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눈을 뜨자마자 한바탕 울어 버린 나는 지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푹 잠들었다 깬 다음 날, 햇살이 밝게 드리워진 병실에 웬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깼어?”
온몸이 욱신거리고 쓰라려서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내게 다가온 사람은 정새빈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마침 정새빈이 누워 있는 내 위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아프지? 많이 아플 거야. 그러니까 움직이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알았지? 하고 아이를 어르는 어조로 물으며 웃는 얼굴이 환했다. 눈가가 붉게 물든 탓에 설마 울고 있었나 싶었는데, 그렇다기엔 미소가 너무 해맑았다.
나는 햇살이 내려앉은 얼굴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올라가는 등받이에 화들짝 놀라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잘 일어났어. 이제 곧 밥 올 시간이거든. 당분간은 미음이랑 죽이지만, 그래도 먹어야 해. 그래야 견딜 수 있어. 이렇게 병실에 입원할 만큼 아프고 많은 상처는 치료하는 데도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자기는 미음이고 뭐고 고기 찾기 바빴다고, 멜로디에 맞춰 흥얼거리듯 말하는 정새빈의 손에는 작은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침대 등받이가 움직이는 걸 보니 침대를 조작할 수 있는 리모컨인 듯했다.
녀석은 등받이를 세우는 버튼을 누르다가 내 몸이 흐트러지는 것 같으면 와서 자세를 바로 해 주고, 다시 조금 올리기를 반복하며 나를 자리에 앉혔다.
그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나는 심하게 갈라져 나오는 쇳소리에 얼른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게 뭐야. 어제 너무 울어서 그런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테이블을 내 앞까지 끌어다 놓은 정새빈이 침대 옆 협탁에 있던 물병에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좀 오래 자서 그래. 어제 운 것도 있긴 하겠지만.”
정새빈의 태연한 어조가 욱신거리는 몸과 가라앉은 목소리에 놀란 가슴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나는 몇 번 더 목소리를 내보려던 생각을 접고 정새빈이 물려 주는 빨대를 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을 마시자 정새빈이 앞에서 옳지, 잘한다- 하는 추임새를 넣었다. 꼭 유치원생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그 태도에 순간 이게 뭐지 싶었으나, 입 안을 적셔 주는 물이 너무 달아서 마시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정새빈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좋지 않다고 말하며 뺏어가지 않았다면 앉은자리에서 한 병을 다 비울 뻔했다.
이미 반병 정도를 비웠는데도 아쉬움이 남아 입맛을 다시자 정새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움찔, 표정을 굳히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을 보고 있던 나도 녀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손에 음식이 올라가 있는 쟁반을 받쳐 든 민선우가 커다란 미닫이문을 열고 있었다.
“쯧.”
“진호 일어나 있었구나.”
정새빈이 대놓고 면박을 주듯 혀를 찼으나 민선우는 가볍게 무시하며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어디 불편한 덴 없어? 올 때까지 누워 있지 왜 앉아 있었어, 불편하게. 형이 언제 올 줄 알고.”
나는 눈을 굴리다가 그냥 조금 떨떠름하게 웃어 버렸다. 언제 올 줄 몰랐다기보단, 올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말하기엔 타이밍도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나 대신 그 말에 대꾸한 사람은 민선우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던 정새빈이었다.
“어차피 누워만 있다고 아픈 게 가시지는 않거든? 하긴, 그러면 오히려 더 답답하고 무기력해진다는 걸 곱게 자란 도련님께서 알 턱이 있나.”
정새빈의 가시가 잔뜩 박힌 빈정거림에 순간 그 몸에 남아 있던 흉터들이 떠올랐다. 애잔한 마음이 들어 정새빈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커다란 손에 턱이 잡혔다. 손가락으로 턱을 살살 쓸면서 부드럽게 자신에게로 주의를 끈 민선우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왜 그래, 진호야. 음악이 거슬려? 꺼 줄까?”
정말이지, 일순간 정새빈이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인가 싶을 정도로 철저히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민선우는 나도 자신을 따라 정새빈을 무시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눈을 슬쩍 피하며 조금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까지 그 장단에 맞춰 주기엔 내가 그렇게 철판도 아니었거니와 정새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 분위기를 중재할 만한 주제가 없을까 머리를 굴리는데, 내가 미처 어떤 말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이 알아서 걸어 들어왔다.
“응? 진호 벌써 다 먹은 거야? 왜 그릇이 다 덮여 있지? 뭐야, 아직 열어 보지도 않은 거였어? 진호야, 배가 안 고파도 조금 먹어 줘야 해. 그래야 힘이 나지, 응?”
정정한다. 해결해 줄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더 악화시킬 사람이었다.
휘적휘적 걸어 들어온 남궁후는 정새빈과 민선우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나와 내 앞에 놓인 음식들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들으란 듯이 크게 혀를 쯧쯧 차더니, 내 몸을 살핀 후 링거와 기계들을 확인했다.
“응, 특별히 문제는 없어 보이네. 이따 주치의 교수님이 오실 거야. 그때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거 잘 기억했다가 꼭 지켜야 해, 알았지?”
나는 이번에도 아까처럼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젓이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는 있지만 방금 한 말은 맞는 말이었으니까.
남궁후는 그런 나를 보고 흐뭇하게 웃더니, 그릇 뚜껑을 열고 손수 미음을 한술 떠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게 맞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박여도 남궁후의 상큼한 미소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서 민선우가 널 보면서 입만 웃고 있는데 괜찮은 거야? 그러나 그 질문은 입을 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오는 숟가락과 동시에 요란하게 등장한 남궁호로 인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진호야! 나 오늘 휴무야! 나는 오늘 오직 너만을 위한 간병인이 될 거야. 내일 출근 직전까지 계속 붙어서 돌봐 줄게, 진호야!”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만세를 하며 외치는 소리에 병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팔을 내린 남궁호는 자기한테 시선이 쏠리든 말든 잠시 눈을 굴려 내 주변을 살피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새빈이 있는 쪽, 즉 내 오른쪽을 향해 걸어갔다.
“진호야, 형이 금방 낫게 해 줄게. 걱정하지 마. 아픈 거 금방 다 날아가게 해 줄게. 알겠지?”
한쪽에 가져온 짐을 내려놓은 남궁호가 내게 바짝 다가서서 속삭였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하는 말에는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 서려 있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양옆에선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입 안에 담고 있던 미음과 함께 삼켰다. 아, 진짜 아까부터 애들도 아니고 왜 저래.
“형들은 왜 아침부터 지랄이세요.”
“……?”
“아니, 너 말 안 했어. 나야.”
놀래라. 내가 말한 건가 싶을 정도로 생각하던 말이 그대로 들려서 눈을 휘둥그레 뜨니 남궁호 뒤에 있던 정새빈이 빼꼼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녀석은 내게 표정에서 다 보여, 라고 말하며 침대에 붙어 있는 간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기대면서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진호야, 우리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그 질문에 이 악물고 서로를 무시하던 녀석들이 일제히 정새빈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미묘하게 어색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따뜻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들리고 있던 음악이 아니었다면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 사이에 껴서 좀 머쓱해진 기분으로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피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정작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 장본인인 정새빈은 세상 평화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진짜 설마 자는 건 아니겠지? 방금까지 멀쩡하게 말했던 사람이 이렇게 금방 잠드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불안했다.
다행히 정새빈은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자기가 깨어 있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이상하긴 했으나 그 정도야 정새빈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어색하고 머쓱하고 싸늘한 분위기는,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깨졌다.
나는 이 흐름이라면 분명 최태혁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으로 냉큼 고개를 돌렸다. 다섯 명 중에서도 그나마 다른 놈들을 제어하는 역할인 듯했으니까 지금 이 상황도 어떻게든 해 주겠지,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반만 맞고 말았다.
“…쯧.”
병실에 들어선 사람은 최태혁이 맞았다. 하지만,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던 녀석이 미음이 담긴 그릇을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혀를 찬 덕분에 분위기는 더 얼어붙고 말았다. 조용해진 병실에는 잔잔한 음악과 정새빈의 흥얼거림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