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그래도 그런 일을 해서 진호 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건 최대한 지양하고 싶고, 시작부터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선택받으려고 열심히 견제하고 어필했던 거야. 진짜 좀 이상하고 돌은 놈들이지?”
정새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아까까진 서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시하거나 반박하던 녀석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반박하지를 않는 거야, 이 미친놈들아. 흔들리는 눈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나에게 녀석들은 각자 미소를 지어주고, 미음을 먹여주고, 손을 잡아주고, 볼을 쓸어주었지만 정새빈의 말을 부정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요. 왜 제가 그렇게까지 갖고, 아니. 왜 저를 좋아하는데요? 아니, 지금은 좋을 수 있어도 그냥 조금 안 보고 다른 사람 만나고 그러면 금방 잊힐 수도 있잖아요. 형들이라면 나 같은 건 그냥 금방 잊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는... 그럴 것 같은데.”
말을 마치자마자 최태혁이 빨대 꽂힌 물병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 들려고 손을 들었지만, 최태혁은 물병을 건네는 대신 빨대를 입가에 대주었다. 눈치를 보니 내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나는 순순히 빨대를 입에 물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뒤이어 입을 연 것은 남궁후였다.
“왜 네가 좋아졌냐고 묻는 말에 나는 몇 가지 계기들을 말해줄 수 있고, 왜 네가 좋냐고 묻는 말엔 셀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 지금 당장도 내 눈에는 미음 받아먹는 모습도 귀엽고, 저 또라이 말에 놀라서 토끼 눈이 된 모습도 사랑스럽거든.”
그런데 네가 지금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니지? 미음을 건네면서 묻는 남궁후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금 이걸 먹을 때냐는 표시로 고개를 뒤로 물렸다가 날카롭게 박혀 드는 다섯 쌍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진호야, 네가 지금 최우선으로 할 일은 몸이 나아지는 거야.”
조용히 있던 민선우가 나긋한 어조로 나를 얼렀다. 이대로 버티면 대화고 뭐고 다 관두고, 내가 미음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것만 보고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고 순순히 미음을 받아먹었다. 그러자마자 남궁후가 씩 웃으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진호 너는 스스로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네가 가진 매력들은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금방 너를 대체할 수 있는, 혹은 오히려 더 나은 사람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거 되게 잘못된 생각이야.”
내 생각을 정확히 맞힌 남궁후의 말에 놀라 눈썹을 들어 올리던 나는 마지막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왜? 맞는 말 아닌가?
“진호야. 사랑이라는 게 잘난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라면, 우리 다섯은 서로에게 푹 빠져있어야 해. 대한민국에 우리 정도 외형과 배경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든. 근데 우린 지금 그 가정만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로를 단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없어.”
내 의문에 답을 한 건 남궁호였다. 말하면서 정말 싫었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데, 일순간 내 머릿속에서도 녀석들이 서로 껴안고 애틋하게 보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 우웩이었다. 분명 외관으론 그럭저럭 어울리지 않나 싶으면서도, 얘네 성격을 알고 있는 나로선 상상만으로도 심각한 반감을 느꼈다.
“나도 객관적으로 진호 너보다 잘생긴 애, 예쁜 애, 몸매가 좋은 애, 착한 애, 여우 같은 애 있는 거 알아.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좀 더 쉽게 이해가 되는 사람도, 더 기억에 남을 만한 극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도, 심지어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내 눈에 들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나는 민선우와 최태혁이 키스하듯이 얼굴을 붙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떨다가 내 욕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는 남궁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남궁후는 태연한 얼굴로 잘됐다는 듯 숟가락을 내밀었다. 어울리지 않는 타이밍에 고개를 뒤로 물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을 거 같아 떨떠름하게 입을 벌렸다. 역시나 남궁후는 내가 미음을 먹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근데 그래도 나는 너야. 그 사람들한텐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던 감정이 널 생각만 해도 넘쳐흘러. 왜냐고 이성적으로 물어보면 나도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이 기현상을, 나도 처음엔 부정했어. 그래서 내 감정에 비해 널 소중하게 대하지 못했고…. 그러다 결국 실수를 저질렀지.”
남궁후의 눈이 잠시 맞은편에 있는 두 사람, 남궁호와 최태혁에게 향했다가 돌아왔다.
“네 눈에 나에 대한 실망이 비쳤을 때 벼락처럼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내가 멍청했구나. 진짜 멍청했었구나. 사람들이 감정과 이성을 나누는 이유가 뭔데. 원래 감정이란 건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거잖아.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런 거잖아.”
사랑. 나는 귓가를 달콤하게 파고드는 단어를 입으로 곱씹었다.
남궁후의 말이 맞았다. 내가 알기로도 사랑이란 알 수 없어서 잔인하고, 예측할 수 없어서 애타는 감정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이성으로 판단하는 대신, 그저 받아들여 달라면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녀석들이 날 사랑하고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표현하고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앞서 말했듯 예측할 수 없어 애타는 감정이지 않은가. 더 커질 수도, 잔잔히 남아있을 수도,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없어질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누군가랑 이어지고 처음엔 그걸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감정이 옅어지지 않을까.
날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다는 건 그냥 지금이니까 하는 생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든 내가 미음을 먹는 데만 집중하는 것 같던 민선우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잡은 나비 표본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진호 네가 무서워할 거 같아서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내가 살면서 아주 드물게 애정을 느꼈던 생명체였고, 표본이 된 지금도 그 애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나는 감정, 특히 애정이나 사랑같이 지극히 비이성적인 감정을 아주 드물게 느끼는 만큼 그게 잘 식지도 않아.”
네가 나비 표본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왜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뭔지 몰라도 나는 곤충 표본보다 그 말이 더 무서운데?
“하물며 지금 너한테 느끼는 사랑은 그런 나비에게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깊고, 선명한데 내가 어떻게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면서 널 놓아줄 수 있겠어. 나는 못 해, 진호야.”
민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조곤조곤한 어조와 단정한 얼굴로 이만큼이나 강렬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나는 민선우의 선언 아닌 선언에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녀석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그리고 최태혁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녀석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심한 어조로 한마디를 툭 뱉었다.
“나는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순애보다.”
...와.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그리고 정도 많은 편이지. 그래서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지금은 네게 가진 이 감정이 그때의 풋내 어린 감정보다 훨씬 크고 깊다는 걸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감정이 작아지거나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해. 그래서 나는 널 아무에게도 보낼 수가 없을 것 같다, 진호야.”
앉아있어도 짐작이 갈 정도로 커다란 키에 옷 위로도 드러나는 건장한 몸으로 정이 많다고 말하는 최태혁이라. 진짜 하나도 안 어울려서 순간 표정으로 당황스러움을 드러낼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다행히 질세라 말을 보태는 남궁호 덕분에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덜 수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한 번에 여러 명을 만난다거나 바람을 피운 적 없어.”
그리고 남궁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후가 끼어들었다.
“나는 내 사람이 생기면 그 순간부터 주변의 이성은 전부 다 정리하는 편이야.”
경쟁하듯 본인이 얼마나 성실하고 꾸준한 사랑꾼인지를 어필하는 남궁호와 남궁후의 말이 양쪽에서 쏟아졌다.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앞서 말한 두 사람보다 훨씬 정상적인 어필이긴 했다. 그래서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주려는데 정새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내내 침대에 엎드려있던 녀석이 내는 기척에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 끝에서 정새빈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결연하게 말했다.
“나는 앞으로 평생 진호 너한테만 넣을 거야.”
“....”
“...또라인가, 진짜.”
지금껏 어떤 황당한 소리를 들어도 잘 참아냈던 나도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떠오르는 대로 내뱉고 말았다. 그러나 말한 나도 아차 싶었을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을 듣고도 정새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미친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