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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19)화 (218/234)

219화

누가 자꾸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깨어나는 정신에 맞춰 점점 더 선명해지는 소리엔 쌍욕이 가득 섞여 있어 그냥 듣기에도 너무 불쾌했다.

조용히 하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상하게 무거운 눈꺼풀과 지끈거리는 머리 통증 탓에 영 귀찮았다.

그래 뭐, 떠들 수도 있지. 그냥 이대로 더 자자. 자고 일어나면 머리도 덜 아프겠지. 근데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약을 먹고 자야 하나. 아니, 근데 이건 두통이 아닌데? 이 아픔은 마치….

아, 씨발. 정신이 확 들자마자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눈앞이 번쩍하는 고통과 함께 속절없이 쓰러졌던 것을 보아 누군가 내 머리를 정신을 잃을 정도로 세게 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보통, 아무 목적 없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당했구나. 끌려왔구나.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저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선득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평온하던 심장도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많이 이겨 냈다고 생각했던, 이제 조금은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던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너무도 선명하게 뇌리를 스쳤다.

어리둥절하게 눈을 떴던 내게 가해지던 이유 없는 폭력. 고작 심심함을 해소하기 위해 쏟아지던 조롱. 잔인하게 짓밟힌 가느다란 희망.

몸이 깨어나자 두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와 함께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어지러이 펼쳐졌다. 불안과 공포, 절망을 이기지 못한 몸이 티가 날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본능이 빨간 불을 깜박이며 외쳤다. 안 돼, 멈춰. 내가 깨어난 것을 그들이 아는 순간 또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주먹질이 일상인 사람들의 인정사정없는 손속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팠으므로, 절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순간 패닉에 빠졌던 정신을 살고자 하는 본능이 다독였다. 나는 급하게 몸을 웅크리려다 그냥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가만히. 그렇게 되뇌며 몸에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덜덜 떨리던 몸이 아주 조금씩 잠잠해졌다.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조용히, 가만히.

그렇게 억지로 평온을 유지하며 숨을 죽이자, 아까부터 시끄럽게 굴던 어떤 남자들의 대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미 저지른 걸 다시 갖다 놓는다고 없던 일이 된답니까? 자꾸 똑같은 소리만 하지 마시고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요, 방법을!”

“그러니까, 새끼야! 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너는 뭐 있냐? 있어서 아까부터 큰소리야?”

아까보다 진정이 되어 그런지 그저 소음일 뿐이었던 대화 내용이 귀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앞의 내용을 듣지 못했지만,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이 싸우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곤란한 상황이라니, 뭐지?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그쪽 형님들한테 전화라도 한 번 더 해 봅시다, 예? 원래 같이하기로 했던 건데, 이렇게 발 빼는 법이 어딨어요!”

“그러길래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지금은 아니라고, 안 된다고 하셨다고 몇 번을 말했냐!”

“씨발, 진짜! 지금은 아니라는 말만 벌써 몇 달째요, 몇 달째!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이러다가 흐지부지 없던 일로 하려는 낌새 형님도 알았잖소! 내가 그년한테 받아야 할 돈이 얼만데, 똥줄 안 타게 생겼냐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수습도 못 할 일을 치면 어떡하냐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수습이 안 될 만한 일일 줄 알았습니까! 애새끼 하나 족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대화를 듣던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내용이 영 이상하기도 이상했지만, 대화하는 두 사람의 말투나 어조가 심하게 어수룩했다. 잠깐 들은 걸로 판단하긴 이르다곤 해도,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회귀 전 그날의 사내들은 더 살벌하고 사나웠으며 날카로웠다. 시종일관 낄낄대고 험한 말을 쓰긴 했지만 매 순간 나를 긴장시키고 무섭게 했던 그들을 프로 깡패라고 친다면, 저들은 고작 골목을 기웃거리는 삼류 양아치 같았다.

그리고 삼류 양아치 둘 중 하나는 돈을 위해 이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돈을 받아 내야 할 사람은 여자인 것 같은데, 왜 나를 납치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집스럽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뒤통수를 맞은 순간, 채예령과 같이 있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왜 이게 이제야 생각난 거야. 심지어 회귀 전 납치되었던 때 가장 존재감이 컸던 녀석인데 멍청이처럼 잊고 있었다. 정신을 완전히 차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급하게 눈을 뜬 것이 무색하도록 시야는 어두웠다. 내 뒤쪽에서 들어오는 빛은 멀리까지 비춰 주지 못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시간이 지나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사람의 형체가 하나 잡혔다. 아니길 바랐지만, 너무나 익숙한 체형으로 봐선 높은 확률로 채예령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까부터 계속 다른 쪽을 타박하던 목소리가 확인 사살을 해 주었다.

“그럼 옆에 놈은 왜 굳이 데리고 와서 일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도 어차피 취해서 곯아떨어진 새끼를! 한 놈 어떻게 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두 명이면 말이 달라지는 거 몰라?”

“아니, 저라고 창현이, 그 새끼가 멋대로 들고 올 줄 알았습니까? 거기다 하필이면 버리려던 순간에 정신 차리는 바람에 우리 얼굴 다 본 놈을 두고 올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나는 정신을 차렸었다는 대목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을 볼 정도로 정신을 차렸다던 녀석이 저렇게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는 건 분명 어떤 조치를 했다는 말인데, 그게 결코 녀석에게 좋은 일은 아닐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양아치들의 대화에 약간 사그라들었던 공포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들처럼 미친 듯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저들도 누군가를 납치할 만큼 정신 나간 놈들이었다. 나와 채예령은 지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뒤로 묶인 손목을 살짝 비틀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봐선 테이프로 칭칭 감은 것 같은데, 얼마나 감았는지 풀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물론 발목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작은 동작으로 힘만 빼느니 좀 더 크게 비틀어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확 큰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몸을 크게 뒤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나 손목과 발목 모두 조금도 느슨해질 기미가 없었다.

빌어먹을. 욕을 삼키며 최대한 조용히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도 손을 이리저리 비틀어 본 결과 혼자서는 절대 풀 수 없겠다는 결론이 섰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좋은 수가 없을까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저 멀리 보이던 채예령이 조금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거다. 원래는 얼른 풀고 가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가서 녀석의 상태를 보고, 괜찮아 보이면 얼른 깨워서 서로 손을 풀어 주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움직이는 대신 조용히 숨을 죽이고 대화 중인 남자들의 기척을 살폈다. 놈들은 여전히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실랑이 중이었다. 듣는 사람까지 답답할 정도로 전혀 진척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그나마 환영할 일 중 하나였다.

나는 속으로 제발 그렇게 계속 싸우고 있어라, 하고 빌면서 조심히 그러나 과감하게 몸을 움직였다.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보기보다 꽤 거리가 있었는지 배가 당기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에야 겨우 채예령의 몸에 닿을 만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복근 힘만으로 상체를 들어 올려 모로 누워 있는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걸쳤다. 그리고 턱을 지지대 삼아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하고 채예령의 얼굴을 살피자, 다행히도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 보였다. 바닥에 닿아 있는 반대쪽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주변 바닥에 물방울 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피를 흘리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안도감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면서 마지막으로 녀석을 샅샅이 살폈다. 이제 조용히, 너무 놀라지 않게 깨워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깨울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지만, 깨자마자 소리를 질러 저 남자들을 자극하는 건 아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혼자서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내 영리한 친구 채예령을 믿어 보는 수밖에.

나는 녀석의 귀에 대고 아주 조그맣게 속삭이며 어깨로 녀석의 몸을 밀었다.

“예령아. 채예령.”

그러나 나의 부름에 답한 사람은 누워 있던 채예령이 아니라,

“…뭐 하냐?”

어느샌가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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