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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23)화 (222/234)

223화

예상했던 대로 내 핸드폰은 평범남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면서도 전원을 켜는 것은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의외로 예리한 발언을 했다.

“근데 이거 켰다가 누가 위치 추적해서 찾아오는 거 아니야? 그래도 명색이 납치고, 예정에도 없는 놈까지 딸려 왔는데.”

나는 철렁 내려앉는 심장을 모른 척하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속셈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 입을 다물었다.

썩 개운치 않은 얼굴로 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던 남자를 재촉한 건 이 상황이 지겨워 보이는 덩치였다.

“야, 이거 켜서 위치추적 된다고 진짜 추적할 만한 사람이 있어? 네 녀석이 돈 받을 때까지 저놈 집에서 같이 지내도 된다 그랬잖냐. 옆에 우리 같은 놈들이 붙어도 아무 문제 없을 만큼 세상 혼자 살아가는 놈이라는 건데. 그렇다는 건 밤에 연락 좀 안 된다고 위치추적까지 할 사람은 없다는 소리 아니냐?”

천만다행히도 평범남은 덩치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아마 부모조차도 오늘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은커녕, 어딜 나갔는지도 모를 거라고 말하면서 짧게 낄낄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회귀 전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몇 달 전, 내가 회귀한 시점까지만 돌아가더라도 내가 집에 며칠 동안 들어가지 않는 것 따위로 경찰에 신고해 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예령이를 제외하곤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예령이는 지금 정신을 잃은 채 저 안쪽에 있었고.

“혹시 모르니까 저 친구 놈 것만 절대 켜지 마. 그리고 정 불안하면 저놈 것도 얼른 필요한 통화만 하고 바로 꺼 버리면 되겠지, 뭐.”

그러나 저 둘에겐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에겐 잠깐이라도 연락이 안 되면 난리를 칠 사람이 다섯이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잔뜩 열받아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들의 정도 이상의 집착이 이렇게 반갑고 위안이 되는 날이 오다니. 거기다 가족이 아닌 이상 위치추적을 할 수 없다는 일반 상식 따위 씨알도 먹히지 않을 놈들이라 더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든 저 핸드폰을 켜면 대충 위치는 잡히겠지. 그리고 정말 통화를 할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상태인지 우회적으로라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덩치가 하는 말에 상처받았다는 듯, 일부러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내 얼굴을 빤히 보던 평범남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드디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잉-

핸드폰은 조금 긴 진동음을 내며 켜졌다는 것을 알렸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평범남의 표정을 살폈다. 완전히 켜지길 기다리며 가만히 액정을 내려다보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의외로 연락이 많이 와 있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 꺼져있는 동안 연락이 많이 왔나 보다. 부재중 전화는 그렇다 쳐도 혹여 메시지 내용을 보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는 걸 막기 위해 황급히 변명을 쏟아냈다.

“아 그게, 제가 단체 카카오톡, 단체로 들어가 있는 방이 많아서, 그래서 그래요. 요즘 회사 다니고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보다, 삼촌. 제가 진짜 너무 무서워서요. 저도 그냥 돈 빨리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데, 제발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주세요. 얼른 설득하고 집 처분해서 돈 빨리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제발요.”

급조한 변명은 빈약했지만, 뒤에 덧붙인 애원은 내가 듣기에도 제법 절박하게 들렸다. 달리 재촉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감정에 호소하려고 한 말인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진심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담겨 진짜 같이 느껴졌다.

덩치는 계속 제발, 제발 거리는 나를 보더니 또 아까처럼 발작하는 것 아니냐고, 그냥 빨리 전화해주고 끝내자면서 평범남을 부추겼다.

그는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이어 내 앞에 들이밀어진 핸드폰 화면에는 엄마라고 저장된 민선우의 연락처가 찍혀 있었다.

“솔직히 전화야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건데, 네 새끼가 또 지랄할까 봐 엄마 목소리 한번 들려주는 셈 치고 전화해 주는 거야. 알겠냐? 딱 한 번만 할 거고, 안 받으면 오늘은 그걸로 끝이야. 받으면 허튼소리 할 생각 말고 대충 상황만 설명해. 길어지면 바로 끊을 거니까.”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미친놈으로 보인 김에 그냥 그 이미지를 밀고 나가려고 일부러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범남은 그런 나를 보고 혀를 차더니, 드디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언제 받을까 노심초사할 틈도 없이, 화면이 전환되자마자 스피커폰을 누르는 그 짧은 찰나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김-

“엄, 엄마! 엄마, 나야. 나 진호. 엄마, 내가 지금 어, 지금 내가 삼촌이랑 있는데. 일이 조금 생겨서 삼촌이랑 있거든? 근데 있지, 엄마.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한 거라서 일단 내 말 좀 먼저 들어 줘 봐 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받을 줄 몰라 잠깐 말문이 막힌 사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먼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황해서 누가 들어도 남자 목소리인 그 저음을 덮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같이 그 목소리를 들었을 두 사람을 정신없게 만들기 위해 속사포처럼 막 떠들어 댔다.

다행히 단어 하나도 채 뱉지 못한 민선우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는지, 평범남은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릴 뿐 전화를 끊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 핸드폰 화면 구석의 시간을 힐긋힐긋 확인하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민선우도 눈치 있게 침묵을 지켜 주었다.

제발, 제발 무슨 조치든 취하고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평범남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곧 끊겠구나. 나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 줄게,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만나자, 우리. 나 지금 너무 무서-”

무심코 나온 마지막 말이 끝나기 전에 평범남이 전화를 끊었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는 것을 보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몸이 옆으로 기울어질 만큼 강한 힘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내가 씨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통화하는 동안에도 뭐 그리 말이 많냐면서, 대답도 없는 년 붙잡고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때려대는 통에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다혈질이구나 생각하기에도 정도가 심한 급작스러운 분노가 폭력으로 바뀌어 쏟아졌다. 나는 다시 한번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아까부터 괜찮다고,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무서워 죽을 거 같은 이 상황을 얼른 벗어날 수 있기를.

“죽어, 새끼야. 죽어! 아주 이놈의 망할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뭐가 스위치였는지 몰라도 평범남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손으로는 모자랐는지 급기야 일어나서 발길질까지 하는 걸 피해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고통이 줄지는 않았다. 나는 점점 멍해져 가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이번엔 내가 목적이니, 크게 건드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구나. 남자가 먼저 돌아갔다고 마음을 놓았던 건 객기였구나. 무섭고, 아프다. 너무 아프고, 무섭다.

“야, 야 진정해. 애 얼굴 거기서 더 상하면 내일 데리고 다닐 때 귀찮아지는 거 몰라? 너 또 주체 안 되는 거 보니까 할 때 된 거 같다, 야. 지랄 말고 저쪽 가서 좀 빨고 와, 새끼야.”

평범남은 내가 엄마랑 통화하는 새 본인도 전화를 받으며 어딘가로 갔던 덩치가 돌아올 때까지 내게 한참 동안 분풀이를 했다.

덩치가 그런 그를 말리면서 평범남의 주머니에 뭔가 찔러 넣는 것이 보였다. 정말 미친 것처럼 화를 내던 평범남이 마법처럼 차분해졌다. 씩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나는 곧이어 이리저리 쌓여 있는 짐 뒤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망을 봐 달라는 평범남의 너스레에 마지못해 따라나서던 덩치의 의견이었다.

혹시 만에 하나 누군가 오더라도 그저 넓은 화물 창고로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신중한 말에 평범남은 축 늘어진 내 몸을 구석에 성의 없이 구겨 넣었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말소리를 들으며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스르르 감기려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맞아서 온몸이 욱신거리는 건 둘째치고, 이제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체온이 떨어진다는 건 명백히 좋지 않은 신호였다.

조금만 더 버티자, 김진호. 조금만 더. 그놈들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아 올 거야. 반드시 찾아내서 와 줄 거야.

편하게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안의 나를 필사적으로 다독이며 버텼다.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정신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회귀 전처럼 총을 맞은 것도 아닌데. 그저 미친 듯이 맞았을 뿐이라 최악이라고 해 봤자 정신을 잃는 게 전부일 텐데도, 그냥 정신을 잃는다는 것 자체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회귀 후 정신을 잃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유독 거부감이 들었다.

싫었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심지어 사방이 어둡고 지나치게 조용하고 죽을 만큼 아파서 또다시 발작이 일어날 것처럼 몸이 덜덜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스스로 되뇌었다.

아니야. 오늘은 그날이 아니고, 이제 무섭고 아픈 건 끝났어. 남자는 돌아갔고, 남은 두 사람도 당분간은 날 해치지 않을 거야.

적어도 녀석들이 와서 병원에 가기 전까진 정신을 놓지도, 잃지도 않으리라. 기필코 내 눈으로 내가 위험에서 벗어나는 걸 확인하고 쓰러지리라. 그래야만 이 지독한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그렇게 악으로 버텼을까. 이제 몸이 떨리지도 않을 만큼 몸에 아무런 힘이 없어졌을 때,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고 속도가 느려진 내 머리는 아주 천천히 누구일까 추측을 시작했다.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아까 나간 두 사람이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뛰는 것 같은 빠른, 여러 명의 발소리.

설마. 설마, 온 건가. 진짜 온 건가?

“김진호!”

내 이름을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 왔나 보네.

“진호야! 어딨어! 제발 아무 소리나 내 줘, 진호야, 응?”

녀석들은 내 이름을 외치며 퍽 절박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진호야, 제발. 제발, 진호야.”

그러나 나는 이미 한계였다. 억지로 잡고 있던 정신이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여기 있다! 진호야! 이게 무슨…!”

그래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나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씨발,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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