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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33)화 (232/234)

233화

하늘이 유독 푸르렀던 날, 나는 생전 처음 가 보는 고등학교에 방문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인 듯한 학교 책상에 앉아 수업처럼 이어지는 시험을 보고 교실을 나설 즈음엔 벌써 오후가 되어 있었다. 집에 가기 위해 시험지와 필기구를 도시락 통이 든 가방에 집어넣고 있으니 뭔가 하교하는 고등학생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 엄마. 다 끝났어.”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옆을 걸어가던 사람의 전화 내용이 귀를 스쳤다. 휭 부는 바람이 차가워 옷깃을 여미면서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거 같아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성분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힐끔대는 시선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늘 하루가 어땠고, 시험이 어땠는지를 수화기 너머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고 있었다.

시험의 여파가 남아 조용히 걷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명랑한 목소리가 힘있게 퍼져 나가자, 그에 자극받았는지 한두 명씩 핸드폰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어디야? 나 시험 끝났어.”

“아빠? 어, 나. 응, 시험 끝나서.”

순식간에 사방에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들으며 나도 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고개만 젓고 다시 집어넣었다. 단지 시험이 어려웠다는 투정을 부리고 싶다고 전화하기엔 아직 내 면이 그렇게 두껍지 못했다.

나는 괜히 오그라드는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에 아예 전담으로 붙여진 기사 아저씨가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정문 앞으로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이대로 나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이 고등학교는 유독 교정이 넓었지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마음이 창피한 만큼 걸음을 재촉했더니 금방 교문이 나왔다. 점점이 걸어 나가는 사람들 너머 얼핏 익숙한 차 뒤꽁무니가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창피고 뭐고 얼른 가서 편한 뒷좌석에 푹 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일 시험을 본 피로가 훅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방을 한 번 추슬러 메고 걸음을 더 서둘렀다. 그렇게 뛰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로 교문을 벗어난 내 눈앞에 온전히 드러난 차는, 역시 내가 알던 그 차가 맞았다. 다만 원래 계획과 달리 바로 차에 타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선 이유는 그 옆에 기사님이라기엔 너무 큰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

“진호야! 시험 잘 봤어? 피곤하지는 않아? 여기, 이거 마셔. 주머니에 계속 넣어 놔서 따뜻해.”

해맑게 웃는 남궁호의 얼굴을 얼떨떨하게 올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 날씨에 대체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녀석의 코끝이 붉었다.

“언제부터 기다리신 거예요? 아니, 그것보다 지금 자야 하는 시간 아니에요?”

분명 오늘 오전에 연락할 때까지 병원에 있었던 사람이 이 시간에 여긴 왜 온 걸까. 지금쯤이면 퇴근해서 집에 가든 병원 당직실에서든 눈을 좀 붙여야 하는 시간일 텐데. 자세히 보니 붉은 콧잔등보다 다크서클이 더 심각해 보였다.

나는 녀석에게 건네받은 따뜻한 캔 커피를 주머니에 넣고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따뜻한 온기가 남아서 그런지 손에 닿은 볼이 유독 차게 느껴졌다. 남궁호는 저항 없이 내 손에 얼굴을 기대더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오늘 진호 시험 보는 날이잖아. 데리러 오고 싶었어.”

“어차피 내일 만나는 날 아니에요? 무리하지 말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내심 반가운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말하려니 생각보다 더 타박하는 말투로 말하고 말았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붙여야 하나 힐긋 눈치를 살피는데, 반짝 눈을 뜬 남궁호가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내가 여기 오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해, 너.”

“네? 애를 써요?”

“있어, 그런 게. 아무튼, 지금은 나보단 너야. 진호, 넌 안 피곤해? 오늘 종일 시험 봤잖아. 도시락은 잘 챙겨 먹었지?”

남궁호는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뭔가 얼버무리려는 심산으로 그러는 게 빤히 보였다.

애썼다는 게 무슨 말인지 한 번 더 물어볼까 하다가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전이라면 불안한 마음에 기어코 꼬치꼬치 캐물었을 테지만, 이제는 뭘 하든지 나에게 해되는 건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더 묻지 않는 대신, 나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지만 어른스러운 체하느라 참고 있었던 말을 뱉었다.

“사실요, 형. 저 오늘 진짜 짜증 났어요. 아니, 시험 보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이 자꾸 다리를 떨면서 제 의자를 차는 거예요. 근데 또 엄청 무섭게 생겨서 말은 못 하고… 어찌저찌 시험은 보긴 봤는데 그거 때문에 더 피곤한 느낌이에요.”

“뭐? 미친 거 아니야? 말하지 왜 그랬어. 일단 말하고 해코지할 것 같으면 우리한테 연락하면 되지.”

내 투정을 들은 남궁후가 차 문을 열어 주다 말고 뒤를 돌아 목소리를 높였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이 퍽 재밌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푸핫- 형들한테 연락을 왜 해요. 엄마한테 이르는 초딩도 아니고. 아니, 그리고 거기서 연락한다 쳐도 형들이 어떻게 해 주게요. 뭐, 막 일 내팽개치고 거기까지 달려와 줄 건가?”

불쑥 솟은 장난기에 녀석을 올려보며 묻자 남궁호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당연하지. 너, 내가 여기 몇 시부터 와 있었는 줄 알아? 다음부터는 그런 일 당하고 가만히 있지 말고 엄마한테 이르는 초등학생보다 더 악착같이 고자질해. 그럼 나도 학교 달려가는 학부모보다 더 극성맞게 달려가서 왜 우리 애 기를 죽이냐고 멱살 잡아 줄 테니까. 알았어?”

남궁호가 내 볼을 잡고 주욱 늘어트리더니 단호한 눈을 하고 물었다. 몇 시부터 와 있었냐고 물으려던 나는 졸지에 말문을 틀어막힌 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양쪽으로 죽 늘어진 얼굴로 마지못해 에에- 하고 대답하는 나를 보고 남궁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안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내려 잽싸게 입을 맞추고 볼을 놔줬다.

“뭐, 뭐 해요, 밖에서!”

“아냐, 아무도 없었어. 걱정 말고 타. 집에 가자.”

없기는. 시험 끝난 학교 교문 앞인데 벌써 아무도 없는 게 말이 돼? 어이없는 변명에 주변에 있을 사람들을 가리키며 따지고 싶었지만, 혹시나 방금 입맞춤을 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남궁호의 뻔뻔한 얼굴만 노려봤다. 그러나 녀석은 매서운 눈초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 안을 향해 손짓했다.

하, 그래. 너한테 뭐라고 해 봤자겠지, 뭐.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녀석이 문을 열어 준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뒷좌석에 탔다는 걸 깨닫고 퍼뜩 놀라 앞을 보니 기사 아저씨가 룸미러를 통해 눈인사를 해 오셨다. 반사적으로 마주 인사하는 사이 반대쪽 문이 열리고 남궁호가 타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형이 와서 형이 운전해서 갈 줄 알았어요.”

“아,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태가 영 운전할 정도는 아니어서.”

지잉 올라가는 칸막이를 보면서 옆에 속삭이자 남궁호가 자기 눈 밑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 다크서클이 어디까지 내려갔는지 알긴 아는구나.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 컨디션으로 왜 왔나 싶어 한숨이 나오다가도, 고맙고 좋아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녀석을 올려다보던 눈을 아래로 깔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내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남궁호가 다시 시험장 이야기로 주제를 돌려 주었다. 나를 배려한 녀석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나도 모르는 척, 아까 그 민폐남 이야기부터 점심 도시락이 어땠는지, 시험 문제 난이도와 교실 안 온도까지. 별의별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았다.

그때마다 친구처럼, 친한 형처럼 스스럼없이 반응해 주는 남궁호 덕분에 신이 나 생각나는 이야기를 모조리 다 했을 때쯤, 우리는 지금 내가 지내는 집 앞에 도착했다.

“우리 곰돌이, 오늘 진짜 고생 많았으니까 얼른 올라가서 맛있는 거 먹자.”

“와, 그거 진짜 오랜만에 듣네요.”

“뭐? 곰돌이?”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인사부터 드리고 남궁호를 향해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호도 내 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날 향해 시선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이름 부르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안 불렀는데, 다른 애들이 애칭 부르는 거 보니까 나도 애칭 부르고 싶어져서 종종 부르려고.”

“그런 악영향은 안 받아도 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자 남궁호가 뒤따라오며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호 오늘 집 안까지 들어가려는 모양이네. 지금 지내고 있는 곳은 누구 명의인지는 몰라도 퇴원한 내가 지낼 수 있도록 다섯 명이 마련해 준 곳이었다.

전에 최태혁과 같이 지냈던 곳보다는 작지만, 여전히 서민인 내가 보기엔 대궐 같은 이곳에서 나는 집을 관리해 주시는 분들과 지내고 있었다. 서로 마주치기 싫어하는 다섯 명은 각각 약속한 날에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길 열흘이 좀 넘었나. 서로 암묵적인 룰이 있는 건지 미리 약속하지 않은 날엔 다른 약속이 없어도 오지 않던 녀석들이었는데, 오늘 남궁호는 같이 시간을 보낼 생각인 것 같았다.

나로선 나쁘지 않았다. 시험 날이라 약속을 잡지 않았을 뿐이지 저녁에 특별한 일이 없었고, 아까 시험이 끝난 후, 남들은 약속이 있는 듯 바쁘게 나가던 모습을 봐서 그런지 오늘은 혼자 있기 좀 그랬기 때문이었다.

나는 때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남궁호를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요리나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원하는 메뉴가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니라 남궁호였다.

“그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면 큰일인데. 확 데리고 도망갈 수도 없고.”

녀석은 영문 모를 말을 하며 나를 으스러트릴 듯이 꽉 끌어안았다.

“억! 저, 숨, 숨!”

일순 숨이 막혀 녀석의 등을 치려고 팔을 든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남궁호는 누군가의 손아귀에 머리채가 잡혀 고개가 뒤로 한껏 젖혀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라.”

“씨발, 좋은 말? 이게 말이냐? 죽인다, 진짜! 놔라!”

그 손의 주인은 언젠가는 정말 둘도 없이 사이가 좋았다고 믿었던, 그의 쌍둥이 남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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