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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21)화 (220/234)

221화

목이 막혔다. 잊히지 않는 공포가 목을 틀어쥐고 꽉 조르는 것 같았다. 나를 힐긋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치고 나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별생각 없이 눈동자를 굴리다 나를 본 것 같았던 남자는 급격히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당신 조카도 뭐, 우리 쪽 사채 썼다 안 갚고 그런 적 있답니까? 아직 정신 붙어 있는 거 보면 약쟁이는 아니고. 중간책 노릇 하다 빼돌리려고 했던 적이라도 있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쟤가 얼마나 귀하게 큰 새낀데. 오죽했으면 하나 있는 삼촌이랑 일면식도 없었겠냐고. 거기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올해부턴 사람을 그렇게 붙여 대니 어떻게 접근할 방법이 보여야지.”

변제 기간이 점점 다가와 누군 죽게 생겼는데, 갈수록 틈이 없어져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아느냐고 평범남이 내 무릎을 툭툭 발로 찼다. 남자를 향했던 눈도 어느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과 눈을 맞추고 있는 편이 차라리 숨이 트였다.

나는 잔뜩 움츠러든 자신을 애써 다독였다. 저번처럼 괜히 발작을 일으켜 남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주의를 분산시켜 이 두려움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내겐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고 의문이 드는 존재가 바로 앞에서 계속 자기 얘길 늘어놓고 있었다. 삼촌이라더니 자기 내킬 때만 잠깐 말이 많아지는 엄마와 달리 시종일관 말이 많은 타입인 것 같았다.

나는 주절주절 쏟아지는 투덜거림에서 몇 가지 정보를 뽑아낼 수 있었다. 평범남과 덩치는 도박장을 함께 드나드는 일종의 타짜 팀이고, 이런 과격한 수까지 써야 했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이유는 거듭된 실패로 인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빚이었다.

평범남은 원래는 언제나 그랬듯 엄마를 통해 받아 낼 생각이었으나, 정말 미친 것같이 굴던 엄마가 근래 들어선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며 혀를 찼다. 나는 무심코 아빠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조용하던 남자가 앞에서 무슨 말을 떠들든 전혀 관심 없다는 투로 중얼중얼 혼잣말을 시작했다.

“그럼 나를 봤을 리가 없을 텐데. 이 조카분께선 이상하게 나를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죠. 그것도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본 얼굴이란 말이지, 저건. 그날 그 영감 생신 연회 반응도 특히 이상했고. 아, 그쪽 뒤 닦아 주는 일할 때 봤나? 씁, 아닌데. 그것도 도련님들이 있을 만한 곳에선 안 했는데.”

남자는 자기 턱을 쓸면서 나를 샅샅이 훑었다. 그 무기질적인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번쩍이며 그날의 기억이 끝없이 점멸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가다간 저 남자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낼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 설사 그 일을 떠올린다고 해도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걸 머리 한구석으로는 알면서도 뼛속 깊이 각인된 비이성적인 공포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갔다.

안 돼. 살려 줘. 싫어. 무서워. 나는 어느새 속으로만 생각하던 단어들을 입으로 중얼거렸고, 긴장으로 뻣뻣해지기만 했던 몸은 한겨울 맨몸으로 내쳐진 양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거 보십쇼. 댁네 조카님 좀 이상하다니까?. 아, 이거 정말 형님 전화도 그렇고. 얼굴 하나 아는 걸로 용돈 벌어 좋다 했더니 영 잘못 엮인 거 아닌지 모르겠네.”

등장 이래 단 한 번도 비속어를 쓰지 않았던 입에서 조그맣게 씨발, 하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욕 없이는 말도 못 하는 사람처럼 시종일관 가벼운 욕을 뱉던 두 남자와 달리, 저 남자가 뱉는 짧은 욕설은 차원이 다를 정도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무서워서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했던 내 시야 한구석에 허공을 가르는 남자의 손이 보였다. 나를 때릴 거야. 본능에 빨간불이 켜지고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을 놓쳐 버렸다.

“아, 살, 살려. 잘못했, 잘못했어요.”

도망가려고 다리에 힘을 줬으나 묶인 다리는 땅을 박차지 못했다. 기어서라도 멀어지려 했지만 묶은 손은 아무리 당겨도 앞으로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 앞뒤 재지 않는 격한 움직임으로 균형을 잃은 몸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몸을 꿈틀대도 머리를 긁적이며 날 내려다보는 남자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었다.

안 돼. 죽어. 죽을 거야. 밝은 빛 아래 보이는 건 남자 하나와 삼류 양아치 같던 두 명밖에 없었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나를 둘러싸고 발길질해대던 남자들이 보였다. 밝은 것이 현실이겠지 싶다가도, 눈을 감았을 때 보이던 얼굴이 눈을 떴을 때도 보여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야! 이 새끼 이거 진짜 미친 건가? 야! 정신 차려! 야!”

나를 향해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내 뺨을 쳤다. 툭툭 치는 손길에서 번지는 따끔함에 나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긴장한 상태로 무릎을 꿇은 내 앞에 쭈그려 앉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떠올랐다. 약 올리듯 내 뺨을 툭툭 치며 낄낄댔던 그 사내의 말도 함께.

‘야, 너 옆에 있다가 끌려왔다며? 와, 이 새끼 이거 운 존나 없네. --야, 그냥 두고 오지 그랬어, 불쌍하게.’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아주 깍듯한 자세로 웃으며 대꾸했다.

‘옆에서 다 봤는데 경찰 신고하고 그러면 번거로워지지 않습니까, 형님.’

‘그건 그렇긴 한데. 하, 이거, 이거. 이 젊은 청년이 너무 불쌍해서 그러지. 이 일에 엮였으니 어지간해선 여기서 살아서는 못 나갈 텐데.’

‘저놈 명줄이 거기까지인 게 아닐까요? 형님들 귀찮을 일 없게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쇼.’

험악한 인상의 사내는 동정을 가장한 장난기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이어 내게 다가온 남자는 날 보고 씩 웃더니 내 머리채를 잡아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저 안쪽에 있던 사람들과 달리 사나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 남자들에게 날 끌고 온 남자가 말했다.

‘심심하면 갖고 놀아도 되는데, 이따 쓸데가 있는 놈이니 죽이진 말아라.’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생생한 광경이 감각까지 일깨운 걸까. 던져질 때 잘못 부딪혀 크게 욱신거린 옆구리가 그때처럼 아픈 것 같았다. 배려 없이 잡아 당겨졌던 두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온몸을 지배하는 욱신거림은 곧이어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차는 느낌에 황급히 몸을 웅크리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아악! 아파! 아, 아파요! 제발!”

그때부턴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를 울리는 건 삐, 하는 이명과 그날 들었던 조롱, 내 내면 깊숙이 눌러 놓았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어린 비난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산소가 공급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길 기도하며 더, 더 몸을 말았다. 내가 울고 있는지 땀을 흘리고 있는 건지 몰라도 온통 축축해진 얼굴에 흙먼지가 붙어 왔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배가 아팠다. 전신을 괴롭히던 지끈거림이 슬금슬금 모이더니 배에 모여 나를 괴롭혔다.

‘탕-!’

딱 한 번 들어 봤던 커다란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배를 때리는 선득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 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아파. 너무 아파요. 그렇게 대상 없이 흘러나오던 애원은 자연히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그들밖에 없었다.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를 구해 줄 만큼 나에게 정이 있는 사람. 내가 지금 상황에서 나를 구해 주길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사람.

그런 사람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젊고 튼튼한 채예령은 지금 나와 같이 잡혀 와 있었고, 내 행방을 아는 친구들은 모두 인사불성이 될 만큼 취했다. 채예령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경찰에 신고했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구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차마 들지 않았고, 나의 아버지는 내게 그만한 관심이 없었으며 엄마는 더더욱 그럴 터였다.

그리고 나는 겪은 적이 있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던 어두운 창고, 그곳의 두꺼운 문을 열어젖혔던 다섯 명을.

그때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던 다섯 명의 모습도 같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지만, 그 욱신거림은 곧이어 떠오르는 수없이 많은 기억들로 인해 금세 잦아들었다.

마음껏 기대라던 듬직함,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어른스럽게 품어 주던 안정감, 하나하나 세심하게 보살펴 주던 다정함, 끊임없이 괜찮다고 다독여 주던 연대감. 이기적이고 강압적으로 굴다가도 결국엔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함부로 손대지 못하던 태도와 그걸 가능하게 한 애정.

그래, 애정. 내가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적나라하고 거대하며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던 애정.

보고 싶었다.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나는 비로소 인정했다. 이미 나 또한 그들을 애정하고 있었다. 언제나 발 한쪽을 빼놓고 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저 기만이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나 또한 그들을 놓는다는 걸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들을 향한 깊은 감정을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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