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정새빈은 꿋꿋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빙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폈다.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대놓고 반가워하던 정새빈이 꼿꼿하게 펴진 나의 중지를 보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설마 그 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 줄 줄 알았나?
“헛소리할 거면 차라리 그냥 엎드려 주무세요.”
솔직히 마음 같아선 처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날 병간호하려고 온 사람에게 예의는 지키고 싶어 참았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는 반응을 보니 굳이 참을 필요 없었구나 싶었지만. 아무튼. 그래도 덕분에 한없이 무겁고 어색해지려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긴 했으니 잘된 건가.
나는 정새빈이 자리에 털썩 앉는 것을 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가장 급한 질문부터 했다.
“예령이는요? 거기에 예령이도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말하는 거 들으니까 어디 때려서 기절시킨 것 같은데 치료는 받았어요?”
사실 이건 어제 깨어나자마자 확인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살았다는 안도감과 나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으며, 이젠 나에게도 나를 구하러 와 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해서 울다 잠들어 버렸다.
“예령이는 옆 병실에 입원했다가 어제 퇴원했어. 머리 쪽을 세게 맞아서 상처가 나긴 했는데 뇌는 별 이상 없었고, 상처는 잘 꿰매서 관리만 잘하면 흉도 안 남을 거야.”
다행이다. 남궁호의 대답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게, 회귀 전 그날 예령이가 날 챙기지 않았다는 데에 약간의 원망을 안고 있었으면서 나 또한 내가 급한 상황이 되니 나부터 챙기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구석에 처박힌 나를 찾아 데려올 정도였다면 예령이는 당연히 찾았을 거란 믿음이 있기도 했으나, 그래도 일순 예령이의 존재를 잊었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그랬는데 만에 하나 예령이를 그대로 놓고 왔다거나, 나보다 더 심각한 상태라는 말을 들었으면 난 아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을 터였다.
그런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외로운지 알기에 더더욱.
“어, 그… 정신적으로는요? 많이 놀랐을 텐데, 그건 괜찮아요? 트라우마나 그런 거요.”
“일어나자마자는 좀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진정됐어. 깨어난 날부터 정신과 진료도 받고 있고. 너 걱정된다고 난리 치는 거 빼곤 괜찮아.”
오늘도 바로 온다는 거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얼마나 말렸는지 몰라.
남궁후가 그렇게 덧붙이며 미음을 한 수저 더 내밀었다. 이야기 흐름이고 뭐고 시도 때도 없이 들이밀어지는 미음이 슬슬 질려 그릇을 슬쩍 확인하니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한 숟갈을 마저 먹고 눈을 굴렸다. 온다는 걸 말린 이유는 안정이 아니라 앞에 있는 다섯 명 때문이겠지. 그래, 내 눈에도 얘네들보단 예령이를 못 오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쉬워 보이긴 했다.
견제와 어필이라. 채예령이 나름대로 괜찮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이 녀석들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였다.
솔직히 여태껏 얘네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마음을 인정하고 쓰러졌다가 일어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거기까지 결론을 내릴 만한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 또한 언젠가 그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너무 깊게 얽혀 버린 다섯 명의 남자.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이 정도면 비현실적이라고 욕먹고, 비윤리적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이야기 아닌가.
남들이 다 뭐라고 해도 나만 좋으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한꺼번에 다섯을 만난다는 건 내 윤리관으로도 썩 그렇게 흔쾌히 받아들여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인정해 버린 이 감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우는 순간, 나머지 네 명을 정리할 마음을 먹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걸 생각도 하기 전부터 이렇게 원천 봉쇄 한다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상대가 선택한 길을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슬프고 어쩌면 분할 수도 있겠지만, 한 발짝 뒤에서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나.
데리고 오면서 치료를 해 줘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일단 자기 옆에 두고 사랑해 주겠다는 심보라니. 내 상식선으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지금까지 겪은 저 다섯 명이라면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걸 알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제 깨어났을 때만 해도 천군만마 같던 녀석들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커다란 부담이 될 줄이야. 내 인생은 진짜 왜 이러냐. 왜 뭐 하나 쉽게 굴러가는 게 없어.
나는 습관적으로 이마를 치려고 팔을 올렸다가 링거 줄이 주르르 딸려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냥 내렸다.
그대로 내려다본 손등과 품이 큰 병원복 소매 사이로 보이는 팔에는 자잘하게 긁힌 상처들은 물론이요, 군데군데 큰 멍이 들어 있었다. 아마 주로 얻어맞은 몸통은 이것보다 더 심한 상태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생각해 보니 좀 억울했다.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 나는 왜 납치당해서 뒤지게 맞고 기절했다가 일어나서 바로 이런 걸 고민해야 하는 거야.
목 쓸 때마다 아파서 죽겠구먼, 자꾸 헛소리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를 않나, 사랑한다면서 자꾸 협박 같은 말을 해 사람 심란하게 하지를 않나. 이게 맞아? 이게 진짜 맞는 거냐고.
미음을 먹이면 뭐 해. 이러다 체할 거 같은데. 자꾸 입에 빨대 물려 주면 뭐 하냐고. 결국 또 말하게 할 거면서. 남들 보기에 외모도 능력도 배경도 잘난 남자들한테 사랑받으면 뭐 해. 하나같이 다 어딘가 나사 하나씩 빠진 놈들인데!
“진짜 큰 결심인데…. 나는 진짜 큰 건데….”
저 봐, 한 놈은 심지어 나사 하나가 아니라 백만 개 빠진 거처럼 미친 새끼잖아!
안 되겠다. 나는 생각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저놈들도 제 맘대로 하는데, 왜 나만 맨날 이성적이고 상식적이어야 해? 아냐, 못 해. 안 해. 나도 이기적으로 굴 거야. 아주 그냥 내 맘대로 할 거야.
나는 결연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최태혁, 남궁후, 민선우, 정새빈, 남궁호와 눈을 맞추고 선언하듯 말했다.
“저는 이제 꽃길만 걸을 거예요.”
그래, 나는 앞으로 꽃길만 걸을 거다.
“저는요, 지금까지 충분히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아왔거든요? 박살 난 가정에 입양돼서 철없고 이기적인 부모한테 정신적 학대도 당해 봤고, 예령이 덕분에 왕따는 피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학교 폭력도 당해 봤고, 성인이 되자마자 지원은커녕 다달이 큰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엄마 때문에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아 봤고요.”
이 녀석들은 모르겠지만 납치도 두 번이나 당했고, 총도 맞아 봤고, 죽어도 봤다.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매일 무기력하고, 자신감 없고, 그런 주제에 옆에서 유일하게 챙겨 주는 친구한테는 은근히 열등감 느껴서 피해 다니기나 하고.”
스스로가 소중한 줄 모르고 막살다가, 문득 불안과 초조가 찾아오면 내가 처한 불우한 환경을 탓하며 자기합리화하고 살았다.
“거기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는 했어도 한국 사회에서 게이로 살아가는 것도 얼마나 스트레스였는데요. 내가 뭐, 잘생겼기를 해, 능력이 좋기를 해, 사교적이기를 해. 저는 혼자서 아, 나는 부모 사랑도 못 받아 봤는데 애인 생기는 건 꿈도 못 꾸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살았다고요.”
나는 말하다 보니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으로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런 제가 올 한 해 동안 진짜 많이 바뀌었어요. 가족이 생겼고, 저한테 상처만 주는 가족에 대한 미련을 버렸고, 친구들이 생겼고, 심지어 나중에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경력도 생겼어요. 공부도 나름 열심히 해서, 이대로 가면 저 사회복지사 자격증 100퍼센트 합격이란 말이에요.”
토익도 얼마 전에 친 모의고사에서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900점을 넘겼다. 이제 다음 달에 결제해 놓은 토익 시험을 보러 가는 일만 남았다.
그래, 지금의 나는 그랬다. 새삼 돌이켜 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회귀 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억울해서 시작했던 말에는 점점 뿌듯함이 실렸고, 좋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리느라 수그러졌던 어깨가 자연스레 펴졌다. 덩달아 올라간 시야에 뜻 모를 얼굴로 날 보는 녀석들이 담겼다.
“그리고 연애도요. 저도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서 부정기를 거치느라 제대로 좋아하지도 못했는데, 생각해 보면 진짜 전화위복도 이런 전화위복이 없잖아요. 연애라곤 꿈도 못 꿔 본 내가 이젠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난 다섯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이건 정말 팬티 벗고 소리 지를 정도 아니냐… 아니요, 진짜 그러겠다는 건 아니니까 눈 빛내지 마시고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내 엎드려 있던 정새빈이 고개를 번쩍 드는 걸 보고 아차 싶어 바로 말을 철회했다. 그러면서 흥분한 탓에 횡설수설하던 입을 다물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아무튼, 여기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었다.
“저는 이제 저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인지 알아요. 아니, 솔직히 아직 완벽히는 모르겠지만 전보다는 알아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저를 위해서 열심히, 행복하게 살 예정이거든요? 개중에는 분명히 연애 라이프도 포함되어 있고요.”
나는 녀석들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여기까지 잘 견디고 잘 해냈으니 이제 저는 꽃길만 걸을 거예요. 그러니까 절 정말로 사랑한다면, 고백인지 협박인지 헷갈리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절 행복하게 만들어 주세요. 선택이고 뭐고는 그다음에 다시 생각하고요. 아시겠어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최태혁에게 눈짓했다.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입에 대 주는 빨대로 마신 물은 정말 달콤하고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