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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17)화 (216/234)

217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봤거든. 보고 말았어, 너무 익숙한 표정을.”

그렇게 말문을 연 녀석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아빠가 돌아가시고 채예령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던 날. 녀석의 병실에 찾아온 내 모습은,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깨달았을 거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 말이다.

헐레벌떡 달려온 게 티 나도록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화가 났다기보단 슬퍼 보였다며 채예령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날 그냥 말을 하지 그랬냐고, 그랬다면 자기라도 가서 머리채를 잡아 주었을 거라면서 나를 타박했다.

나는 농담처럼 전부터 자꾸 머리채, 머리채 하는데 아버지랑 엄마, 둘 중 누구의 머리채를 그렇게 잡고 싶었냐고 물으려다 조용히 침만 삼켰다. 내가 쓸데없는 농담을 하지 않아도 채예령은 알아서 감정을 추스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무튼, 형들도 당연히 그걸 느꼈는지 너 나가고 난 다음에 문에서 눈을 못 떼더라고. 입으론 정장 어쩌고 하는 말을 중얼거리는데 얼굴은 어찌나 심각한지.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려니 딱 감이 오더라.”

“…….”

“아, 이 형들 김진호 좋아하는구나. 아주, 심히, 매우 좋아하는구나.”

그러면서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정새빈과 민선우 역시 같은 이유겠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유독 극단적으로 연락이 줄었던 둘이기에 세 명의 반응만 보고도 확신할 수 있었다면서.

“나도 참 성격 좋은 편은 아닌 게, 평소에 쿨하고 멋지기만 했던 남자 셋이 그러고 있으니까 그 와중에도 장난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모르는 척 물었어. 진호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었냐고. 진호 들어오자마자부터 셋 다 진호한테서 눈을 못 떼셨던 거 아시냐면서.”

그제야 세 명은 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쌍둥이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일이 생겨 이만 가 봐야겠다고 말한 게 어이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고. 그 모습에 쌍둥이도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잠깐 같이 웃더니, 최태혁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얼굴을 굳혔다고 했다.

그 뒤로 최태혁은 사고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하고,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고, 어쩐지 핸드폰을 확인하자마자 하얗게 질린 쌍둥이도 나중에 또 들르겠다는 말과 함께 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네가 있는 ‘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간 것 같다고 말하며, 채예령은 그날 이야기를 끝냈다.

손으로 입가를 꾹 눌렀다. 어째선지 입꼬리가 올라가고 싶은 것처럼 씰룩거렸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귀에 아프게 박혔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즐거워서 웃었던 게 아니었어. 나를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아니었어.

최태혁과 쌍둥이가 변명하듯 했을 땐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는데, 채예령이 이렇게 말하는 건 믿겼다. 빈틈없이 뭉쳐 있던 응어리가 부드러워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실망이 옅어지고, 미움이 흐려졌다.

그랬구나. 나는 자꾸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채예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 형들이 날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소리야?’

확신을 얻기 위해 그렇게 물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너무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는 건가 민망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하늘을 보고 있던 채예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네가 나한테 너 동성애자라고 말했을 때. 나 그때 진짜 너 병신같다고 생각했거든?”

“뭐?”

원색적인 비난에 기분 나쁜 티를 그대로 드러내니 채예령이 나를 힐긋 곁눈질했다.

“그렇잖아. 안 그래도 인생살이 존나 힘든 새끼가.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그놈의 동성애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는 주제에, 왜 굳이 또 순탄치 않을 게 뻔한 길을 자진해서 가려고 하는지. 답답한 걸 넘어 화가 나면서 욕이 절로 나오더라고.”

녀석은 눈을 돌려 다시 하늘을 보면서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교회에선 교화해야 한다고 하고, 그 사람 좋다는 우리 부모님도 고개 젓는 일인 데다, 아무리 찾아보고 알아봐도 한국 사회에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건데. 얘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거부해서 어떻게든 고칠 생각은커녕, 왜 벌써부터 인정하고 자빠졌나,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싶더라고.”

그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채예령의 결론은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가정사를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으니, 그거 하나만은 어떻게든 고쳐 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그래서 싫다는 나를 데리고 교회를 다니고, 동성애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말하며 솔선수범해서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녀석의 말에 따르면 본인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동성애라는 게 생각을 바꾼다고 바뀌는 게 아닌데. 진짜 몰라서 저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지?

슬그머니 드는 의문에 녀석을 약간 한심하게 쳐다보는데, 녀석은 나의 반응 같은 건 개의치 않고 더 가관인 말을 쏟아 냈다.

“그러다 결국 인정했어. 아, 뭐가 됐든 너는 남자를 좋아하겠구나. 이 정도 해도 안 변하는 거면 진짜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다음에 든 생각은 이렇게 된 마당에 부디 좋은 놈을 만나야 할 텐데, 였어. 너는 애정 결핍이 심하고 정도 많아서, 나쁜 놈 만나는 순간 큰일 날 게 뻔하니까.”

그 나쁜 놈에게 가스라이팅당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그대로 버려질 것 같았다고 말하는 채예령을 보면서, 나는 중지를 들어 올렸다. 아무리 나를 보고 있지 않다고 하지만 옆눈으로 보였을 텐데도 녀석은 모른 척 웃었다. 그리고 진짜 역대급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얼마나 걱정이었냐면, 진짜 진지하게, 차라리 내가 너를 만나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어.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남자라곤 나밖에 없었고, 너도 나 말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말은 안 했지만 나름 너를 연애 대상으로 보려는 노력도 좀 하고 그랬었어, 나.”

말하면서 머쓱했는지 녀석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해 놓고 쑥스럽게 웃지 마, 이 또라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녀석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근데 안 되더라고. 넌 나한테 친구 이상이니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안 되더라. 남자한테는 진짜 죽어도 연애 감정이 안 생겨. 난 여자가 좋다, 진호야.”

“야, 분명히 말하는데, 나도 너는 그냥 친구로밖에 안 보여, 미친 새끼야.”

“알아. 우린 서로 그러기엔 너무 가족이지.”

채예령은 피식 웃으면서 말하다가 문득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턱을 쓸며 말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 네가 날 좋아하는 거 같은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장단 맞춰 좋아하는 시늉은 했을 수도?”

“…진짜 돌았구나, 채예령.”

채예령은 자기가 말하고서도 소름이 끼쳤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랄하지 말라고 읊조리며 옆으로 옮겨 앉았다.

이번엔 제법 멀리 떨어져 앉아서 그런지 기척이 느껴졌나 보다. 내내 허공을 보던 녀석이 고개를 돌려 사람 한 명은 거뜬히 앉을 만큼 멀어진 거리를 떨떠름하게 내려다봤다.

“그럴 수도 있었단 말이지, 그러진 않았다고 이 매정한 놈아. 나도 너랑 사귀는 거 싫어. 난 여자가 좋다니까?”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 자체가 좀 소름이거든? 결론이 아니어도 과정이 있었다는 게 기분 나빠. 심지어 은연중에 네가 꼬시면 누구라도 넘어갈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을 걸 알아서 진짜 토 나와.”

말로는 이 기분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 것 같아 헛구역질하는 시늉까지 하자 녀석이 이를 악물고 부들거렸다. 그렇게 우린 한없이 심각했던 주제는 잠시 미뤄 두고 애처럼 누가 더 기분 나쁜지를 겨루며 투덕거렸다.

그렇게 가벼운 몸싸움까지 벌인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벤치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나는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자마자 시간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많이 지나진 않았다. 연락 온 것들을 휙휙 대충 확인하고 있는데, 얼굴 바로 옆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보니 채예령이 얼굴을 바짝 붙이고 내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자기를 보든 말든 내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감탄했다.

“와- 난리 났네. 다 큰 성인 남자가 밤에 밖에 있는 게 이렇게까지 걱정할 일일 줄이야.”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을 멈춘 나 대신 자기가 직접 액정 위로 휙휙 손가락을 미끄러트리며 알림들을 확인했다.

“태혁 형, 호 형, 선우 형, 후 형…. 얼씨구? 새빈 형까지? 이 형도 정상적으로 남을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이긴 했구나?”

“…뭐 하냐?”

어이가 없어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자 녀석이 나를 힐긋 보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응, 그냥. 소꿉친구로서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애인 후보들 심사 중이랄까.”

정말이지, 오늘 채예령은 말을 할 때마다 폭탄을 펑펑 터트리기로 작정한 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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