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화면은 분명 통화 중으로 넘어갔는데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야 나도 모르게 받은 전화였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침묵했는데, 전화를 건 쪽도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잘못 걸었나?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나는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여, 보세요?”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보면서 더듬더듬 뱉은 말에, 드디어 수화기를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자고 있을 시간 아닌가.
오랜만에 듣는 전화기 너머 최태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낮고 묵직했다.
“어, 그, 잠깐 깼어요. 이제 다시 자려고요.”
또 침묵. 원래도 과묵한 녀석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말 없게 만들지는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할 말이 있어 전화했다기보단 그냥 새벽에 답장이 온 것에 놀라 충동적으로 걸어 본 모양이었다.
- 진호야.
“에, 네? 예?”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침묵을 이을지 깰지 고민하던 찰나, 낮은 한숨과 함께 내 이름이 뱉어졌다. 분명 전화로 듣는 건데도 귀에 직접 숨을 불어 넣는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 대답하다 삑사리가 났다.
최태혁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좋았나. 전에 그렇게 통화할 땐 별생각 없었던 목소리를 오랜만에, 그것도 새벽에 들어서 그런지 유독 감미롭게 들렸다.
- 방에 무드 등 있으면 그걸 켜고, 불은 꺼라.
“네?”
- 너무 밝으면 눈 아프다. 통화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해.
나는 뜬금없는 지시에 눈을 굴리다가 안 그래도 조금 뻐근했던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구석에 있는 무드 등을 켜고 방불을 끄니 어스름한 빛 외엔 어둑해졌다. 확실히 눈이 편해졌다.
나는 피곤한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전등 스위치가 있는 벽에 기대 스르르 앉았다. 전화를 끊으면 끊자마자 방 불을 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 엉덩이가 바닥에 닿자마자 최태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 전화 빨리 끊을 생각 없으니까 다시 침대로 돌아가. 끊기 전에 불 켤 시간 줄 테니 걱정 말고.
뭐야, 어떻게 알았대. 겁먹은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함에 입술을 비죽이며 핸드폰을 노려봤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녀석의 이름이 떠 있는 액정뿐이었지만.
그새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핸드폰 불빛에도 눈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침대로 향했다.
“근데 형은 뭐 하느라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어요?”
침대 위에 모로 누우면서 심드렁하게 묻는 말에, 최태혁은 일이 늦게 끝나 이제 막 자려고 누웠던 참이라고 답하며 내게 똑바로 누우라고 잔소리했다.
이건 또 어떻게 알았지? 하여튼 최태혁은 이상한 데서 귀신 같은 면모가 있었다. 얘가 이 한밤중에 전화해서 왜 이럴까 싶었지만, 나로서도 이왕 눕는 거 편하고 따뜻하게 눕고 싶어서 편한 자세를 잡고 꾸물꾸물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네, 네. 똑바로 누웠습니다요. 형도 참 엄청 심심했나 보네요. 이 밤중에 전화해서 애꿎은 사람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거 보면.”
녀석은 성가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내 말투에 작게 웃더니, 웃음기가 잔뜩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요즘 하는 태도를 보면 내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야, 응?
나는 질문인지 지적인지 모호한 말을 곱씹으며 눈을 굴리다가 답했다.
“그게 아니라, 그냥 막 나가는 건데요.”
- 막 나가?
“네, 전에는 형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미지 관리한 건데, 이젠 그럴 마음이 없어져서요. 호감 얻으려고 억지로 막 살갑게 굴고 말 잘 듣고 그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제 성격대로 하는 거예요.”
사실, 원래 성격에 심술을 좀 보탠 거긴 하지만.
- 내가 무섭지도 않고?
“그건 아니죠. 워낙 덩치도 있고 딱 봐도 살벌한 분위긴데 어떻게 안 무서워요. 눈앞에 있으면 여전히 무섭긴 무서워요. 뭐, 전보단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요. 지금은 전화 중이라 목소리만 들리니까 간이 좀 부은 것도 같고….”
꿍얼꿍얼 뱉은 말에 최태혁이 또 한참을 웃었다. 내가 한 말 어디가 그렇게 재밌나 전혀 공감되지 않았던 나는 이불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 진호야.
웃음 멈춘 녀석은 즐거운 듯한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왜요.”
답하는 내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그러나 최태혁은 개의치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 너는 날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네가 당장 내 뺨을 때려도 나는 절대 널 어떻게 하지 않을 정도로 아끼고 있으니까.
그동안 무섭게 굴어 미안하다. 쉽게 다루려는 마음으로 나를 무서워하는 점을 이용해 겁박했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매달리는 네 모습이 꽤. 아니, 아주 귀여워서 자꾸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덤덤하게 이어지는 사과에 멍하니 있던 나는 마지막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변태세요?”
- 하하, 그래. 맞아. 이렇게 아끼면서도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네게 무섭게 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니까, 그것도 맞는 소리지.
분명 사과하는 흐름이었던 거 같은데 저게 맞아? 본인의 욕망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말에 할 말을 잃어 하, 하고 코웃음 쳤더니 최태혁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중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 한마디로 무마될 수 없다는 것과 네가 그 말을 더 이상 듣기 싫어하는 것도 알아서, 근래엔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
“…형, 그렇게 새벽 감성으로 계속 얘기하다간 내일 일어나서 이불 차요.”
낯간지럽고 무거운 분위기를 못 견딘 나는 이불을 꽉 말아 쥐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최태혁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짧은 정적을 깨는 최태혁의 어투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 막 대해. 지금처럼, 네 성격 그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언제든 건방지게 대들고 투덜거리고 심통 부려라. 그래도 내 눈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니까. 손아귀를 빠져나간 게 괘씸한데도, 죽여 없애고 싶은 대신 그저 엉덩이 몇 대만 때려 주고 다시 묶어 가둬 놓고 싶은 사람은 김진호, 너뿐이니까. 너는 내 앞에서 네 성격대로 굴어도 돼.
안 될 것 같은데. 막 대하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도 나를 데려다 괘씸죄로 엉덩이 때리고 다시 감금하고 싶다는 협박을 하는 건지 모를 말에 말문이 막혔다. 맥락상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얘 나름대로 되게 관대한 처사인가 본데, 듣는 일반인으로선 뒷얘기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진짜 얘도 정상 아니야. 하나같이 다 미친놈들이야, 정말.
“감금, 어쩌고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 그래, 최대한 참을 예정이니 지금은 못 들은 체해도 되는 얘기다.
안 하겠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다섯 놈들과 지낸 시간이 있으므로 녀석들의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따져 봤자 또 나만 속 터져 가면서 저 새끼 진짜 미친놈이구나 새삼 깨닫고 끝나겠지, 뭐.
내 체념 어린 한숨을 들은 최태혁이 목을 울리며 웃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래, 이럴 줄 알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벌써 새벽 3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불을 켜 놓고 동영상을 보다 잠이 드는 데 걸릴 시간을 가늠하며, 핸드폰을 귀에 대고 말했다.
“형, 벌써 새벽 3시가 넘었어요. 이제 자야 할 것 같은데. 안 졸리세요?”
내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최태혁은 본인은 아직 괜찮다고 말하며 내게 졸리냐고 물었다. 나는 자야 하니까 거짓말로 졸린다고 하고 끊을까, 고민하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졸리지는 않은데, 내일 생각하면 빨리 자야 하긴 해요.”
- …졸리지 않은데 어떻게 자려고. 따로 방법이 있나?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그럼 이만하고 어서 자라며 통화를 마무리 지을 줄 알았던 최태혁은 그러는 대신 자는 방법을 물었다. 얘도 잠을 잘 못 자나. 왜 이런 걸 묻지.
“음, 방법이랄 것까지는 없는데. 저는 보통 동영상 틀어 놓고 듣다가 자요. 적당히 재미없고, 근데 또 잡생각은 날려 줄 만큼의 내용은 있는 동영상 같은 거 찾아서 듣고 있다 보면 그나마 잠이 좀 오더라고요.”
- 그렇군.
나는 최태혁이 수긍하는 것을 들으며 전등 스위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뜻해진 이불을 걷어 내긴 싫었지만, 이대로 전화를 끊고 나서 불을 켜는 것보단 차라리 지금 켜 놓는 것이 전화를 끊자마자 찾아올 정적을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겁쟁이는 살기 참 귀찮고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불을 걷어 내려다가, 문득 최태혁이 다시 조용해졌다는 걸 깨닫고 녀석을 불렀다.
“형?”
그리고 내 부름에 돌아온 것은,
- 오늘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했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뜬금없는 티엠아이였다.
“…갑자기?”
- 하체를 하는 날이었다. 하체 운동 중에 내가 제일 즐겨 하는 건 스쿼트인데, 스쿼트라는 건….
당황이 가득 섞인 되물음을 못 들은 건지 무시하는 건지, 최태혁은 진지하게 스쿼트의 정의와 정확한 자세, 해야 하는 이유와 장단점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어 어버버하던 나는 이내 적당히 재미없고, 그러나 잡생각을 날릴 만한 정보는 가지고 있는 말이라는 걸 눈치챘다. 나는 피식, 소리 내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 재워 주려고 이러는 거지 지금? 그 최태혁이.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없고 웃기면서 간지럽다. 이제 데드리프트를 설명하고 있는 진지한 목소리를 들으며 자꾸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날 위한 일인데 대놓고 웃기가 미안해서 최선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그러다가 그만하라고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날은 동영상 대신 최태혁의 하체 운동 강의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