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정새빈이 들어오고 가장 먼저 달라진 점은 잠자리였다. 원인은 당연히 정새빈이었다.
녀석이 들어온 첫날 밤, 나는 별생각 없이 민선우의 방으로 향했다. 막 문고리를 잡고 들어서던 내게 날아온 정새빈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내가 들어간 곳이 민선우의 방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민선우랑 하게?”
“예?”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해서 뒤돌아보니 정새빈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있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녀석다운 단어를 뱉었다.
“섹스.”
이렇게 아무 전조도 없이 떡 나올 단어는 아닌 것 같은데, 정새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놀라서 굳어 버린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내 머릿속에는 잊으려고 애썼던 그 밤이 스르륵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퍼뜩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거든요! 그런 거 안 하거든요!”
그러자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한 바퀴 굴린 녀석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여기 민선우 방. 너는 쫑쫑이. 지금 늦은 밤.”
“잘 시간! 잘 시간이니까 자려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이상한 거 하려는 게 아니라!”
“왜?”
정새빈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더니, 손가락을 펴 나와 문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건장한 게이와 바이가 한 침대를 쓰면서 잠만 잔다고? 잠만 잔다고 쳐도, 왜? 애초에 왜 둘이 같이 자는데? 현실 도피 만렙 쫑쫑이가 위기의식을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소시오패스 능구렁이가 좋은 핑계를 대서 넘어가 준 거야?”
어딘가 억울하면서도 정확한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솔직히 아무 일도 없진 않았다. 분명히 그때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
조금 변명하자면, 나는 떠올리기도 창피해 죽겠는 그 사건 후에 다른 방에서 자려고 하긴 했었다.
그러나 호기롭게 내 방으로 향한 것과는 달리 나는 그날부터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조금씩 안정되던 수면 시간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었고, 수면의 질도 현저히 떨어졌다. 분명 정신과에서 처방된 약 중에 소량이지만 수면제도 섞여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생각들과 우울한 기억들 때문에 눈을 감아도 머릿속은 전쟁터처럼 시끄러웠다. 그 탓에 자꾸 머리를 비울 만한 뭔가를 찾게 되었고, 동영상이나 게임, 소설 등을 보느라 잠이 늦게 들었다.
그러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겨우 잠이 들면 끔찍한 악몽들이 찾아와 정신을 때려 깨웠다. 악몽이 기억날 때도,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일어날 때마다 좆같다는 점은 한결같았다.
인간의 삼 대 욕구 중 하나인 수면욕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니 나의 신경은 조금씩 예민해지고 몸은 피로해졌다.
민선우는 며칠 만에 퀭해진 내 눈 밑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네가 원하지 않으면 손을 대지 않을 테니 괜히 고생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말했다.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냉큼 다시 민선우와 자기 뭣했던 나는, 그날 밤에도 고집스레 내 방으로 향했다. 민선우는 내 뒤에 대고 한숨을 쉬더니 팔을 잡고 나를 돌려세웠다.
‘좋은 말로 하면 안 듣지, 김진호. 너 이대로 또 불면증 심해지면 형 진짜 화낼 거야. 그땐 저번처럼 봐주고 그런 거 없어.’
그 협박 비슷한 경고가 어이없으면서도 어딘가 반가웠던 건 왜일까. 나는 싫은 듯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터덜터덜 녀석을 따라 얌전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적거리며 침대에 누운 나를 향해 모로 누운 민선우는, 정말 담백하게 가슴께를 토닥여 주었다.
가깝게 밀착된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 규칙적인 토닥임, 가끔 사락거리며 머리를 정돈해주는 섬세한 손길. 경계하느라 긴장했던 몸에 힘이 빠지고 스르르 잠이 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걸 계기로 나의 각방 봉기는 며칠 만에 진압되어 지금까지 같이 자고 있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
근데 이걸 딱 잘라 설명하자니 뭔가 막막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밤에 혼자 못 자겠다는 건데, 그렇게 말하면 정새빈 성격에 또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사실 내가 좀 쪽팔리기도 했고.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가만히 서 있던 정새빈이 움직였다.
“어?”
녀석은 나를 지나쳐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렀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 뭔가를 읽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민선우는,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정새빈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확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뭐 해?”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에 정새빈은 정새빈답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로 올라가 방심한 민선우를 구석으로 밀어내더니, 떡하니 가운데에 누웠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이게 또 무슨 지랄일까 싶어 머뭇머뭇 침대 가로 온 나에게 아주 당당히 말했다.
“쫑쫑이는 여기.”
정새빈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건 옆으로 쭉 뻗은 본인의 오른팔이었다.
“…와.”
그 뻔뻔한 작태에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뭐 하냐고.”
물론 민선우는 매우 화가 나 보였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쓰면 정새빈이 아니지. 옆에서 이를 으득거리든 말든, 정새빈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여기.”
꿋꿋이 팔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도 단호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뇌가 제 기능을 안 하는 건 알겠는데, 그마저도 아예 으스러트려 버리기 전에 당장 나가.”
“얼른.”
나는 하도 이를 악물어서 뚜렷하게 보이는 민선우의 턱선과 발을 동동거리며 나를 재촉하는 정새빈을 번갈아 봤다.
항상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민선우가 저렇게 주먹을 부들거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우와, 저러다 진짜 한 대 세게 맞겠는데, 정새빈?
“얼른! 얼르은! 여기! 쫑쫑이는 여기!”
급기야 정새빈은 장난감 사 달라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쓰는 어린애처럼 팔다리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퍽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라가려는데, 곧이어 방 안에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허공을 가르던 정새빈의 손이 바로 옆에 있던 민선우의 얼굴을 가격하면서 난 소리였다.
“…하.”
민선우가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면서 천천히 웃었다. 명백한 분노가 섞인 헛웃음이었다.
이건 아무리 정새빈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는지,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대신 민선우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올라갔다가 정새빈을 향해 내려꽂혔다.
그 주먹을 맞고 찌그러진 것은, 민선우에겐 안타깝게도 정새빈의 머리가 아니라 베개였다. 정새빈이 요령 좋게 옆으로 뒹굴 굴러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것은 한 번뿐, 굴러갔다 하더라도 같은 침대 위라 거기가 거기였던 덕에 정새빈은 금방 민선우에게 잡혔다. 나는 멱살이 잡힌 채 상체가 들어 올려진 정새빈과 그런 정새빈을 그대로 침대 밖에 떨어트릴 심산인 민선우를 보며 이걸 말려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시작과 동시에 목이 졸려 얼굴에 피가 몰리면서도 피식거리며 입을 연 정새빈에 의해 날아갔다.
“쫑쫑아, 너 걸레 좋아해?”
정새빈은 녀석다운 왜 저러는지 모를 맥락 없는 헛소리로 내게 다른 고민을 선사했다. 나는 정새빈을 든 채로 굳어 버린 민선우를 힐긋 곁눈질했다. 녀석도 이게 뭔 개소리야, 하는 얼굴을 하고 정새빈을 내려보고 있었다.
“네? 갑자기요?”
“좋아해? 아니면 싫어? 역시 막 더러워서 싫은가?”
“아니, 어, 뭐…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한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해 봤는데요.”
“그럼 지금 해 봐.”
왜지. 왜 나는 이 상황에 갑자기 뜬금없이 걸레의 호감 여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걸까.
민선우가 하, 하고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눈을 굴리는데 현타 온 표정을 한 민선우가 보였다. 녀석은 들고 있던 정새빈을 패대기치듯 던졌고, 반동으로 몸이 튕길 정도로 내팽개쳐진 정새빈은 그 와중에도 나만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싫, 어할 필요가 있나요? 걸레도 사는 데 꼭 필요한 건데. 좋아한다고 하기엔 뭣한데, 그렇다고 싫어하진 않아요.”
“하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응.”
마지못해 쥐어짠 말에 정새빈이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또 물었다.
“그럼 누가 너한테 걸레를 준대. 그럼 받아, 안 받아?”
“예?”
이건 또 무슨 질문이야. 도저히 흐름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저절로 미간이 모이고 고개가 기울여졌다.
“걸렌데 되게 예뻐. 디자인이 엄청 고급스럽고 비싼 거야. 기능도 좋아. 그거 받아, 안 받아?”
“받, 받겠죠?”
내 대답에 정새빈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약간 퇴폐적으로 잘생긴 얼굴과 모델 같은 몸매 덕분인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나 잔뜩 구겨진 옷매무새도 트렌디한 패션처럼 보일 정도로 예쁜 미소였다.
“있으면 쓸 데가 생기는 생활용품인 데다 부피가 크지도 않고, 거기다 예쁘고 비싼 거면 뭐, 무조건 받고 볼 거 같은데요. 안 받으면 손해 아닌가?”
“그럼, 손해지. 엄청 손해지.”
정새빈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더니,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민선우가 있는 쪽을 힐긋 곁눈질하다가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럼 있잖아, 이건 어때? 누가 너한테 정말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보이는 하얀 수건을 준대. 그것도 나름대로 디자인도 괜찮고 비싼 거야. 그럼 받을 거야?”
이번엔 수건인가.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냐고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이쯤 되면 그럴 타이밍도 놓친 거 같아서 나는 질문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받죠. 수건이면 걸레보다 더 좋은 건데 당연히 받죠.”
그리고 내 답을 들은 정새빈의 얼굴 위로 언뜻 비열한 미소가 스쳤다.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수건이 아니라 걸레였다면? 심지어 그냥 걸레도 아니고, 어-마어마하게 닳아 빠진 걸레였다는 걸, 이미 몇 번 쓰고 난 시점에 누가 몰래 알려 줘서 알게 된 거야. 그럼 기분이 어떨까? 어떨 거 같아?”
그 질문을 하는 정새빈은, 영문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꿀밤을 먹여 주고 싶을 정도로 천진한 낯으로 얄밉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