀쳐졌어요?”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그 인파에 휩쓸려 멀리 가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루크는 카이얀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루크는 카이얀이 전에 없이 고함을 치며 화를 내자 무척 당황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전, 그러니까… 지갑 때문에 그랬습니다.”

“지갑?”

“네, 그게, 이거…….”

평소답지 않게 더듬대며 루크가 손에 꼭 쥐고 있던 걸 내밀었다. 카이얀은 잠깐 그게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그게 제 지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순간 손을 돌려 뒷주머니를 확인했다. 지갑이 없었다. 카이얀은 아연해져서 루크를 보았다. 다시 카이얀의 시선을 받자, 루크는 딱 자세를 바로 하고 보고하는 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로스터드 씨의 지갑을 가져가는 걸 봤습니다.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러다간 놓칠 것 같아서, 금방 찾아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간인이 너무 많아서 밀고 길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트 바깥까지 나가게 됐는데, 그 바람에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그러더니 루크는 슬쩍 카이얀의 눈치를 살피고, 그의 멍한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요는, 소매치기 때문이었다?”

“소매치기가 뭔지 잘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모른다는 소릴 하고 싶진 않았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루크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카이얀은 한숨을 참았다.

“지갑 훔쳐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쨌어요?”

묻고 나서 보니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소리였다. 루크가 그 사람을 경찰에게 넘기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럴만한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저 얼굴로 쫓아가서 붙잡고, 지갑을 돌려 달라고 했겠지.

“아무튼 찾아다 준 건 고맙습니다.”

하나도 안 고마운 얼굴로, 카이얀은 고맙다고 말했다. 딱딱한 목소리여서 루크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렇게 무섭게 화를 내는 카이얀은 또 처음이었다.

“제가 뭔가 실수했습니까?”

머뭇거리며 묻자,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까?”

“꼭 누가 잘못해야만 화가 나는 건 아닙니다.”

뭣도 모르고 실컷 다그쳤으니 미안한 마음이 안 든 건 아니다. 그러나 죽어도 사과하긴 싫었다. 루크에게 사과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 자존심을 세우는 편도 아니다.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지금 상황에서 루크에게 사과하긴 싫었다.

“앞으론 나한테 말하고 가세요. 말 안 할 거면, 그냥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물건 아닙니까?”

루크는 주저하며 물었다. 웃기지도 않아. 카이얀은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쳐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일이 되면 또 풀고 잘 대해 줘야겠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루크를 실컷 쩔쩔매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갑이 아니라 차가 없어졌어도 이만큼 놀라진 않았을 겁니다.”

루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이얀은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난 게 아니라 답답해졌다. 카이얀은 제 손의 지갑을 흔들어 보였다.

“이게 루크 씨보다 중요한 건 아니라고요.”

왜 이해하지 못할까. 어린아이도 이 정도는 알 것이다. 자기가 없어져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나.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걱정할지는 생각조차 안 했나. 그저 훈련받은 탐지견처럼 도둑맞은 물건만 찾아오면 그만인가. 개가 사라져도 걱정할 판국에 하물며……. 정말 피가 다 식는 줄 알았다.

“전 없어지지 않습니다. 무사히 돌아오는 건 제 임무 중 하나입니다.”

“그냥.”

카이얀은 루크의 말을 가로채며 이를 악물었다. 임무 따위 알 게 뭔가. 하지만 더 이상 화내진 말자. 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자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냥,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고 해요.”

“하지만 지갑이…….”

“알겠다고 하라고.”

카이얀은 거의 한계였다.

“내가 당신을 걱정한다잖아. 없어지면 놀란다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알았다고, 갑자기 사라지지 않겠다고 대답하라고.”

루크는 눈을 깜빡였다. 걱정했구나. 놀랐고. 이 사람이, 자기 때문에.

물론 미안했다. 그러나 더욱 미안하게도, 한편으론 좀 달콤하기도 했다. 물론 그 말을 지금 입 밖으로 냈다간 정말 한 대 맞을 것 같았으므로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날, 그들은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또 지겨운 샐러드를 먹었다. 집에 돌아온 카이얀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루크에게 좀 더 차분하게 설명해 줬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조금 덜 혼잡한 마트에 함께 가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루크가 사라졌다고 그렇게 당황한 자기 자신이 좀 낯설기도 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크도 마음이 복잡해진 채로 뒤척였다. 카이얀이 지갑보다 자길 더 걱정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왜 화를 냈을까. 루크는 거기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둘 모두 생각이 많아 밤은 더디 깊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 다음 날 일어날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

카이얀은 인터넷 뉴스를 잘 보는 편은 아니었다. 일단 각 웹 사이트들의 경향성이 불편했고, 연구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매일 책 뒤적이랴 워드 창 보고 있으랴 눈이 뻑뻑한데, 괜히 자기를 피곤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자기 이름은 잘 보이고 잘 들리는 법이다. 웹 사이트 메인에 제 이름이 들어간 걸 보고, 카이얀은 너무 놀라 기사를 클릭했다.

사진이 맨 위에 있었다. 경악스럽게도, 자기와 루크가 찍혀 있었다. 다행히 루크는 뒷모습만 나왔지만, 그 정도로도 당연히 충격이었다. 카이얀은 빠르게 기사를 훑었다. ‘어제 6시 경, 한 여성이 자신의 SNS 계정에……’ 거기까지만 읽고도 카이얀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SNS 같으니, 정작 난 하지도 않는데 매번 이게 말썽이지.

요는 누가 마트에서 자길 봤고, 그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는 거였다. 신비주의 수재 학자 카이얀 로스터드가 낯선 남자와 같이 있는 사진은 당연히 시선을 끌었다. 사진 속 제 얼굴을 대충 보니 루크에게 한참 화를 낼 때였다. 그 이후 곧장 거길 떠나서 루크 얼굴까지는 제대로 못 찍은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절대 연예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화 강국에서 이름난 학자인 만큼 유명세는 피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기사가 뜬 게 처음이 아니기도 하다. 심지어 머독과의 친분을 메인 테마로 한 기사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루크가 이 일에 얽히자 너무나도 화가 나고 걱정이 되었다. 카이얀은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다가 일단 포털 사이트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어디까지나 일반인’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기자에게 짧지만 뾰족한 메일을 전송했다. 하지만 SNS에 올라간 글과, 이미 여기저기 퍼진 사진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도대체.”

왜 이렇게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내 논문 읽어 본 적이나 있을까. 다음번엔 우상을 만드는 인간 심리를 주제로 작품을 좀 분석해 볼까. 습관적으로 일 생각을 하다가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금방 잊는다. 머독과 야릇한 자세로 함께 찍은 사진도 한바탕 화제가 되었지만 금세 잊혀졌다. 머독이 장난을 치느라 나온 사진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금방 묻힐 것이다. 카이얀은 짜증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걸 그토록 꺼려 왔는데, 학계에서 초반에 자기를 하도 여기저기 노출시키는 바람에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루크는 어쩐 일인지 제 방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아침 산책을 하고 식사도 했는데, 귀찮게 붙어 다니더니 이젠 그것도 그만두려는 모양이었다. 기사를 보니 더 그가 신경 쓰여서, 카이얀은 올라가 볼까 하고 몸을 일으켰다.

“로스터드 씨.”

막 계단을 내려오던 루크가 카이얀을 보고 반색을 했다. 두 손으로 뭘 받쳐 든 채였는데, 카이얀은 그게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나 루크가 너무 들뜬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냥 그가 자랑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왜 안 내려오나 해서 올라가 보려고 했습니다. 왜요?”

“이거, 지난번에 주신 겁니다.”

두 사람은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섰다. 근소한 차이긴 하지만, 자기보다 키가 큰 루크가 한 계단 위에 있기까지 하니 올려다보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내색하지 않았다.

“뭔데요?”

모르는 척 묻자 루크가 자랑스럽게 손에 든 걸 내밀었다. 그게 뭔지는 보자마자 바로 알았지만, 카이얀은 놀라는 척해 주었다.

“와, 벌써 다 맞췄습니까? 이렇게 빠를 줄 몰랐는데요.”

사실 500피스 퍼즐은 난이도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루크가 기대보다 빨리 맞춰 온 것은 확실히 놀라웠다. 어차피 사과의 의미로 사 온 거였고, 대강 팽개쳐 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언제나 기대보다 훨씬 더 성실하고 정직하다. 이걸 맞춰 올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은 탓인지 마음이 조금 이상해졌다.

“잘했네요.”

다 큰 어른에겐 어울리지 않지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어 손을 뻗었다. 루크가 한 계단 위에 올라가 있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손이 안 닿을 정도는 아니어서, 카이얀은 그냥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었다.

“맞춰 줘서 고마워요.”

어린아이를 대하듯, 정성을 들여 칭찬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루크는 인터넷에 그런 사진이 떠도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게 자기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정말 이해조차 하지 못하리라.

다른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릴 때 부모나 또래로부터 컴퓨터 사용하는 법도 배우고,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했을 텐데. 학대가 학대인 줄 알고, 자기의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찾을 권리에 대해서도 알고.

그러나 루크는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칭찬 스티커나 소소한 용돈 같은 것에 대해서, 그는 모른다. 그리고 그게 폭력이었다는 것도 모른다.

“다음엔 또 다른 거 사다주겠습니다.”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도, 퍼즐을 선물하는 것도, 이렇게 아이 대하듯 칭찬하는 것도… 모두 소용없음을 안다. 이런 것으로 루크의 잃어버린 유년을 채울 수는 없으리라.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루크의 유년에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보다 더 카이얀을 아프게 하는 것은, 루크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기가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모른다. 정상적인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했으니 위화감이 없던 것도 아닐 텐데.

이런 삶이 가능한가.

“아.”

루크의 머리에서 손을 내리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카이얀은, 곧 약간 놀라 얼빠진 소리를 냈다. 루크가 퍼즐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카이얀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시면 좋겠습니다.”

카이얀은 멍하게 루크를 올려다보았다. 루크는 깊이 염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언제 이렇게 됐지? 두 사람은 벌써 두 계절을 함께 보내고 있었으나, 카이얀은 너무나 새삼스러워 말을 잃었다.

“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가 카이얀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을 때를 제외하고, 누가 제 머리를 쓰다듬은 건 처음이었다. 기본적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어린 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있어, 친구들도 함부로 서로의 머리에 손을 올리진 않았다.

그러나 루크는 달랐다. 그에게는 이 행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저 카이얀이 쓰다듬어 주니 좋았고, 그 좋은 기분을 카이얀도 느꼈으면 해서 똑같은 행위를 돌려준 것이다.

거의 십 년 만에 느끼는 감각에 카이얀은 깜짝 놀랐고, 또 조금은 어색했다. 카이얀은 자기가 왜 당황했는지 몰랐지만, 일단 멍청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뒤돌아섰다.

“일단 점심 먹죠. 내려와요.”

“네.”

루크는 카이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럴 때 보면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은데. 카이얀은 대강 점심을 차리며 액자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루크가 처음으로 맞춘 퍼즐이니, 액자에 넣어 걸어 주고 싶었다.

* * *

남은 시간은 아주 평범하게 지날 것처럼 보였다. 낮에 카이얀은 루크와 나가 가을 옷을 새로 사주었고, 액자도 샀다. 부질없는 걸 알고도 동심이란 걸 느끼게 해 주고 싶어 인적 드문 호숫가에서 비눗방울 놀이까지 했다.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가 또 넘어지면 다치니까 안 된다는 말까지 들었다. 카이얀은 그냥 귀엽게 들어 넘겼다. 중간에 몇 번 나이란에게 전화가 왔지만, 카이얀은 ‘찾았다고 했잖아.’라는 문자만 보내 놓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약간 어둑해졌을 때 집에 들어오다가, 카이얀은 그날 신문을 챙기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았다. 혼자 살 땐 행동 패턴에 변화가 없었는데 루크와 사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카이얀은 대수롭지 않게 1면 기사를 훑고 그걸 대강 던져두었다.

카이얀이 신문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면, 그는 그날 밤에 걸려올 전화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 찾았다고 문자만 보내면 다야? 전화를 받아야 할 거 아냐.

카이얀은 시계를 보았다. 밤 열한 시 반이었다. 루크는 제 방으로 돌아갔고, 카이얀은 최근에 발표한 제 논문 반응을 살피는 중이었다. 카이얀은 좀 성가셔져서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들어갔다.

“찾았으면 됐잖아. 뭐가 더 필요해?”

-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 조만간 루크 돌려보내야 돼.

나이란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해서, 카이얀은 잠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 말을 알아들은 카이얀은 휴대폰을 바꿔 들었다.

“뭐? 왜?”

- 신문 못 봤어? 우리 군이 열세야.

“못 봤어. 파병 문제야?”

카이얀의 국가 리탄은 국제 사회에서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국제 평화 기구 의장이고, 불법적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수의 군인을 파병했다. 리탄 자체는 평화롭고 안전했으나, 파병 군인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했다.

- 그래. 연합군 문제라 루크가 필요해. 루크가 해 줘야 하는 일이 있어.

“그게 뭔데?”

- 당연히 군사 기밀이지.

나이란은 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카이얀은 너무 갑작스럽게 닥친 일에 뭐라 대꾸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긴 했지만, 마트에서도 이런 상상 때문에 놀란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 르다크 내전이 생각대로 안 됐어. 3차로 파병했는데 계속 밀려. 루크를 보낼 거야.

“루크 씨 한 사람이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나이란이 비웃는 소리가 났다.

- 넌 상상도 못 할 일을 할 수 있지. 루크는 물론 일반 전선에서도 싸우지만, 잠입에도 전문가고, 뒤집힌 비행기에서도 아무 무리 없이 싸울 수 있어.

카이얀은 머뭇거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자기는 분명 루크를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인간적인 대우만 보장하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돌려주는 게 맞고, 이대로 계속 지낼 수 없는 것도 안다.

- 연구소 사정이 안 좋아서 너한테 맡긴 것뿐이야. 네가 데리고 있는 동안은, 네가 어떻게 하든 신경 안 썼어. 약 끊게 한 것도 괜찮아. 하지만 이제 와서 말 바꾸는 건 안 돼. 루크는 국가 재산이야.

“굳이 말하자면 국가가 도둑질한 재산이겠지.”

나이란의 말이 너무나 거북해, 카이얀은 뭐 어쩌겠단 계획도 없으면서 일단 말부터 뱉었다. 그러나 나이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 전처럼 협박해도 소용없어. 이미 중앙 정부에서도 허가가 난 상황이니까. 그리고 루크의 이름은 군적에 올라와 있다고.

카이얀은 순간적으로 밀리엄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이번 정권이 나이란의 연구소를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나이란의 연구소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견제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임시 해체된 것이다. 그 사실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는데, 상황이 불리해지자 무적에 가까운 인간 병기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카이얀은 분해서 이를 갈았다.

“루크 씨는 이미 오래 전에 약을 끊었어. 다른 감각들도 조금씩 일반인과 비슷해지고 있어. 지금 데려가서 뭘 하겠어?”

이런 상황까지 계산하고 벌인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루크는 일반인보다 몇 배 뛰어난 정도일 뿐, 이전 같은 능력은 없을 것이다.

- 상관없어. 그거라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나이란은 딱 잘라 말했다.

“새 실험을 하려는 건 아니고?”

- 의심 그만해. 우리도 마트 나갔다가 사진 찍히는 유명 학자하고 싸울 생각은 없다고.

나이란이 잔뜩 비꼬았다.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카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 일단 3주 정도 다시 훈련 기간이 필요해. 준비도 일주일이면 다 끝나. 그때 루크 데리러 갈 테니까 얘기나 잘해 줘.

“3주는 국내에 있다는 거네.”

- 그래.

“그럼, 그때까진 주말마다 내 집으로 보내.”

나이란은 기가 막혔는지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곧 한숨 쉬는 소리가 전해졌다.

- 억지 부리지 마.

“너희 못 믿겠다고. 왜 3주나 필요한데? 그동안 다시 실험할지 어떻게 알아?”

-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집으로 보내라고. 일주일에 하루도 상관없어. 가기 전까진 루크 씨 어떻게 지내나 내가 확인하겠어.”

나이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카이얀은 그녀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권도 그들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니 이렇게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나이란은 물러났다.

- 좋아. 매주 일요일에 보내겠어. 이제 만족해?

그 순간 카이얀은 알아차렸다.

중앙 정부에서 연구소의 불법 실험을 묵인하고 손을 벌렸다 하나, 여전히 그들의 입지는 불안정한 것이다. 그러니 강경하게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으로 나오지 못하고 한 수 접어주는 것이다.

“이번 일 정리되면.”

카이얀은, 이것도 될까 의심하며 말을 시작했다.

“루크 씨 의사를 물어봐. 계속 군인으로 일하고 싶은지.”

- 루크한테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얼마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설마 사람 평생을 그 정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목격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루크가 학대인 줄도 몰랐을 학대까지 생각한다면, 세계 모든 금을 그의 발밑에 쌓아도 모자랄 것이다.

-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노력은 해 볼 테니까, 일단 루크한테 얘기나 해 둬.

더 얘기하지 않겠다는 듯, 나이란은 그쯤에서 전화를 끊었다.

카이얀은 허망한 기분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분명 작은 일이 아닌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닥쳐온 일이라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들지. 뭐라고 말해 줘야 하지. 이번에 루크 씨가 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르다크 내전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물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루크는 이 집을 떠날 것이고 외국 전쟁터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그날 카이얀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자기가 왜 잠들지 못하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뒤척였다.

* * *

루크는 아침 산책을 위해 현관에서 카이얀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얀을 기다리는 것은 거의 루크의 일상이었다. 카이얀이 대강 준비를 하고 현관으로 왔을 때, 루크는 그가 몹시 피곤해 보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분명 잠들기 전까진 별일 없었는데. 루크는 초조했지만 카이얀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고개만 저었다. 머뭇거리는 루크를 대신해 카이얀이 문을 열었다. 산책 내내, 루크는 카이얀 곁에 바짝 붙어 걸으며 계속 그의 상태를 살폈다.

카이얀은 영 힘이 없어 보였다. 산책은 그만두고 식사부터 하는 게 나았을까. 카이얀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루크는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한적한 길을 걷다가, 카이얀이 문득 갈림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대로 쭉 가면 시내가 나온다. 번화가가 시작되는 곳까지 루크와 함께 걸어갔다가, 길이 혼잡해지기 전에 돌아오곤 했다. 샛길로 빠지면 호수로 가는 길이다. 이전에 루크와 자전거를 타고 갔던 곳이다. 카이얀은 루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길로 가 볼까요?”

카이얀은 다정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루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이얀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권해 왔다.

“집으로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색이 나쁘십니다.”

“음… 잠을 좀 못 자서 그럽니다. 얘기해 줘야 할 게 있어서.”

카이얀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루크는 그를 따라 걸으며, 얘기라면 집에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안 좋은 몸을 이끌고 멀리까지 가야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카이얀에게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 자전거로 20분쯤 달려야 하는 거리의 호수까지 걸었는데도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석 달 전이었으면 별다른 아쉬움도 없이 보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루크 씨.”

산책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보다 더 멀리 걸은 탓에, 날은 이미 환해졌고 다른 사람들도 산책로에서 다 떠난 후였다. 카이얀은 호수를 가까이 두고 설치된 벤치 위에 앉았다. 루크도 그 곁에 앉았다.

“어제.”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나이란 이야기부터 할까? 말은 시작했는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정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말할 준비만 안 된 게 아니다. 그냥 루크를 다시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전쟁터에서 어땠습니까?”

어제 전쟁터에서 어땠냐고?

이 뜬금없는 전개에 루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카이얀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느라 여념이 없는 루크는, 금세 의문을 지우고 일단 성실하게 대화에 응했다.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싶으신 겁니까?”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여러 가지로, 얘기가 듣고 싶어서.”

카이얀은 별로 확신 없는 어조로 답했다. 애매한 소리였지만 이제 대화에 익숙해진 루크는 의외로 쉽게 답을 내놓았다. 카이얀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그에게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주로 단독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주요 표적을 제거하거나, 잠입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대규모 작전에 참여하게 되면 저격수들을 찾아내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루크는 최대한 카이얀이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했다. 마치 카이얀이 자기에게 그랬듯.

카이얀은 호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냥 그 이야기들을 듣고만 있었다. 루크는 자기가 그때 뭘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말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난 루크 씨가 좀 로봇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반에는 그랬다. 그가 루크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연구소에서 자라, 인체 실험을 받고, 전쟁에 나갔다. 로봇이 아니면 이상한 것이다.

실제로 루크는 어디로 보나 군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인사를 할 때나 앉고 서고 대답하는 그 모든 움직임에서 루크는 군인 같았다. 주로 연구소에 있었을 텐데, 그런 행동이 몸에 익은 건 대체 어째서일까. 어떤 식으로 교육받은 건지 카이얀은 알기 어려웠다.

“제가 그렇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사람 같아서 놀랐습니다.”

그 점 때문에 카이얀은 더 쉽게 루크를 받아들이게 된 건지도 모른다. 루크는 의외로 사람 같았다. 그는 어디로 보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필 줄 알았으며, 가르치기 전부터 분명 감정과 생각이라는 걸 갖고 있었다.

오래 억제되어 있었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온갖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인데도 루크는 성실하고 정직하고 다른 사람을 걱정할 줄 알았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사육되다시피 길러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정해진 때에 먹이고, 정해진 때에 재우고, 불필요한 말은 나누지 않으면서.”

“보통은 그렇게 했습니다.”

루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떤 감상도 없이. 카이얀은 잔잔한 호수의 표면에서 루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말을 해 줘야 할까. 해 주는 게 옳을까.

‘혹시 그게, 어떤… 폭력이거나, 학대거나… 그랬다는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카이얀은 그 말을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거기 박사나 연구원은 어땠습니까?”

“정해진 시간에 들어와서 정해진 일을 했습니다.”

“내 말은, 그때 루크 씨 기분이 어땠냐는 겁니다.”

“제 기분 말씀이십니까?”

루크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지 말라고 배웠다. 생각은 해가 되는 것이라 배웠다. 연구소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생각에 매몰되어 사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루크는 배운 대로 따랐다.

그는 좋은 학생이었고, 순종적인 실험체였다. 자기 운명에 저항하려 한 적도 없었다. 아니, 그는 운명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그는 살던 대로 살았고 계속 그렇게 살 줄 알았으며 거기에 아무 불만도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신체의 고통도 그렇게 극심하진 않았다. 약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통증은 줄어들었고 발작 횟수도 줄었다. 물론 고질적인 발작과 결별할 순 없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었고 연구소도 그 발작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횟수도 점차 줄어 갔다. 어릴 때 겪었던 실험들은, 대체로 잊어버렸고 기억에 남았다 해도 크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정도였다.

“나는.”

카이얀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루크 씨가 더 많은 걸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을 못 잔 탓인지 머리가 좀 멍했다. 그러나 의식은 분명히 깨어 있었다. 카이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루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 말고 다른 것들을요.”

당신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람이었다. 통증을 느끼고,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본능과 직관을 가진 인간이었다. 당신은 안드로이드가 아니었고, 인간 탱크 따위도 아니었다. 당신은 사람으로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릴 권리가 있다.

“나랑 해 봅시다. 운전도 배우고, 별도 보러 가고, 버스도 타 보고, 여행도 가고, 그러자고요.”

“네, 그러겠습니다.”

루크는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가 깃든 얼굴이었다.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카이얀은 차마 그 면전에 대고, 이게 헤어지기 위한 준비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 하자. 아침부터 먹고, 그 다음에.

루크는 카이얀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으나 더 캐묻지 않았다. 카이얀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동안, 루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서 계속 의미 없는 말들을 이어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날 두 사람은 집에 묶여 있어야 했다. 집에 돌아온 카이얀이 그대로 앓아누운 것이다. 열이 치솟고 온몸이 쑤셨다. 지독한 몸살감기였다. 밖에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거랑은 상관없는 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이얀은 독한 해열제를 먹고 잠들었다.

“로스터드 씨.”

카이얀이 아픈 건 처음이라 루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카이얀은 오늘은 가서 쉬라는 얘기만 남기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잠들어 버렸고, 루크는 혼자 그 곁을 지켰다.

루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카이얀 옆에 앉아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해 줘야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자기도 연구소에서 종종 아팠다. 커가면서 그런 일이 적어졌지만 어릴 땐,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환각을 볼 때도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좀 성가셔했고 몇 가지 주사를 놓거나 약을 먹이거나 그걸로 안 되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루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에 상처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카이얀이 이런 상태가 되자, 뭐라도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루크는 물수건 만드는 방법도 몰랐으므로 카이얀에게 정말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주사도 놓을 줄 모르고, 안다 해도 주사약이 없다.

다른 사람이 열병으로 앓는 걸 본 일이 드문 루크는, 카이얀의 상태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피 흘리는 게 아니니 지혈해 줄 수도 없고, 골절도 아니니 부목을 대 줄 수도 없다. 카이얀 몸 안의 열과는 싸울 수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곁에 앉아만 있던 루크는 곧 카이얀의 마른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스치는 듯.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 안 깨어날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입맞춤으로 사람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도 해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아는 게 그것뿐이라서, 루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번 카이얀에게 입을 맞추었다.

카이얀의 입술은 뜨거웠다. 루크가 느끼기에, 몸은 스스로 다 타 버리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나는 당신을 깨울 수 없을까. 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까. 왜 고통 가운데 당신을 홀로 버려두어야 하나. 왜 나는 당신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고, 하다못해 거기 참여할 수도 없는 걸까.

카이얀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루크는 몰랐다. 자기가 발 디딜 공간도 없는 타인의 고통이었다. 루크는 혹시 되지 않을까 하는 어린애 같은 기대를 지우지 못한 채, 카이얀의 고통에 무수히 입을 맞추었다.

* * *

카이얀은 저녁에 깨어났다. 잠든 사이 식은땀을 흘렸는지 몸이 조금 끈적거렸다. 그래도 컨디션은 한결 나아진 것 같아 카이얀은 누운 채 한숨을 내쉬었다. 물이라도 마실까 싶어서 상체를 일으키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로스터드 씨.”

카이얀은 일어나다 말고 깜짝 놀라 루크를 보았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기운이 빠지긴 한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하루 사이에 수척해진 것 같은 루크의 얼굴을 보며 잠시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전에 비해 훨씬 카이얀의 반응을 잘 읽어 내게 된 루크는, 조금 머뭇거리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놀란 건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카이얀은 더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목이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그러다 그는 자기가 오늘 하루 종일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카이얀은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루크 씨, 괜찮으면 물 한 잔만.”

“네.”

루크는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렇게 급한 건 아닌데 싶어 카이얀은 조금 무안해졌다. 그는 기운 없는 몸으로 멍하게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저 멍하게 앉아 있는 것에 불과했다.

“여기 있습니다.”

루크가 유리컵을 내밀었다. 10초도 안 걸린 것 같네, 당연히 그보단 더 걸렸겠지만 카이얀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물을 마시고 옆에 내려놓으려는데, 루크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아 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그걸 손에 꼭 쥐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다시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이란과의 통화가 오늘 일에 영향을 미쳤을까. 완전히 그 일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 영향도 없었다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이얀은 일단 침대에서 내려왔다.

“좀 씻고 오겠습니다.”

“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루크가 당연하다는 듯 따라왔다. 부축 필요 없는데. 카이얀은 그냥 됐다고 손만 저어 보였다. 용케 알아들은 루크가 카이얀 뒤에서 멈춰 서고, 카이얀은 욕실로 들어갔다. 몸에 달라붙은 옷을 벗어 버리고 수온을 조절하다가 카이얀은 잠깐 의아해졌다.

운 좋게 타이밍 맞춰 내 침실에 왔던 건가? 아니면 계속 옆에 있었나?

카이얀은 머뭇거리다가 잠깐 욕실 문을 열고 바깥의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여덟 시. 산책 나갔다 오전에 돌아왔고, 그 뒤에 바로 열이 올랐으니……. 카이얀은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 밥은 먹은 건가?

안 먹었을 게 뻔해서 카이얀은 좀 서둘러 씻었다. 어차피 느긋하게 물 받을 생각도 없었으니, 빨리 나가서 늦게라도 저녁을 먹일 생각이었다.

애도 아니고 왜 내가 없으면 밥을 안 먹는 거지. 저런 사람을 다시 연구소로 보내야 한다니, 거기서 생각 없이 패스트푸드 같은 걸 먹이면 어떡하지.

카이얀은 대강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쳤다. 정신이 없으니 갈아입을 옷도 깜빡했다. 욕실 밖으로 나갔을 때, 카이얀은 밖에 서 있던 루크와 거의 부딪칠 뻔했다.

“아, 죄송합니다.”

카이얀보다 더 놀라서, 루크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주춤주춤 카이얀에게 손에 든 걸 내밀었다.

“아…….”

카이얀은 선뜻 받아 들지 못하고 바보 같은 소리만 내고 말았다. 루크가 손에 든 머그컵에서 김이 오르고 있었다. 티백으로 끓인 차였다. 루크는 영 확신이 없었는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더 머뭇거리면 루크의 손이 무안할까 봐 카이얀은 얼른 그 머그컵을 받았다. 루크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는 일반적인 간호에 대해 전혀 몰랐으므로 무엇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필요 없다고 할까 가슴을 졸였는데 카이얀이 선뜻 받아 든 것이다.

카이얀은 일단 그걸 한 모금 마시고 침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한 건데, 루크가 따라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훌훌 갈아입자니 예전 일이 마음에 걸렸다.

“부엌에 가 있으면 금방 저녁 주겠습니다. 밥 안 먹었죠?”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누워 계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

왜 자꾸 이렇게 멍청해지지. 카이얀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렇게만 생각했다. 기운이 좀 없는 것뿐이지, 이제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닌데. 사실 그리 배고픈 것도 아닌데.

그래도 루크가 이렇게 챙겨주려 애쓰는 게 싫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크였다. 여러 의미로 카이얀에겐 좀 특별할 수밖에 없는.

카이얀이 특별히 거절의 말을 내지 않자, 루크는 바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얼결에 혼자 남은 카이얀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 차만 홀짝거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카이얀은 스스로를 이해하려 애써보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하지만 루크가 그럴싸한 오트밀 죽을 내올 때까지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평소 하시는 대로 따라했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작은 상을 요령껏 침대에 올리더니, 루크가 확신 없는 어조로 덧붙였다.

“제가 맞게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잘 몰라서…….”

“아, 아뇨. 잘했습니다. 고마워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카이얀은 스푼을 들었다. 최악의 맛이면 어떡하지. 내심 걱정하며 한 입 떠먹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자기를 주의 깊게 살피는 루크의 시선을 느끼며, 카이얀은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참…….”

뭐라 말하려다, 카이얀은 입을 다물었다.

“네?”

루크는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 되물었다. 카이얀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루크 씨랑 같이 사니까 좋네요. 10년 만에 간호란 것도 받아 보고.’

그냥 농담처럼, 장난처럼, 가볍게. 인사치레로 할 수도 있는 말인데 왜 그 말이 목에 턱 걸린 듯 나오지 않는지. 이게 뭐 대단한 말이라고. 해 주면 좋아할 텐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말하다 눈물이라도 글썽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그만한 꼴불견이 없겠지. 카이얀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릇을 비웠다. 곧 혼자 남게 되리라는 게 실감이 났다. 자기와 루크 둘 다.

혼자.

원래 그게 당연했는데. 왜 이렇게 새삼스럽고 낯선지. 시간이 원래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그래도 오늘 안에는 얘길 해 줘야 한다. 어제 통화를 했으니 미룰수록 좋지 않을 것이다. 카이얀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려온 건 자기면서 감사하다는 말도 자기가 한다. 카이얀은 그냥 웃고 말았다. 루크가 상을 들고 나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카이얀은 침대 위에서 제 앞을 가리키며 루크에게 말했다.

“할 말 있는데 좀 앉아 보세요.”

침실에서 이런 얘길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서 얘기하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어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마 내내 잠든 제 옆에 있었을 루크도 올라가 쉬고 싶을 것이다.

루크는 얼른 침대 위로 올라왔다. 좀 긴장한 얼굴이었다. 카이얀은 머릿속으로 준비해 둔 말을 먼저 꺼냈다.

“어제 나이란 캠벨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네.”

루크는 의외로 침착했다. 나이란의 이름을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카이얀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내전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서, 루크 씨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조만간 루크 씨를 데리러 올 거라고…….”

“아…….”

루크가 약간 동요했다. 그는 할 말을 고르려는 듯 사이를 두었다가, 간신히 대답을 꺼내 놓았다.

“알겠습니다.”

카이얀은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가지 않겠다고 말하진 않더라도, 조금 두려워하기라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곧장 알았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일순 서운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이 감정 때문에 카이얀은 또 당황했다. 대체 왜 서운하지?

“언제 온다고 합니까?”

루크가 그렇게 물었을 때, 카이얀은 깨달았다.

루크는 태연한 것이 아니다. 그는 긴장 상태였다. 다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다. 여전히, 아직도,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카이얀은 순간 울컥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다시 연구소에 보낼 수 있겠는가. 설령 다시 불법적인 실험을 받는다 해도 루크는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 생각이 미치자 토할 것 같았다.

“정확한 날짜는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화해서 물어볼 테니까……. 그 전까지, 혹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주면 됩니다.”

“네.”

“미안합니다.”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카이얀은 짤막하게 덧붙였다. 처음으로 정계의 접촉을 다 뿌리친 것을 후회했다. 선을 만들어 뒀다면 좋았을걸. 그런다고 뭐가 해결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니 더 아쉬웠다. 중앙 정부의 비공식적 허가도 있었다니 밀리엄에게 연락해도 소용없을 것이고.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루크는 당황해서 바로 고개를 저었다.

“로스터드 씨와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금도 좋습니다. 왜 미안하다고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요.”

카이얀은 두서없이 이어지는 루크의 말을 끊고, 잠깐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원래 가끔 그럴 때가 있는 겁니다.”

루크는 이해하지 못했다. 카이얀도 딱히 그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과연 이 사람이 자기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자기가 그와 함께 있어 즐거웠고, 그와의 일상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누가 요구한 건 아니지만, 카이얀은 자기가 루크를 보호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랬다. 그걸 루크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카이얀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뭐 해 보고 싶은 거 있어요?”

“네.”

루크는 곧장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가 좀 뜸을 들이리라 예상한 카이얀은 약간 놀랐다.

“뭐 해 보고 싶은데요?”

“아…….”

루크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러다가 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네?”

“그냥 지낼 때는 여러 가지로, 로스터드 씨와 해 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려니까, 갑자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카이얀은 말문이 막혔다. 루크가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오히려 위로할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루크는 위로 같은 걸 바라지 않았고 이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카이얀은 잠시 자기를 추슬렀다. 그는 곧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네.”

루크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더니 슬쩍 카이얀의 눈치를 살폈다. 루크가 나갈 거라고 생각한 카이얀은 뭔가 싶어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기회를 잡은 듯 루크가 말했다.

“오늘 여기 있어도 됩니까?”

“어… 왜요?”

멀쩡한 방 내버려 두고. 카이얀은 그 말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루크 방에 침대를 놔 줘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아직 주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루크는 진지하게 말했고 카이얀은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양할 거라고 생각하고 옆에 누워도 된다고 했는데, 루크는 정말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했다. 카이얀은 좀 웃겨서 그냥 웃었다.

낮에 오래 잔 탓인지 카이얀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루크는 금세 잠들었다. 오래 뒤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어느새 꽤 길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보며, 카이얀은 ‘시간이 아깝다’는 루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 * *

나이란은 일주일 후에나 올 수 있다는 말을 전해 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해, 그렇게 말할 때 나이란은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카이얀으로선 반가운 얘기였다.

루크는 카이얀과 뭘 하고 싶은지 선뜻 생각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집에만 있긴 싫었으므로 루크는 겨우 “밖에 나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카이얀은 쾌히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아, 잠깐만요.”

카이얀이 옷을 다 갖춰 입은 루크 쪽으로 휙 돌아섰다. 뒤따라 걷던 루크가 약간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얀이 루크를 살피며 물었다.

“이제 귀는 어때요? 큰 문제는 없습니까?”

“네. 하지만 잘 들리긴 합니다.”

루크는 바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 전날, 제 청력이 어떤지 점검해 본 차였다. 혹여 카이얀과 밖에 나갔을 때 또 방해가 될까 싶어서였다. 일반인의 청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바깥의 기계음이나 멀리 있는 카이얀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어디 나갔을 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연구소에서 청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투 중에 착용하도록 지급한 게 있었는데, 그걸 착용했을 때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움직이는 데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음… 혹시 모르니까 솜 같은 거라도 챙겨갈까요?”

카이얀은 구급상자를 뒤져 솜을 꺼냈다. 차라리 귀마개를 하나 살까. 잠깐 그런 생각도 했지만,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귀 괜찮으면 버스나 지하철 타보는 것도 좋을 텐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네, 좋습니다.”

카이얀은 자동차 열쇠를 내려놓았다. 둘은 시내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자전거를 거치대에 매놓은 후, 카이얀은 루크를 이끌고 역으로 내려가 일회용 승차권을 샀다.

“저도 딱히 이런 걸 자주 타진 않아서요. 자, 해봐요. 돈 거기다 넣고.”

카이얀과 집에서 영화를 보며 이것저것 본 게 있었기 때문에, 루크는 크게 허둥대지 않고 일회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지폐가 조금 구겨져 있어서 투입구에 제대로 못 넣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루크는 아주 쉽게 해냈다. 카이얀이 몇 번이나 생각했던 거지만, 루크는 기계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다. 낯선 것도 자기 몸을 움직이듯 쉽게 다룰 줄 알았다.

“이번엔 동전.”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보자’는 게 목표인 카이얀은 미리 챙긴 동전까지 루크 손에 쥐여 주었다. 먼저 뽑은 승차권은 카이얀에게 주고, 루크는 하나하나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잘했습니다. 그럼 탈까요?”

막 돌아서는데, 루크가 카이얀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서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루크는 카이얀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루크는 이런 비유가 싫었지만, 전장에서 표적을 놓친 적 없던 것처럼 카이얀을 놓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루크의 생각을 모르는 카이얀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담백하게 대답했다.

“네.”

사람들이 조금 흘끔거렸지만 카이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사진이라도 찍힐까 싶어 모자까지 눌러 쓰고 왔다. 연예인이 아니니 큰소리만 내지 않으면 주목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카이얀은 상행선을 골랐다. 그는 사실 조금 전부터 목적지를 정해 둔 상태였다. 루크야 이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를 테니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함께 움직이기만 하면 이 사람도 어딜 가든 싫어하진 않겠지. 루크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카이얀은 인파를 따라 플랫폼까지 내려갔다. 누가 툭 카이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을 때, 루크는 그의 곁에 더 바짝 붙었다. 카이얀은 계단이라 그렇게 딱 붙으면 걷기 불편하다고 얘기해 줄까 하다 그만두었다.

“여기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때 영화에서 봤죠?”

집에서 함께 영화 보며 지낸 시간이 많아 루크는 쉽게 이해했다. 그러나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른 일이어서, 루크의 시선은 지하철이 들어올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는 괜찮을까. 카이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 도어가 있어 소음이 심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버스나 승용차 소리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꽤 시끄러웠다. 카이얀이 얼른 두 손을 들어 제 두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루크 씨, 이렇게 해요.”

“네?”

루크는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쟁을 실제로 겪어 본 적 없는 카이얀은, 이게 군인에게 낯선 동작인지 익숙한 동작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카이얀은 두 귀에 가볍게 얹은 손을 그대로 둔 채 재차 말했다.

“이렇게 하라고요.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귀…….”

빠앙-.

지하철 경적 소리가 울렸다. 그때 루크가 재빨리 팔을 뻗어 손을 카이얀의 손 위에 겹쳤다. 루크가 카이얀의 귀를 다시 덮어 준 모양새였다. 카이얀은 당황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지하철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손등 위를 덮은 루크의 손바닥이 따뜻했다. 모든 소음이 훌쩍 뒤로 물러난 듯 멀어졌다. 루크는 카이얀의 귀를 단단히 덮은 채 진지한 얼굴로 카이얀을 살피고 있었다.

“귀가 아프십니까?”

지하철이 완전히 멈춘 후에 루크가 얼굴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카이얀은 고개부터 저었다. 그러면서 제 손을 귀에서 떼어 냈는데, 자연 루크의 손도 떨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루크 씨 귀 막으란 얘기였습니다. 나 말고요.”

“아.”

루크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서, 카이얀은 일단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이 출발하기 전, 루크가 말했다.

“전 로스터드 씨 귀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혹시 소리 때문에 아픈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네. 뭐…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루크 씨는 괜찮아요? 이제 이 정도는 별문제 없나?”

“네.”

간략한 대답이라 카이얀은 그러려니 고개만 끄덕였다. 남이 보기엔 꽤 이상한 모습이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카이얀은 루크가 사람들에게 떠밀리지 않도록 자기 옆으로 잡아당겼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첫 번째 역을 지났을 때 루크가 물었다. 루크에게 노선도 보는 법을 알려 줄까 생각하고 있던 카이얀이 손을 뻗어 노선도 한 곳을 짚었다.

“여기요.”

“동물원 말씀이십니까?”

“네. 혹시 가 본 적 있습니까?”

루크는 없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없겠지.

카이얀은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다고 루크의 사라진 유년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동물원 한 번 정도는 가 봐야 한다. 막상 가면 다리만 아프고 크게 볼 것도 없지만, 카이얀은 어릴 때 부모님과 동물원 가는 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물 보는 것 자체보다는 그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사자나 코끼리나, 기린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있는 곳입니다. 운 좋으면 말을 탈 수도 있을 거고. 말 탈 줄 알아요?”

루크는 얼른 동화책 속에서 왕자가 타고 온 그 하얀 짐승을 떠올렸다.

“탈 줄 모릅니다. 로스터드 씨는 타 본 적 있으십니까?”

“어릴 때 몇 번? 루크 씨는 운동신경이 좋으니까 탈 수 있을 겁니다.”

설명하는 것보단 가서 보는 게 더 빠르겠지 싶어 카이얀은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대신 루크에게 노선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색깔로 노선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나, 표시된 곳에서 환승할 수 있다는 것. 루크는 진지하게 들었다.

그 진지한 얼굴을 보다가 카이얀은 잠시 가슴이 묵직해졌다. 이 노선도가 루크에게도 쓸모 있는 날이 왔으면. 언젠가,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싶었다.

* * *

평일 낮이라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후가 될수록 사람이 몰리겠지만, 그래도 루크는 꽤 수월하게 매표소 앞에 설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연구소 소속이 아닌 민간인과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민간인은 카이얀이었는데,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말을 섞으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매표소 직원은 사무적인 어조로 인원수를 묻고 표를 내주었다. 카이얀이 쥐어 준 카드로 계산을 마치자, 저쪽에서 루크를 보고 있던 카이얀이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잘하네요. 다음에도 할 수 있겠습니까?”

“네.”

루크는 꽤 자신 있게 대답했다. 카이얀은 픽 웃었다. 자라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어릴 땐 혼자 무언가를 사는 일도 왠지 모험처럼 느껴지곤 했다. 루크도 그런 기분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함께 다시 와야지. 카이얀은 그렇게 다짐하며 동물원 안으로 들어갔다.

공원처럼 꾸민 곳이라, 하늘 언저리까지 나무들이 솟아 있는 게 보였다. 높이 쳐든 가지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걸을 때마다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음악 같았다.

늘어선 가로수 사이를 걸으며, 루크는 카이얀을 감상했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카이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잘 정돈된 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루크는 카이얀 옆에 붙어 걸었다. 카이얀은 그에게 떨어져 걸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길 양 옆은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오른쪽으로, 평화로이 엎드린 언덕 너머 호수가 보였다. 먼 수면에서 빛이 반짝였다. 햇빛이었다. 카이얀이 흘끗 그쪽을 보고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물별이네요.”

“호수 말입니까?”

“아니, 햇빛이요. 물 위에서 저렇게 빛나는 건 물별이라고 부릅니다.”

물별. 물에도 별이 뜨나. 아니면 그냥 그렇게 보여서? 루크는 잠시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부르겠지.

루크는 다시 시선을 돌려 카이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로도 하얗게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루크는 궁금했다. 그럼 이건 뭐라고 부를까. 별처럼 빛나진 않지만, 카이얀은 찬란했다. 그는 루크가 바라보고 만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별이었다.

그렇다면 가질 수도 있을까.

루크가 그 생각을 더 이어가기 전에, 카이얀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이 문 지나면 동물원으로 들어갑니다. 혹시 동물 소리 같은 거 들려요?”

루크는 안 들린다고 대답했다. 카이얀은 조금 안심했다. 확실히 청력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맹수관부터 찾았다. 파충류도 좋지만, 큰 동물을 먼저 보여 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루크는 확실히 맹수에 흥미를 보였다. 호랑이가 느긋하게 움직일 때마다, 목에서 꼬리까지 이어지는 곡선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네 다리의 근육이 만져질 듯 선명하게 움직였다. 루크는 사자의 암수는 갈기로 구분 가능하지만 호랑이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즐겁게 동물을 구경했다.

그러다 루크는 늑대 우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늑대는 철창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웅크린 채 조는 모습을 보다가 카이얀은 습관처럼 안내판을 쓱 훑었다. 곧 그가 픽 웃었다.

“루크.”

움직이지 않는 짐승을 유심히 보던 루크가 휙 카이얀을 돌아보았다. 카이얀이 이런 식으로 부른 건 처음이라 좀 낯설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루크를 보고 있지 않았다.

“루크.”

카이얀이 철창 너머를 보며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늑대는 당연히 카이얀에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흘끗 그에게 시선을 던지고 귀를 한 번 쫑긋했다.

“이름이 루크라네요.”

카이얀이 웃으며 안내판을 툭 쳤다. 리탄 토종 늑대, 4세, 수컷, 루크. 루크는 잠깐 카이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물한테도 이름을 붙이거든요. 저 늑대 이름이 루크인 거죠. 동물 이름으로 루크가 흔하던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카이얀은 이 우연이 꽤 재밌는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고개를 돌려 루크를 보았다.

닮았나? 별로 닮진 않았다. 표범 같은 건 절대 아니고, 늑대라기보다는 개 아닌가. 늑대와 개는 형제라니 그게 그 말인가?

카이얀은 즐겁게 이것저것 루크 얼굴 옆에 나란히 놓아 보았다.

“루크. 이렇게 부르니까 느낌이 다르네요. 루크… 확실히 좀.”

개 이름 같기도 하고. 카이얀은 그 말을 삼켰다. 이런 말 때문에 루크의 기분이 상할 것 같진 않지만, 문득 누가 루크의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누가 지었든 애정을 담아 짓진 않았을 것이다. 사랑과 축복을 담아 부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로스터드.”

곧 루크가 고개를 갸웃하며 카이얀을 불렀다. 카이얀이 제 이름에서 호칭을 떼고 부르며 즐거워하니, 저도 해 보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기분이 그 덕에 풀어졌다. 카이얀은 픽 웃었다.

“내 이름은 로스터드가 아닙니다.”

“카이얀?”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루크는 아주 정확하게 발음했다. 이름이야 처음 만난 날 얘기해 줬지만, 루크는 꼬박꼬박 각하니 귀하니 하다가 결국 로스터드 씨라고 불렀다. 이름을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좀 낯설었다.

“카이얀.”

루크도 좀 낯선 듯 다시 발음했다. 카이얀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르면 안 되는 이름 같은 건 아니다. 당연히 불러도 된다. 친구들도 다 부르고, 심지어 예전 학회에서 만났던 친분 적은 기자조차 제 이름을 불렀고. 그런데 루크가 그렇게 부르니 기분이 묘했다.

“부르면 안 되는 겁니까?”

“아…….”

그래도 예전 같으면 부르기 전에 물어봤을 것이다. 카이얀은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루크는 자기를 꽉 묶고 있던 여러 지침들에서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아뇨, 됩니다.”

“네, 카이얀.”

빠르기도 하지. 단번에 경칭도 떼고 이름이야?

카이얀은 픽 웃었다. 어차피 로스터드는 진짜 성도 아니니 이름으로 불리는 편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철창 너머에서 늑대가 이를 다 드러내며 하품을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앞발 위에 내려놓았다. 아예 잘 준비를 하는 모양새였다. 카이얀은 네 발 달린 루크를 거기 내버려 두고 옆의 루크를 이끌었다. 파충류관에 가서 뱀이라도 목에 감아 줘 볼 생각이었다.

* * *

“피곤하지 않아요?”

돌아오는 지하철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카이얀은 손잡이를 잡고 선 루크에게 넌지시 물었다.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카이얀은 피곤합니까?”

“좀 그러네요.”

카이얀은 확실히 지쳐 있었다. 루크에게 이것저것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무작정 돌아다녔더니 서 있는데도 잠이 쏟아질 정도였다.

파충류관에서, 루크는 뱀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목에 걸었다. 둘러 준 사육사가 신기해할 정도로, 루크는 태연했다. 하지만 카이얀이 자기도 감아 보겠다고 했을 때 루크는 꼭 그렇게 하고 싶으냐고 물었고, 카이얀이 뱀을 목에 감고 있는 내내 조마조마한 얼굴로 서성였다. 사진사가 돈을 받고 두 사람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줬다. 루크가 갖고 싶어 하는 눈치라 카이얀은 두 장을 다 그에게 주었다.

해양관에서 루크는 작은 열대어보다는 상어나 고래에 더 관심을 보였다. 자기 상상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건 누구에게나 신비로운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거의 넋을 놓은 루크를 바라보며, 그가 조련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잠깐 상상해 보기도 했다.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진 않았다.

대강 관람을 끝내고 나왔을 때 카이얀은 정말 녹초가 된 것 같았지만, 루크가 생각 이상으로 즐거워해서 깜짝 놀랐다. 그에겐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카이얀은 내일은 어딜 가야 할까 고민했다.

“저 때문에 무리하신 건 아닙니까?”

루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카이얀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내일은 뭐 하고 싶어요? 생각나는 거 있습니까?”

“네.”

“오. 뭔데요?”

루크의 대답이 너무 망설임 없이 나와서 카이얀은 약간 놀랐다. 루크는 거의 사이를 두지 않고 대답했다.

“운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 운전.”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준다곤 했지만 법적 절차를 생각하면 쉬운 일도 아닌 게, 일단 루크는 면허를 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단속이 심하지 않으니 간단한 조작법 정도는 가르쳐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배워서, 다음번엔 앉아서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난 그냥 서서 와도 되는데요.”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카이얀은 픽 웃었다.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허약하진 않다고요.”

그렇게 대답해 주고 그래도 운전은 가르쳐주겠다고 덧붙였다. 루크가 보기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허약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도 루크는 그다지 피로한 기색이 아니었다. 약을 끊은 지 꽤 오래 됐는데… 괜찮은 걸까. 카이얀은 갑자기 치미는 걱정을 잠시 눌러두었다.

집에 와서 간단히 밥을 먹었다. 밖에서 사먹어도 괜찮았겠지만, 길에서 파는 음식을 먹이고 싶진 않았다.

“저… 카이얀.”

저녁을 먹다 말고 루크가 카이얀을 불렀다. 카이얀은 방울토마토를 쿡 찍으며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새삼스럽게 뭘.”

“그래도, 데려가 주셔서 기뻤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카이얀은 약간 당혹해서 루크를 보았다. 카이얀은 사람과 이렇게 감정적인 얘길 할 기회가 드물었다. 친구들과는 굳이 인사 같은 걸 챙기지 않는 사이였고. 그래서 루크가 이 정도로 진지하게 고맙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카이얀은 어쩐지 조금 쑥스러웠다.

“네. 루크 씨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동물원 갔네요. 혼자 가긴 좀 뭐해서.”

루크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동물원에 갈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니, 혹시 모른다. 언젠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겼다면……. 그런 평범한 미래가 제 앞에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같이 사니까 확실히.”

거기까지만 말하고 카이얀은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그 이상 말해 주진 않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루크는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짐작’이란 것도 카이얀이 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네, 뭐.”

그렇게 대답하고, 카이얀은 샐러드 접시에 시선을 고정했다. 좀 낯설고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 * *

루크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엑셀이나 브레이크 같은 개념도 알고 있었고, 깜빡이나 비상등의 개념도 아주 쉽게 이해했다. 자전거를 단숨에 탈 때부터 알아봤지만 기계를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게 분명했다.

괜히 이리저리 부딪쳐서 경찰이라도 올까 봐 일부러 넓은 공터까지 차를 끌고 갔던 카이얀은 루크가 너무 금방 운전을 익히자 오히려 좀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이젠 뭐 더 가르쳐 줄 게 없는데요? 시험 삼아 집까지 천천히 가 볼까요?”

근데 경찰은 조심해야 됩니다. 카이얀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때 루크는 놀란 얼굴로 카이얀을 돌아보았다.

“지금… 갑니까?”

“아.”

카이얀은 멈칫했다.

“다시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모르겠는 거 있어요? 잘 하는데요. 어차피 신호는 공부해야 하는데 지금 도로로 나가기도 좀 그러니까.”

루크는 뭐라고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이러나 싶어 카이얀은 그냥 그를 보기만 했다. 루크는 말을 고르느라 한참 사이를 두었다.

“다른 곳에 갈 줄 알았습니다.”

카이얀은 잠깐 멍해졌다가 그냥 픽 웃었다. 아무래도 운전해서 어딜 데려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면허증이 없질 않은가. 신호야 가르치면 또 금방 익힐 것 같지만 면허증이 없는 건 어찌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카이얀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루크는 약간 불안한 눈으로 보닛 앞으로 빙 돌아 운전석 쪽으로 오는 카이얀을 바라볼 뿐이었다. 카이얀은 운전석 문을 열고 루크에게 내리라고 손짓했다.

“옆에 타요.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습니까?”

어딜 가고 싶다면 가면 되지. 누가 운전하느냐가 뭐 그렇게 중요한가. 카이얀은 그런 생각이었지만, 루크는 운전석 밖에 서서 주춤거리고만 있었다.

“제가 모셔다 드리고 싶습니다.”

“면허증이 없어서 안 됩니다. 시간 그렇게 늦지 않았으니까 뭐… 외식이라도 할까요?”

카이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더 이상 우겨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루크는 잠자코 조수석에 앉았다. 카이얀이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출발했다. 루크는 잠시 그 옆얼굴을 응시하다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카이얀은 카이얀대로 메뉴를 생각해 내느라 마음이 바빴다. 너무 기름진 건 안 먹이고 싶은데, 그래도 이쯤 되면 좀 자극적인 음식을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신호에 걸렸다. 카이얀은 아무 생각 없이 흘끗 루크를 봤다가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요?”

“네?”

“아니, 표정이 뭔가… 되게 그런데요?”

루크가 찡그리고 있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카이얀은 그가 조금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루크의 답을 기다리는데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카이얀은 일단 엑셀을 밟았다. 가까운 상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건가 싶어서 음식점을 고를 마음의 여유가 나질 않았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

“아닙니다. 전 단지…….”

루크는 제 마음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루크는 단어를 고르지 못해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조용한 지하 주차장, 다행히 카이얀은 가만히 그런 루크를 기다려 주었다. 루크는 겨우 말을 시작했다.

“제가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뭘요?”

“운전…….”

“아.”

카이얀은 좀 당혹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루크는 그간 운전한다는 것에 조금 집착해 온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만나서 차에 태웠을 때도, 운전 배워서 자기가 모시겠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아쉬워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카이얀은 고개를 갸웃하고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운전이야 누가 하든 뭐 어떻습니까. 그냥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면 되지.”

“제가 카이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카이얀은 말문이 막혔다. 참 이상한 데 집착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루크는 조금 불안한 듯, 그러나 열망에 찬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었다.

“카이얀은 항상 저한테 많은 것을 해 주는데, 저는… 아직 민간인들이 사는 곳에 대해서 잘 모르고, 어떻게 해야 카이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도 잘 몰라서… 뭔가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건 거의 고백 수준이네.

카이얀은 난처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되짚어 보면 자기가 아팠을 때도 루크는 이랬던 것 같다. 도움이 된 걸까 못 된 걸까 살피고, 자기가 맞게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지. 카이얀은 진작 그를 안심시켜 주지 못한 게 좀 미안해졌다.

“루크 씨는 아직 여기에 대해 잘 모르니까, 제가 챙기는 겁니다. 루크 씨가 딱히 뭐가 부족하거나 잘못하고 있어서가 아니고요.”

루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운전석에 등을 기댔다. 고개만 돌려 루크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루크 씨는 저한테 도움이 됩니다.”

루크는 못미더운 표정이었다.

이젠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네.

카이얀은 즐거웠다. 이 사람이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겁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만드는구나 생각한다.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걸 봤지만 그건 너무 어릴 때였고, 혼자 사는 데 익숙해지면서는 대체 왜 생판 남과 함께 사는 수고를 감수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루크를 만나면서 카이얀도 변했다. 루크가 웃고, 기뻐하고, 미안해하고, 아파하는 걸 보면서. 그를 보며 이래서 함께 사는 거구나 싶었다. 지금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순간을 위해 함께 사는 거구나.

“기억 안 납니까? 저 넘어졌을 때, 루크 씨가 약도 발라 줬는데.”

“그건.”

“아플 때 먹을 것도 챙겨 주고, 동물원도 같이 가 주고.”

“그건 다, 별거 아닌 일이었습니다.”

카이얀은 어깨를 으쓱했다. 루크는 답답하게 굴고 있었지만, 카이얀은 이 상황을 꽤 즐기고 있었다. 자기에게 뭐든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기분이 나쁘겠는가.

“내가 루크 씨한테 해 준 건 뭐 별 대단한 거였습니까?”

“네?”

“요리해서 먹이고, 아플 때 간호해 주고, 같이 살고, 이게 다인데요? 루크 씨도 다 나한테 해 줬던 건데?”

루크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카이얀이 해 준 건 분명 대단했다. 자기가 카이얀에게 해 주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는 루크에게 방을 내주었고, 아플 때 품에 안고 진정시켜 주었다.

당신은 통제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려 주었다. 귀찮은 기색 없이 부탁을 들어주고, 선물도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다. 루크는 카이얀의 집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그 캡슐 속에서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로.

“그건… 그거랑은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요?”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어쨌든 다릅니다.”

루크는 우겼다. 카이얀은 그냥 웃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냥 루크 씨가 나한테 더 해 주고 싶은 겁니다. 더 못해 줘서 아쉬운 거고. 하지만 루크 씨는 지금도 충분히 내게 도움이 됩니다.”

루크는 카이얀의 말에 좀 놀란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그쯤에서 대화를 정리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쉬웠다.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다면 저 사람에게 시간을 들여서 알려 주었을 텐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주고받고 하면서도 그걸 모른다. 덜 주는 것 같고, 너무 많이 받는 것 같다. 상대방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주는 게 없는 것 같아 전전긍긍하게 된다.

카이얀은 차에서 내리면서 루크 모르게 웃었다. 첫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네, 별일 아닌 듯 그렇게 생각했다.

* * *

저녁 산책 도중에 갑자기 비가 왔다. 두 사람은 비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카이얀은 젖은 신발을 벗어 버리고, 혹시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싶어 루크부터 욕실로 밀어 넣었다. 물론 루크가 감기 같은 것에 걸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곧 연구소로 가야 하는데 그 전에 몸에 무리를 주고 싶진 않았다.

카이얀은 수건으로 대강 몸을 닦고 루크가 나오길 기다렸다.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샤워기는 이렇게 쓰는 거고, 샴푸는 이걸 쓰면 되고, 수건은 여기에 있고… 이런 걸 가르쳐 준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잠시 앉아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가 나왔다. 늘 머리를 대강 말리는 편이라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잔소리하는 것도 우습다 싶어 카이얀은 가서 쉬라고 말하고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루크는 가만히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카이얀과 좀 다른 생각을 했다.

귀가 전처럼 들리지 않게 된 것이 아쉽다. 예전에는 소리만 들어도 카이얀이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어떤 물건을 움직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세세한 움직임을 잡을 수가 없다. 약을 끊으면서 고질적인 발작은 거짓말처럼 없어졌지만 욕심이란 참 끝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오면 키스해도 될까.

루크는 좀 멍한 기분으로, 욕실 밖에 서서 그렇게 생각했다.

카이얀은 거의 잊고 있지만 루크는 여전히 카이얀에게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카이얀이 아니라고 공들여 설명해 주긴 했지만 ‘끔찍하다’는 말의 영향은 알게 모르게 루크에게 영향을 미쳤고, 두 번 다시 카이얀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기 싫은 루크는 알아서 행동을 조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를 달래고 다그쳐 봐도 소용없었다. 자의로 성욕을 소멸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 루크 씨.”

욕실에서 나온 카이얀은 여전히 거기 서 있는 루크를 보고 약간 놀랐다. 이제 이 정도 일에는 일일이 사과하지 않게 된 루크는 그냥 카이얀을 보기만 했다.

“방에 갔을 줄 알았는데 안 갔네요. 뭐 할 말 있어요? 계속 서서 기다렸습니까?”

“네.”

“내 연구실이나 침실로 가 있지. 무슨 일인데요?”

그러면서 카이얀이 가볍게 루크를 스쳐 지나갔다. 같은 바디 제품을 쓰다 보니, 카이얀의 몸에서는 제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가 났다. 한 집에서 계속 살다 보니 두 사람의 체향은 점차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꼭 바디 제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득 루크는 궁금했다. 이 사람도 그걸 알까.

“카이얀.”

침실까지 따라 들어간 루크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카이얀은 침대를 정리하며 얘기하라고 대답했다.

“오늘 혹시 괜찮으시면, 여기서 자고 싶습니다. 괜찮은지 여쭤 보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아.”

카이얀은 약간 당황해서 루크를 보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루크는, 조금 초조한 얼굴로 자길 보고 있었다. 거기다 거절의 말을 내기도 어려워서 카이얀은 그냥 그러라고 했다. 어제도 침실에서 같이 자고 싶다고 했는데…….

아까 욕실 거울로 본 것이 생각나 흔쾌한 척 수락해 놓고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미 그러라고 했으니 카이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불을 들어 주었다.

“난 지금 가서 책 가져올 거거든요. 루크 씨 먼저 누워 있어도 됩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어, 서재로 갈 건데요.”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있겠습니다.”

루크는 조금 긴장한 채 조심스레 대답했다. 카이얀은 한 번도 자길 서재에 들인 적이 없다. 연구실에는 자주 들어가 봤고 거기서 혼자 영화 본 적도 있지만, 서재에는 들어갈 일이 없었고 카이얀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거긴 뭔가 카이얀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공간 같았다.

“어…….”

카이얀은 머뭇거렸다. 루크는 그가 거절의 말을 찾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얀은 자기 바운더리가 확실하다. 루크도 그걸 알았다. 자기가 싫어서 들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도 들이질 않으려는 것이다.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걸 알고 있었는데도 아쉬웠다. 뭐 때문에 아쉬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자도 괜찮다고 해 줬으니 여기서까지 고집을 부릴 순 없을 것 같았다. 루크가 내키지 않으시면 그냥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럼 뭐, 올라올래요? 딱히 별 대단한 건 없는데. 어차피 잠깐 들어갔다 나올 거고.”

대답해 놓고 카이얀은 먼저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연 채로 루크가 나오길 기다렸다. 루크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허락에 깜짝 놀라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기회를 놓칠 새라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들어와 보고 싶었습니까?”

카이얀이 계단을 올라가며 물었다. 루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조금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얘길 하죠.”

웃음기 섞인 목소리. 그 다감한 목소리에 힘을 얻어 루크는 앞서가는 카이얀의 등에 대고 조심스레 속을 털어놓았다.

“아무도 안 들여보내 주시는 것 같아서, 부탁드리면 실례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그럼 오늘은 그냥 실례하기로 한 거예요?”

“아, 그런…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카이얀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루크를 실컷 놀리며 서재까지 올라갔다. 아무도 안 들여보내 주는 곳이긴 하지만,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해 온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대단한 곳은 아니었다.

“나 진짜 책만 골라서 나갈 겁니다. 좀 둘러봐요.”

마음껏 돌아다니며 둘러봐도 된다는 뜻이었는데, 루크는 카이얀 뒤에 붙어 졸졸 따라다녔다. 카이얀은 이게 뭔가 싶어 좀 웃음이 났지만 꾹 참았다. 사실 루크는 서재가 궁금하다기보다는 그냥 자기와 같이 움직이고 싶었던 것뿐이리라.

카이얀은 어느 책장 앞에서 책을 골랐다. 그는 두 권의 책을 뽑아들더니 루크에게 그걸 보여 주었다.

“어떤 게 좋아요?”

그때 루크는 카이얀을 보고 있었다. 카이얀은 책을 양손에 한 권씩 들고 있었는데, 그의 질문을 듣고 루크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선택지에 카이얀이 포함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얀이 좋습니다.”

“…….”

카이얀은 대답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뭐라는 거야? <나이팅게일과 장미>랑 <잭과 콩나무> 중에서 뭐가 더 좋으냐고 물었더니 왜 내가 좋다는 소리가 나와?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빤히 보자 루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제 말은, 책도 좋지만, 셋 중에 고르라면…….”

“어… 아니, 그냥 이 책 두 권 중에 뭐가 더 좋으냐고 물어본 겁니다.”

일상회화에서 여전히 이런 문제가 발생하다니. 카이얀은 그냥 <잭과 콩나무>를 골라 침실로 내려갔다. 루크는 여전히 당황한 채로 그를 쫓아왔다. 실컷 놀려 줄까 하다가 카이얀은 루크를 너무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만두었다.

“자, 누워 봐요.”

카이얀은 루크를 눕히고 취침등을 켰다. 그리고 누운 루크 옆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곧 잘 거니까, 책을 읽어 줄 겁니다. 그냥 들으면 돼요.”

카이얀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유치한 짓이라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루크에게 이런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그가 유년에 갖지 못했던 것들을.

물론 루크는 곧 자야 한다는 것과 책을 읽어 주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몰랐다. 카이얀은 원래 종종 이렇게 하는 거라고 말해 주곤 책을 펼쳤다.

“옛날, 어느 시골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잭이었습니다.”

카이얀은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처음 소를 팔아야겠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듯 목소리를 바꿔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는 정말 민망했다. 카이얀은 루크의 반응을 살피며 평이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었다.

“꼬마야, 이 콩은 요술 콩이란다. 이 콩이 너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거야.”

루크는 이불을 덮고 누운 채, 옆에 앉은 카이얀의 목소리를 들었다. 취침등을 켜둔 상태라 그의 옆얼굴에 엷은 빛이 어려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카이얀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니, 그저 카이얀의 소리가 들렸다. 그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가끔 숨을 들이쉬는 소리, 이따금 몸을 움직이는 소리…….

“잭은 콩나무 줄기를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콩나무 줄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 것처럼 길었습니다.”

루크는 카이얀을 계속 바라보았다. 제 소리에 카이얀의 소리가 묻힐까 싶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카이얀이 루크를 돌아보며 살짝 웃음을 보였다. 그저 평소와 같은 웃음이었는데,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취해 있다가 그 웃음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잭은 마침내 콩나무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카이얀이 시선을 책장에 둔 채, 손을 뻗어 가볍게 루크의 머리 위에 얹었다. 아이를 대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루크는 순간 그 손목을 잡아채 잘근잘근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린 강아지처럼 잇몸이 간질거렸다.

“마침내 잭과 어머니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카이얀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 책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루크가 졸음이 싹 달아난 얼굴로 자길 보고 있는 걸 알고 잠시 웃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괜찮습니다. 카이얀 목소리가 좋아서, 피곤하지 않습니다.”

카이얀은 그냥 웃고 대답을 피했다. 놀리면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면서, 이런 말을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어릴 때 부모님이 가끔 책을 읽어 줬습니다. 그럼 그걸 듣다가 잠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다른 걸 더 읽어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그랬죠.”

루크가 그런 걸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냥 문득 읽어 주고 싶었다. 물론 루크는 머리맡에서 책 읽어 주던 부모가 없었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진 않겠지만, 그런 루크를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그게 아니니까.

“나중에, 저도 읽어 드리겠습니다.”

루크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카이얀의 손등 위에 겹쳤다.

“와, 좋네요. 나한테 책 읽어 주고 싶어요?”

취침등 꺼야지, 하고 일어난 카이얀이 별생각 없이 물었다. 막 스위치에 손을 올리는데 루크의 대답이 들렸다.

“네. 좋아하는 사람에게 해 주는 일 아닙니까?”

탁, 스위치 꺼지는 소리가 났다. 카이얀은 조금 당혹해서 바로 뒤돌아서지 못하고 제자리에 선 채 머뭇거렸다. 저 ‘좋아한다’는 말이 어쩐지 묵직한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아니면 아까 발견한…….

“나중에 읽어 주면 좋죠. 이만 잡시다.”

그 화제를 간단히 정리한 후 카이얀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당연히 루크는 진정이 되질 않았다. 카이얀은 정말 피곤했던 건지 금방 잠들었다. 카이얀은 꽤 예민한 편이지만 잘 때는 그렇지도 않아서, 누가 흔들어 깨우지 않는 한 중간에 잠에서 깨는 경우는 드물었다. 숨이 깊고 안정적이라 루크는 처음 카이얀과 한 침대를 쓴 날 바로 그걸 파악했다.

만지고 싶다.

닿고 싶고, 깨물고 싶다.

왜 이렇게 이가 간지러운 것 같지?

루크는 끙끙거리며 참으려고 애를 썼다. 카이얀은 잠든 것 같은데 자기는 쉽게 쉴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이불 밑에서 손을 뻗어 카이얀의 손 위에 겹쳤다. 바르게 누워 있던 카이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루크는 점차 숨이 가빠오고 판단력이 떨어지며 목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카이얀과 닿은 부분만 제 신체인 것 같고 나머지는 그저 부속품인 것 같았다. 귀에서 계속 윙윙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이런 것도 아닌데 루크는 처음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탁, 별일 아니라는 듯 제 머리에 올라오던 카이얀의 손.

루크는 카이얀의 손을 쥐었다가, 곧 천천히 제 입가로 가져왔다. 이젠 귀에서 이명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디까지 괜찮을까. 이 사람이 깨진 않을까. 그런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충동은 이런저런 걱정을 단숨에 제압하고 더 길길이 날뛰었다.

더 만져. 더 물어봐. 어차피 깨지 않아. 이미 알잖아. 더 안쪽에, 드러난 팔에, 목덜미에, 가볍게…….

쪽,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루크의 입술이 카이얀의 손목에 닿았다 떨어졌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상체를 반쯤 일으킨 루크는 카이얀의 드러난 손목과 팔오금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어쩐지 열이 몰려 있는 듯한 팔오금을 잘근 깨물었다.

카이얀이 가볍게 뒤척였다. 루크는 잠시 긴장했지만 그뿐이었다. 카이얀이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자, 루크는 이제 드러난 목덜미를 노렸다. 여전히 이는 간지러웠다. 아니, 그냥 온몸이 다 간질거렸다. 몸 안쪽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루크는 카이얀의 목 뒤에 살짝 입술을 대고 있다가, 약하게 그 살을 빨아들였다.

행위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카이얀이 깰 가능성은 전무한 것 같았다. 지난번에도 가볍게 문 적이 있는데 깨지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도 괜찮을 것이다.

아. 루크가 속으로 신음했다.

난 카이얀을 사랑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과 닿고 싶지 않아. 이 사람이, 다시 만져주면 좋겠다. 아까처럼. 사람 많은 곳을 다닐 때처럼, 별일 아닌 듯 내 팔을 쥐었으면 좋겠다.

카이얀과 닿으면, 정말 이상해져…….

루크는 열병을 앓듯 생각했다. 알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카이얀과 한 침대에서 잤을 때부터 이 충동은 끊임없이 루크를 괴롭혔다. 자는 사람에게 이러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지만 루크는 이 감각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몰랐다.

이건 나쁜 일이 아니야. 그저 만지고 싶고 닿고 싶을 뿐인데. 이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들키지 않으면, 내가 카이얀을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들키지만 않으면…….

카이얀이 다시 뒤척였다. 이번엔 루크 쪽으로 돌아누웠다.

루크는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할짝, 조심스레 카이얀의 목덜미를 핥았다.

“루크 씨.”

루크는 얼어붙었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처음 카이얀의 몸에 입을 댔을 때도, 이런 식이었다. 종종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다 환청이었다. 그저 제가 너무 긴장하고 흥분해서 만들어 내는 소리인 듯했다.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자, 루크는 곧 긴 숨을 내쉬며 조심히 손을 뻗었다. 손으로 아주 살짝 카이얀의 팔뚝을 쥐고, 다가가 카이얀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루크라도 혀까지 밀어 넣을 용기는 없었다. 그저 닿았다 잠시 물러서는 입맞춤이었다.

“루크 씨.”

덥석, 뜨거운 손이 루크의 손목을 붙잡았다. 카이얀의 팔에 올려 둔 바로 그쪽 손이었다. 황홀한 기분에 잠겨 있던 루크는 순간 기절할 것처럼 놀라 거의 누운 채 펄쩍 뛰었다. 거리를 벌리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카이얀은 아주 강하게 루크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 루크는 카이얀이 졸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저를 쏘아보는 카이얀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뭐하는 겁니까?”

카이얀은 일어나지도 않고 누운 채 조용히 물었다. 여전히, 루크의 손목을 힘주어 쥔 채였다. 마음만 먹으면 뿌리치는 일은 간단했지만 루크는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달아올랐던 몸이 확 식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휘발되었던 이성이 돌아오자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자각이 되었다.

“루크 씨, 뭐하는 거냐고요.”

“아. 저는, 그게.”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했다. 루크는 카이얀의 표정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완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이번에야말로 미움받게 되면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찔렀다.

곧 카이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쥐고 있던 루크의 손목을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그러고선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이대로 가 버리는 건가 싶어 깜짝 놀란 루크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뒤따르려 했다.

그때 탁, 하고 불이 들어왔다. 루크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린 그 상태로 딱 굳어졌다. 카이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잔뜩 긴장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는데, 카이얀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루크 씨.”

루크는 일단 바르게 서자 싶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 이러다 목으로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루크는 뒷짐 쥔 손을 꽉 움켜쥐며 카이얀의 말만 기다렸다.

“나 봐요.”

물론 카이얀은 어영부영 넘어가 줄 마음이 없었다. 얼굴을 보라고 요구하자 루크는 눈에 띄게 망설였다. 당연하지, 자는 사람한테 그런 짓 해 놓고 뻔뻔스럽기까지 하면 안 되지. 왠지 심사가 뒤틀린 카이얀은 그답지 않게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딱딱한 어조에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든 루크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카이얀은 제 목 뒤를 대강 문지르며 그런 루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쳐다보라고 했더니 차마 고개도 못 돌리고 눈치만 살피며 끙끙대는 모양새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을 텐데, 지금은 하나도 귀엽거나 가엽지 않았다. 카이얀은 봐주지 않기로 했다. 이미 한 번 봐주지 않았나.

“이거, 어제 한 겁니까?”

짧은 소매를 어깨 위까지 걷어, 카이얀이 제 팔뚝을 보여 주었다. 어깨와 가까운 쪽에 깨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루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고 침묵했다. 카이얀은 정말 한 잠도 제대로 안 잔 사람처럼 멀쩡한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제 행위에 너무 집중하느라 카이얀의 상태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았다. 루크는 무수히 자책하며 카이얀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나 똑바로 쳐다보라고요. 이건 어제 문 거고, 손목은 오늘인가?”

카이얀은 냉랭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쳐다보라고 재차 말하자 루크는 또 어물어물 눈을 맞춰 왔다. 확 기가 죽은 얼굴이었다.

아까 샤워를 하다가 이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카이얀이 동정이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피부에 자국이 남은 게 뭔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처음엔 어디 부딪쳤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 입으로만 낼 수 있는 자국이었다.

한 집에 사는 사람, 게다가 한 침대에서 자는 사람은 루크밖에 없으니 이런 짓을 할 사람도 루크뿐이었다. 그래도 선뜻 몰아세우고 싶지 않아서 한 번쯤은 봐주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억지로 달려들지 않고 참은 게 어디야. 루크에 대한 마음은 그만큼이나 자라서 큰 실수를 했어도 한 번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내심으론 불안해서 부러 깨어 있었더니……. 처음 루크가 제 손을 잡았을 때만 해도 카이얀은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자는데 손을 잡다니 참 귀엽네, 좀 억지로라도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루크가 제 손목에 입술을 대고 팔오금까지 올라왔을 때도 그냥 등을 돌리고 눕는 정도로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입술까지 찾아오는 농도 짙은 스킨십까지 계속 묵과할 수는 없었다.

“대답 안 합니까?”

카이얀이 확 인상을 썼다. 루크는 행동을 정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뭐라고 말해야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루크는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카이얀도 대강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카이얀은 거기서 끝내 줄 생각이 없었다.

“육하원칙으로 나한테 뭘 했는지 정확하게 말해 봐요.”

루크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핏기까지 가시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 기다렸다. 살짝 인상을 쓴 채 루크를 응시하는 카이얀의 모습은 근사했지만, 루크는 드물게도 그런 카이얀의 모습에 신경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육하원칙이 뭔지 모릅니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카이얀.”

“내 이름 부르지 마요. 내가 한 게 아니라 루크 씨가 한 거니까.”

겨우 용기를 내서 이름을 불렀는데 돌아온 건 빈정거림이었다. 차라리 잔뜩 화를 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루크는 자기 입으로 이랬고 저랬고 하고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루크는 매달렸다.

“잘못했습니다.”

“지금 내가 그걸 모릅니까? 당연한 소리 하지 마요.”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카이얀은 대꾸하지 않고 한쪽 눈썹만 치켜 올렸다. 더 이상 매달릴 말도 궁해진 루크는 못 믿겠다는 그 시선에 그저 쩔쩔매기만 했다.

카이얀은 여러 사람과 만나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해야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지는 알았다.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자 루크는 결국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밤에…….”

오늘이 아니고 어제부터겠지, 카이얀은 그렇게 쏴붙여 줄까 했으나 더 이상 루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만두었다.

“여, 여기서 그랬습니다. 다치게 하려고 하거나 나쁜 마음이 있었던 건…….”

“뭘 그랬는데요.”

어떻게든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싶은 루크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잘 알고 있었다. 잘 알아서 부러 말을 자르고 몰아붙였다.

“카이얀 팔에…….”

“팔에만?”

“아닙니다. 목에도… 하지만 목은, 어제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변명하던 루크는 고개를 숙이고 네, 죄송합니다, 하고 재차 사과했다. 딱히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카이얀은 그냥 넘어갔다. 카이얀이 계속하라고 고개를 까딱하자, 루크는 정말 차라리 의식을 잃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입으로, 조금 건드렸습니다.”

조금 건드렸다고? 어떻게 이걸 그렇게 표현하지?

카이얀은 비딱한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또 걸고넘어지진 않기로 했다.

“왜 그랬는데요.”

루크는 입을 다물었다. 카이얀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제 스스로 말하게 만들 작정인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좋다고, 그래서 계속 만지고 싶고,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지금 화가 나 있었다. 섣불리 그런 말을 했다가 그의 마음이 더 상할까 두려웠다.

“전 다만, 나쁜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루크는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는 비참함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그 단어에 대해서도 잘 몰랐으므로 자기가 느끼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카이얀 앞에서, 루크는 비참했다. 당신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자기 처지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루크 씨.”

더 다그칠까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둘까 고민하던 카이얀은 마침내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곧장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루크의 시선은 꽤 절박했다.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지. 카이얀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루크의 행동 때문에 즐거웠다곤 말 못 하겠지만, 루크의 생각처럼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것도 아니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루크 씨를 성적인 대상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루크는 대답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성적인 대상. 쉬운 말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때문에 루크는 조금 억울해졌다. 자기도 카이얀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냥 그를 만지고 싶었던 건데……. 결국 같은 얘기인 걸까. 하지만 같은 얘기라면 왜 이렇게 불편하고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지.

“물론 루크 씨는 성욕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해는 하지만, 나한테 이러는 건 그만두면 좋겠네요.”

“네… 죄송합니다.”

“정 참기 어려우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루크는 급히 카이얀의 말을 끊었다. 저 입에서 다시 다른 사람을 불러 준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게 싫었다. 그때 분명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진지한 말로 들리진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랬다 해도, 지금 이 분위기에서 다시 그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루크가 말을 끊자 카이얀도 그 얘길 계속하진 않았다.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사는 건,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하려 해도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내 말 알아들은 거죠?”

“네.”

루크가 지나치게 경직된 것 같아 말을 더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카이얀은 더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잠시 고민하다가 지나치게 긴장한 루크를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난 물 한 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앉아 있든지 해요.”

그 말만 남겨두고 카이얀은 부엌으로 나가 물을 마셨다. 그리고 물티슈를 찾다가 그만두고 대강 손에 물을 묻혀 목 뒤를 문질러 닦았다. 팔에 자국이 남은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며칠 있으면 없어질 테니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루크는 여전히 아까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루크 씨?”

왜 저러고 있나 싶어 부르니, 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화가 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카이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루크는 정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카이얀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얀은 당혹스러웠다. 누가 보면, 제 입술에 루크의 생사가 달리기리도 한 줄 알았으리라.

“제 방으로 올라가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이얀은 잠깐 사이를 두고 대답을 골랐다. 루크의 행동 때문에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겁을 주려던 건 아니었다.

“특별히 화가 난 건 아닙니다. 올라가는 게 편할 것 같다면 그렇게 하고, 여기 있는 게 나을 것 같으면 있어도 좋습니다. 난 루크 씨를 쫓아낸 게 아니니까.”

카이얀은 그렇게 말하고 루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크는 머뭇거리다가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그쯤하면 됐습니다. 여기서 잘 거면, 지금 불 끄겠습니다.”

부러 가벼운 어조로 반복되는 사과를 받아넘기고, 카이얀은 탁 불을 껐다. 루크는 카이얀이 눕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올라갔다.

카이얀은 루크가 잔뜩 숨을 죽이고 있는 걸 느꼈다. 오늘 잠이나 잘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카이얀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무척 피곤했다. 내일이 되면 좀 더 안심하겠지. 시간이 가면 뭐든 더 나아질 것이다. 시간이 많이 남진 않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카이얀은 문득 불안해졌다. 연구소나 전쟁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는 내가 도와줄 수도 없을 텐데.

그 밤, 카이얀은 루크가 군대 내 성추행으로 고소라도 당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다.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카이얀 때문에 루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 * *

카이얀은 머독과 지그문에게 루크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머독과 지그문은 가까운 친구니까, 앞으로 계속 가까이 두게 될 것 같은 루크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 루크에게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만들어 주고 싶기도 했다.

연구소 쪽에서 이렇게 급하게 루크를 데려가려 들지만 않았다면, 카이얀은 오래 시간 끌지 않고 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한 자리에 앉아 루크는 음료수를 마시고 저와 친구들은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면서 시답잖은 얘기를 했겠지.

한 명은 게이에 한 명은 윤락업소 주인, 마냥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아니니 루크에게도 어떤 의지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고.

연구소에서 찾아오겠다고 한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연구원들은 마지막 날 아침에 루크를 데리러 올 테니 사실상 함께할 시간은 하루가 남은 셈이었다.

전날, 루크는 베이커리에서 혼자 빵을 샀다. 카이얀은 루크와 함께 빵을 고르고 그를 계산대 쪽으로 이끌었다. 자기 이외의 사람들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는지라 ‘얼마입니까?’ 하는 말도 힘들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크는 예상보다 침착하게 대처했고, 할인 카드가 있느냐는 질문에 당황하긴 했어도 어색함 없이 계산을 끝마쳤다.

집까지 돌아오며 그 빵을 먹었다. 루크가 한사코 빵에 대해 잘 모른다 말해 대부분 카이얀 취향으로 고른 빵이었다. 루크는 의외로 타르트에 자주 손을 대서 금방 동을 냈다. 부드러운 게 좋은 모양이네. 카이얀은 비슷한 식감의 빵을 몇 개 더 건넸다.

“오늘, 여기서 자도 됩니까?”

역시 지난번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루크는 또 주저했다. 주저하면서도 부탁하는 게 새로워서 카이얀은 내심 즐거웠다. 생색내려는 뜻은 전혀 없지만 루크가 이만큼 변한 건 분명 자기 덕도 있으리라.

“바닥에서 자도 괜찮습니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루크는 서둘러 덧붙였다. 카이얀은 최대한 평이한 어조로 상관없으니 그냥 올라와서 자라고 대답해 주었다.

“내일 말인데요.”

카이얀이 누운 채 말했다.

“네.”

“별 보러 갈까 합니다.”

“네.”

루크는 잠시 뒤척이는가 싶더니 카이얀 쪽으로 돌아누웠다. 카이얀은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 루크의 윤곽이 흐릿했다. 헤어짐이 가까운 탓인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이건 다 꿈이 아니었을까……. 카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만질 뻔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루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속삭임 같았다. 루크가 이렇게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카이얀은 그에게 더욱 귀를 기울였다. 루크는 자기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이것도 홀로그램의 일부였으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카이얀은 말문이 막혔다.

다음 순간 카이얀은 둔통을 느꼈다. 이런 한심한 홀로그램이 어디 있겠는가. 군사 훈련도 아니고, 특별한 경험도 아니다. 그저 누구나 누리는 평범한 삶이었을 뿐이다.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고 그저 집에서 누구나 하는 일들을 했을 뿐인데.

“다시는, 카이얀을 만날 수 없으면…….”

“우린 만날 겁니다.”

카이얀은 루크의 말을 끊었다. 부러 확실하게 단언했다.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듯. 루크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자기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이란은 믿을 수 없다. 중앙 정부의 허가까지 받은 이상 그 연구소는 끝까지 루크를 붙잡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카이얀을 불안하게 했다. 루크가 아무 것도 몰라 두려워한다면, 카이얀은 많은 것을 알아 두려웠다.

그러나 카이얀은 믿었다. 루크는 더 이상 몇 달 전의 그 군인이 아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좋아한다는 것이 뭔지, 기쁘다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되었다.

“만져 봐요.”

카이얀은 루크 쪽으로 돌아누워, 루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이끌어 제 뺨에 올렸다. 루크의 손은 따뜻했다. 카이얀은 루크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친 채, 루크를 보며 말했다.

“내가 홀로그램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는 겁니다.”

루크는 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현실의 전쟁터와 홀로그램 사이에서 얼마나 자주 방황했는가. 전에는 그 둘을 헷갈리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제 임무만 잘 수행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게 진짜 현실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따뜻하죠?”

카이얀이 속삭였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자기를 보고 있었다. 루크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카이얀 쪽으로 더 가까이 당겼다. 카이얀은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꿈도 아니고, 가짜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진짜야. 루크는 되뇌었다. 손을 움직여 카이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목에서 어깨까지, 단단하게 이어지는 곡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카이얀은 주문처럼 계속 말했다. 그의 말에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는 홀린 듯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허상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감각이, 이 모든 감정이, 사려 깊은 눈동자와 세심한 손길이 어떻게 환상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이게 어떻게 신기루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황홀한데…….

문득 루크는 깨달았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루크가 몸을 움직여 카이얀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 카이얀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루크는 말했다.

“좋아합니다.”

루크는 카이얀의 얼굴이 당혹에 젖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둠 덕인지 크게 두렵지 않았다. 말하고 싶다. 전하고 싶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이것만큼은 진실임을, 당신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말한다는 것이 이렇게 가치 있는 일이었던가. 왜 미처 몰랐을까.

“진심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진심을 가르쳤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다.

루크는 카이얀이 보여 준 그 순간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카이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능숙하게, 자기 손을 잡아 빛이 가득한 세계로 인도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카이얀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루크는 문득 깨달았다.

빛나는 것은 카이얀이다.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루크는 물러났다.

재촉하는 말도, 보채는 말도 없었다. 정말 그뿐이라는 듯 루크는 물러섰다. 닿았던 손도 떨어졌다.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안녕히 주무시라고 말했다. 그게 끝이었고 그는 정말 곧 잠들어 버려서, 카이얀은 혼자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뒤척여야 했다.

다음 날, 루크는 태연했다. 그는 특별한 일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듯 굴었다. 카이얀도 애써 평소처럼 행동하려 했지만 쉽지 않아서, 둘은 기묘한 어색함 속에서 오전을 보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카이얀은 정원에 나가 가지치기를 했고 루크는 잔디를 깎았다.

“수영해 본 적 있습니까?”

가지가 대강 다 정리되었을 때 카이얀이 물었다. 루크와 계속 살게 된다면 수영장을 만드는 것도 좋겠지. 그런 생각에 물은 말이었다. 루크는 없다고 대답하며, 카이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요?”

그 노골적인 시선에 당혹한 카이얀은 거의 더듬다시피 했다. 이런 면에서 늘 솔직한 루크는 주저하면서도 대답을 내놓았다.

“저를 안 보시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어…….”

“아침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까?”

카이얀은 말문이 막혔다. 딱히 루크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카이얀은 좀 억울하기도 했다. 어젯밤에 그렇게 진지하게 고백해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저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 대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카이얀은 끙끙댔다.

“딱히 안 보진 않았습니다. 기분 탓이겠죠.”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대답하자 루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러려니 수긍했다. 카이얀은 다시 잔디 깎기에 열중하는 루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나 알까. 성욕과 사랑을 헷갈리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고백한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는 건 알지만, 상대가 루크라서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카이얀은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해가 조금 뉘엿뉘엿 기우는가 싶었을 때, 카이얀은 나갈 준비를 했다.

둘은 먼저 시내로 나가 망원경을 샀다. 아마추어도 조금만 배우면 사용할 수 있다는 굴절망원경이었다. 카이얀은 값을 치르고 간단한 사용법을 배운 뒤 다시 차에 올랐다.

“좀 자도 됩니다. 어차피 내일 새벽에나 들어갈 것 같은데, 미리 자두는 것도 좋죠.”

차 안에서, 카이얀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카이얀 혼자 만드는 것이어서 루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카이얀은 이대로 운전대를 루크에게 맡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기가 잠들어서 이 분위기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카이얀은 기억을 더듬어 차를 몰았다. 양친은 별을 보기 위해 천체관측소로 가지 않았다. 이후 찾아갈 일이 없어 길을 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렴풋이나마 길이 기억났다. 자주 가긴 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아.”

카이얀은 곧 자기가 여전히 길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카이얀이 갑자기 소리를 내자 루크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 사업장 근처네요.”

지그문의 사업장 근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세상을 떠난 지그문 모친의 사업장이었다. 카이얀의 부모님과 그녀는 오랜 친구였다. 카이얀은 평범한 교수였던 제 부모님이 도대체 어떻게 윤락업소 주인과 친구가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지그문도 모른다고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친구 만나러 가실 때 이 길로 가셨습니다. 전 가서 제 친구랑 놀고 그랬죠.”

“친구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별 보러 간다니까요.”

가 봤자 지그문은 없다. 그는 도심에 살고, 그곳은 일종의 분점일 뿐이다. 간단히 설명을 해 주고 카이얀은 운전을 계속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자신이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카이얀은 중간에 한 번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당연히 뒷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는 그저 막연히 장난치며 부모님을 따라다녔는데, 이젠 옆에 동거인을 앉히고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살갑게 구는 건데 그랬다. 나쁜 아들은 아니었고 오히려 모범생에 가까웠지만, 다감한 자식도 아니었던 것 같다. 카이얀은 괜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운전에 집중했다.

날이 점차 어두워졌다. 딱 맞춰 나온 셈이었다. 카이얀은 근처에 잠시 차를 세우고 먹을거리를 샀다. 캠프 도구 같은 건 가져오지 않았으니 조리가 필요 없는 음식만 사야 했다. 뒤따라오는 루크에게 통조림 같은 걸 먹여도 될까 생각하다가, 카이얀은 별다른 의미 없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다음엔 캠핑하러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말을 뱉고 나서 카이얀은 멈칫했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리며 과연 ‘다음’이 있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네, 좋습니다.”

루크는 사이를 두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카이얀은 그 망설임 없는 대답에 놀랐다. 어젯밤에는 불안해하더니, 오늘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불안하다 말하는 루크를 공들여 안심시킨 보람이 있다 싶었다.

카이얀은 봉투를 들고 차로 돌아오며, 지난번에 무슨 영화를 보다가도 나중에 캠핑 가자는 얘길 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자고 해 놓고 못한 일들이 정말 많구나.

입안이 썼다. 시동을 걸고 다시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노스라이드였다. 언뜻 보면 평범한 주택가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노스라이드는 전체가 지그문 소유였다. 키 작은 주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여 있는 걸 보며 카이얀은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자, 차는 여기다 두고 가죠.”

주택가 뒤편에는 경사가 꽤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카이얀은 망원경을 들고 언덕을 올랐다.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 같이 드는 게 낫겠네요. 이게 경통이 길어서.”

결국 두 사람은 사이좋게 경통을 들고 언덕을 올랐다. 말 그대로 다듬어진 언덕이어서 나무 같은 것은 저 멀리에나 솟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카이얀은 평편한 곳을 찾아 망원경을 설치했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경통을 고정시키고, 이슬 덮개를 뺀 후 접안렌즈 쪽에 눈을 대보았다.

글쎄, 잘 보이나? 이럴 줄 알았으면 잘 배워 두는 건데.

카이얀은 그런 아쉬움을 남긴 채 방위각과 고도를 이리저리 조절해 보았다.

“이건 천문대에 있는 망원경이 아니라, 엄청 크게는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음… 달이 나으려나?”

카이얀은 달 쪽으로 경통을 돌렸다. 잘 고정시킨 뒤, 자꾸 헐거워지려고 하는 가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루크에게 접안렌즈에 눈을 대보라고 말해 주었다.

루크는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허리를 숙였다.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는가 싶더니,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는지 와 하고 아이 같은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 거기 좀 얽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크레이터라는 겁니다. 구덩이 같은 거죠.”

가을 날씨는 꽤 쌀쌀했다. 가대를 붙든 손이 좀 얼어가는 것 같았지만 루크가 너무 신기해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루크는 언제나 맨눈으로 보던 그 작은 달을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운 모양이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초점 조절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사실 카이얀이 대강 맞춰 놔서 만질 필요가 없긴 했지만, 루크는 시야가 흐려졌다 또렷해졌다 하는 게 신기한지 계속 그걸 만지작거렸다.

“카이얀도 보십시오. 제가 잡고 있겠습니다.”

루크는 잔뜩 들떠서 허리를 펴고 다가왔다. 카이얀은 이걸로 목성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경통을 돌렸다.

하늘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사실 별에 관심을 가진 건 부모님이었지 카이얀은 아니어서, 별이 보여도 카이얀은 그게 무슨 별인지 몰랐다.

‘그래도 다양한 걸 보여 주는 게 좋을 테니까.’

그래서 카이얀과 루크는 한참을 이리저리 망원경을 돌리며 놀았다. 운 좋게도 목성의 4대 위성과 토성의 고리까지 볼 수 있었다. 전문가용 망원경이 아니라 영화처럼 거대하게 보이진 않았으나, 루크가 충분히 만족했으므로 카이얀도 만족했다.

“이게 북극성입니다.”

카이얀이 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아 보여 주었다. 아주 작은 별이었다. 작게 보이는 것일 뿐이지만, 루크는 보이는 대로 느끼므로 그게 아주 작다고 생각했다.

“거의 동전 크기로 보이죠? 워낙 멀리 있어서 그런 겁니다.”

카이얀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루크는 까마득하게 멀리 있다는 별, 수천 년을 가도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다는 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밝고, 분명하죠. 바다에선 저걸 보고 길을 찾기도 합니다. 변하지 않고.”

루크는 카이얀을 보았다. 밝고 분명한 별, 변하지 않는 별에 대해 말하는 카이얀의 얼굴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밝은 건 카이얀이다. 루크는 넋을 잃은 채 그를 보며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야.

루크가 일어나서 가대를 잡고 있던 카이얀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어둠 속에서, 루크는 웃고 있었다. 이제는 웃는 얼굴이 더 자연스러웠다. 잠시 그 얼굴을 보고 있는데 루크가 말했다.

“손이 시려서, 카이얀도 그럴 것 같았습니다.”

“아, 고마워요.”

루크의 손은 따뜻했다. 원래 손이 뜨거웠던가. 카이얀은 잠깐 그대로 있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다시 루크를 보았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자기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어색해져서, 카이얀은 손을 뺐다.

“어… 먹을 거라도 좀 가져오겠습니다. 배고프지 않아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일단, 가져와야겠습니다.”

카이얀은 당혹한 채로 루크를 거기 두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차로 돌아와 이것저것 먹을 것과 손난로 같은 것을 챙기면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해해 보려 애썼다.

루크 씨가 어제 괜한 말을 해서…….

이유 모를 초조함에 속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카이얀은 애써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자, 이거.”

카이얀은 휴대용 손난로를 가운데 켜놓고, 잠시 경통을 분리시켜 놓았다. 가대가 불안정해 경통이 자꾸 넘어가려 해서였다.

“그러고 보니까 단걸 많이 먹은 적이 없죠?”

카이얀이 쿠키를 뜯어 루크 쪽으로 밀어 주었다. 오랜 시간 약으로 유지해 온 신체가 정상일 것 같진 않아서, 카이얀은 나름대로 루크의 식단에 신경을 기울여 왔다. 이쯤 됐으니 달고 자극적인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맛있습니다.”

루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블 초콜릿 쿠키였는데, 새로운 맛이었다. 카이얀은 즐겁게 루크를 먹이고 식어 버린 햄버거도 내밀었다. 루크는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면서 카이얀에게도 권했다.

“레스토랑에 가 볼 걸 그랬네요. 코스 요리 같은 거.”

“다음에 데려가 주십시오.”

카이얀은 평이한 어조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침묵했다. 그러더니 곧 생경한 것을 물었다.

“연구소에는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아.”

카이얀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연구소에 대해 물어온 건 처음이었다. 루크는 조금 당황했다. 특별한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순전히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질문이라면 그냥 말 안 해도 됩니다.”

“아닙니다. 생각이 나질 않아서… 아마 처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루크가 대답하자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이은 물음은, 처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그럼 부모님도 생각 안 나겠네요.”

“네.”

루크는 문득 카이얀이 부모님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났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돌아가셨다고 했던 것 같다. 루크는 언젠가 카이얀으로부터 부모의 개념에 대해 배웠지만 정말 그뿐이었다.

“혹시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루크 씨가 원한다면, 부모님을 찾아보는 것도…….”

좋았을 거라고, 카이얀은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게 몹시 경솔한 발언일 수도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타인의 개인사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법이다.

카이얀은 더 말하지 않았고 루크도 자기 부모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 아무 감상도 없었으므로. 루크가 궁금한 건 오히려 카이얀의 부모님 쪽이었다.

“카이얀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에 대해서…….”

루크는 말끝을 흐렸다. 물어 놓고도, 자기가 대체 뭘 물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카이얀은 솜씨 좋게 그 말을 받았다.

“돌아가셨습니다. 10년 전에.”

루크는 이럴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몰랐다. 그는 부모에 대해 잘 몰랐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알았다. 카이얀은 그가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말을 이어 나갔다.

“특별히 하기 어려운 얘긴 아닙니다. 듣고 싶어요?”

루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듣고 싶다. 특별히 부모에 대해 궁금하다기보다는, 카이얀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싶었다. 나는 늘 당신을 듣고 싶다. 당신을 보고, 당신을 만지고 싶다.

“부모님은, 아, 이 얘기가 먼저가 아니네요. 난 로스터드라는 성을 쓰지만 원래 성은 아이사트입니다. 로스터드는 그냥 만들어 낸 거예요.”

“아…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음, 부모님이 좀 유명했거든요.”

정확히는 양친의 죽음이, 유명했다.

“두 분은 군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묵직하다.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 이렇게 무거운 일이었던가. 카이얀은 조금 놀랐다. 쉽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버나드 아이사트와 라냐 아이사트는 좋은 부모였다. 카이얀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 준 사람들이었다. 둘은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였음에도 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지금의 카이얀처럼 대단히 유명하진 않았으나 나이를 생각하면 성공적인 인생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인생은 아주 간단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복잡하지도 않았다.

군대 주둔지에서 군인 두 명이 외출을 나왔다. 외국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한참 외국으로의 군대 파견이 잦을 때였다. 둘은 술에 취해 있었고, 인적 드문 길에서 카이얀의 부모와 마주쳤다. 몸이 부딪쳤고, 시비가 붙었다. 총기 소지가 합법인 나라, 상대는 만취한 군인 둘.

그 길에서 두 사람이 쓰러졌다. 소음기가 장착된 총이었다.

“직접 본 건 아니고, 카메라 영상으로 봤습니다.”

그때 카이얀은 거기 없었다. 그는 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릴케의 시집이었다. 그가 부모님의 죽음을 알게 된 건 그 다음 날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시 경찰의 수사권이 돌연 특수 수사대로 넘어갔다. 매스컴은 귀신처럼 이에 주목했다. 그때부터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지만, 열일곱 살의 카이얀은 집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그런 일들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수사권 이전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게 된 건, 밀리엄 장군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였다.

“부모님에게 배운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친이 강사로 있을 때, 교양 수업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이후로 꾸준히 연락하고 있었다고. 카이얀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이얀이 혼자 지키고 있는 집으로 들어와 사과부터 했다. 어린 카이얀은 영문도 모르는 채 그의 사과를 받고 사정 설명을 들었다.

외출을 나와 부모님을 살해한 군인들은 당시 부대 지휘관이던 밀리엄의 관리 아래 있었다. 밀리엄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감시 카메라에 군인들의 얼굴이 찍혔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매스컴이 부모의 죽음에 주목한 상태, 밀리엄 장군은 그들에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수사는 공식적으로 강도에 의한 우발적 살인으로 종결될 거라고 했다. 외국으로의 부대 파견이 잦은 시기였다. 카이얀은 잘 몰랐지만 군인 증가와 추가 파병을 두고 국론이 양분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카이얀은 밀리엄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이해한 건 딱 두 가지였다. 부모님이 군인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추어져야만 한다.

“그 군인들에 대한 처벌은 당연히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비공식적인 처벌이 되겠지만, 아무튼 확실히 할 테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했죠.”

카이얀은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나질 않았다. 생각보다 그 일이 마음에 깊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때는 벌떡 일어나 무어라 고함을 쳤다. 참을 수가 없었다. 부모가 그렇게 비명에 갔는데, 진실을 알았는데, 그런데 그걸 밝힐 수가 없다니.

억울해서 구역질이 났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했던가. 이제 와서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다고 양친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사실을 밝혀야 했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너무 어리고 힘이 없어서 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카이얀은 감시하에 놓였다.

매스컴과의 접촉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보호 명목이었지만 분명한 감시였다. 강도 살인으로 공식 발표가 나자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사건에 달려들었고, 아무 특징 없는 사건이었다면 왜 수사권이 이리저리 옮겨간 거냐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수사팀은 입을 꾹 다물었고 기자들은 좋을 대로 사건을 난도질했다.

카이얀은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힘이 없었다. 카이얀은 침묵했고 방향 없는 원망과 증오만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친척들이 카이얀을 도왔지만, 카이얀은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

밀리엄 장군은 열일곱 살짜리 소년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어린 카이얀은 밀리엄을 비웃고 내킬 때까지 빈정거렸다.

어느 날 찾아온 밀리엄이 검은 카드를 내밀며 국가에서 지급하는 위로금이라고 말했을 때는, 그대로 카드를 들어 그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그도 나름대로 윗선의 압박을 받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대강 정리되자, 루크가 사과했다. 그는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묻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카이얀은 이 신선한 반응에 픽 웃음이 났다. 지그문과 머독에게도 얘기한 적 있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허둥대진 않았다.

“지금은 밀리엄 장군님과도 꽤 편한 관계가 됐고, 10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그래도, 어쩐지 좀…….”

루크는 정확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이얀은 괜찮다고 했지만 루크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루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카이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카이얀은 좀 놀란 모양이었지만 손을 빼진 않았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아무래도 군인이고 기자고 다 진절머리가 나더라고요.”

“아…….”

“그래도 루크 씨 덕분에 변했습니다.”

카이얀은 가볍게 덧붙이고 그저 웃었다.

둘은 오래 침묵했다. 별은, 굳이 망원경으로 보지 않아도 잘 보였다. 마치 눈짓하는 것 같았다. 그 반짝이는 눈매를 올려다보다 카이얀이 문득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오늘 이 얘길 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음… 루크 씨랑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루크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카이얀은 어색한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지만, 루크는 열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뜨거웠다. 함께 있어서 즐거웠다. 카이얀이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부모님 얘길 한 것도,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루크 씨한테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덕분에 많이… 괜찮아진 것 같고요.”

그 사건 이후, 카이얀은 외부로 통하는 문을 닫아걸었다.

카이얀은 풀어낼 길 없는 공허와 뿌리 깊은 고독을 연구에 쏟았다. 자연 밖으로 향하는 문은 더 단단히 잠기고 말았다. 평생, 그렇게 살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게 슬프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려니 여겼다.

“저도 카이얀과 있어서 좋았습니다.”

루크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정말, 좋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10만큼, 100만큼 좋았습니다.”

루크는 정말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카이얀은 먹먹해졌다. 대단한 걸 해 준 것도 아닌데. 이런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을 다시 그 연구소로 보내야 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카이얀은 두려웠다. 그곳에서 다시 실험하면 어쩌지.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루크 씨.”

카이얀은 돌연 결심이 섰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 무언가 작은 방비책이라도 세워 둬야 한다.

“내 말 잘 들어요.”

“네.”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달아나서 이리로 와야 합니다.”

루크는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연구소에서 달아난다는 것 가정 자체가 불가능한 듯했다. 카이얀은 답답해져서 루크를 똑바로 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루크 씨를 억지로 가두거나, 뭔가 해를 입히면, 바로 도망쳐서 여기로 오는 겁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여긴 내 친구가 하는 곳이니까 내가 그 친구에게 미리 얘길 해 두겠습니다.”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여기 우리 집에서 그렇게 안 멉니다. 도로 보는 법을 알려 줄 테니까 돌아가는 길에 외워요. 연구소에서 뭔가… 협박하거나, 어떤 폭력적인 실험을 하거나, 그런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오는 겁니다. 외국으로 파견을 간다고 했지만, 그 전에나, 혹은 돌아온 후에라도.”

루크는 머뭇거렸다. 루크는 ‘협박’이나 ‘폭력’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연구소에서 자기에게 하는 일들이 협박이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카이얀은 지금 루크를 준비시켜야만 했다. 그러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도 연구소의 폭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거기로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방비가 필요했다.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적인 상황 앞에서 루크는 이제, 어렴풋이나마 그게 부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카이얀은 힘주어 말했다.

“그때 오는 겁니다.”

집은 감시를 받을 것이다. 둘만 아는 장소,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카이얀은 루크에게 거듭 다짐을 받았다. 루크는 왜 이런 약속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카이얀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거기서 무슨 말을 해도, 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사람 삶에서 내 흔적을 지워 버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쓸까. 카이얀은 그것이 두려웠다. 나이란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루크를 보내긴 하겠으나, 그것으로 끝내 버릴 수는 없었다.

반드시 루크를 찾을 것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해야 잘 보낼 수 있을지만 생각했는데, 그 시간마저 끝나가니 반드시 루크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좋아합니다.”

그런 아이 같은 고백을 듣고 어떻게 이 사람을 포기하겠는가. 어떻게 이 사람을 다시 그 끔찍한 삶으로 밀어 버리겠는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루크는 확언했다.

“잊어버릴 리가 없습니다.”

우습게도 그 확언에 안심이 되었다. 카이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다치지 말고.”

“네.”

“겁먹지도 말고요.”

“겁나지 않습니다.”

‘난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라고 말하는 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카이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루크 씨를 잊어버렸을까, 피해 주는 게 아닐까, 싫어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연구소에서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마세요. 내 말만 기억하는 겁니다.”

“카이얀의 말이 우선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카이얀은 문득 그 규칙이 줄줄이 적힌 종이를 찢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연구소의 명령이 우선이냐, 자기 지시가 우선이냐고 물었다. 급하게 몰아붙여 자기 지시가 우선이란 대답을 듣고 그 자리에서 종이를 찢어 버리게 했다. 카이얀은 다시 다짐을 받았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좋아요.”

카이얀은 한숨처럼 말했다. 그러고 나서 혼잣말처럼 반복했다.

“좋아.”

쉬지 않고 달리다 우뚝 멈춘 것 같은, 탈력감이 일었다.

이 사람은 올 것이다. 오겠다고 했으니 올 것이다. 기다리고 또 찾으리라. 부디 무사하길. 별빛이 흩어진 언덕에서 카이얀은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반드시 다시 만나기를.

루크는 카이얀을 바라보았다. 그를 향한 열망이 루크를 지배했다.

카이얀에게 가는 길은 분명 쉽지 않으리라. 그는 늘 카이얀을 향해 걸었으나, 어째서인지 카이얀에게 가는 길은 늘 어지러웠다. 어렵게 넘어지고 실수하며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위태한 걸음걸이였지만 카이얀은 결코 사라져 버리지 않았다. 그가 루크의 시작이고 목적지였다. 루크는 생각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늘 우회로다.1)

그러나 나는 이 세상 모든 길목마다 헤매더라도 끝내 당신에게 다다를 것이다.

별이 빛나는 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퍼즐 조각처럼 쏟아졌다. 그 조각은 밤빛으로 맞물려 언약의 풍경이 되었다.

둘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이란 캠벨 박사와 연구원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본 별들이 새벽빛 너머로 얼굴을 감출 때, 두 사람은 헤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