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웃기는 타이밍이었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던 이 두려움 속에서 태평하게 감정이나 자각하고 있다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가 그들에게 애정을 느꼈던 순간들을 하나둘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 발목을 잡고 저 무저갱으로 잡아당기던 두려운 기억들을 하나둘 가려주었다.
두려움이 옅어지니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몸의 떨림이 잦아들고 시각과 청각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이 새끼야!”
마침 들리는 짜증 가득 섞인 호통을 들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두 명분의 다리였다. 눈동자를 굴려 내가 볼 수 있는 곳을 모두 확인했으나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정장 바지였지만, 누가 없는 건지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다쟁이가 분명한 내 삼촌이란 사람이 소리치며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좀! 그 새끼가 있으면 편한 건 사실이지만 없어도 일은 할 수 있으니까! 알아서 하라니, 내가 그러려고 그 큰돈을 준다고 한 줄 알아? 여기까지 와서 이딴 식으로 발 빼는 새끼는 아예 빨리 빠져주는 게 나아요, 형!”
날 두렵게 했던 남자가 없구나. 발을 뺐다고 표현하는 것과 아까도 본인은 이만 가 보겠다고 말하던 걸 보면 내가 정신 못 차리고 발작하고 있을 때 아예 돌아간 것 같았다. 그에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정작 이 납치를 사주한 사람들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사람은 그 남자였지, 이 두 사람이 아니었다. 경박한 분위기도 분위기고 내게 목적이 있는 사람이니 그때의 사람들처럼 날 함부로 죽이진 않을 것 같은 믿음도 있었다. 그렇다고 절대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없긴 했지만.
“씨발 진짜, 그년 집구석은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아오, 야! 병신, 같이, 굴지, 말고, 정신, 차리, 라고!”
아니나 다를까. 빨리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덩치의 계속되는 재촉에 안 그래도 열받았던 평범남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숨죽이고 가만히 누워있던 날 향해 한 음절씩 끊어 말하며 말이 끊길 때마다 있는 힘껏 발길질했다. 내가 미친놈처럼 구는 것도, 강력한 조력자가 돌아가 버렸다는 사실도 어지간히 당황스럽고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처음 몇 번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던 폭력은 이내 명치에 맞아 들어가면서 아파서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남자는 내가 숨이 쉬어지지 않아 꺽꺽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두어 번 정도 더 차고 나서 내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끌어 올렸다.
“끄윽, 큭.”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내 앞에 쪼그려 앉은 남자의 눈은 아까 봤던 것보다 배는 돌아있었다. 나는 잘못 맞아 이마나 눈 위가 찢어졌는지 자꾸 눈에 들어오려는 피를 피해 눈을 찡그리며 그 눈을 마주했다.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나 보네. 역시 뭐든 매가 약이라니까? 처맞으니까 정신을 차리잖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걸 창현이 새끼는 조폭이란 새끼가 형님이 하지 말랬다면서 뒤로 빼기나 하고 말이야. 야, 너 귀신 들렸나? 왜 갑자기 발작은 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네가 그러면 내가 으악 무섭다, 하고 그냥 보내 줄 것 같았냐?”
평범남의 말은 대부분이 물음표로 끝났지만, 질문이라기보단 빈정거림이었기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남자도 내가 답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말을 이어 갔다.
“조카님, 헛짓거리할 생각 마시고 지금부터 이 삼촌이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너는 여기서 얌전히 있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나랑 같이 부동산에 갈 거야. 가서, 집을 내놓고 그게 팔릴 때까지 나랑 지내다가 판 돈을 내가 받으면 거기서 깔끔하게 바이바이 하는 거지. 얼마나 깔끔해, 응?”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정말 내 답을 유도하는 질문이었지만, 마찬가지로 내가 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새도 없이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네, 삼촌 말이 다 맞아요, 하는 소리를 내며 끄덕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무섬증이 일려는 것을 애써 누르며 머리를 굴렸다. 저 말대로라면 나는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여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남자와 덩치가 내 옆을 지키고 있겠지만 일단 나가기만 하면, 심지어 부동산을 가는 등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생긴다면 벗어날 방법이 어떻게든 생기기 마련이었다.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냅다 때린 남자 때문에 얼굴에도 상처가 나 있는 상태라 내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 누군가가 신고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계획은 뭔가를 떠올랐다는 양 눈을 크게 떴다 씩 웃는 남자로 인해 순식간에 어그러졌다.
“아. 그러고 보니 떨거지 하나 딸려 왔었지? 그걸 어디다 써먹나 했는데 이러면 되겠네, 응. 오히려 잘됐다. 조카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밖에 나가서 삼촌 말 안 듣고 나쁜 짓 하면 네 친구 좆되는 거야. 알았지?”
평범남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질 나쁘게 웃었다.
먼저 돌아갔다던 남자와 비교하면 확실히 위압감이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죽이진 않더라도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드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특히 돈이 정말 급한지 약간이라도 돈을 못 받을 것 같은 불안이 스밀 때면 눈이 돌아 행동이 과격해지는 걸 보면 앞뒤 없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혼자 묻고 답하던 것과 달리 이번만큼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평범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크윽, 네. 네.”
아쉽지만 밖에 나가서 뭔가를 하는 계획은 전면 중지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평범남에게 협조하여 집이 넘어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집은 어차피 까맣게 잊고 있었을 만큼 내 거라고 여기지 않던 재산이었으므로 미련도 없었다.
유일하게 걸리는 점은 엄마가 줬다는 건데, 최근 엄마에 대한 짝사랑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은 후라 굳이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고 싶진 않았다.
진짜 문제는 집과 돈이 아니라, 집이라는 게 언제 팔릴지 누구도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물론이고 채예령까지 이 사람들과 지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본인은 자기 돈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사실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재산을 갖자고 깡패와 협조하여 조카를 납치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 깡패도 건드리지 말고 보내 주는 게 좋다고 말하는 대상을 이렇게 복날 개 패듯이 패고, 내내 내팽개쳐 놓았던 조카의 친구를 저렇게 거리낌 없이 인질로 쓰는 작자였다.
어떻게든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해. 나는 눈을 내리깔고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평범남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내 순종적인 태도가 먹힌 것일까. 가만히 나를 노려보던 남자가 잡고 있던 머리를 놓고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래, 말만 잘 들으면 때리진 않을 거야. 내가 뭐, 깡패도 아니고. 돈 받고 난 다음에도 걱정할 거 없다. 그 돈만 받고 나면 네 놈이랑 다시 볼일도 없으니까. 네 놈이나 저 친구 새끼가 쓸데없이 경찰에 신고하고 뭐 하고 하지만 않으면.”
근데 자기는 원래 양지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신고해도 좀 귀찮아질 뿐이고, 감방 가는 것도 이젠 별 감흥 없다면서 중얼거린 평범남이 한쪽 입꼬리만 씩 끌어올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내 재산 다시 가져오는 걸로 조카라는 놈이 신고한다면, 괘씸해서라도 삼촌으로서 훈육을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 말에 맞장구치는 덩치의 말소리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 생각해. 저 안쪽 방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기척이 없다는 건, 채예령은 아직 기절 중이라는 소리였다.
정신없는 틈을 타 조금씩 손발을 비틀어 봤지만, 테이프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이게 풀리지 않는 한,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이상하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을 다섯 놈들이 이미 나를 찾고 있으리라 믿는 수밖에.
그러나 회귀 전 남자들은 그들의 목적이 다섯 놈 중 한 명이었기에 납치하자마자 연락을 취했던 것과 달리, 저 두 놈은 그게 아니니까 그들은 지금 정보 하나 없이 나를 찾고 있는 터였다.
어떻게 단서라도 줄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리다 문득 얼마 전에 장난으로 바꾼 연락처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이름으로 된 연락처로 전화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덩치와 뭔가를 쑥덕거리고 있는 남자를 불렀다.
“삼, 삼촌, 제가 너무 무서워서 계속 말씀을 못 드린 게 하나 있는데요. 저기, 저 그 집이요. 얼마 전에 엄마가 찾아와서 공동명의로 하자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 그거 공, 공동명의로 묶여있어서. 팔려면 아, 아마 엄마 동의도 필요할 거예요.”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자길 부르는 소리에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던 평범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남자가 흥분해서 또 앞뒤 생각 않고 발길질부터 하기 전에 재빨리 걱정하지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엄마는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설득할 테니, 그저 전화 한 통만 하게 해 달라고.
나는 남자가 긴가민가하면서도 혀를 차며 핸드폰을 꺼내 들 때까지 비굴하게 설명하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드는 그를 보고 반쯤 성공했다는 기쁨을 내리누르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아니요, 삼촌. 엄, 엄마가 번호를 바꾸셨어요. 아마 그래서 연락이 안 되셨던 거 같아요. 그, 저기, 워낙 최근에 바꾸셔서 저도 아직 번호를 못 외워서요. 제 핸드폰에 보시면 삼촌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랑 다른 번호로 엄마라고 저장된 연락처가 있을 거예요. 거기로 전화하시면 바로 받으실 거거든요? 그, 그럼 제가 바로 설득해 볼게요, 네?”
온통 다 거짓말이었던 앞의 말들과 달리 방금의 말은 반쯤은 진실이 섞여 있었다. 내 핸드폰엔 실제로 ‘엄마’라고 저장된 연락처가 두 개가 있었고, 그중 하나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저 남자가 처음 보는 번호일 것이다. 그 번호의 주인은 민선우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