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다급하게 받은 전화는 다가온 태혁과 새빈이 보내는 무언의 강요에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전환되었다. 불안정한 호흡, 잔뜩 떨리고 갈라진 목소리. 셋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진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보고 싶어. 빨리 만나자, 우리. 나 지금 너무 무서-
거기서 전화는 갑자기 끊겼다. 아마도 같이 있던 놈이 일방적으로 끊은 듯했다.
셋은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우두커니 선우의 핸드폰 액정을 보고 있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 이유도 있었지만, 바로 걸려 올 예정인 전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선우의 까맣게 변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기야.]
그들의 예상과 달리 전화 대신 도착한 간결한 메시지에는 원하던 정보가 들어 있었다. 선우는 잠시 다른 두 명에게도 메시지가 보이도록 들고 있다가 회수하며 말했다.
“각자 할 일은 확실히 하고 와.”
선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사람이 알아들었는지 관심이 전혀 없는 듯 휴대폰만 응시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태혁과 새빈도 아무 대꾸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선우는 그대로 뒤돌아 기사가 대기하고 있을 곳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저놈들이라면 더 말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받은 정보로 사건의 전말을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엄마 쪽 삼촌, 집, 돈, 화물 창고로 보이는 주소지 등 진호의 전화에도 제법 많은 단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돈 때문에 사람을 납치하는 세계를 담당하는 태혁과 신원 조사를 보다 면밀하게 할 수 있는 곳과 연줄이 있는 새빈이 움직여 알아낼 일이었다. 선우는 안타깝게도 그런 쪽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전달받은 장소로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 진호의 신병을 확보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여기로 가 주세요. 긴급한 상황이니 교통 법규는 되도록 무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문제는 생기지 않도록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최대한 빨리 가 주세요.”
평소처럼 기사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여유도 없던 선우가 스스로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며 지시했다. 생소한 지시 사항에 다소 당황하던 기사는 그보다 더 생소한 선우의 기괴한 미소를 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의 서늘한 시선에 못 이겨 헐레벌떡 운전석으로 가 차를 출발시켰다.
그 뒤로 선우는 기사가 본인의 지시 사항을 잊은 것같이 굴 때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더 밟으세요.”
빨간 불에 멈췄을 때도, 속도가 100을 넘어 조금 낮추기 위해 액셀에서 아주 잠깐 발을 뗐을 때도 가차 없이 내려오는 지시에 기사의 낯빛이 점점 누렇게 떴다. 새벽이라 차가 없어 다행이지, 그게 아니라면 사고가 나도 몇 번이고 났을 난폭한 운전이었다.
그렇게 목적지에 정차한 기사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덜덜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선우는 기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니 진호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창고 주변에는 태혁이 보낸 듯한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다수 포진해있었다. 점점이 퍼진 것같이 보이지만, 선우가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날카롭게 주시하는 눈빛에는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게 선우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무능하고 무식해서 깡패가 된 머저리들한테 선우가 긴장할 일은 전에도, 앞으로도 없었다. 오히려 평소라면 건방진 것들에게 한마디 해 줬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에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안이 있었다.
문이 살짝 열려 빛이 새어 나오는 저 창고 안에 진호가 있겠지. 조직원을 보냈으면 먼저 들여보내 진호부터 찾을 것이지, 일을 더럽게도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서 금세 창고 문 지척에 닿았던 선우의 걸음이 돌연 멈췄다. 그의 주의를 끄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 씨발, 진짜. 가만히 안 있어?”
“읍, 읍읍!”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테이프가 칭칭 감겨서 무릎 꿇려진 사내 둘이 보였다.
아, 저거구나. 진호가 말한 삼촌이라는 존재를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봤던 진호의 ‘엄마’라던 물건과 제법 닮은 눈매를 하고 있었으니까.
사내는 할 말이 많은 건지, 아니면 겁을 먹고 도망가고 싶은 건지 몰라도, 이리저리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선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선우는 그 물건을 뚫어져라 보며 머릿속에 아주 잔인하고 끔찍한 계획을 세웠다.
태혁은 의외로 좀 자비로운 부분이 있으니 이건 내가 맡아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런 생각으로 선우가 활짝 웃어 보이자 사내는 뭔가를 직감했는지 낯빛이 창백해졌다. 선우는 그 얼굴을 확실히 머릿속에 박아 넣고 한껏 올렸던 입꼬리를 손으로 내리면서 창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선우가 창고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빠르게 가까워지는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좀 더 늦을 줄 알았는데 나머지 넷이 도착해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그에 선우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쯧, 하고 혀를 찼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새 혼자 영웅이 될 기회를 놓쳤다.
어쨌든 진호를 찾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선우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선우의 눈앞에 펼쳐진 건 예상보다 더 넓은 창고와 셀 수 없이 많은 화물들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깥보다 온도가 더 낮았다는 점이었다. 선우는 다시금 진호부터 찾지 않았던 밖의 멍청한 조직원들을 향해 분노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살폈다.
“헉, 어디, 허억, 어디야.”
“나와.”
뒤따라 들어온 쌍둥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쪽으로 찢어졌고, 태혁은 문 앞을 막고 창고를 전체적으로 둘러보던 새빈을 옆으로 밀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태혁이 들어오자마자 선우에게도 익숙한 얼굴의 태혁 산하의 부하 직원 세 명이 따라 들어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찢어졌다.
그렇게 그들은 처음엔 그저 발로 뛰어 진호를 찾았다. 그들이 창고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쥐 죽은 듯 고요했기에, 정신을 잃었거나 대답할 수 없는 상태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창고 내부는 대체로 밝았으나, 일부는 매우 어두웠다. 그리고 이렇게 뒤져도 안 나올 정도로 숨겨 둔 거면 진호가 있는 곳은 어두운 곳임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어둠을 무서워하는 진호를 그런 곳에서 눈을 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우는 그런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더 빨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구석에 있던 예령이를 찾아내 수습할 때까지 진호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자 초조해졌는지, 별안간 태혁의 커다란 목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김진호!”
태혁이 분노와 초조함을 담아 외친 이름이 창고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그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후도 걱정이 잔뜩 서린 외침을 토해 냈다.
“진호야! 어딨어! 제발 아무 소리나 내 줘, 진호야, 응?”
그걸 들은 선우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진호가 눈을 떴을 때 그가 보는 처음 보는 것이 시꺼먼 어둠이 아닐 수 있도록. 그래서 자존감 낮고 애정에 목마른 나비가 혹여나 이 어두운 세상에 저 혼자라는 우울한 생각을, 혹여나 자신을 애타게 찾는 이 목소리가 본인이 자아낸 상상이라는 헛된 착각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진호야, 제발. 제발, 진호야.”
새빈이 외침인지 애원인지 모를 목소리까지 들은 선우가 다른 방향으로 몸을 트는 순간, 그 방향 끝에 있던 남궁호가 드디어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원하던 말을 외쳤다.
“…여기 있다! 진호야! 이게 무슨…!”
약간의 안도가 섞여 있던 목소리에는 곧이어 경악이 들어찼다. 결코 좋지 않은 반응을 들으며 뛰어간 곳에서 발견한 진호는 커다란 화물 사이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은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좁은 틈에 구겨지다시피 넣어진 몸은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몸엔 어스름한 불빛에도 보일 정도로 상처가 가득했다.
가장 먼저 발견했던 남궁호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진호의 몸을 빼냈다. 빛에 드러날수록 선명히 보이는 너덜너덜해진 진호의 상태를 보면서 선우는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다른 넷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각자 주먹을 그러쥐고 벌겋게 변한 눈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팽팽해진 긴장감 어린 침묵을 깬 사람은 새빈이었다.
“감정 추스르고 얼른 움직여. 병원이 먼저야.”
새빈은 남궁호의 품에 안긴 진호를 향해 손을 뻗은 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 말에 분노로 잠시 이성을 잃었던 선우와 태혁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래, 일단 치료가 먼저였다.
그렇게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외상은 있지만, 다행히 내장이나 뇌가 다치지 않았다는 희망적인 소식과 함께 쌍둥이가 미리 준비해 둔 특실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진호는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바로 옆 병실에 입원시킨 예령이 그다음 날 바로 일어난 것과 달리 진호는 며칠이 지나도록 눈을 뜨지 않아 다섯 명의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다 그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병실에 모여 결국 다섯 모두가 함께 있게 된 어느 날, 거짓말처럼 진호가 눈을 떴다.
“흐어어엉-”
이리저리 눈을 굴려 그들을 관찰하던 진호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선우는. 아니, 그 자리에 있는 다섯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