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알겠습니다.”
짧고 긍정적인 대답에 미묘하게 굳어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워낙 비장하게 불러 긴장하셨던 모양이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아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옛날의 저라면 분명 그렇게 말하고 말았을 거예요.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 부리겠다고 제안을 거절했거나.”
회귀 전의 나에겐 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근데 요즘 제 성격이 좀 많이 변했거든요. 이대로 살면 금방 죽거나, 죽지 않더라도 그냥 죽지 못해 사는 사람처럼 살 걸 알아서 바뀌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래서 요즘엔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하고, 사람을 피하지 않으려고 하고, 저를 좀, 좋아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꼽자면 당연히 마지막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고 쓸모없으며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심지어 내 인생임에도 스스로 엑스트라라고 여길 정도로 무가치하게 여겼던 존재를 새삼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아팠다.
지금도 나는 이런 말들을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을까, 과연 이 말에 관심이나 있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로 나에 대한 애정은커녕 확신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쉽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젠 좋아하고 아껴주고, 당당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더 이상 혼자 아프고, 힘들고, 속 썩어 문드러지건 그만하려고요. 그러니까 원래라면, 옛날의 저라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을 말을 좀 할게요.”
할아버지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당신을 똑바로 보면서 차분히 말하는 내가 생소하신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고집 때문에 제 인생은 정말 엉망진창이었어요. 그 말도 안 되는 조건 지키고 돈 받겠다고 덜컥 애를 입양한 아버지나, 그렇게 데려온 애가 어떻게 클지 뻔히 보이는데도 제 아들한테 져주기 싫어서 끝까지 방관한 할아버지나, 정말 덜 자란 어른이었다고 생각해요.”
“너...!”
“특히 저는 아무 잘못 없는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아버지한테 화난 걸 저한테도 온갖 화풀이란 화풀이는 다 하시면서 눈치 주고 차갑게 구셨잖아요. 제 앞에서 아버지랑 엄마한테 온갖 나쁜 소리, 아이가 들으면 안 될 소리까지 거리낌 없이 하시면서요.”
안 그래도 주름진 미간이 더 깊게 파이고 황당에 벌어진 입에서 짧은 노성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저는 할아버지 좋아했어요. 처음 생긴 할아버지고, 유일한 할아버지니까. 제가 계속 좋아하면 언젠가 할아버지도 나를 조금은 좋아해 주시겠지- 기대했거든요. 그래서 대학 가고 그나마 받던 물질적 지원이 끊기고 나서도 생신 연회는 꼭 갔던 거예요. 이젠 적어도 할아버지 돈 축내던 입양아에서 제힘으로 좋은 대학 다니는 손자로 봐주시지 않을까 해서.”
물론 할아버지가 방관하시는 바람에 억지로 이어가던 가족 놀이도 해야 했던 것도 있지만요. 씁쓸한 어조로 뱉은 신랄한 덧붙임을 들은 할아버지가 입을 벙긋거리셨다. 뭐라고 받아치고 싶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려 드리던 나는 다시 일자로 다물리는 입을 보고 나서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근데 할아버지는 끝까지 인정 안 해주시더라고요. 그걸 아는데.... 알았는데도 돌아오고 나서도 저는 미련을 놓지 못했고, 그렇게 또 그 자리에 갔다가 그 일을 당했어요. 바보같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며 할아버지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했다. 회귀 전의 유서와 엄마와 단둘이 있었던 일을 그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얼굴에 선명히 떠오른 의문을 무시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걸 계기로 저는 그렇게 외면했던 제 마지막 현실을 인정했어요. 저는요 할아버지. 저는 이제 절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혼자 붙든다고 붙들어지지도 않던 사람들을 놓아주기로 했어요.”
눈물이 고였지만 흐르지는 않았고, 딱히 지을 표정이 없어서 그냥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제 할아버지라고 말씀해주신 거 감사하긴 한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런지 별로 절 위해 하는 말이라고 느껴지지가 않아요.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 모르겠는데. 하다못해 회사에서 뵈었을 때만이라도 인사 한 번이라도 해주셨으면 모르겠는데. 지금으로선, 그냥 그래요.”
점점 굳어가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어느새 내려간 입꼬리를 다시금 끌어올렸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부러 밝은 어조로 말했다.
“이건 감사히 받을게요. 죄책감을 덜어내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동정 어린 돈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벌어서 생활하다 보니까 돈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돈이란 거, 진짜 필요하더라고요. 조건도 제 미래를 위해선 필요한 거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너무 추상적이긴 한데. 뭐, 그런 만큼 알아서 잘 참작해주시리라 믿어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여러 옆에 두고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펜대를 꽉 쥐었다가 힘을 뺐다.
“서류는.... 그냥 믿을래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보상 값이라고 말씀하셔놓고 설마 사기 치시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저한테 그렇게까진 하면 안 되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안 읽고 바로 사인할게요.”
빈손으로 사인해야 하는 곳을 찾아 종이를 쓸었다. 아직도 잘게 떨리는 펜을 쭉 길게 뻗은 선 위로 끌어왔다. 투둑. 고여있던 눈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종이 위로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눈물을 시작으로 갑자기 울음이 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흐렸던 시야가 맑아지며 오래 참아왔던 말을 쏟아내느라 열이 올랐던 머리가 차분해졌다.
팔락, 팔락. 사각사각.
한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와 사인하는 소리만 들렸다. 멋대로 사인하기 시작한 나에게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께에 비해 사인할 빈칸이 적었던 덕분에 사인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나는 뚜껑 닫은 펜을 원래 있던 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정수리에 와서 꽂히는 눈빛에 고개를 들기가 멋쩍어 괜히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여전히 잔뜩 일그러져 있는 주름진 얼굴. 화가 난 것 같기도, 일견 괴로워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또 입꼬리를 힘주어 당겨 올렸다.
“말씀하신 첫발. 내딛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 안에 할 수 있도록.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어 속으로만 생각했다. 당장 아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하나 생각했지만, 차라리 잠을 줄이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할아버지의 반응을 보아하니 하실 말씀은 다 하신 것 같고, 나도 할 말을 다 한 것 같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위해서였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인사를 하려는 순간,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자.”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일어나시더니 나보다 먼저 걸음을 옮기셨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걸어 나가는 등만 황망히 보던 나는 조용히 속삭이는 비서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가시죠. 회장님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동행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왜. 이해 못 할 행동에 자연히 따라오는 의문이었지만, 그걸 묻기엔 할아버지는 이미 저만치 가 계셨다. 나는 주춤주춤 몇 발자국 떼다가 이내 정상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집을 벗어나자 큰 대문 너머로 차가 보였다. 먼저 나간 할아버지가 뒷좌석에 타시는 동안 차 앞에 도착한 나는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차는 없었고, 먼저 탄 할아버지는 꼿꼿이 앞을 보고 앉아 계셨다. 나보다 뒤에 나온 비서님이 차를 빙 둘러 가시더니 반대쪽 뒷좌석 문을 열면서 나를 봤다. 나는 몇 번 더 눈을 깜박이고 나서 발을 옮겼다.
병원으로 가는 길 나는 내내 창밖만 보았고, 할아버지는 아마도 앞을 보고 계셨다. 어제부터 그렇게 말을 많이 하던 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정말 단 한마디도, 습관처럼 내던 혀 차는 소리도 내지 않으셨다.
다만 내가 차에서 내리기 직전, 무심한 목소리로 ‘연락해라.’ 한마디 던진 것이 다였다. 나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문자를 받고 미리 기다리셨던 경호팀장님과 눈인사를 하는 새 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를 보고 있으려니 굳이 여기까지 같이 오신 건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호기심이 반짝이다 사그라들었다.
다시 돌아온 병실, 아빠는 여전히 잠들어 계셨다. 나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오늘로 주말이 끝났다. 내일은 출근하는 날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출근해야 하나. 나는 아빠 코에 연결된 산소 줄과 구석에 놓인 내 옷가지를 확인한 후에 망설임 없이 보조 의자에 앉았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침대에 엎드려 아빠의 손에 볼을 댔다.
“아빠, 저 방금 할아버지 만나 뵙고 왔어요.”
그리고 말하다 보면 아빠가 깨어 맞장구쳐주길 기대하며 자리를 비운 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다 했다. 며칠 동안 매진하던 발표 자료를 첨부한 메일 전송하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불편한 자세로 자서 그런지 오전 내내 몸이 뻐근했다. 이제 슬슬 점심시간일 것 같은데. 뒷목을 주무르면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때마침 뒤에서 대리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진호 씨! 우리 오늘 점심 외부 식당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대리님이 평소 어울려 다니는 다른 팀 대리님 두 분과 같이 있었다. 내게도 직급 상관없이 잘해주시는 분들이었기에 평소라면 얼른 일어났을 테지만, 오늘은 죄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저 오늘 점심시간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또? 아니, 어제부터 점심시간에 어딜 그렇게 가? 혹시 연애해?”
“하하하, 그럴지도요?”
친절하고 세심한 만큼 오지랖 있는 대리님은 쑥스러워할수록 놀림의 강도가 세졌으므로, 나는 일부러 능글맞게 답했다. 예상대로 흥미를 잃은 대리님은 우우- 하는 장난기 섞인 야유소리를 내더니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나도 가야지. 대리님이 있던 쪽을 보느라 돌아간 자세 그대로 핸드폰만 챙겨 일어났다. 어제, 오늘 나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아빠에게 갔다.
“아빠, 저 헉, 왔어, 헉, 요!”
“어머. 진호 학생 또 뛰어왔어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병실 문을 열자 앉아 계시던 간병인 아주머니가 엉거주춤 일어나시는 것이 보였다. 뒤를 잇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 아빠는 여전히 주무시고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