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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216)화 (215/234)

216화

친한 걸 넘어섰다라. 술에 취해 그냥 하는 말이라기엔 한숨 섞인 말의 묘한 뉘앙스가 걸렸다. 나는 뜨끔하는 느낌을 애써 누르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자 투덜대는 투로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던 녀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가?”

“친한 걸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는 말.”

채예령은 내 질문을 듣자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더니 힐긋, 옆을 곁눈질했다.

강하민과 김은수는 허물어지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점점 테이블 쪽으로 고꾸라지는 중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더니, 취기가 한 번에 훅 오른 모양이었다.

나와 채예령은 진지해지려던 분위기를 깨트리고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대화보다 취한 두 명이 아예 인사불성이 되기 전에 돌려보내는 것이 더 시급해 보였다.

채예령이 계산하는 사이, 나는 두 명의 뒤통수를 쳐 잠깐이라도 정신을 깨웠다. 화들짝 놀란 두 명은 술 취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안 취했다고 우기다가 마지못해 택시를 불렀다.

우리는 녀석들을 무사히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각자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사서 나왔다. 그렇게 손에 하나씩 먹을 걸 쥔 채 말없이 걷다가 때마침 나온 벤치에 앉았다.

아까 그 질문을 또 하기엔 타이밍을 놓쳤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차에 채예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인기가 많잖아.”

“……?”

뭐지, 이 밑도 끝도 없는 자랑질은.

“나 싫다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랄까. 호감 정도라면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얻고, 거기서 조금만 노력해도 금방 사랑받아 온 사람이거든, 나는. 근데 심지어 머리 좋고 눈치도 빨라.”

진짜 지랄이 너무 심하게 풍년이었다. 나는 잔뜩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표정을 보고 민망해하기를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채예령은 이쪽을 볼 기색 하나 없이 허공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순간부턴 다 보였어. 모를 수가 없더라. 사람들이 호감이 있을 때 짓는 표정과 하는 행동의 패턴, 친구로서의 감정인지 그 이상인지도. 네 덕분에 같은 성별끼리도 그런 감정으로 볼 수 있다는 걸 아니까, 그쪽까지도 빠짐없이, 다.”

거기까지 말한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취기 하나 없어 보이는 맑고 진중한 눈.

“친한 걸 넘어섰다는 얘기는 형들이 널 그냥 아끼는 동생 이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어, 김진호. 그것도 나한테 쏟았던 호기심 어린 애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감정을 가지고.”

눈을 깜박였다. 너무 놀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었다. 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한테 쏟았던 호기심 어린 애정’이라고 말한 거야? 진짜? 아니 그럼, 그럼 채예령, 얘 지금까지…!

“너, 너 알고 있었어?”

내가 놀란 가슴을 진정키며 더듬더듬 묻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모르냐.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이 나만 콕 집어 잘해 주는데. 그 정도면 머리에 꽃밭만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당연히 알아. 거기다 내가 지금까지 말했잖아. 나는 머리 좋고 눈치 빠른 데다, 사람이 사람한테 보이는 호감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서 그냥 다 보인다고.”

“그걸 알면서 계속 친하게 지냈던 거야? 너, 호모포비아잖아. 남자들은 어깨에 손만 둘러도 소름 끼쳐 할 정도로 그런 사람들 혐오, 아니 싫어하잖아.”

“정확히 말하면 나를 그런 대상으로 보는 놈들을 싫어하는 거야.”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나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녀석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뭔가 고민하더니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나한테 스킨십하거나 고백한 것도 아닌데 내 쪽에서 먼저 과하게 철벽 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좀 속물적이긴 하지만, 덮어놓고 멀리하기엔 아까운 인맥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무조건 쳐 내기보단 적당히 거리 두면서 지냈어.”

“뭐?”

“이기적이고 냉혈한처럼 들릴 거 알아. 아는데, 나 원래 인간관계 이렇게 계산적으로 해. 이게 내가 나한테 접근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복잡한 사건 없이 살아남은 방법이야. 애정이라는 게 너무 지나치면 피곤해지고 없으면 불편한 법이니까, 나한테 쏟아지는 호감 적당히 조절하면서 이용하기도 하고 이용당해 주기도 하면서 사는 거.”

아, 당연히 너는 빼고. 녀석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조그맣게 덧붙였다. 그러더니 자기가 베어 문 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한텐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내 판단으론 형들은 나한테 절대 진심 아니기도 했고. 처음이야 호기심이었겠지. 그러다가 내가 자기들하고 뭔가 공통점이 있어 보이고, 같이 있으면 편하기도 하니까 감정이 좀 더 발전한 거 같긴 해. 근데 그래 봤자 내가 느끼기엔 좋은 성능의 컴퓨터나 취향에 맞는 인형을 발견한 것 정도였어.”

“그건 모르는 거지.”

나는 다섯 명이 했을 협약을 떠올리며 바로 채예령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자 채예령이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나를 쳐다봤다.

“아니, 그게 그렇잖아. 감정은 크지만 너는 누가 봐도 ‘이쪽’은 아니니까, 널 배려해서 선을 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그것도 아니면, 형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더 다가가지 못했다거나.”

“…그랬대?”

나도 모르게 녀석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자니 채예령이 미간을 모으며 허를 찔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형들이 그랬다는 게 아니고 그냥 혼자 생각하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고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물어본 거라고.”

당황해서 그런지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오히려 의심만 살 것 같았다. 채예령은 그런 나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다가 쯧,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야, 그 사람이 진짜 좋아 봐. 선 지키고 견제하고 할 정신이 어디 있냐? 그냥 바로 직진이지. 간을 보고 손을 뗄 수 있다는 것부터 일단 진심이 아니라는 소리야. 아니, 호감은 진심일 수 있어도 딱 거기까지라는 거지. 거기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그 형들이 내가 진짜 좋으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다고? 진짜?”

날 향해 대답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올리며 하는 말에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알고 있는 과거를 생각하면 증거는 많았으나, 알면 알수록 멀찌감치 봤을 때보다 더 독불장군 같은 다섯 놈들을 생각하니 차마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나를 향해 채예령이 코웃음 쳤다.

“그래, 너도 이제는 알 거 아니야. 그 형들이 얼마나 일반인의 상식 범주를 넘어서는지. 그런 사람들이 나한테 가졌던 감정이 크고 깊었다면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굴 리가 없어. 선 지키고 견제하기는 개뿔, 내가 그걸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도 상관없이 들이댔을 거라고.”

지금 너한테 하는 것처럼. 순간 낮아진 목소리로 뱉어진 내용에 몸이 굳었다.

채예령도 뒷말을 잇지 않아 우리 사이에는 돌연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차가운 공기,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침묵을 지키던 채예령은 몇 번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엔 이래저래 우연이 겹쳐서 전보다 친해졌구나, 했어. 그러다 생각보다 연락을 자주 하는구나 싶더니, 점점 연락할 때마다 10번 중 9번은 같이 있다 그러고. 심지어 몇 달 전부턴 아주 돌아가면서 형들 집에서 살았잖아, 너.”

“…그건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알아. 일이 있었겠지. 너는 일이 있어서 그랬겠지. 내가 아는 김진호는 좀 엉뚱하고 줏대 없긴 해도 일단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아무 일도 없이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 나도 안다고. 근데 형들은? 그 일이라는 게 형들한테도 너한테 매번 연락하고, 만나고, 집에 데리고 가서 동거할 정도의 일이야? 그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차분한 추궁에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오므렸다.

“나도 설마설마했어. 사람 좋아지는 덴 이유가 없다지만, 그래도 보통 좋아하게 되는 타입이 있잖아. 그런 면에서 형들은 나 같은 사람들 좋아하는 거 같았고, 너는 나랑은 외모도 성격도 완전히 결이 다르니까. 그래서 형들 행동 보면서 의심하다가도 에이 아니겠지, 하고 넘겼었어.”

“…….”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수가 없더라. 처음엔 ‘네 친구’였던 호칭이 이름으로 바뀌고, 지나가듯 한두 마디 언급되던 네 얘기는 이제 나랑 연락하는 목적이 되고, 당연히 내가 더 많이 알던 네 일상은 이제 반대로 내가 형들한테 물어봐야 하는 지경이 되었는데. 이걸 어떻게 그냥 아니겠지, 하고 넘겨. 내가 진짜 똥멍청이면 모를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머리가 좋잖아. 한없이 심각해진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건지 몰라도 채예령이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며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녀석을 향해 너는 이런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러고 싶냐고 한심함을 섞어 질책했더니, 녀석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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