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와, 분위기 진짜 멋지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푹 쉬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 큰 어른들이 이게 정말 무슨 애 같은 신경전이야. 다들 쯧쯧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따가운 목을 달래가며 아, 하고 소리 내 보았다. 그러자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심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거기다 찌릿하게 아프기까지 했다. 말하는 건 좀 무리일 거 같은데.
당분간 좀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입술을 비죽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던 녀석들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왼쪽엔 차례대로 남궁후와 민선우가 서 있었고, 오른쪽엔 최태혁과 남궁호, 정새빈이 있었다.
나는 우선 최태혁에게 턱으로 간이 의자를 가리켰다.
“야, 너 올려다보기 목 아프니까 앉으래.”
또 내가 한 생각이 그대로 들려 움찔, 몸을 떨며 정새빈을 봤다. 녀석은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 신비로운 존재야, 정새빈.
나는 녀석을 지긋이 주시하다가 여전히 서 있는 최태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간이 의자를 향해 턱짓하니 순순히 말을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손가락 끝을 한번 움직여 봤다. 이제 몸도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아까보다 수월하게 움직여졌다.
나는 왼쪽을 보고 남궁후를 향해 입을 벌렸다. 그리고 팔을 들어 검지로 벌린 입을 가리켰다.
“배고프니까 밥 달래.”
이번에도 정새빈이 마치 통역해 주듯 내 행동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그러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던 최태혁과 달리 남궁후는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그건 네가 말 안 해도 알거든.”
“응, 덜 자란 새끼는 조용히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새빈 형한테 깍듯이 하래.”
뭐야, 저건. 나는 미음 한 숟가락을 하는 새 제 마음대로 내 마음의 소리를 추가하는 정새빈을 황당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당연히 남궁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남궁후는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미음을 한 숟가락 더 내밀면서 말했다.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지금은 감히 제일이라고 못 하지만, 진호는 원래 나를 제일 좋아했어. 지금도 봐. 나한테 가장 의지하잖아.”
숟가락을 거둬가며 남궁후가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정새빈을 슬쩍 옆눈으로 보면서 도발하기까지 했다.
분명 20대 후반의 어엿한 의사인데 왜 이렇게 초등학생 같지? 나는 부디 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눈동자에 한심함을 담아 남궁후를 보았다.
그러나 남궁후는 내가 자기를 한심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나를 향해 웃으며 미음을 한 숟가락 더 내밀었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오히려 민망해진 내가 그걸 받아먹는 새 이번엔 남궁호가 등판했다.
“야, 착각하지 마. 진호는 날 좋아했던 거거든?”
이쯤 되니 한숨은 나올지언정 놀랍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3살이나 많은 건장한 청년들이 날 두고 초등학생처럼 싸우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희귀한가. 게다가 저 셋은 저래 보여도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나름대로 멋진 남자들이니까. 그 사실만 놓고 보면 나는 지금 제법 황홀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냥 미음을 팝콘 삼아 이들의 신경전을 구경하기로 했다. 얘네는 그런 애들이잖아. 정새빈은 또라이고 쌍둥이는 언제나 소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
“나다.”
…응?
“진호가 가장 따르고 의지하고 애정을 가졌던 사람은 나였다.”
최태혁, 네가 왜 거기 껴. 너는 저 애들한테 병실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은 이미지였잖아.
“아니지. 너희는 여전히 멍청하구나.”
…어? 민선우?
“진호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았던 건 나야. 가장 오래 같이 지낸 것도 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머저리 셋처럼 굳이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거든. 진호는 나를 가장 좋아해. 과거에도, 지금도.”
와, 찢었다. 민선우의 아주 상쾌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진실 여부를 떠나서 놈들이 뱉은 이유 중 가장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었다. 심지어 ‘과거형’이라고 말하면서 저 세 명의 기를 팍 죽여놓다니.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정신 차리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섯 명을 죽 둘러보았다. 잘생긴 면면들을 보고 있자니 다른 의미의 감탄이 나왔다. 다들 멀쩡하게 생겨서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의미가 담긴 감탄이었다. 적어도 최태혁이랑 민선우는 좀 어른스럽게 대처할 거라고 믿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가 죽은 와중에도 숟가락을 내미는 남궁후에게 미음을 받아먹는데, 서로 기 싸움하는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정새빈이 느른한 어조로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근데,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니야?”
녀석은 나를 포함한 다섯 쌍의 눈이 자기를 향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어필은 보통 반대잖아. 너는 날 좋아해, 가 아니라 내가 너 좋아해, 가 맞는 거 아닌가?”
거기까지 말한 정새빈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서서히 드러나는 눈동자는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얘네 지금 어필하는 거거든. 아까는 견제하느라 그랬던 거고.”
정새빈의 발언에 병실 온도가 순식간에 확 내려간 것처럼 서늘해졌다. 왜?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어벙한 얼굴을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항상 내 시선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눈을 맞춰 주던 녀석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새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정새빈이 유일했다.
여기서 저 발언이 새삼스러운 건 나밖에 없나? 사실 얘네가 워낙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싸워서 개의치 않아 했을 뿐이지, 너네 항상 나한테 어필하고 서로를 견제하지 않았어? 도대체 저 말에 이렇게까지 긴장할 이유가 뭐야.
나는 다시 시선을 옮겨 정새빈과 눈을 맞췄다. 그러자 녀석이 멈췄던 말을 다시 시작했다.
“드디어 네 의견을 고려해야 할 만큼 널 좋아한다는 걸 자각해서 그래. 우리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네가 조만간 누군가를 선택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냥 저 좋을 대로 낚아채서 데리고 놀려고 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렇게 하다 네가 다치고 힘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될 정도로 네가 좋아졌다는 걸 알아 버려서.”
아.
“그러니까 만에 하나 너를 아프게 할 수도 있는 일을 해 버리기 전에 자기를 선택해 달라는 마음으로 견제하고 어필하는 거야. 다 큰 어른들이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게 싸울 만큼 필사적으로.”
정새빈은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정새빈을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정새빈이 짧게 말할 땐 복장이 터질 거 같고, 길게 말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으며 방금 들은 폭탄 발언을 정리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래, 말을 듣고 보니까 이 상황 전에 우리 집에서 자기들끼리 협약 맺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섯 명이 모여앉아 나를 가운데 두고 견제하는 상황. 그러나 내가 중심에 있으면서도 내가 아닌 서로를 보며 이야기했던 그때와 달리, 녀석들의 시선 끝에는 이제 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게 단순히 흥미가 있다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젠 분명하게 나를 ‘좋아한다.’ 말하고 있었다. 다들 좀 상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인간들이 하나같이 어딘가 돌아서 영 찜찜한 게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정새빈이 했던 말을 돌이키며 곱씹었다. 그럴수록 인상이 찌푸려지고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갔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이가 없었고, 웃고 싶어 입꼬리가 움찔거리다가도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다 아무리 생각해도 싸한 부분이 있어 오늘 하루는 말을 하지 않으려던 결심을 뒤집고 목소리를 냈다.
“저기 근데, 저를 ‘아프게 할 수도 있는 일을 해 버리기 전에’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러자 드디어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정새빈이 엄지손가락으로 대충 다른 녀석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답해 주었다.
“생각해 봐. 쟤네가,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너를 남한테 보내 줄 거 같아? 물론 처음엔 좋게 설득하려고 하겠지, 널 다치게 하긴 싫으니까. 근데 그게 안 통하면? 그런 상황에서 아, 진호는 아무리 해도 내가 아닌가 보네, 하고 포기할 위인으로 보여? 우리가?”
아니요.
“이기적이고 비정상적인 우리들은 생각하겠지. 일단 데려오자. 데려와서 아껴주자. 하필이면 만만하지 않은 새끼와 있어 데려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혹여나 몸을 다치면 치료해주고 마음이 다치면 보듬어주면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제일’이 될 거고 그럼 문제는 없어진다.”
그렇게 말하는 정새빈의 얼굴엔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고, 무심코 둘러본 다른 네 명의 얼굴엔 아무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