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나는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그런 거 아니라고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안 하느니만 못한 부정이었다. 역시나 채예령도 코웃음을 치며 바로 반박했다.
“아닌 게 아닌데? 맞아도 너무 맞아서 탈이고만, 뭘 자꾸 아니래. 내가 이 형들의 아끼는 동생 포지션에 있어 봐서 아는데, 이건 그거 아니야.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하는데, 형들 너 좋아해. 어느 정도냐면….”
녀석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뒤로 보내더니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켰다. 그리고 자기한테 온 알람 몇 개를 확인하더니, 이럴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며 내게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 봐라, 봐. 형들이 널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이젠 나한테까지 혹시 너 술 마셨는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물어볼 정도라고. 무려 그 새빈 형한테도 메시지가 두 개나 와 있는 거 보이냐?”
눈앞에 들이밀어진 액정에서 나온 빛이 눈 부셔서 저절로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좁아진 시야로 대충 화면을 훑으니 채예령이 말한 대로 익숙한 이름들이 보였다. 녀석이 굳이 한 번 더 강조한 정새빈의 이름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꾸 강조할 때 갖다 쓰는 걸 보면 쟤가 생각하기에도 정새빈이 제일 상식을 벗어난 놈인가 보네.
나는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서 손바닥으로 녀석의 핸드폰을 꾹 눌렀다.
“아, 알았어. 봤으니까 치워. 눈 아파.”
채예령은 순순히 핸드폰을 물렸다. 그리고 투덜대면서도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착실히 답장하기 시작했다. 언뜻 본 채팅 목록은 항상 주변에 사람이 많은 놈답게 읽지 않은 메시지 표시가 한참 이어졌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녀석의 손가락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아까 확인했던 알림들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머뭇머뭇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채예령의 말대로 성인 남자한테 쏟아지는 것치곤 지나친 걱정이 담긴 메시지들을 읽으며 하나하나 답장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민선우에게 더 늦어질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언제 끝냈는지 턱을 괴고 나를 지켜보던 채예령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것만 네가 잡아.”
“…그게 뭔데.”
“주도권.”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서 인상을 쓰자 녀석이 답답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혀를 차면서 날 향해 다 먹고 휑해진 아이스크림 막대를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솔직히 형들 말고 그냥 다른 정상적이면서도 괜찮은 사람 만나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보기에 그건 이미 늦었어. 남은 건 네가 그 사이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버티려면 주도권을 잡는 수밖에 없다고. 안 그러면 하나같이 자기주장 강한 형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너만 다친다?”
보통 친구가 위험한 사람을,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을 다섯이나 만나고 있다면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게 맞지 않나?
“형들이 날 좋아하고 말고는 일단 차치하고. 너 왜 나는 당연히 형들을 만날 거라는 투냐? 그것도 네 말대로면 날 다치게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인데.”
순간 떠오른 의문을 필터링 없이 묻자 녀석이 휘두르던 막대를 담배처럼 꼬나물며 되물었다.
“네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 형들이 순순히 아, 얘는 내가 별로구나.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안 만나 준대?”
“…어?”
“야, 내가 얼마 전에 엄마가 하도 걱정하시기도 하고, 나도 너 걱정돼서 마침 연락하던 선우 형한테 구시렁댄 적이 있거든? 아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지 집을 너무 오래 비워 두는 것 같다면서, 진호가 혼자 지내는 게 힘든 상황이면 나도 있고 우리 집도 있으니까 돌아오면 되는데 왜 고집부리는지 모르겠다고.”
그 형이 거기에 뭐라고 답한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또다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채팅창을 휙휙 넘기다 찾던 걸 발견했는지 멈추고 내용을 소리 내 읽었다.
“‘그 집보단 지금 지내는 집이 더 넓어서 같이 생활하기엔 여기가 더 쾌적해.’ 이렇게 왔어. 당연히 나는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서 물음표를 보냈지. 그랬더니 이렇게 왔어. ‘혼자 지내는 게 힘든 상황이라기보단 혼자 지내게 할 생각이 없어서 같이 있는 거니까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얘기야.’”
“…….”
“제일 상냥한 선우 형이 이 정도인데 다른 형들은 어떻겠냐. 이 형들은 널 놔줄 생각이 없어, 김진호. 그리고 형들 배경이나 능력 생각하면 한국을 뜨지 않는 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고.”
민선우가 가장 상냥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날 놔줄 생각이 없고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놈들도 그럴 거라는 말에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난리 치지 않아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다들 한 번씩은 나를 감금 비슷한 걸 한 전적이 있다. 현재에도 나를 감금해 놓고 자기만 보게 하고 싶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으며, 미래에 뭔가 삐끗하면 충분히 날 감금시킬 의지가 충만한 예비 감금러들이었다.
채예령은 자세한 상황을 모르고 한 말일지 몰라도, 벗어나긴 늦었으니 주도권이라도 내가 틀어쥐어야 한다는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채예령을 힐긋 곁눈질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씩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며 털털한 어조로 덧붙였다.
“좋게 생각해. 형들이 직업이나 성격이 범상치 않고 종종 싸한 느낌도 있지만, 그거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 엄청난 사람들이잖아. 다 잘생기고, 몸 좋고, 똑똑하고, 경제력 있고. 단편적이긴 하겠지만, 네 얘기 하거나 네가 하는 이야기 속 형들을 보면 너한텐 충분히 다정한 것도 같고.”
거기까지 말한 녀석은 다시 똑바로 앉아 벤치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길게 내뱉고 나서 힘없이 말했다.
“우리는, 진호야, 결핍이 많잖아. 그리고 김진호, 너는 특히나. 그게 물질적인 부분이든 정서적인 부분이든 꽤 결핍되어 있으니까. 아무리 감추고 모른 척해도 없어지지 않고, 모를 수가 없는 휑한 감각이 한 번씩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히잖아.”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녀석의 옆얼굴이 어딘가 애잔하고 씁쓸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나서 연애할수록 느끼는 건데, 우리는 단단하고 많이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더라. 내가 기대도 거뜬히 서 있을 수 있고, 밑 빠진 독 같은 내 공허를 살아갈 힘이 날 정도만이라도 메워 줄 수 있을 만큼 많이 가진 사람.”
녀석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더 젖혀서 벤치 등받이 끝에 목을 기댔다. 몸을 아래로 늘어트려 아주 편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잠시 멈췄던 말을 잇는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였다.
“그런 의미에서 형들은 완벽하잖아. 너 한 명 기대는 것쯤이야 거뜬할 만큼 강철같은 멘탈을 가진 데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다 가진 사람들이니까 너한테 줄 수 있는 것도 많을 거고. 네가 정말 한국 뜰 만큼 싫은 게 아니면 그냥 그중에 한 명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나는. 주도권만 확실히 네가 잡아, 주도권만.”
그렇게 말한 채예령은 조그맣게 ‘근데 네가 누굴 고르면 다른 형들은 어쩌려나. 난리 날 것 같은데.’라거나 ‘그렇다고 한꺼번에 다 만날 수는 없잖아. 아닌가? 현대판 일처다부, 아니, 일부다처, 도 아니네. 일부다부제?’ 같은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 그 자세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하고 싶은 말 실컷 다 하고 나니 뒤늦게 취기가 확 올랐나 보네.
나는 채예령의 멀끔한 얼굴을 잠깐 허탈하게 쳐다보다 녀석이 했던 것처럼 위를 향해 고개를 젖혔다. 희미한 별이 점점이 박힌 까만 하늘이 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었다. 오히려 묘하게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길다면 길었던 오밤중 대화를 통해 내가 안고 있던 고민이 하나씩 풀어진 느낌.
오늘 나는 이해받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으며, 응원까지 받았다.
하하,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코웃음을 닮은 작은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아아, 항상 함께했던 우울감이 한 움큼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새삼 상쾌하게 느껴지는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진동하는 채예령의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채예령네 아저씨였다.
핸드폰 화면 구석에 떠 있는 시간이 어느새 자정을 넘긴 걸 보아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인사를 드렸다. 아저씨는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셨고, 우리는 짧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현재의 위치를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내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는 민선우에게 이제 끝났다고, 예령이네 아버지가 오셔서 나도 집 앞에 내려 줄 예정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아저씨를 기다리는 동안 스트레칭이라도 해서 찌뿌둥한 몸을 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깨질 거 같은 통증과 함께 급격히 고꾸라지는 시야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