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220)화 (219/234)

220화

순간 몸이 굳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멈췄던 숨이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맞춰 거칠어졌다.

“뭐 하냐고.”

다시 날아오는 똑같은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이미 반쯤 패닉에 빠진 뇌는 다른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친구를 깨워 어떻게든 손과 발을 묶고 있는 걸 푼 다음 도망갈 생각이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어떤 말과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고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오, 씨발 진짜.”

“헉, 잠, 잠깐만요. 잠깐만요!”

작게 욕을 중얼거린 남자가 혀를 차더니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놀란 내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아무 대꾸도 없이,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이리저리 치이고 엎어져도 남자는 기어코 힘으로 날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안 돼. 싫어.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가 허술하고 양아치 같던 대화와 어떻게든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에 가려 작아졌던 공포가 다시 크기를 키웠다. 맞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이내 내 머릿속에는 그 두 문장만 깜박이고, 빛으로 다가갈수록 더 선명해져야 하는 시야는 눈물로 인해 오히려 전보다 더 흐려졌다.

어떡해. 어떻게 해. 마침내 사방이 환한 곳까지 끌려 나온 내 앞에는 평범한 체격의 남자와 조금 덩치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왜 벌써 깨고 지랄이야.”

“아까 네 놈 새끼가 너무 약하게 쳐서 그렇겠지, 이 화상아.”

넌 어떻게 된 애가 제대로 하는 게 없냐. 그렇게 얘기하면서 덩치 큰 남자가 평범한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무래도 계속 타박을 주던 남자가 ‘덩치’, 나를 끌고 온 남자가 ‘평범’인 것 같았다.

나는 뒤통수 맞은 것이 억울했는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평범과 이 상황이 영 못마땅한지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린 덩치의 얼굴을 아닌 척 샅샅이 훑어보았다.

모르는 사람. 회귀 전 그날에 없던 사람들이었다. 다섯 놈들이 오기 전엔 맞느라, 오고 나선 죽느라 자세히 관찰할 틈은 없었으니 내가 놓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체크를 해 봐도 확실했다. 저런 얼굴은 기억에 없었다.

심지어 저 평범한 체격의 남자는 제법 잘생겨 눈에 띄는 외모였다. 지나가는 깡패1처럼 생긴 사람의 얼굴도 기억나는 마당에 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정말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면, 그럼 이건 그날의 납치와 전혀 상관없는 해프닝인 건가?

여전히 무섭기는 했지만, 그때와 같은 정말 지독하고 잔인한 놈들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심장 박동 수가 아주 조금 잦아들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용기가 생겼다.

나는 그 용기를 그러모아, 사람을 앞에 두고 또 저들만의 대화에 빠진 두 사람에게 말했다.

“사, 살려 주세요.”

냅다 지른 애원에 대화가 뚝 끊겼고, 두 남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방금까지 서로 화를 내던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 다른 의미로 일그러졌다. 그 눈치를 보며 다시 한번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남자들은 서로를 보고 미간을 좁히더니 덩치가 한숨을 쉬며 평범에게 턱짓했다.

“야, 이렇게 된 거 말이나 해 봐라.”

그렇게 말한 덩치가 한 걸음 물러서는 걸 본 평범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내게 다가왔다.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내 바로 앞에 쭈그려 앉은 남자가 제일 처음 건넨 말은 안녕, 하는 새삼스럽고 상식적인 인사말이었다.

“안녕, 진호야. 나는 네 삼촌이란다.”

비록 뒤에 이어진 말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지만. 나는 분위기와 내용에 맞지 않게 좌우로 살랑거리는 손바닥을 보면서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했다. 뭐? 삼촌?

“정확히는 네 외삼촌이지, 응. 빌어먹을 년과 피는 반쪽밖에 섞이지 않았긴 했지만. 뭐, 너는 아예 피가 안 섞였으니 피 얘긴 일단 건너뛰자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씨발, 너랑 네 엄마 년 때문에 좆되게 생겼다는 거니까. 오케이?”

충격적인 발언에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외삼촌이라고 주장한 남자는 정신을 차리라면서 눈앞에서 손뼉을 쳤다. 화들짝 놀라 정신이 든 것도 잠시, 그 얼굴을 보자마자 외삼촌이라는 단어와 엄마라는 단어가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나한테 외삼촌이 있었다고? 아니, 엄마한테 형제가 있었어? 피가 반쪽밖에 섞이지 않았다는 건 뭐야. 이복형제? 이부형제? 근데 엄마 보육원 출신 아니었나? 어떻게 형제가 있지? 아빠가 이 이야기는 안 해 줬었는데? 말을 안 해 준 건가? 아니면 아빠도 몰랐던 거야?

남자의 폭탄 발언은 내가 여전히 손발이 묶인 채 납치당했다는 사실도 망각하게 할 만큼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평범은, 아니 내 외삼촌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내가 혼란스러워할 틈도 주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바빴다.

“…래서, 나는 지금 네 명의로 된 집을 판 돈이 필요하다, 이거야. 그 정도면 그 씨발년이 들고 튄 내 사업 자금을 어느 정도는 충당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너한테도, 나한테도, 그년한테도 아주 다행스럽게. 오케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들어야 한다는 듯 남자가 내 볼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제법 따끔한 감각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남자를 보았다. 이 남자가 뭐라고 했더라. 솟아오르는 의문에 정신이 없어 듣고 흘리던 남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를 여기 데리고 온 게 집을 팔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엄마가 들고 날랐다는 돈 때문에요?”

“그래, 이 새끼야!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우리 엄마가 평생 뼈 빠지게 유부남 등쳐 먹어서 만든 돈이라고. 내가 어? 언젠가 내 도박장 밑천으로 쓰려고 그것만큼은 큰돈 될 때까지 참아 보자 싶어서 안 뺏고 모른 척했던 돈인데, 잠깐 감방 간 사이에 그년이 홀랑 가져가서 네 앞으로 집을 사 놨지 뭐냐.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씨발!”

집.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몇 년 전 갑작스레 찾아온 엄마가 내 손을 잡고 갔던 어느 서울 근교의 부동산에서, 나는 괜찮은 아파트 한 채의 주인이 되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돈이냐고, 내 명의로 해도 되는 거냐고 묻는 말에 엄마가 머리를 꼬며 ‘그냥,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안전할 것 같아서.’ 심드렁하게 말했던 집.

그 뒤로 이래저래 엄마한테 등 떠밀려 주소지를 이전하고, 집 안을 꾸며 놓긴 했지만 그건 엄마의 재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저 내 머릿속에선 지워 버린 그 집을 이런 식으로 기억해 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 눈만 깜박대고 있자, 내 답변을 기다리듯 가만히 나만 바라보던 남자가 야, 야. 하고 나를 부르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었다.

“알겠냐고. 야,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이게 지금 좋게 좋게 말해 주니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어디서 멍을 때리고 지랄이야. 야! 들었으면 고개 끄덕이라고, 새끼야! 지금 너 여기서 고개 저으면 죽는 거야! 알아?”

남자는 답답했는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협박했다. 귀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고함을 지르니 그 소리에 뇌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나 대신 소리친 남자에게 답한 건 깨어나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죽이는 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터벅터벅. 순간 조용해진 공간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는 규칙적인 걸음걸이.

“그리고 방금 전화 받고 오는 참인데, 형님께서 웬만하면 그냥 놔주라십니다. 섣불리 건드려서 좋을 거 하나 없는 놈이라고 하시던데요?”

“뭐, 뭐라고? 이미 일이 이렇게 됐는데 그냥 놔주긴 뭘 그냥 놔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죄송하게도 그게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고요. 아무튼, 더 엮이면 저희 쪽이 좀 곤란해지는 모양이라. 용돈 벌이 하다가 조직 말아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만 복귀하라고 하셔서 전 바로 가 봐야 합니다만, 약속했던 일당은 어떻게 주실 건지?”

존댓말을 하는데도 다소 느른한 어조에는 상대를 낮게 보고 있다는 게 그대로 드러났다. 내 앞에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난 남자는 주먹을 그러쥐면서도 눈으로는 뒤에 있을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심지어 몇 걸음 뒤에서 평범남이 하는 양을 지켜만 보고 있던 덩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또한 어째서인지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되었다.

왜일까. 왜, 이렇게 소름이 돋을까. 나는 이 불안함이 그저 기우이길 바라며, 긴장으로 굳어 움직이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등 뒤를 확인했다.

“아.”

보지 말걸. 다소 어색해 보이는 청바지에 외투를 걸친 사람은 분명히 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회귀 전뿐만이 아니라 회귀 후의 기억에도 있는 유일한 그날의 사람.

너덜너덜해져 가는 나를 보고 씩 웃던, 할아버지의 생신 연회에서 나를 보고 인상을 쓰던 그 사람은 이번에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